껌씹기
강해림
개정판 국어사전을 찾다가 껌을 씹는다
천천히 아무 저항 없이 씹히는 껌은,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부터는 껌이 나를 씹는다
무엇이든 오래 질겅거리고 씹고 탐닉하다 보면
말랑말랑해지고 어느 순간 카오스의 붉은 혀가 찾아든다
늦은 밤, 희미한 불빛 아래 야간작업 하던 나는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간다
한 봉지의 쌀과 석유와 맞바꾼 가난한 영혼은 어느 덧 기름냄새가 나고,
자꾸만 달라붙는 잠과 피로도 육체를 녹슬게 할 순 없었던 것 하루를 저당 잡히고,
사과맛 박하맛 톡톡 쏘는 오렌지맛……
인생이란 장미빛 향기를 찾아 떠난 발걸음들이 보도블록 붙은 껌을 밟으며 돌아온다
썰물처럼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 껌씹기는 이빨이 썩을 염려가 없으므로 안전하고,
후우 풍선껌을 불어날리듯 그가 제공한 짧은 공상도 끝나갈 무렵
껌.껌껌나라.껌정.껌둥이……
사전 속의 껌은 온통 껌정 투성이다 시간의 검은 활자들이 걸어나와
다시 개정판을 찍을 수 없는 나를 읽다 가고,
사전을 덮자 휴지통 속으로 그가 나를 뱉는다
검은 길 위에서, 껌을 뱉기는 쉬워도 자꾸만 달라붙는 나를 떼어내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