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모세 오경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미션(cmc) 2009. 9. 16. 07:09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김 중 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구약학)

구약의 하나님 이름의 의의
구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물론 자연신학적인 추구를 통한 가능성이 전혀 부인되는 것은 아니지만(시 19:1-6; 사 40:21-26; 비교, 롬1:20-21), 그 주된 방편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한 계시(즉,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쾨니히(E. Knig)가 지적한 대로 어떤 종교사상사적인 진화론적 발전과정을 거쳐서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요 완전하신 영적인 자존자(自存者)로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존재기원을 이해하였다(시 90:2). 따라서 고대 구약 세계의 인접문화권의 종교들(가나안, 에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그리스, 로마 등)의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의 탄생이야기나 신보(神譜, theogony)는 구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 이해에서는 남녀 신의 성적인 구별도 발견되지 않으며,

구약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어휘에 여신(女神)이란 단어가 없다.

그렇다고 구약의 하나님을 “남성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잘못된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자연의 세력들이나 물질과 동일시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한 영적 존재로서(호 11:9; 사 31:3 참조), 구약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나발)”로 규정하였다(시 14:1; 53:1). 구약의 신명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현존을 그의 이름과 연결하고 있는데, 하나님 자신은 하늘에 계시지만 땅 위에 있는 그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신다는 것이다(신 12:11; 14:23; 16:11; 왕상 3:2; 8:29 참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자와 동일시되며, 그 사람의 인격과 특징을 나타내 준다. 구약의 하나님 이름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며,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 자신(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서 이해된다. 구약의 하나님의 본성과 활동하심은 그 신성한 이름안에 요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셋째 계명에서는, “너는 네 하나님 야훼(여호와)의 이름을 헛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야훼(여호와)는 자기의 이름을 헛되게 사용하는 자를 무죄하다고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출 20:7; 신 5:11)라고 하였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식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출 7:5; 시 9:10; 사 52:6; 렘 16:21; 요 17:26 참조).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고유명사인 신명사문자(요드 헤 바브 헤: 야훼, 야웨, 여호와) 사용은 단순히 하나님을 지칭하는 기능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또는 인간 및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영광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Tetragrammaton”, Encyclopedia of Jewish Concepts, P. Birnbaum, Hebrew Publishing Company, 1991, 608-9쪽 참조).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들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의 에스더와 아가를 제외한 22책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다(에스더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며, 아가서에서는 야훼 이름이 1회 나타나 있다). 일찍이 모세가 출애굽의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출 3:13).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신명사문자(Tetragrammaton:야훼, 야웨, 여호와)”로 계시하셨다(출 3:14-15). 그러나 구약 하나님의 고유명사 이름으로서 신명사문자의 기원에 관해서는 토라 자체가 본문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창세기 4장 1절에 하와는 이미 야훼의 이름을 알았고, 아담의 손자 에노스 때에 비로소(처음?) 사람들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창4:26).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등장하는 족장 이야기에서도 야훼(YHWH) 이름은 자주 사용되었다(창 12:8; 26:25; 28:16). 더욱이 출애굽기 6장 2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엘샷다이(El Shaddai)로 나타나셨고 그의 이름을 야훼로는 알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신 명칭 자료의 다양성과 복잡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의 18세기 성서비평학에서 시작된 가설이 소위 5경의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이다. 5경의 문서가설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된 것은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다양한 신앙전승 자료들(구전과 문전)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결국 저러한 신앙전승들이 통합?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5경 문맥에서 하나님 이름의 다양성과 연관성이 생겨났다고 본다.


비평적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먼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랜 신앙과 본문전승은 남부 유다 지역의 “J”(소위 Jahwist, Yahwist) 전승으로 볼 수 있는데, 이 J는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로 부른다는 것이다(창 2:4 하반절 이하). 한편 북쪽 에브라임 지역을 중심한 “E”(소위 Elohist)전승은 창조 이야기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족장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앨로힘”으로 사용하다가(창 17:9 이하), 모세 때에 와서 비로소 야훼 이름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출 3:13-15). 한편 구약의 신앙과 본문전승에서 5경의 문맥에는 기존의 J와 E 전승을 통합하는 제3의 전승이 있고, 이 전승의 주체는 제사장들로서(Priests) 우리는 이것을 “P”전승이라 부르며, 이 P는 신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3단계로 시대적 구분을 하는데, 먼저 창조와 태초 이야기에서는 앨로힘(Elohim), 그리고 족장 이야기에서는 엘샷다이(El Shaddai), 그리고 모세 때부터 비로소 야훼(YHWH) 이름이 알려졌다고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창 1:1; 17:1; 출 6:2-3; 비교, 수 24:14-15).


