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진정한 강자/시 52:1-9

미션(cmc) 2015. 3. 20. 17:14

진정한 강자
 (시 52:1-9)     
    
  (시 52: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시 52: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시 52: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시 52: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시 52: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시 52: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 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부터 열 가지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연약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러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은 재력가가 되고 어떤 사람은 권력가되고 어떤 사람은 실력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돈도 권력도 실력도 없는 무능력한 자처럼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이 갈수록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지극히 정상인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힘이 있는 자들의 횡포로 힘이 없는 자들이 불이익과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노력 여하에 좌우되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힘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누구는 힘이 있는 자가 되고 누구는 무능력한 자가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빈 손들고 태어난 인생이 힘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은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 5: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은 선물을 주시지 않고 어느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이 주는 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하는 것을 내게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 까닭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 선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대행하는 사명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다 똑같이 빈손으로 태어났지만 남다른 선물을 받은 것은 특권이 아니라 도리어 책임과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사명과 책임을 받은 사람이 오늘 성경에서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인도하시고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이 라는 권력을 주신 것은 주변의 우상숭배국가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계만방에 선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왕은 그의 왕권을 가지고 우상숭배하는 이방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라고 많은 군대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화와 안정된 삶을 살게하는 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남다른 축복은 특혜가 아니라 남다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롬 13: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오늘 성경 시 52편 1절에 보면 ‘강포한 자’라는 말(rwOBG, 깁보르)이 있는데 이 단어의 본 뜻은 ‘강(력)한, 강(력)한 자, 용사’ 라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1. 포악한 자들의 죄악
 오늘 성경 말씀은 어느 문학가의 가상적인 글이 아니라 실제의 시간과 공간 속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서두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52: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을 때 어린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꺼꾸러뜨리고 그의 목을 벰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사건을 계기로 사울왕의 딸 미갈을 아내로 맞아드리면서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당시 목동이었던 다윗이 사울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뜻합니다.
 그 후로 다윗이 전쟁터에서 번번히 승리를 하였고 그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충천하게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노골적으로 사울왕이 죽인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자는 만만이라고 노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그 때부터 사울왕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윗 때문에 자기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국방을 지켜야 할 군대를 다윗을 잡기 위해 동원할 정도였습니다. 그처럼 사울왕에게는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지만 정작 다윗은 사울을 피해 유리 방황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법궤와 제사장이 있는 놉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파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가서 떡과 무기를 구하였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단신으로 자기를 찾아온 다윗을 의아해 하면서 자초지종을 물었을 때 다윗은 거짓말로 아히멜렉을 속이고 떡과 칼을 전해 받았습니다.
(삼상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사실은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었지만 아히멜렉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왕의 특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밀사로 아무도 수행시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아히멜렉을 안심시켰습니다.
(삼상 21: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다윗이 그렇게 해서 떡과 칼까지 구해가지고 도망칠 때 그 장면을 사울왕의 목축을 맡아 키우는 목자장인 에돔 사람 도엑이 목격하였습니다. 비밀은 없었습니다. 다윗의 거짓말은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을 쫓다가 지친 사울 왕이 부하들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삼상 22: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마침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도엑이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사실을 고자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속아서 떡과 칼을 주게 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빼버리고 단순히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었다고 고자질하였기 때문에 사울 왕은 아히멜렉이 자기를 반역했다고 오해하고 아히멜렉만이 아니라 85명의 나머지 제사장들과 그 가족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다 죽이고 심지어 가축들까지 도엑을 시켜 다 죽이게 하였습니다.
 (삼상 22: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삼상 22: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오늘 성경 시편 52편은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사울왕을 축출하거나 도엑에게 복수하는 대신 고작 하나님 앞에서 장탄식을 하면서 탄원한 기도를 드린 내용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은 사울 왕이나 도엑에 비해 너무나 힘이 없는 약자요 무능력한 자처럼 보일 것입니다. 반면에 기세 등등한 사울 왕과 도엑은 강자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육강식이 통하고 있는 오늘의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사울과 도엑이 진정한 강자가 아니라 포악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민심이고 민중이고 국민의 여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점에 있어서는 사울 왕보다 다윗을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윗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한 다윗을 볼 때 더 나약하게 보일 것입니다. 아니 무능력한 자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 다윗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보다 정의롭게 능력이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울과 도엑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멸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여기서 ‘멸하심이여’ 라는 말($t'n:, 나타츠)은 ‘헐다, 파괴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이고, ‘붙잡아’라는 말(ht;j;, 하타)은 ‘움켜쥐다’ 라는 뜻이고, ‘뽑아 내며’라는 말(js'n:, 나사흐)은 ‘잡아 찢다’라는 뜻이고 모두 다 미완료 동사입니다.
