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확실하고 확고한’ 감화
맹목적 인정이 아닌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이 믿음의 근거
'제16강좌' 믿음:감화(persuasio)와 확신(fiducia)(기독교강요 3.2.1-3.2.43) |
1. 믿음,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분의 본체의 형상’이시므로(히 1:3), 오직 그 분 자신과 그 분께서 행하신 일을 알고자 힘써야 하며(고전 2:2) 그 분만을 증언해야 한다(행 20:21). 왜냐하면 우리가 그 분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이기 때문이다(행 26:17-18).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심이다(눅 10:22). 그리하여 우리가 그 분을 앎이다(3.2.1).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지 교회를 높이면서 그것의 권위와 판단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3.2.3). 믿음의 근거는 ‘무지’(ignoratio)가 아니라 ‘지식’(cognitio)이다.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과 그 분의 ‘뜻’(voluntas)을 아는 생명의 지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의와 성결과 화평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으므로(고후 5:18-19)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느낌’(sensus)에 따라서 교회의 지시대로 이끌리기만 한다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로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가톨릭의 ‘맹목적 신앙’(fides implicita)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 ‘아는 것이 없이’(nisi intelligere) ‘믿는 것’(credere)은 맹목적 인정이지 참 신앙이 아니다. 사도께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을 때(롬 10:10), 이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인정하여 아는 것’(agnotio explicita)을 의미한다. (3.2.2).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믿는 맹목적 신앙이 먼저 있고 이후에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연약한 믿음도 ‘참 믿음’(vera fides)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기를 원하신다(롬 12:3). 처음부터 무지하든지 알고 믿든지 하는 것이지, 모르고 믿은 후 어느 순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구체적으로 어떤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경건한 정서’(情緖, pius affectus)에 감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이 참 믿음의 성도이다(3.2.4-5).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vera Christi cognitio)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 복음은 ‘믿음의 말씀’에 대한 ‘좋은 교훈’ 즉 ‘믿음의 가르침’(doctrina fidei)으로서(딤전 4:6)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율법의 의를 성취하신(롬 10:4; 갈 3:25)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다. 복음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께 듣고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그 분을 배우게 된다(엡 4:20-21). ‘듣는 것’(audire)이 ‘믿는 것’(credere)으로 표현된다. 들어서 배우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사 54:13; 요 6:45). 그리하여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명에 이를 것을 선포하였다(사 55:3; 시 95:7). 이렇듯, 말씀을 기록함은 듣게 함이요, 들어서 믿게 함이다(요 20:31). 믿음과 말씀은 마치 태양과 그 광선이 분리될 수 없듯이 나눠질 수 없다.
“믿음을 떠받쳐서 지탱하는 기초(basis)는 말씀이다. 말씀이 없다면 믿음은 쓰러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한다면 믿음은 결단코 남을 수 없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1:5; 빌 1:3-5; 살전 2:13).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quid est)과 그 분의 ‘어떠하심’(qualis est)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지 즉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뜻을 깨닫게 된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divinae ergo nos voluntasis notitia)에 다름 아니다. 오직 이 지식은 그 분의 말씀에서만 얻게 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거역될 수 없는 진리’(inviolabilis veritas)를 계시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신실하시며(롬 3:3) 거짓이 없으시다(딛전 1:2). 믿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분의 말씀 곧 진리를 인정하고 확신함이다. 믿음은 ‘진리에 대한 감화’(de veritate Dei persuasio)이다(3.2.6).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께서 진리이심과 사랑이심을 계시한다. 시편 기자는 누차 주님의 ‘긍휼과 진리’(misericordia et veritas)를 함께 노래했던 바(시 25:10; 36:5; 40:40-41; 89:14, 24; 92:2; 98:3; 100:5; 108:4; 115:1; 117:2; 138:2), 이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보증’(unicus pignus)으로 바라봄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믿음의 바른 정의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다”(3.2.7).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며 그 위에 지탱되며, 유지된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순종-‘예’-으로 성취되었다(고후 1:20).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으며 완성되었다. 값없이 주신 은혜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는 믿음은 견고하게 설 수 없다. 그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지 않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전혀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말씀’으로(롬 10:8), 그 진리이자 성취이신 그리스도께 부착(附着)해야 한다(3.2.29-32).
2. 믿음, 성령의 감화
믿음은 지각적인 인식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照明)’으로(illuminando)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1:5). 그러므로 두뇌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믿어서 의에 이르게 된다(롬 10:10). 믿음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으로(요 4:14; 7:38) 받아들이는 것이다(요 6:29).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기초하며 ‘그 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서 ‘경건한 정서’(pius affectus)에 잠기는 것이다(3.2.8, 36).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그 선하심이 실재함에 대한(de eius veritate) 확실한 감화이다”(3.2.12)
오직 거듭나는 사람들은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다’(벧전 1:23).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단번에 영원히 부여된다(살전 1:4-5; 딛 1:1).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하다고 하더라도 확고한 보증과 인침이 주어진다(엡 1:14; 고후 1:22).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믿음은 없으며(마 15:13), 참 믿음을 가지고 종국에 파선(破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딤전 1:19; 3:9). 오직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된다(롬 8:15; 갈 4:6). 하나님의 선하심은 오직 아들의 사랑으로써 역사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사랑의 영’(spiritus amoris)을 주심으로써 그 영을 부음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셨다(롬 5:5). 그러므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형식적 신앙’(fides informis)이 사랑과 함께하는 ‘내실적 신앙’(fides formata) 외에 따로 있지 않다.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오직 ‘사랑’으로 나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 밖에 없다(딤전 1:5). 가톨릭은 사랑의 공로가 함께 역사하는 믿음 외에 사랑과는 무관한 초보적인 믿음이 따로 있다고 하나 이는 전혀 비성경적이다(3.2.9-12).
