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살후 3:1-5)
우리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살후 3:1-5)
(살후 3: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살후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살후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 자녀를 둔 부모가 기도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기도 제목은 자녀들을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자녀는 혹 부모를 위해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할 때 혹 빠뜨릴 수는 있어도 부모는 자녀를 빠뜨리고 다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의 혈육이 없지만 기도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은 기도는 영적인 자녀라고 할 수 있는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에 친히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와 성도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신약 사도행전 이후에 기록된 여러 교회들로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교회 들입니다. 물론 오늘 성경에 데살로니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교회들을 세우기만 하고 무책임하게 돌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교회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위로하거나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목적으로 믿음의 편지를 보낸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오늘 성경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교회들은 마치 열 손가락처럼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다 소중하게 여기고 또한 사랑하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를 종합해 보면 그 가운데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어느 교회보다 더더욱 사랑하는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도 바울이 특별히 관심을 더 두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그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1. 너희를 위한 기도
오늘날 지상 교회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교회라면 성경에 나오는 교회 중에서 가장 성령 충만한 교회의 롤 모델을 찾는다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가야 지역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마게도니아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자랑하고 부러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여기서 ‘믿는 자의 본’이라는 말(tuvpo", 튀포스) 은 ‘원형, 모형’이라는 뜻으로 마치 도장을 날인한 것처럼 똑같이 닮고 싶어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와 같은 큰 은혜와 복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 특별한 소원을 품고 기도하였습니다.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외형적으로 더 큰 건물과 더 많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대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신 까닭은 나름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이 있으시기 때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신 까닭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항상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들에게 말씀과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단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까지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하신 기대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영광을 받게 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이기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조기로 만드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는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그것이 결과적으로 인간이 가장 명예롭게 되고 행복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영광을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성도가 행하고 바라는 모든 일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하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서, 우리에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며,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또 우리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의 목적이며 계획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우리를 위하여-기도의 동역자
사도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들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치 새 가족처럼 신앙의 연조가 오래지 않은 교회로 사도 바울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가 짧은 신앙 연조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로 잘 자랄 뿐 아니라 모진 고난 중에서도 큰 기쁨으로 믿음을 지켜나가는 든든한 교회로 자라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주인과 종, 선생과 제자처처럼 수직적인 상하 관계가 아니라 누가 더 높고 낮은 것이 없는 수평적인 형제관계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연합을 뜻하는 말로 같은 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형제라는 단어는 육체적인 형제자매를 의미할 뿐 아니라 가족을 의미하고 비유적으로 친구나 동료를 뜻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신자들 간에 호칭할 때 사용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형제들 간에 자연스럽게 서로의 필요와 도움을 주고받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만 하지 않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로 섬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발로 밟고 자기가 영웅이 되고 지도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켜 제자라는 말대신에 ‘동역자’라고 호칭을 하였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여기서 ‘동역자’라는 말(sunergov", 쉬네르고스)은 ‘함께’라는 말과 ‘일하다’라는 말이 합성된 것으로 누구누구와 함께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로마서 말미에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우르바노아 스다구, 디모데와 누기와와 야손과 소시바더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호칭하였습니다.
(롬 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심지어 로마에 까지 흩어진 성도들이 사도 바울과 어떻게 함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사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디모데처럼 같은 장소에서 함께 복음 전도 사역에 동역을 하기도 하였지만,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기도로 후원금으로 동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아니라 로마 고린도 에베소 골로새 교회들에게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기도의 동역을 요청하였습니다.
