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 흔들림 없는 믿음/(시 13:1-6)
흔들리는 세상, 흔들림 없는 믿음
(시 13:1-6)
(시 13: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 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우리가 물건을 사기 위해 구멍가게나 재래시장이나 백화점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백화점이란 손님들이 원하는 것들이 종류별로 다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은 구멍가게가 아니라 영적인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또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신가? 하는 영원한 미래까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가운에 대답하기 어려운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은 시원하게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생살이가 왜 고난의 연속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하게 된 근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배은망덕하게도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죄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행복을 고난을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성경 여러 곳에 약속하셨습니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설령 고난 중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전화위복케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인생의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고까지 약속하였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백성들에게는 얼마든지 고난이 없게 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때로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도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만날지라도 원망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성경에 나오는 어느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 보면 마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고난 중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세상은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고, 시편 기자가 어떻게 흔들리는 세상에서 신앙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1. 흔들리는 단계
(시 13:1)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여기서 ‘잊으시나이까’ 라는 말(jk'v;(7911, 샤카흐))은 깜빡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낯설어 하는 ‘모르다, 시들하다’ 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또 ‘숨기시겠나이가’라는 말(rt's;(5641, 사타르) )은 무엇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감추다, 숨기다’라는 뜻의 미완료동사로 지금까지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시편 기자가 아무리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잊으시고, 숨기시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시편 기자에게는 오히려 자유롭게 생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평소에 세상에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면 낙심하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원수들이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잊어버리시고, 숨기시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하루 종일 근심이 떠나지 않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때가 기회라고 공격해 오고, 조롱하는 것은 시편 기자를 더더욱 비탄과 슬픔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 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인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시편 기자를 외면하실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1절, 2절에 두 번씩, 모두 네 번이나 ‘어느 때까지니이까?’ 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평소에 믿음이 좋아보이던 사람도 흔들리는 세상에서 이 같은 영적인 지진을 만나게 되면 그 마음에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들게 됩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이미 시편 기자와 같은 영적인 흔들림을 이미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금 그와 같은 상태에 묶여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 때까지 나를 이 어려움 중에 내 버려두시려고 하는지 불안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설령 지금은 아닐지라도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죽기 전에 언젠가는 반드시 그와 같은 실존적인 고민, 절망, 외로움, 실망감, 불안,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오늘 시편 기자는 어떻게 그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2. 더욱 의지하는 단계
세상에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신앙생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고 얼마나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실존적인 회의와 갈등에 대한 시편 기자의 대안이 무엇이었을 까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까지 자기를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두실지 몰라서 어느 때 까지니이까? 라고 마치 믿음 없는 사람처럼 부르짖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그로 인해 육체는 더욱 고통스러워 지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그 때문에 사망의 잠이 들까봐 염려가 들면서 마치 집을 나간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여기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라는 말과 미완료 형이 ‘사망의 잠’이라는 말을 연결시켜 볼 때 지금 시편기자는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매우 심각한 질병 상태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시편 기자가 지금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의 위협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질병의 고통으로 인해 안팎으로 심히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그럴 때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기도가 안 되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자포자기하면서 차라리 자신의 생을 스스로 종결짓는 것이 더 낫겠다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와 같이 절망에 사로 잡혀 기도가 되지 않고 신앙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때 설령 마음에 우러나오지 않을지라도 이를 악물과 마지막 순간까지 죽을힘을 다해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평소에 깊이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예 화
사람이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하여 수술을 받게 될 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속을 깨끗이 비우기 위해 금식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어간 주사의 도움을 받아 생존을 하게 되고 피가 모자라면 때로 수혈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병을 이기고 벗어나려면 마지막에 가서는 주사나 수혈의 주사 침을 제거하고 억지로라도 모래알 같고 쑥물처럼 느껴지는 미음부터 억지라도 먹기 시작해야만 입맛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체력을 회복하고 주사 바늘을 뽑아 버리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보게 되면 시편 기자에게서 그와 같은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외면하시고, 감추시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라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편기자는 비록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감추신다고 생각이 될지라도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여 주시고 사망에 잠에 빠질까 두려운 자기의 눈을 밝혀 달라고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가나안 여자가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구하였을 대 예수님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다가, 자기 자식의 빵을 개에게 던져주겠는가 라는 모욕적인 소리를 들었지만 포기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예수님이 비로소 그 여인을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셨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마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물론 사람은 누구나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위기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그와 달랐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원한 것은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그렇습다. 오늘 우리가 고통과 슬픔에 가득 차서 더 이상 다른 소리를 외칠 수 없을 때는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를 요동치 않게 하실 수 있지만 때로 시편 기자와 같은 고난에 처하게 하시는 이유가 반드시 있으십니다.