믿음은 ‘경건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sana pietatis doctrina)이다. 믿음은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 2:3)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경의 전체 교훈을 아우른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기도가 드려지고, 구원의 전체 과정이 이루어지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3.2.13). 믿음을 지식이라고 할 때, 이는 감각적인 지식을 초월한다. 마음이 믿음에 도달한 때에도 그 믿는 바를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감화되어’(persuasus) ‘그 감화의 확실성’(persuasionis certitudo)에 이를 때 감각한 것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믿음의 지식’(notitia fidei)은 ‘이해’(apprehensio)가 아니라 ‘확실성’(certitudo)에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주 ‘지식’(cognitio, scientia) 혹은 ‘인식’(agnitio)으로 불릴 때(엡 1:17; 4:13; 골 1:9; 3:10; 딤전 2:4; 딛 1:1; 몬 6: 벧후 2:21; 요일 3:2), 그 진리는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확정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7).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의 사랑 안에서 터가 굳어지고, 그 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충만한 은혜에 이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엡 3:17-19). 그러므로 참 지식은 우리의 이해력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력에 의지할 때에만 온전히 수납된다(3.2.14). 믿음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을 통하여 이르는 ‘확실하고 확고한’(certa ac firma) 감화이다. 믿음으로 말씀의 객관적 ‘확실함’(certitudo)에 대한 주관적 ‘확신’(fiducia)에 이른다. 성경에 있어서, 이러한 ‘확신’은 항상 믿음으로부터 기인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하고(시 12:6; 18:30; 잠 30:5) 그 분의 선하심을 의심치 않고 신뢰하게 된다(골 2:2; 살전 1:5; 히 6:11; 10:22). 그러므로 믿음에서 확신이 생기고, 확신에서 ‘담대함’(audacia)이 생긴다고(엡 3:12) 사도는 말한다(3.2.15).
성령께서 믿음의 ‘저자’(autor)이며 ‘원인’(causa)이다. 성령의 ‘조명’(illuminatio)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정결케 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운다. 그리고 아는 바대로 지키며 살게 한다(딤후 1:14).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 한다(갈 3:2). 이는 성령과 함께, 성령으로써, 믿음을 ‘하나님의 고유한 선물’(singulare Dei donum)로서 받게 된다는 뜻이다(3.2.33). 오직 성령으로써만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찰한다(고전 2:10-16). 성령이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로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의 비밀을 알만한 날카로운 시력을 얻을 수 없다(3.2.34).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고전 2:4-5). ‘믿음의 역사’(opus fidei)는(살후 1:11) ‘하나님의 역사’(opus Dei)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자마다 모든 좋은 것들에 참여하게 하심에 있다(3.2.35).
우리가 받은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으로서(고전 2:12)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롬 8:16).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부어주시는(행 2:33) 보혜사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롬 8:9)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요 14:17),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심을 안다(요일 3:24; 4:13). 그 사심은 영원하다(3.2.39).
3. 믿음의 삶
진정한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견고한 감화로’(solida persuasione)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깨닫고 그 분의 사랑과 관용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과 ‘화평’(securitas)을 누린다(롬 5:1). ‘믿음의 최고 요체’(cardo)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을 누리고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는데 있다(3.2.16). 믿음은 여호와를 온전히 바라며(시 27:14) 그 분의 말씀 가운데 요동치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희미하게 본다(고전 13:12). 그러나 믿음으로써, ‘확실하게’(certe), 하나님을 본다. 작은 창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넓은 집을 비추듯이, 성령 가운데,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주의 형상으로 변해간다(고전 3:18).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믿음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아니하니 재(灰) 아래서도 명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르거나 죽지 않듯이, 사탄도 믿음이 거하는 속마음의 자리에 까지는 내려오지 못한다(3.2.17-21).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timor)과 ‘떨림’(trepidatio)이 있다고 하나 그것이 ‘믿음의 화평’(securitas fidei)을 해치지는 못한다. 오히려 성도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룬다(빌 2:12).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reverentia)와 함께 그 분의 은혜에 대한 ‘감미로움’(dulcedo)과 ‘달콤함’(suavitas)을 누리는 것이다(3.2.22-23, 26-28).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께 속한 모든 선한 것들’에 뿐만 아니라 ‘그 분 자신’께 동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연합체’(societas)가 된다(3.2.2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녀는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소망하며, 사랑한다. 소망은 바라는 것들 곧 믿음의 ‘실체’(hypostasis)이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으면 믿음은 무너진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니(롬 8:24), 이는 믿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히 11:1). 믿음과 소망은 같이 있으되(벧전 1:21) 오직 사랑과 함께 역사한다(3.2.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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