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창44:27~34
아버지와 아들
(창 44: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창 44: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창 44: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창 44: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창 44: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창 44: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창 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 44: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5 월은 가정의 달 첫 주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은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인 아담을 만드셨고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혈연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아담의 가정이 오늘 우리 가정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가정은 재산이나 집의 규모에 따라 차이와 상관없이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면,
1) 어떤 가정은 마치 지상에서 천국의 행복을 맛보게 하는 천국 모델 하우스와 같은 가정이 있는가 하면,
2) 또 어떤 가정은 마치 지상에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는 지옥 모델 하우스와 같은 가정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자라나서 또 가정을 이루어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지난 날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나의 가정은 둘 중에 어떤 가정이었나를 돌이켜 보고, 지금 내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또 어떤 모델 하우스인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혈연 공동체
하나님께서 만드시 최초의 가정은 일부일처의 가정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물론 혈연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위배된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의 가정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돕는 배필 하와를 지으실 때 한 여자만을 지으셔서 짝을 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흐르는 공통된 맥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지는 가정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창세기에서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라고 말씀하였고,
2) 예수님께서도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마 19:5)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셨고,
3) 바울 서신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1)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창조 질서가 지켜지지 않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없고 서로 사랑해야 할 혈연 공동체인 가족 간에 미움과 시기와 반목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고통이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신앙 공동체인 믿음의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창조 질서가 지켜지지 않게 되면 행복은 떠나고 불행이 주인노릇하는 고통스러운 가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가정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도 이 질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조차도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과 하갈에서서 태어난 이스마엘 간의 갈등과 반목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당대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중동의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갈등의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창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 21: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지금도 이슬람에서는 일부다처가 합법화되었기 때문에 조금도 죄의식이 없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2) 야곱의 가정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맨 처음에 원했던 아내는 라헬이었으나 당시 풍습 때문에 라헬이 시집을 가려면 언니가 먼저 시집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야곱이 라헬을 차지하기 위해서 레아까지 품어야만 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정사는 마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처럼 그 때부터 계속해서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부인 레아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씨받이로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자, 그것을 본 라헬도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레아를 통하여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딸 디나를 낳았으며 레아의 종인 실바를 통해서는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에게서는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으며, 라헬의 종 빌하를 통해서는 단과 납달리를 낳아 총 13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2. 잘못된 사랑
물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 삼대는 다 신앙 공동체입니다. 신앙 공동체라는 말은 혈연으로만 맺어진 가정이 아니라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혈연 공동체요 신앙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가 지켜지지 않을 때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녀들을 골고루 사랑하지 않고 편애하는 잘못된 자녀 사랑입니다.
1) 이삭의 가정
그 대표적인 가정이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의 가정으로 겉으로는 매우 믿음이 돈독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이삭이 사십 세에 결혼하였으나 자녀가 없을 때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부인 리브가와 더불어 이십년 동안을 기도하는 가운데 에세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창 25: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여기서 ‘간구하매’라는 말(rt'[, 아타르) )은 ‘간청하다, 탄원하다’라는 뜻의 와우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간청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에서와 야곱을 얻었으나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리브가는 둘째 야곱을 편애함으로 형제간에 깊은 골이 지게 되었고 마침내 시기와 갈등으로 말미암아, 에서와 야곱은 도저히 한집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불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2) 야곱의 가정
야곱이 그와 같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야곱도 열두 아들 가운데 유난히 요셉을 더욱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복형제들 간에 갈등을 부축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네명의 아내 가운데 특별히 사랑하던 라헬이 일찍 죽음으로 말미암아 라헬에 대한 사랑이 라헬이 낳은 요셉에게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마음 속으로만 품고 다른 아들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티를 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에 대한 편애였습니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때문에 요셉은 다른 이복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것은 야곱의 잘못된 사랑이 오히려 요셉에게 고통을 불러 온 것입니다.
(창 37: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여기서 ‘미워하여’라는 말(anEc;, 사네)은 ‘증오하다, 싫어하다’라는 뜻의 와우계속법 미완료로 심지어 요셉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스마엘 사람들이 낙타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길르앗에서 애굽으로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서 머나먼 애굽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야곱의 가정이 혈연 공동체요 신앙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올바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 마치 지옥과 같은 고통과 가족이 아닌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혈연이 같다고 해서, 온 가족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해야만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킨 혈연 공동체입니까? 우리 가족은 모두 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야곱의 가정처럼 미움과 시기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까?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돌이켜 보고 속히 해결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3. 올바른 사랑
요셉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요셉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욱 깊이 사랑하셨고 더욱 높이셔서 마침내 애굽의 바로 왕에게 그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발탁되게 하셨습니다.
