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갈망과 만족/시 63:1-7
영혼의 갈망과 만족
(시 63:1-7)
[1]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사람은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길은 고속도로처럼 평탄한 길입니다. 중간 중간에는 먹거리가 준비된 휴게소가 있고 심지어 졸음이 오면 잠간 눈을 부칠 수 있는 졸음 터까지 준비되어 있는 평탄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여행이 즐겁기만 해야 하고 또한 길이 좋기 때문에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로 대형 사고는 고속도로에 많이 납니다.
또 어떤 길은 구불구불하고 비 포장된 길입니다. 그런 길을 운전해 가는 사람은 잠시도 졸 사이가 없이 흔들대고 튀어 올랐다고 툭 떨어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심지어 허리까지 아프게 하는 거치를 길입니다. 물론 휴게소도 졸음터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피곤하고 힘든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길입니다.
또 어떤 곳은 광야입니다. 평소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기 때문에 닦아논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길을 만들면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때로 외롭고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는 불안하기만 한 길입니다.
수년 전 몽골 선교지를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펼쳐진 광야 길입니다. 사룬구동 짚차만 있으면 먼저 간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사람들이 계속 다니다가 보면 저절로 길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광야는 길이 없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길을 만들면 얼마든지 길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브라함 조상 때부터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평탄한 고속도로가 아니라 길이 없어 보이는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닦아 놓은 길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사십년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출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그와 같은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이요, 보호자이요, 인도자요, 구원자이심을 훈련시켜 영적인 광야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 시편 기자도 왕이 되기 전에 그와 같은 광야 훈련장에서 여러 가지로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신 후에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을 때 시편 기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으로 자만하지 않고 자신을 연단하시고 훈련하셔서 마침내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평생을 겸손히 섬겼습니다.
(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오늘 성경 말씀도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광야에서 연단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때 시편 기자는 어떤 자세로 이 광야 훈련과정을 통과하였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시오 다윗이 믿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도 때로 광야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그 광야 여정을 통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1.나의 하나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실 물과 먹을 양식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먹고 마시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을 것과 마실 물이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나와 이웃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표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는 유다 광야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오늘 시편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시 63:1)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여기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은 다윗이 사울에 쫓겨 다닐 때 몰래 숨어 있던 광야를 뜻한다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여기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물 없는 광야에 쫓겨 온 자기에게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그의 영혼과 육체의 갈망을 총족시켜 주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광야이다가 보니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을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광야에서 주리고 목말랐을 때 출애굽을 후회하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출 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기서 ‘원망하여’ 라는 말(@Wl(3885, 룬)은 ‘밤을 새우다 불평하다’ 라는 뜻의 와우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계속해서 밤새도록 모세를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기자도 메마르고 삭막한 광야에서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이 아니라 어디서 사울이 나타날지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시편 기자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요? 그러나 인간 관계가 다 깨어지고 육신적으로 주리고 목말랐을 때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물론 동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대부분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의 차이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주석을 하였습니다.
1) '우리의 하나님'은 객관적이며 관념적인 하나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은 나와 직접 관계하고 있는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하나님이십니다.
2) '우리 하나님'은 보편적인 하나님이시지만 '나의 하나님'은 구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3) '우리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나의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일 때 비로소 '우리 하나님'의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시면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 역시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 목마른 영혼
사울 왕은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막아야 할 군대를 풀어서 다윗을 잡으려고 매일 찾았지만 사울이 잡지 못한 것은 다윗이 몸을 잘 숨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삼상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여기서 ‘넘기지’ 라는 말(@t'n:, 나탄)은 사울의 어설픔이나, 다윗의 지혜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사울 왕이 삼천 명의 군대를 풀어 광야를 이 잡듯이 샅샅이 수색했으나 다윗을 잡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왕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사울 왕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을까요?
다시 말해서 아무리 사울 왕이 삼천 명의 군대를 풀어 광야를 이잡듯이 샅샅이 수색했으나 다윗을 잡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왕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사울 왕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누구의 간섭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지만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실 수 없는 절실한 까닭이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 63:1, 개정)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은 인간관계가 깨어져서 고독과 고통스럽게 되었을 때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는 일에 더욱 힘썼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의 처지는 현재 광야와 같은 상황이며, 물이 없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실로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는다면 곧 망하게 될 것 이였는데, 그래서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과 같이(42:1)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간절히’ 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일찍이’ 라는 말입니다. 이는 다윗이 아침 일찍부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았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40이상 살아도, 물을 마시지 못한다면 3일을 버티지 못합니다.
