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기도/시 69:16-23
십자가의 기도
(시 69:16-23)
(시 69: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 69: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시 69:19)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시 69: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시 69: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 69:23)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고난을 싫어하고 평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틀이었습니다.
평소 우리는 고난이 좋고, 즐겁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정반대로 고난이 없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게 되면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ajparnevomai 아파르네오마이)은 ‘제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다, 포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결코 고난이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고난을 대신하신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 고난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무런 고난도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고난 중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1)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고난을 겪은 시편 기자는 고난을 겪으면서 그 고난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기서 ‘고난’이라는 말(hn:[;, 아나))은 ‘유익’이라는 말(b/f, 토브)은 ‘좋은, 선한, 즐거운, 번영, 복지’라는 뜻입니다.
2) 신약에서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은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환난’이라는 말(qlivyi", 들립시스)은 ‘억압, 고난’이라는 뜻이고, ‘즐거워하나니’라는 말(kaucavomai, 카우카오마이))은 ‘뽑내다, 자랑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 평생 사는 동안 때로 나의 죄와 실수로 말미암아 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 까닭없이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럴 때 오늘 우리도
1)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긍정적으로 좋게 받아드리고
2) 바울 사도처럼 고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큰 믿음의 비결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에서 배우고 본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시편 기자의 고난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가 잘 아는 다윗입니다. 오늘 시편 역시 시편 기자가 몸으로 경험한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69: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
여기서 ‘물’은 마치 갑자기 홍수가 나서 집안으로 물이 몰려들 때 처음에는 발목에서 점차 허리 가슴 목에서 입에서 머리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죽음이 압박해오는 상태를 뜻합니다.
(시 69: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죽이려고 온갖 모욕을 당하게 하고 나중에는 생명까지 위협하는 상황에서 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를 그와 같이 미워하고 죽이려는 원수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머리털 보다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1) 가족들의 외면
우리가 그럴 때면 평소에 믿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가 나서서 나를 변호해주거나 방패막이가 되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시편 기자에게도 육신의 가족들이 있었지만 평생 시편 기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편 기자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누구보다 시편 기자의 편이 되어주었어야 할 가족들까지 얼굴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시 69: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여기서 ‘객’이라는 말(rWz 주르)은 ‘멀어지게 하다, 사이가 나빠지다’라는 뜻이고, ‘낯선 사람’이라는 말(yrik]n:, 노크리)은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쉽게 정이 들 수 없는 생소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편 기자가 원수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시편 기자 때문에 가족들이 불이익을 당할 까봐 겁을 먹고 시편 기자를 낯선 사람처럼 멀리하였다는 것입니다.
2) 마음의 고통과 슬픔
시편 기자가 얼마나 마음이 외롭고 상처를 많이 받았을까요? 그런 와중에서 시편 기자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 때문에 시편 기자는 마음이 상할대로 상하고, 근심이 가득하여 마음에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소원은 누군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줄 위로자를 찾았습니다.
(시 69: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여기서 마음이 ‘상하게’ 라는 말(rb'v, 샤바르)은 ‘산산이 깨뜨려 부서졌다’는 뜻이고, ‘근심이 충만하니’라는 말(vWn 누쉬)은 마음이 ‘아프고 병이 난다’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지속적인 아픔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지금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아픈 성도가 있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에게 주목하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닙니까? 그 결과 시편 기자의 마음은 가난하고 슬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 69: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여기서 ‘가난하고’ 라는 말(ynI[; 아니)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외부적인 억압으로 인해 ‘마음이 비천해진 상태’로 물질적인 가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태를 뜻합니다. 또 ‘슬프오니’라는 말(ba'K, 카아브)은 그냥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다 고통스러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마음은 마치 동전 양면과 같아서 육체가 아프면 마음까지 약해지고 마음이 아프면 육체까지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치료하는 병원과 의사는 많지만 마음을 치료하는 병원과 의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 시편 기자는 그 아픔을 어떻게 치료하고 어떻게 회복하였는지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2. 시편 기자의 기도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무엇 때문에 그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은 고난 중에 시편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또한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1) 주의 집을 위한 열성과 고통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이 아니라 정반대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여기서 ‘비방’이라는 말(#r"j, 하라프)은 ‘비난하다, 조롱하다, 모욕하다, 무시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원천적으로 싫어하는 자들이 시편 기자가 너무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을 보고 시편 기자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무슨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거나 무슨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 때문에 비난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 그 때문에 시편 기자는 목이 마르고 눈이 쇠약해질 정도로 고통이 매우 극심하였다고 오늘 성경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나) 시편 기자는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지만 그것을 보고 원수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거나 핍박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더 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을 가지고 말거리를 삼더라는 것입니다.