1753년 프랑스의 의학교수 쟝 아스뜨뤽(J. Astruc, 1684-1766)이 창세기의 신명칭의 상이한 사용에 착안하여 제기하기 시작했던 문서가설은, 독일학자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이 1883년에 그의 역작『이스라엘 역사서설』에서 5경에는 다윗-솔로몬 시대로부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시대까지 걸치는 종교사상사적 역사발전 단계에서 문서화된 J,E,D,P라는 자료들이 있다고 명제를 발표한이래, 그 5경(또는 여호수아서 까지 포함하는 6경)의 4자료 문서설은 끊임없는 수정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5경의 신학과 역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사를 이해하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그 가설의 전제들(예컨대, 종교사상의 진화, 문맥의 중복·반복불가, 모순된 내용들, 문체·용어 사용의 엄격한 일관성 등)은 학문적으로 비판되었으며, 새로운 대안들이 제시되었다(예컨대, U. Cassuto, The Documentary Hypothesis, Jerusalem, 1961; 배제민, 『새로운 형태의 모세오경연구-문서설 비판을 중심하여』, 총신대학출판부, 1984; M. H. 세갈, “모세5경의 저작: 새로운 진단”,『구약신학논문집』, 제6집, 윤영탁 역편, 성광문화사, 1992, 141-196쪽 참조).


그 동안 구약학계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고유명사 신명사문자(YHWH)의 기원에 관해 레위지파설, 겐족설(the Kenite Hypothesis), 유다지파설 등의 가설들이 제기되었으나, 오늘날 어느 학자도 구약본문의 증거를 떠나서 야훼 이름의 원초적 의미와 역사적 기원에 관해서 모르고 있다. 또 그 발음도 이스라엘의 구약본문전승 과정에서(경외사상 때문에?) 잊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신학적 의미
그러므로 구약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 이름의 다양성은 여러 다른 신앙전승이나 문서자료들의 상이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계시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과 관련하여 하나님 이해의 구약신학적인 다면성을 나타내 준다고 보아야한다. 먼저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 하나님이 인류를 포함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내용을 계시하는 본문에서 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까지나 “앨로힘”의 단수 용법으로 무려 35회(!)나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


“앨로힘”이 복수 용법으로 사용될 때는 이방신들을 지칭하는데(출 20:3; 신 5:7; 삿 5:8 등), 이스라엘 하나님을 지칭할 때 앨로힘을 복수 개념으로 쓴 것은 매우 드물며(창 20:13; 35:7 참조), 구약문맥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앨로힘은 대부분 정관사로 한정되거나 단수로 취급한다(왕상 18:39; 창1:1). 문법적으로 복수형태인 앨로힘은 신성의 힘과 능력을 강조하는 “강조형 복수(intensive plural)”로 설명된다(또는 “장엄의 복수형”). 구약 문맥에서 앨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와 구별되는 신격과 신성을 강조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시 8:6). 앨로힘은 구약에 2,600회 나타나며, 그 단수형 앨로아흐도 시 문학에 제한적으로 나타난다(욥 31:2).


신명사문자 야훼 이름은 창세기 2장 4절부터 나타나며 이때 야훼이름이 단독으로 소개되지않고 “야훼 앨로힘”이라는 복합 명칭으로서 소개되고 계속 사용된 것은 의미 심장한데, 이것은 여기서 야훼는 또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앞서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며, 또한 야훼는 초월적인 창조주일 뿐 아니라, 이 땅에 찾아오셔서 자기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과 함께 교제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는 이름이다. 구약에 약 6,600번 나오는 야훼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고대 모압 비문(또는 메사 비문, 주전 9세기경)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름으로 확인되며, 야훼의 구약신학적 의미는 본문에서 모세의 출애굽 소명 문맥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되고있다(출 3:14; 6:2 이하 참조).


이미 위에서 살펴본대로 출애굽 본문에서 야훼 이름이 처음 계시된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출애굽사건과 연관하여 야훼 이름의 신학적인 의미가 밝히 계시된 것(출 3:14; 6:2 이하)은 무엇보다 역사 속에서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말씀하신 구원약속(창 15:13-16; 46:3-4; 50:24-25)을 이제 출애굽사건을 통해 성취하시는 “살아 계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기위한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의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 구약신학자들도 출애굽기 3장 14절의 야훼 이름설명을 칠십인역 전통에 따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나는 나다” 또는 “나는 내가 행할 바를 행하는 자다”라고 하는(비교, 출 33:19) “행동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야훼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시며 자연의 세력들을 다스리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야훼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 특히 출 15:18 참조)을 천명하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문맥에 더 어울리는 해석이라고 본다(발터 침멀리,『구약신학』, 김정준역, 한국신학연구소, 1982, “제1절 계시로서의 신명”, 20-24쪽; B. S. Childs, The Book of Exodus, OTL, 1974, 60쪽 이하, 특히 89쪽 참조).


