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합니다./(눅 4:14-19)
돌아가야 합니다.
(눅 4:14-19)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눅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사람마다 소원이 있는데 가난한 사람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부자의 소원은 더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거나 그 재산으로 명예롭게 사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소원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대부분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일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예전에는 기차가 장작이나 석탄을 태워서 물을 끓여 높은 증기압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기차 앞머리를 가리켜 화차라고 불렀고 거기에는 승무원이 보일러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장작이나 석탄을 공급해 주어야만 하였습니다.
교회는 마치 귀성객을 실코 가는 기차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객차와 같다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끌고 갈 화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가 계속 불을 부처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항상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장작과 석탄을 공급하여야 하는 것처럼 지상 교회와 성도들은 지속적인 영적 에너지를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것은 저절로나 우연히가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와 성도들이 마치 화차에 장작과 석탄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불길이 계속 뜨겁게 타오르는 교회였습니다. 그와 같은 성령의 충만함의 불길은 우연히 아니라 지속적인 말씀 운동과 기도 운동과 찬양과 감사가 어우러져 드리는 역동적인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믿음 상태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입니까? 미지근한 상태입니까? 아니면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어떤 것인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유치원생과 같은 믿음입니까?
정말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교회와 나의 신앙이 성령충만한 상태이기를 원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오실 메시아의 약속
타락한 인류는 마치 대기업을 하다가 도산을 한 기업가처럼 자력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타락한 죄인으로 영원한 멸망과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기업가가 정부의 지원과 은행의 융자를 받아 사업을 재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을 회생시키시기 위해서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예언입니다.
물론 여러 번 약속하셨지만 가장 대표적인 약속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기서 ‘자유’라는 말(r/rD, 데로르)은 매 50년 마다의 희년에 희브리 노예의 해방과 소유권의 회복을 언급하는 전문적인 표현으로 성경에 8번 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레 25: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물론 성경에서 ‘희년’이라는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었던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희년’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와 같은 자유와 해방이 이스라엘 노예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범죄함으로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 누군가가 그와 같은 자유를 선포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동안 강대국의 압제 하에서 자기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기만 하면 굶주림과 질병에서 벗어나 슬픔의 베옷을 벗어 버리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이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일으켜 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너희가 이제 풀려 났다! 모든 옥문들이 열리게 되었다'고 선포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메시아가 어서 오시기를 목말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와 같은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분인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메시아의 증거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기름 부움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그와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시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데 그 증거가 바로 기름 부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기름부음은 장차 만왕의 왕, 대 제사장, 대 선지자인 메시아가 인류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그러므로 과연 누가 그 예언대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인지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인식표가 바로 성령의 기름 부음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이 바로 그와 같은 메시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2. 메시아인 증거
이스라엘의 역사가 위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적절히 사람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그 증거가 기름을 붓는 일 곧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이요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실 메시아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셨다면 그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치 선지자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의 집에 갔을 때 기름 한 그룻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 오라고 한 대로 많은 그릇을 빌려왔을 때 엘리사가 그 빈 그릇들이 가득 차도록 기름을 붓는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메시아는 구약의 선지자나 왕들과 달리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어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까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마치 가난한 과의 기름 한 그릇과 같았다면, 예수님의 그릇은 많은 그릇마다 기름이 차고 넘치는 것처럼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하신 분이 바로 약속대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라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와 같은 메시아라고 하는 여러 가지 증거는
1)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것,
2)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 것,
3) 오늘 성경에 예수님이 성령이 충만하여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일입니다.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여기서 ‘충만’이라는 말(plhvrh", 플레레스)은 ‘가득한, 충만한, 완전한, 충분한, 충실한’이라는 뜻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세 번이나 마귀와의 싸움에서 다 이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성령이 충만하신 상태로 그 광야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고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여기서 ‘능력’이 바로 행 1:8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라는 말씀의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탁월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성전까지 모두 다 보장되어 있는 수도 서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예언대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시기만 하면 예수님 시대가 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대조적인 가난과 무지와 질병에 눌려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북쪽 갈릴리로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돌아가시니’라는 말(uJpostrevfw, 휘포스트레포 )은 ‘되돌려 보내다, 되돌아가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얼마든지 예루살렘으로 가실 수 있지만 갈릴리로 방향을 전환하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과 너무나 대조적인 갈릴리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돌아가셔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시는 일을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눅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여기서 ‘칭송’이라는 말(doxavzw, 독사조) )은 ‘칭찬하다, 찬양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뜻의 현재 진행형으로 사람들로부터 계속 높임을 받으셨음을 뜻합니다.