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건하오니/ (시 86:1-10)
나는 경건하오니
(시 86:1-10)
(시 86:1)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시 86:2)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시 86:3)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4)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 86: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86: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86: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시 86:9)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시 86:10)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해 아래서 아담의 자손인 모든 사람은 마치 도토리 키 재기처럼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언행심사를 돌이켜 보면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본의 아니게 양심에 꺼리는 것들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죄인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윗이 어떤 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고백한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시편 기자처럼 ‘나는 경건합니다’ 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1. 누가 경건한 신앙인인가?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고백한 것은 결코 시편 기자가 자신의 거룩한 삶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자만의 소리가 아니라, 경건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경건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 86:2)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하시드)은 거룩하신 백성들을 호칭하는 말로 요즘 말로는 ‘나는 미리 정하시고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성도’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또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는 말(샤마르)은 ‘지키다, 감시하다, 주의하다’ 는 뜻으로 시편 기자는 육신의 곤고함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그로 인해 영혼이 범죄 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시편 기자가 육신적으로 가난과 궁핍과 원수들에게 쫓겨 다니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영적으로 얼마나 경건한 삶을 소원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물질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는 너무나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이거나 아니면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더 많은 것을 모으기 위한 탐욕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시편 기자 역시 그와 같은 약점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궁핍이라는 이중고에서 범죄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영혼을 보존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시편 기자가 가난과 궁핍 가운데서 풍요로운 물질을 소원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보전과 보다 더 경건한 삶을 살고 싶어서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하였는지를 오늘 성경에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기자가 남달리 경건하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으로 누구보다 경건하게 살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기도입니다.
(시 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 (시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감히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은 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보다 더 경건하게 살고 싶어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시 86:3)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시 86: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이와 같은 은혜는 시편 기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죄인임이 분명하지만 지극히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예수님의 의가 내게 덧입혀 짐으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입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오늘 우리도 본래 경건하지 않은 죄인임을 하나님이 아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경건치 않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복을 주신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경건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보다 더 경건하게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경건함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섬김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경건한 성도의 고난
신 불신을 막론하고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자신의 삶만은 순풍에 돛 달고 항해를 하는 선객처럼 평탄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 평생 사는 동안 근심, 걱정, 염려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오늘 시편 기자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시 86:1)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여기서 ‘가난하고’라는 말(아니)은 ‘억압하다, 낮추다’라는 뜻으로 시편 기자가 억압받는 고통 상태에 처해 있음을 뜻하고, ‘궁핍하오니’라는 말(에브욘)은 물질적으로 너무나 가난한 ‘비천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사람도 배고픈 고통 앞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노라면 때로 병들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재물에 손해를 보거나 생명에 위험을 당하게 되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무엇보다 기도가 절실한 처지인 ‘가난과 궁핍’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였고, 더욱 더 부르짖어 응답하여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시 86: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이 그처럼 가난하고 궁핍한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것은 경제적인 원인이기 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궁핍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육신의 가난보다 영혼의 실족할 것을 더 염려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시 86:2)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여기서 ‘보존하소서’라는 말(샤마르)은 ‘지키다, 감시하다, 주의하다’ 는 뜻으로 시편 기자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영혼이 범죄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불의한 돈과 권력을 탐하다가 그 여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가 불신자가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를 욕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역시 그와 같은 약점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궁핍한 중에서 먹을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보존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는데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린 또 한 사람을 꼽는 다면 잠언 서를 기록한 기자의 기도입니다.