 더구나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라는 말(vr'v, 샤라쉬)은 ‘뿌리채 뽑는다’는 와우 계속법 완료형으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포악한 자들을 지금까지 ‘파괴하고, 잡아 찢고, 뿌리 채 뽑아 버리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시 52: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벌써 끝났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이 맡기신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자를 등치고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보다 더 극대화하려고 더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음에도 불구학 시편 기자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이 포악한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포악한 자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울과 도엑이라는 자가 제사장들을 죽이고, 또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현재 진행형의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포악한 자들을 멸하실 것을 앞당겨 믿고 감사하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만 사모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시 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여기서 ‘감사하고’라는 말(hd:y, 야다)은 ‘찬양하고, 고백하고’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과연 우리가 시편 기자의 처지라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찬양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지 시편 기자와 같은 현실에 직면한다면 찬양은 고사하고 원망과 불평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한다는 말이 왠 말입니까? 찬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그런 환경과 처지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이는 현실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난 날 과거 역사 속에서 불의 자들의 횡포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누가 살아남았는가? 누가 멸망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보면 동일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의 포악한 자들도 반드시 포악한 자들을 그렇게 심판 하실 것이라고 미래를 앞당겨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빈손으로 태어난 힘없는 인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시고 재물도 주시고 재물도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구현하는 재료와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게 교만하여져서,
 1)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물의 풍부함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2)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도리어 악을 행하여 더 부자가 되려고 더 높아지려고 불의하게 살고, 약자를 괴롭히는 자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심판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3. 영원한 믿음
 시편 기자는 마치 자기 발등만 보는 것처럼 당면한 현실만을 보고 속상해 하고 근심하는 단거리 신앙이 아니라 지난 날 하나님께서 포악한 자들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돌이켜 보면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포악한 자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미래가 환히 보여지는 장거리 신앙이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포악한 자에게서 모진 박해를 받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집 뜰에 심은 푸른 감람나무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영원토록 그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시 52: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예수님 당시 감람산에 기도하실 때 심겨져 있던 올리브 나무가 지금까지 살아서 여전히 열매를 맺고 있을 정도로 장수하는 나무이며. 그 열매가 다닥다닥 달려 있음과 같이 다산의 나무입니다.
 시편 기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포악한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것 같이 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경계를 그어 더 이상 넘지 못하게 하시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안전지대인 하나님의 집에 심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 수하에 수많은 군대가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다니는 다윗을 죽이는 고사하고 잡지도 못한 것은 사울 왕이 가진 부귀권세가 절대가 아니며 한계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권세도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 다윗을 생명싸개로 감추시고 있는 한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권세도 다윗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시편 기자가 그 사실을 깨닫고 비록 지금 위기처럼 보이질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세상에 그 어떤 권세를 구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영원히 의지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시 52: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2)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 시편기자의 처지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겠지만 시편 기자는 영원히 감사하겠노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시 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영원한 믿음과 감사는 결코 헛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사울왕과 도엑이 강자같았으나 실상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헛되게 남용한 포악한 자들로 다윗을 죽이기 전에 자기 들이 먼저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시편 기자는 마치 약자처럼 보였고 풍전등화와 같이 곧 죽을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사울을 뒤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그 권세는 영원하다고 할 정도로 대대에 이르렀습니다.
 싸움은 그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결국 이기는 자가 강자입니다. 사울왕과 다윗 왕의 싸움의 승자는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사울보다 더 높고 강한 권력과 재물 때문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과 방패와 칼과 창으로 삼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고백이 담긴 시편 여러 곳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전쟁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라 시편 기자에게 실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27: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 다윗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의 왕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큰 왕으로 섬기는 다윗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 47:2)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가 연약하여 넘어졌을 때에도 내치지 않으시고 그를 붙드시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변화시키셔서 그를 통해 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들을 차질없이 끝까지 이루신 것은 여호와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고 속상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물질만능의 시대요 권력지상주의의 시대이기 때문에 신앙양심을 지킨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점점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앙할 뿐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강한자와 같이 교만하고 군림하고 포악하기까지 하지만 그들에게 핍박당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너무나 허약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예 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고난 당하고 있는 교회들과 기독교에 박해가 가장 심한 나라가운데 제 일위가 해마다 북한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기독교인에 대해서 잔혹한 박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친구 목사님이 카톡으로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그것을 열어보니 아브라함의 고향인 이라크 땅에 IS 가 점령을 하고 난 후 이라크 초대 기독교회가 있는 콰도르라고 하는 지역에서 기독교들을 묶어 무릎을 꿇린 다음 일장 연설을 한 후에 머리 뒤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통에 총격을 가하여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그 자리에 차례로 꼬꾸라지고 난 후에도 단체로 그 시체위에 모래를 뿌리듯이 기관총으로 난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수없이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달려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고, 초대교회와 로마 교회 성도들이 폭군 네로와 다수의 황제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고, 종교 개혁시절 로마 카토릭에 의해 무자비한 고문과 살상을 당하였고, 왜정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도들과 성직자들이 무자비한 고문과 순교를 당하였고 지금도 단지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정으로 강한 자입니까? 전능하사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갈갈히 찢겨 죽었지만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모든 권세는 반드시 때가 오면 헛되이 돌아가지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영원한 권세와 영원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돈이나 권력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지 말고 더욱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강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 18:1) “<승리의 노래-적들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셨을 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