(롬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아주 중요한 일을 하거나 중환자를 수술할 때는 여러 전문가들이 함께 숙의를 하여 결정한 것을 가지고 각기 역할 분담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전도 사역이 자기 혼자 힘으로가 아니라 여러 교회와 성도들의 동역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함을 잘 알고 기도의 동역을 요청한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요청에 따라 여러 교회와 성도들이 ‘동역의 기도’를 해줌으로 인해 사도 바울도 은사를 얻어서 더욱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도로 동역했던 여러 교회와 성도들도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와 성도들에게 ‘동역의 기도’를 요청한 것입니다.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3. 동역 기도의 능력
사도 바울서신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동역의 기도 요청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한 것처럼 핍박하는 유대교의 불순종자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동역의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롬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롬 15: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둘째,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한 것처럼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동역의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셋째,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한 것처럼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위하여 동역의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예화
때때로 부활절이나 성탄절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거나 재소자의 인성 교육을 위해 교도소를 방문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여러개의 철문을 거쳐서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 어느 한 곳도 쉬운 곳이 없었습니다.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고후 6: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후 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그와 같이 많은 저항과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지역마다 여러 교회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일행을 위해 여러 교회의 성도들의 동역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고 복음을 전할 때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인 헤롯왕이 부흥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려고 베드로를 비롯하여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네 명씩 한 조를 만들어서 네 개조가 교대로 지키도록 하고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채 두 명의 군사들 틈에서 자게 하였습니다. 헤롯왕은 이틑날이 되면 백성들 앞에서 끌어내어 공개 재판을 하여 합법적으로 베드로의 목을 베려고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미 야고보 사도를 살해한 헤롯이라면 베드로 사도를 죽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를 지켜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병사들 사이에서 깊이 잠이 들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밤을 지새우며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고 했습니다.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과연 그 후에 밤 중에 갑자기 주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안에 빛이 환하게 비치면서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 깨우며 어서 일어나라고 하더니 베드로의 손목에 매였던 쇠사슬이 풀려졌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면서 베드로를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 베드로는 그것이 사실이기 보다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감옥 문을 벗어나서 제 정신을 차리고 주께서 천사를 보내어 헤롯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깨닫고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을 때 그곳에 성도들이 모여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동역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만히 집으로 들어가서 모여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주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주신 사실을 고하고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행 12: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너희가 우리를 위하여 동역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위대한 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동역의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성경에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1993년 454명이 살해됨으로써 미국의 살해수도라고 불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6년후 워싱턴의 범죄율은 폭력범죄율이 60%까지 떨어졌고 1993년 454명이던 피살자수가 232명으로 줄었다. 강도는 70%나 감소되었고 강간도 40%나 줄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때 미국교회 안에 ‘미국을 위한 중보자들과 뜻을 같이 하는 세계 교회 안에 지속적인 중보 기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입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어떤 상황입니까?
물론 예전에도 있었지만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각종 재난과 대형 사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덩달아 대형교회들의 치부가 매스콤을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한국 교회는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럴 때 일수록 전 국민이 단합을 하여 돌파구를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사분오열이 되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정죄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교계적으로는 교회 성장이 정체되고 대 사회적으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전도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으로는 갈수록 많은 암환자들이 발생하고 이단자들이 위협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징조들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슨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칼빈은 말하기를 “만일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고 자극적인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나같이 말하지만 점점 기도 소리가 잦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난국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주님이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렇다고 우리가 손을 놓고 있으면 안되지요. 우리도 기도로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교역자와 성도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너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동역의 기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예 화
통영에는 멸치가 유명합니다. 멸치는 너무나 작기 때문에 낚시로 잡을 수 없습니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맨손으로 잡을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앙에 선두선이 소나로 물속을 보면서 멸치 떼를 발견하여 선단을 이룬 배들에게 그물을 서로 연결하여 내려 그것을 둥그렇게 만들어 끌어 올리면 수 많은 작은 멸치떼들이 그물에 가득합니다. 그것을 가공선으로 가지고 가서 삶아가지고 해변에다 말린후에 상자에 넣어 비싼 값으로 판매하여 수천만원 내지 수억원의 돈을 벌게 됩니다.
지금 우리도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과 각자의 구원과 성숙을 위해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특 새의 기도 네트워크에 함께 참석하여 기도의 그물을 내려 주님이 명하신 사람을 낚는 그물을 내려 만선의 축복을 받는 계절이 오게 해야 합니다. 그 시작과 마침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동역의 기도로 서로가 서로를 꽁꽁 묶어서 세속의 거친 물결에도 넘어지지 말고 능히 이기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로서로 합심하여 동역의 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이 세상에 없음을 깨닫고 우리 모두 기도의 손을 맞잡고 전도의 그물망을 좀더 깊이 내리는 영적 추수의 계절이 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