(창 41: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버린 야곱의 아들들은 두 번 다시 요셉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중동 지방에 몰아닥친 대 흉년으로 말미암아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창 41: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물론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으나 요셉은 그가 애걸복걸하며 통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몰인정하게 자기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요셉에게 있어서 그들은 형들이 아니라 철전지 원수들이나 다름이 없었고 요셉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의 형들을 단번에 복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 요셉의 사랑
양식을 구하기 위해 돈을 싸들고 먼 길을 찾아온 형들에게 요셉은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창 42:25) 라는 말씀처럼 양식만이 아니라 다음에 또 양식을 살 수 있도록 돈까지 돌려보냈습니다.
이는 요셉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는 구약 시대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는 성경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누가 승자입니까? 사랑을 베푼 요셉이 승자인 것입니다.
설령 아무리 육신의 양식을 배불리 먹는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메말라버린 심령과 가정과 교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가정이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것 못지않게 최선을 다해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랑의 회복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흉년 중에서도 요셉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양식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점점 더 자기들의 숨은 죄가 드러나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유다의 변화
야곱이 가장 두려워했던 문제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기 동생 베냐민을 자기처럼 미워하는지 궁금하여 베냐민을 애굽에 떼어 놓기 위해 베냐민의 부대 자루에 은잔을 넣어 범인으로 몰아 볼모로 애굽에 붙들어 놓으려고 하였습니다.
(창 44:12)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야곱의 아들들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자 망연자실 하는 가운데 장자도 아닌 유다가 앞장서서 총대를 멘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가) 아버지와 아들의 목숨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창 44: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여기서 ‘하나로 묶여 있거늘’이라는 말(rv'q;, 카샤르)은 ‘연합하다, 함께 묶다’라는 뜻으로 마치 성을 쌓을 때 돌과 돌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공동 운명체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생명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오늘이 가정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가족은 마치 성곽을 연결하는 돌처럼 서로 연합되어 있는 생명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행복은 아들의 행복과 아들의 행복은 아버지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식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는 결단코 행복할 수 없는 공동 운명체가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날에 요셉의 형들은 그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요셉을 팔아버렸고 요셉이 없으면 야곱이 자신들을 사랑할 줄 알았으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불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 자기가 베냐민을 대신하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창 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십자가 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유다는 십자가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애굽에 볼모로 남겠다고 하는 것은 내가 대신 죽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대신 고난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정신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자청한 유다는 장자가 아니라 레아의 네 번째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다 지파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요셉의 용서
요셉은 형들이 예전에 자기를 미워할 때와 달리 아버지 야곱에 대한 효성과 형제들간에 우애가 회복되어진 모습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 요셉은 자기를 팔았던 이복 형 유다가 마치 예수님처럼 형제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고난을 받겠다고 자처하는 십자가 정신을 보고서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받게 되었고 크게 감격하면서 오히려 그의 형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2) 요셉은 지난날 그의 형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죄를 다 용서하면서 도리어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전화위복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3)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나안에 남겨 둔 아버지 야곱과 온 친지들을 다 애굽으로 이민 초청을 하였습니다.
(창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4) 애굽에 내려와서 겨우 생존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흉년 중에도 부족함이 없는 풍요를 보장하였습니다.
(창 45: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을 비롯한 모든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과 사랑의 띠로 꽁꽁 묶여진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는 것만이 온 가족의 행복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라면 지난날을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1)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들이 나의 행복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며 부담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는지요?
2) 나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처럼 어느 자녀를 편애함으로 다른 자녀들에게 상처를 준적은 없는지요?
3) 아버지인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아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무관심하게 내버린 적은 없는지요?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천국 모델 하우스 다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하고 버리는 죄악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부모를 버리는 일이 너무나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결국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노엽게’라는 말(parorgivzw, 파로르기조)은 ‘성나게, 분노하게,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양육하라’는 말(ejktrevfw, 엑트레포)은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성경 주석가 찰스 스윈돌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1) 무리하게 완벽한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오래 잔소리하는 것이다.
3) 표현의 자유나 성장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4) 따뜻한 격려와 칭찬과 인정이 없는 것이다.
5) 가혹하고 매정하게 꾸짖거나 학대하는 것이다.
6)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는 것이다.
7) 분노하면서 욕하거나 때리는 것이다.
8) 훈육에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9) 버릇없는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이다.
10) 어떤 자녀를 편애하는 것이다.
11) 훈육이 잘못에 비해 부당하고 극단적으로 체벌하는 것이다.
12) 과잉보호로 부모를 의존하여 독립성을 막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고, 자식이 부모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일이 곧 내가 행복하게 되는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