'1) 여기서 ‘간절히...찾되'(*, 솨하르)’는 '날이 새다', '일찍 일어나다', '부지런하게 구하다' 라는 뜻으로서 이 어근에서 '새벽' 혹은 '미명'(未明)을 뜻하는 명사 '솨하르'(*)가 유래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문구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일을 뜻하는 듯하다(57:8)
메마른 사막 지대를 방황하는 자가 물을 갈급해 하듯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하는 시인의 내면 상태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anderson). 특히 '곤핍한'(*, 아예프)은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를 가리킨다(창 25:29; 욥 22:7).
2) 또 '갈망하며'(amex, 차메)는 '목마르다'라는 뜻이고, 그 것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 '앙모하나이다'(Hm'K;, 카마흐)는 성경가운데서 유일하게 나오는 단어로 수척해지다 라는 뜻으로 수척해 질정도로 마지막 힘까지 다해서 열렬히 하나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시편 기자가 지금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는 광야에서 물을 그처럼 구한 것이 아니라 마치 광야에서 물을 찾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그처럼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그처럼 간절히 찾은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마치 광야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처럼 생각하고 마치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사모하는 것처럼 목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을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시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같은 다윗의 모습은 오늘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만사형통이라고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성소라는 공간안에 갇혀 계시는 부자유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 어디든지 임재하시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시편기자처럼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거기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앙모하면 우리를 만나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만유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서 영육 간에 심히 곤핍한 가운데 당신을 갈망하며 앙망할 때에 그를 찾아가 만나주심으로 그의 갈급함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소이든 광야이든 그 어느 곳에서나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성소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며, 그분은 하늘을 보좌로 삼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누구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사울 왕이 아무리 다윗을 잡기 위해 삼천 명의 군대를 풀어서 광야를 샅샅이 뒤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어찌 이 같은 다윗을 사울왕의 손에 넘기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차 이웃과의 관계가 깨지고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세상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고 위로도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우리로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앙망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시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3. 골수로 만족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인도자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라의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라를 지나자 시원한 오아시스와 70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이 없는 광야에서 반석을 쳐서 미네랄 생수로 마시게 하셨고 양식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비처럼 내려 주셨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셔서 이빨에 고기가 끼어 더 이상 먹지 못할 만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출애굽시키신 하나님,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광야 사십년 동안 애굽에서 마신 적이 없는 반석의 생수와 먹어 본적이 없는 마나를 먹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실제의 삶을 통해서 체험하여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약에 광야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충분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같은 축복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곰곰이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저주스러운 고난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경험하기 위한 기회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광야에서 체험한 가장 소중한 축복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시편 기자는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시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여기서 ‘주의 인자’라는 말은 구약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사실 인자함이라는 단어 속에는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다 포함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가 광야에서 그같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목마르고 배고픈 광야에서 시편 기자는 물과 양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아직도 사울 왕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이며 목마르고 배고픈 광야에서도 시편 기자의 영혼이 두려움 대신 만족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목마르고 배고픈 광야에서 마치 기름진 음식에 배가 부른 사람처럼 그 영혼이 만족하였습니다.
(시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그와 같은 시편 기자는 비록 광야에서 주리고 목마르고 불안한 도피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이 주님의 은혜로 만족하게 되었을 때 그의 현실이 비록 광야에서 맨땅을 침대로 삼고, 돌을 베개로 삼으며, 나뭇가지를 하늘을 지붕으로 삼아 잠을 자기도 해야 했지만 그곳이 바로 주의 영광과 권능이 임재하여 계시는 거룩한 성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광야 생활 중에서도 마치 성소에서처럼 똑같이 주를 기억하고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내가 침상에 누울 때에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할 것이고, 내 영혼이 크게 평안함을 누릴 것이다. 시편 기자 다윗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골수와 기름진 것처럼 감미로우셨다. 그의 침대는 이처럼 딱딱하여 견디기가 어려웠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는 온전한 만족을 누렸다.
(시 63: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결 론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온통 먹을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잠시도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배가 고프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대지만 우유병 꼭지가 입술에 닿는 즉시 울음을 그치고 만족해 합니다.
우리의 신앙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신앙이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온통 관심이 육신의 것에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무감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역시 육신의 소욕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그와 같은 기대와 달리 육신적으로 고통스럽게 되면 믿음조차 연약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점점 자라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면서 영적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 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하게 됩니다.
심지어 육신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을지라도 그 사람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육신의 문제를 해결함 받는 것에만 급급하기 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원하시는지 고민하게 되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룰수 없음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갈급하고 사모하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하나님은 그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영혼을 만족할 수 있는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라면 오늘 우리도 시편 기자와 같은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구하여 시편 기자처럼 영혼에 만족을 얻어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