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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라면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듣고 웃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외국인은 아니다. 유머 감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기러기 아빠’나 ‘제비족’, 그리고 ‘바람난다’는 독특한 한국어의 속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날라리’나 ‘비행(非行)’과 ‘비행(飛行)’의 동음이의어는 음운 체계가 달라 번역조차 불가능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수돗물의 6단계 의성어도 외국 사람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잡음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입버릇이 되었는데도 이 유머 앞에서는 한국인 혼자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다. 정말 떨어져도 죽지 않고 날려면 세 살 때의 언어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 한국 하늘에 처음 제트기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쌕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호주 비행기’라고도 했다. 그 탁월한 의성어의 실력을 발휘해 초음속으로 나는 제트기의 굉음을 듣자마자 ‘쌕쌕이’라고 이름 붙인 우리는 천재였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국을 ‘오스트리아’가 아닌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고 제트기를 호주 비행기라 불렀던 사람들, 호주댁이 전쟁 난 시댁을 도우려고 친정에 알려서 보내온 비행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 가족주의의 등에 업혀 살아온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바깥 세상에 나가 보면 그것은 쌕쌕이도 호주 비행기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제트 비행기란 말은 소리 나는 것을 그냥 귀로 듣고 직감적으로 옮긴 말과는 다르다. 프로펠러가 아니라 가스를 분사하는 힘(제트 ‘jet’)으로 날아가는 과학적 원리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아무 쓸모없이 된 배꼽은 슬프다. 유머 속의 일가족처럼 추락해도 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세 살 때의 말과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어서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듯이 우리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들려온 말이 “일어나라”는 말이었다. 영어의 웨이크 업(wake-up)은 눈 뜨고 일어서면(up) 그만이지만 ‘일어나라’의 한국말은 다르다. 그냥 일어서는 것에 ‘나가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일어나다’는 ‘일어서다’와 ‘나가다’의 두 동사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의 압박 속에서 가장 많이 썼던 말이 ‘독립(獨立)’이요, ‘궐기(蹶起)’였지만 그 한자 말에도 ‘나가라’는 뜻은 없다. 생각할수록 ‘일어나다’의 그 토박이말에는 의미심장한 한국의 행동의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나가면 바깥이고, 바깥은 바람이요 비다. 업힌 채 어깨너머로 바라보던 수틀 같은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비정하고 견고하고 거칠다. 그런 세상으로 일어서 나가려면 영화 ‘타이타닉’의 디캐프리오와 윈즐릿처럼 넓은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부푼 돛처럼 펴고 날아야 한다. 그때 바깥 세상에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 배꼽이 자기 존재의 한 중심에 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원래 ‘배꼽’이라는 말은 배의 복판에 있다고 해서 ‘뱃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ㅂ’ 이 ‘ㄱ’으로 바뀌는 음운도치 현상으로 배꼽이 된 것이다 (배복>배곱>배꼽).
비행기에는 동력과 날개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진정 날게 하는 것은 균형을 잡아주고 방향을 정해 주는 중심이다. 그것이 우리 몸 한복판에 있는 배꼽의 상징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깥 바람이 거세도 이 배꼽으로 중심을 잡으면 덜 떨어진 아이도 정말 옥상에서 떨어져도 제트기처럼 초음속으로 날 수 있다.
일어서면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면 눕게 되는 한국인의 행동 원리. 그래서 ‘일어나다’의 반대말이 ‘드러눕다’와 짝을 이루는 한국어의 신비함(‘일어+나다’와 ‘드러+눕다’). 그리고 일어나고 드러눕는 사이에 문지방 같은 신성한 배꼽의 중심이 있는 세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전통문화에서 새로운 쓸모가 생기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역설이 아무리 추락해도 배꼽을 달고 날아가는 한국인이다.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