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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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민! 이는 일제시기에 도시 빈민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들 토막민이 출현하게 된 것은 농민의 도시집중화가 심해진 1920년대였다. 이렇게 토막민들은 도시 노동자 집단을 형성하면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숙박소 같은 주거형태가 나타났다. 이 노동숙박소의 고객은 뜨내기 노동자들이었다. 경성에는 종로3가와 서대문에 비교적 큰 노동 숙박소가 있었다. 당시 숙박비는 5전이었고 방 하나에 열 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비좁은 시설임에도 매일 100여명 정도가 묵고 있었다.
노동숙박소는 좁은 곳에 밀집해 있었기에 위생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오물과 악취가 질펀한 노동숙박소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기숙사나 사택은 그야말로 판이한 모습이었다. 도시에는 이렇게 민족별, 계층별의 모순이 삶의 공간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식민지 시기 경성은 크게 일본인 중심의 남촌과 조선인 중심의 북촌으로 이원화 된 모습의 도시였다.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은 진고개였다. 개항 이래 경성으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의 거주지 진고개는 조선의 패망과 함께 경성의 번화가가 된다. 이곳으로 도시경제권이 집중되면서 진고개는 식민지 경성에 있는 작은 도쿄로 불리워졌다.
전통적 조선인 거주지역은 시전이 있던 북촌의 중심 종로였다. 시전 상인들의 후예였던 종로상인들은 남촌의 일본인들에게 상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 했지만 자본주의적 대중소비가 확대 될수록 남촌과 북촌의 간극은 더 커져만 갔다. 경성도 지배자 왜인들의 힘과 권력의 상징인 관공서와 지배민족 일인들의 도시 상점가가 늘면서 공간적 무게중심이 재편되어갔다. 총독부 건물과 남대문로로 이어지는 명치정으로 불린 진고개를 중심으로 제국주의 식민지적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을지로 이북의 조선인 거리는 겨우 도시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배자들의 주거지 남촌과의 경쟁은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서울 변두리에는 토막민들의 거주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독립문이나 동대문 외곽의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 신당동 등지는 살아남기 위해 몰려든 토막민들의 집단거주지가 생겨났던 것이다. 1920년대 말에는 세계적 경제 공황이 겹치면서 농민들의 몰락과 함께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되어 토막민의 명칭이 일반화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