그것은 내 신앙의 기초가 반석인지 모래밭인지를 가려내시기 위해 나를 흔들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때에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은 흔들림이 없는가? 하는 것을 시험하시는 기회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때에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우리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을 지피심으로 흔들림이 없는 더욱 견고한 믿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시편 기자가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한 사망의 잠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세상이 나의 믿음을 흔들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금은보화나 값비싼 진주는 모래나 자갈처럼 흔한 것이 아니라 산속 깊이 단단한 돌 속에 감추시고 깊은 바다 속 진주조개의 몸에 감추어 놓으신 것처럼 감추어 놓으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끝까지 주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오직’이라는 말은 유일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끝까지 라는 뜻이고, ‘의지’라는 말(jf'B;(982, 바타흐))은 ‘신뢰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 확고부동하다’라는 뜻의 완료형입니다.
(시 13:5 현대인) ‘내가 한결같은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주의 구원을 기뻐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확고부동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주의 사랑, 주의 구원’ 뿐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탄식은 기도의 안내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탄식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승리의 단계
시편 기자의 삶을 한편의 드라마로 말하면 해피엔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편 기자가 이처럼 기뻐하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송으로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는 까닭은 그가 의지하는 한결 같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시편기자의 마음과 육체에 새로운 힘과 소망으로 충만히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둥에 붙들어야만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바로 한결같으신 주님 사랑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2)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여 평소에 보험도 들어 놓지 않으면 사고를 만났을 때 더욱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 보험이 평소에 꾸준한 기도와 말씀공부입니다.
3)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며 아무런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시편 기자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랜 침묵에 대한 불안과 절망이 우리를 흔들게 하는데도 침묵하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가 하는 것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시편 기자의 현실은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시편 기자는 고통 중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시편기자가 그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기쁨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자신의 삶에서 방관자가 되신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시편기자의 삶에 늘 함께하셨고, 고통의 때에는 더욱더 가까이에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셨음을 깨달은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깨닫자 시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오늘 시편 말씀의 마지막 절이 이처럼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는 문장은 1절에서 말한 '어느 때까지니이까?' 라는 절망의 소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은덕’이라는 말(lm'G:(1580, 가말))은 ‘대우하다, 나누어주다’ 라는 뜻으로 이전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과 구원과 은혜 베푸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원하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편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일평생 죽을 때까지 평안하게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같은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나름대로 종교를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종교는 인생의 고난이라는 문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유난히 미신을 많이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은 그렇게도 과학이 발달된 나라요 경제 부국이라고 하면서도 신사참배와 미신이 강한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불안하지만 그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의 말씀은 가상적인 문학적 시나 산문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경험한 삶의 고백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와 같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비결을 배움으로 그와 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도 시편 기자가 살던 세상에서 시편 기자와 같은 일상적인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것을 보고 배워 우리도 시편 기자와 같이 우리에게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찾아와서 때로 우리의 믿음을 흔든다고 할지라도 시편 기자의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남은 생을 해피엔딩이 되게 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에게도 언젠가 시펴 기자와 같이 내 영혼을 흔드는 인생과 신앙의 실존적인 회의와 갈등이 오게 될 때 나는 내 인생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시편 기자처럼 찬양과 감사하는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마음과 육체는 살아있는 동안 분리 될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질병이나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그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 지고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흔들리는 세상입니다.
마음이 그처럼 연약해지면 육체는 더욱 쇠약해지고 질병은 치료가 되지 않고 더욱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도 덩달아 연약해져서 낙심이 되고 기도가 막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만일 내가 수년 전만 해도 행복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의 하나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즐겼지만 지금은 불행한 사람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하나로 처해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마치 나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게 된 것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 할 것이라".
이 말씀은 진실 그대로입니다. 외양이 아니라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잊지를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을 잊으실 리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편기자의 하나님처럼 탄식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게 하시며, 그 마음속에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씨앗을 심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