(시 69:10)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시 69: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몸이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몸이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수렁처럼 시편 기자가 기도할수록 더욱 더 고난이 극심해져만 갔습니다.
(시 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라) 그 때문에 시편 기자는 심한 모욕을 받아 마음이 갈갈이 찢기어져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시편 기자를는 그와 같은 자기를 위로해 줄 이가 혹시 있을까 애타게 기다렸으나 아무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시편 기자의 찢어진 마음을 감싸 줄 사람이 혹시 있을까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 없다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시 69: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은 그와 같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시편 기자를 조롱하고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쓸개를 탄 것처럼 너무 써서 먹을 수 없는 음식물과 시금떨떨한 초를 마시게하며 시편기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2) 원수들을 대적하는 기도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법에 호소를 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원수들을 원망하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원수를 고발하고 대적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댈 때 묵묵히 여호와 하나님께 원수들을 고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들의 잔칫상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그때가 함정이 되고, 두 눈이 멀게 하시고 등짝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게 하시고, 저들에게 주님의 진노를 퍼부으시고, 주님의 분노에 휩싸이게 하소서.
저들이 살고 있는 집마다 쑥대밭이 되게 하소서. 저들이 쳐놓은 장막마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게 하소서.
저들의 못된 죄를 일일이 기록해 두시고,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저들이 절대로 얻지 못하게 하시고, 생명책에서 저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시고, 주님의 백성이라는 소리를 저들이 아예 듣지도 못하게 하소서”
참으로 무서운 저주의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시편 기자를 대적하던 원수들이 그와 같은 기도대로 되고 말았음을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
시편 기자가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그처럼 대적하는 기도를 할수록 시편 기자의 마음은 그 만큼 더 공허하고 서글퍼지게 되었습니다.
(시 69: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이 원수들을 고발하고 저주의 기도를 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절망의 늪에 몸을 빠진 채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자리에 그냥 머물로 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리로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시 69: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시 69: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우리가 이미 시편 기자가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들으면서 느끼셨겠지만 어떤 명분과 이유이든지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비난하는 소리는 말하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사람까지 불쾌하게 만들고 시험과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전반부에서는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부정적인 기도를 하였던 사람이지만 후반부에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긍정적인 기도로 전환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시편 기자 자신도 영적으로 소생하는 모습을 결론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서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것을 박차고 일어서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는 듣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희망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절망이나 저주가 아니라 희망과 축복을 노래해야 합니다.
(시 69:32)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비록 가난한 중에서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이 부르짖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찬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시고 무너진 현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잃었던 땅을 되찾게 하여 주시고, 그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그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시 69:35)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시 69:36)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예화
13세기 무렵 스코틀랜드에 덴마크 바이킹이 쳐들어 왔읍니다. 스코틀랜드의 성이 워낙 높자 덴마크 병사들은 밤에 기습하기로 계획을 세웠읍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병사들이 하나둘 성안으로 넘어 갔는데 주위가 온통 엉겅퀴 밭이었읍니다. 엉겅퀴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덴마크 병사들은 "악!"하고 비병을 질렀읍니다. 그소리를 듣고 깨어난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가시에 찔려 어쩔줄 몰라하는 병사들을 물리쳤읍니다. 그후 나라를 구한 꽃이라고 하여 스코틀랜드는 엉겅퀴를 나라꽃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시편 기자의 기도가 왜 십자가의 기도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오늘 시편 기자가 고백한 기도문을 예수께서도 말씀하심으로 오늘 시편이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시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시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하셨고 쓸개 탄 포도주를 원수들이 마시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전 일천여년 전에 다윗을 통해서 미리 예언하게 하신 말씀을 예수께서 십자가의 기도로 다 이루셨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도 시편 기자처럼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향해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 6:22)“라고 기도를 하셨어야 하는데 그런 기도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형틀을 사랑의 십자가로 바꾸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시편 기자보다 억울한 고난을 더 많이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을 팔고 거짓 재판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는 원수들에게 저주가 아닌 사죄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 시편 기자와 차별화된 ‘십자가의 기도’입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처럼 때로 때로 원치 않는 고난의 십자가가 우리를 짓누를 때 시편 기자 다윗처럼 저주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죄와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기도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1)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미워하는 자로부터 건져 주십니다.
2)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고 인자와 많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3)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위경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십니다.
우리가 시편 기자와 달리 원수를 용서하고 사죄의 기도를 드리신 예수님을 본받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기도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