(잠 30: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잠 30: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는 시편 기자나 잠언 기자가 영적으로 얼마나 경건한 삶을 소원하는 신앙인인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3. 경건한 성도의 소원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이 그처럼 가난하고 궁핍한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것은 경제적인 원인이기 보다는 아마도 사울이나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궁핍한 상황에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의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은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가난에서 부요하게 되고, 궁핍에서 풍요롭게 되고,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을 구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경건한 믿음의 사람의 기도는 어떤 기도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선교적인 기도
(시 86:9)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시편 기자와 같이 이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대부분 육신적인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이지만 시편 기자의 기도는 나의 필요를 뛰어넘어 세계 만민의 필요를 구하는 경건한 기도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의 편협한 사고 중에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오로지 유대인의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편협한 사고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았을 때 거부한 이유도, 베드로가 강권적으로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도들이 청문회에 붙인 것도 그와 같이 편협한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천여년 전 시편 기자가 오늘 성경에서 ‘모든 민족이 주 앞에 나와서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도한 것은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고백해도 좋을 만큼 경건한 성도가 드려야 할 차원 높은 기도입니다.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기도가 당시에는 실현 불가능해 보였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확산되어 본래 이방인이었던 오늘 우리까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복음을 거부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때가 되면 시편 기자의 예언의 기도처럼 모든 나라와 족속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요한 계시록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된 동기가 비록 육신적인 필요 때문이었을지라도, 점점 신앙의 나이를 먹고 성경 말씀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도 시편기자처럼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시간과 물질을 들여 헌신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 거룩한 예배자
(시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가난한 중에서도 육신의 양식이 아닌 영혼의 양식을 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을 바로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의 도를 가르쳐 달라는 거룩한 소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주를 바로 예배할 수 있고, 주께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어서 주의 도를 가르쳐 달라고 경건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시 86: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오늘 우리가 왜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결단을 주목하고 본받아야 할까요? 시편 기자와 같은 1) 선교적인 삶과 2) 말씀 중심의 삶 3) 거룩한 예배자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원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드리는 경건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때 온 세상 만민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시 117: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시 117: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2) 그것이 앞서 간 경건한 신앙인의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최초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던 아벨을 비롯하여 경건한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기쁘시게하는 예배자였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의 간절한 소원도 집권 초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이전하는 것이었고, 집권 말기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전쟁터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미리 다 준비하였다가 아낌없이 다 드린 것은 시편 기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상 22: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하니라’
그러나 시편 기자 다윗의 보다 더 경건한 소원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다 더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비록 유형적인 성전 건축은 할 수 없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내면적인 성전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대상 23:3)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니 모든 남자의 수가 삼만 팔천 명인데’ (대상 23:4) ‘그 중의 이만 사천 명은 여호와의 성전의 일을 보살피는 자요 육천 명은 관원과 재판관이요’ (대상 23:5) ‘사천 명은 문지기요 사천 명은 그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만든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이라’
다른 왕들 같으며 그 많은 사람들을 왕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게 하였겠지만, 다윗은 그와 같이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을 미리 준비하고 훈련시킴으로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할 때 그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제사와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로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게 됨으로 다윗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대하 5: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전 건물이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배를 드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면, 오늘 우리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라는 건물에 모이는 것만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경건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는 일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변할지라도 “ 1) 선교적인 삶, 2) 신령한 예배 3) 영광 돌리는 삶” 이 바로 경건한 성도가 지켜야 믿음의 기본자세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말세의 징조를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의 때보다 더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오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할 것’이라는 말씀과 오늘의 사회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화
엊그제 중부 경찰서에서 경목 목사님과 서장님과 직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서장님의 인사말 중에 예전에 경찰은 도둑이나 강도를 잡고 교통 위반자를 적발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층간소음. 주차문제, 묻지마 폭행과 같은 것들로 경찰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범죄이기 때문에 경찰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문제는 돈이나 법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려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인 도움이 절실한 때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어린이 집 교사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린이를 유괴하고 살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굶겨 죽이고, 팔을 비틀어 부러뜨리고, 심지어 발로 차서 죽게 하는 비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노아가 그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더 패역할수록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부귀권세가 아니라 한결 같은 믿음으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삶을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물론 마땅한 일이지만 막상 그렇게 살고자 하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경건하게 산다고 해서 만사형통의 복이 줄줄 따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이중고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최고 목표를 보다 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두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신 나라는 경건한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요지부동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갈수록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경건하게 믿는 다는 것이 쉽지 않을 지라도 이중고에 시달리면서도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힘쓴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으로 우리도 살아가야 합니다.
(히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하나님은 그와 같이 경건한 믿음의 성도를 반드시 지키시고 때가 되면 다윗처럼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벧후 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 육신이 곤고할 때일수록 영혼의 순결함을 보존하기를 소원하고,
2)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보다 더 열심히 배워 실천하기를 소원하고,
3)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4)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일이나 봉사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5) 세상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시편 기자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고 시편 기자의 결단이 나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