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시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나 삼십년 동안 자라나신 나사렛으로 돌아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여기서 ‘늘 하시던 대로’ 라는 말(e[qw, 에도)은 ‘익숙하다, 습관이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기 전부터,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기 전부터 예수님은 안식일이며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시는 것이 일상생활이었고 습관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읽어주신 성경은 사 61장 “`주께서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니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 그가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짓눌린 사람을 풀어 주며, 주께서 은혜 베푸실 때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으신 메시아로 1)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와 눈먼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제일 먼저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였지만 예수님은 삼년 내내 주로 갈릴리 중심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죄와 질병과 사단에게 얽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구속사역을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그처럼 공생애 삼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주셨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영적으로 무지하고 사단에게 눌려있고 온갖 죄악에 눌려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제자들을 세우셨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 교회이며, 그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을 오늘의 교회와 제자들을 통해서 말씀과 그 일을 계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오늘 내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제자들이라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시오 멘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배워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하셨던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이 계속되어져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결코 우리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보이셨던 것처럼 오직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나 한 사람의 구원받는 축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죄와 질병과 사단의 권세에 눌린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는 너 나를 막론하고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서히 늙고 병들어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가 그렇게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부귀권세와 건강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너 나를 막론하고 영혼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 것은 그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영혼은 하나님에게로 나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심판받게 됩니다. 그 때 심판장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주셨던 달란트로 얼마나 많은 유익을 남겼는지를 물어 보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달란트가 바로 나에게 주신 건강이요 재물이요 지식이요 믿음입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땅에 묻어 놓은 비생산적인 삶을 산 것처럼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이나는 이기적인 삶을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나는 악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치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착하고 충성된 종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겐가 영향을 미쳐 그 사람도 내가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얻고 또 재생산하는 알곡이 되어 끊임없는 재생산이 이루어지게 하는 종자씨가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전형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의 그같은 삶은 항상 성령과 말씀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비록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한 평생 성령 충만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때에 와서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중단하지 않으셨고 거대한 성전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광야로 나가셨고 회당으로 돌아가셨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구약 시대 어떤 인물도 소유하지 못했던 성령의 충만함을 당신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을 닮고 사역을 닮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일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잘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오래 사는 동안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잊어버리고 애굽에 동화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은 정복했지만 그 땅의 다신론 문화와 우상 숭배의 종교를 철저히 배격하지 않았다가 결국 가나안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어 가나안화되었기 때문에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애굽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많은 무신론의 문화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적 생활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처럼 지상 교회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육체는 그 세상에 발목까지 잠기고 내 영혼은 때묻어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나의 영적 생활은 점점 성경과 거리가 멀어지고 기도가 생소해지고 전도는 나와 무관한 것처럼 생각되리만큼 많이 때 묻은 신앙, 삼손처럼 힘을 잃은 신앙인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은 영적슬럼프를 극복하고 마치 긴 객차를 빠른 속도로 끌고 가는 고속철도처럼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오늘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회당을 찾고 성경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신 상태에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1) 무신론자의 삶
(딤후 3:1) “<마지막 날> 마지막 날에 많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딤후 3:2) “그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돈만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며,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딤후 3:3)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고 용서도 없으며, 나쁜 말을 일삼으며, 절제하지도 못하고 잔인하며, 선한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딤후 3:4) “가까운 친구를 배반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며, 교만하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2) 타락한 그리스도인의 삶
(딤후 3:5)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딤후 3:6)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남의 집에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 여자들은 악한 욕심에 이끌려 죄에 빠져 있고,”딤후 3:7) “항상 새로운 말씀을 배우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3) 거룩한 그리스도인 삶
(딤후 3: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딤후 3:13) “그러나 악한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들은 더 악해져서, 결국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딤후 3:14) “그대는 지금까지 배워 온 가르침을 계속 좇아가십시오. 이 가르침들이 진실이라는 것은 그대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믿을 만한 사람들이 그대에게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딤후 3:15)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의 회당으로 돌아가셔서 성경 말씀을 읽고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님의 제자된 오늘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적 능력의 진원지는 오직 성경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딤후 3:16)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딤후 3:17)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은연중에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고 어서 앞서 예수님이 본 보여주신 말씀의 길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