그러므로 “야훼 이름이 알려진다, 그 이름을 안다, 또는 알게한다”는 구약본문의 표현들은 단순한 이름의 문자적인 알림이 결코 아니며, 역사 속에서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출 6:7; 7:17; 렘 10:6-7; 16:21; 33:2; 시 83:19; 겔 6:7,14; 30:25-26; 39:22; 요 17:6, 26!; 계 15:4 등 참조). 이것이 야훼 이름에 대한 구약신학적인 바른 이해이다. 야훼이름은 칠십인역과 신약에서는 “호 퀴리오스”(그 주님, the Lord)로 번역되었다.


한편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로 계시되고 체험(체득)된 하나님의 이름은 “엘”(El)이다(출 6:3; 창17:1 참조). 창조주 “앨로힘”을 우리말로 “하나님”으로 번역한다면, “엘”은 셈족어 공통의 신개념으로서 “하느님”으로 구별하여 번역할 수 있는 일반명사이다. 일반적으로 가나안 종교 만신전의 최고신으로서 황소의 형상으로 표상되는 신이 “엘”신이며(비교, 출 32:4; 왕상 12:28), 셈족어 조어(祖語)인 아카드어에서는 “일루”(ilu), 에블라어에서는 “일(il)로 나타난다. 구약에 약 230회 나타나는 “엘” 하나님 이름은 이방신을 지칭할 수도 있으나(출 34:14; 말 2:11),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이 경우는 주로 정관사로 한정되거나(창 46:3; 시 85:9), 수식어가 붙는다(엘샷다이, 창 17:1; 출 6:3; 엘 앨르욘, 창 14:18; 시 78:35; 엘로이, 창 16:13 등; 특히 엘 엘로힘 야훼의 연속 이름 참조, 수 22:22).


구약의 “엘”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너희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창 46:3, “나는 네 아비의 하나님인 그 하느님이다”; 창세기 49장 25에서는 엘 하느님이 샷다이와 연결된다). 조상의 하느님으로서 “엘” 하느님에 대한 구약신학적 이해는 “엘 샷다이” 이름에 집약된다(출 6:3; 창 17:1; 28:3; 35:11; 43:14; 48:3 등). 구약 문맥에서 샷다이 하느님은 무엇보다 모성(母性)을 가진 하느님으로서 하느님 백성의 생육, 번성, 보호, 축복, 인도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에도 “엘” 하느님 이름이 사용된 것은 그러므로 구약신학적으로 볼 때 그 의미하는 바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창 28:13; 31:42), 이삭의 경외하는 이(창 31:42,53), 야곱의 전능자(창 49:24)도 이러한 “엘” 하느님의 이해와 연관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 나타나는 “엘” 이름의 복합명사도 이러한 점에서 주목된다.


다른 한편 5경이나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나, 예언서와 시편에서 279회나 반복 사용되는 예언신학의 하나님 이름은 “야훼(엘로헤) 츠바오트”이다(삼상 1:11에 처음 사용됨; 롬 9:29; 약 5:4 참고). “츠바오트”는 영계의 존재(즉 천군 천사)를 포함한 피조계의 우주 만물을 가리키며(시 103: 창 2:1 등 참조), 또한 이스라엘 군대를 지칭하는 용어인데(출 7:4; 민 1:3; 겔 7:4 등), 여기에서 미루어 보건대 야훼 츠바오트의 문자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전쟁의 신”이거나 우주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온 세계의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이름은 개역개정판에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번역되고 있으며, 구약에서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는 예를 들면, 예레미야 9장 17절 이하에서 10장 16절까지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사 1:9; 렘 2:19; 암 3:13 말 1:4: 시 24:10; 84:2 등 참조. 시편에서 만군의 여호와 이름 사용은 예언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구약 예언신학에서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은 무엇보다 자연 종교의 우상들의 힘을 무력화하는(또는 그 허상을 깨뜨리는) 유일신으로서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통치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야훼 하나님의 왕권을 이 역사속에서 구현하는 야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그의 군대(하나님 나라의 군대)이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자들이 강조하는 만군의 야훼 하나님은 그렇다고해서 이스라엘의 편협한 민족적 수호신이거나 배타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만군의 야훼는 어디까지나 온 나라들과 온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우주적이고 전 세계적인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 이름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배타적 선민사상과 이스라엘의 자기 의를 시정하고, 하나님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의 예언자들이 사용한 예언신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하나님 이름인 것이다(암 9:5-7 참조).


끝으로 구약문맥에서 비교적 후대로 오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정관사를 붙이는 “아돈”(사 1:24; 19:4 등)과 보다 자주 일인칭 접미사가 붙은 복수형태로서 나타나는 “아도나이”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돈과 아도나이는 약 439회 정도 사용되는데, “아도나이 야훼”의 형태로만 약 280회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직역하면 “나의 주인들”인데, 구약본문에서 이 명칭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그 사용이 구별되면서, 야훼 하나님이 나의 삶에 있어서 “주인들중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강조의 복수”(또는 장엄의 복수)로서 그 이름의 뜻이 드러난다. 아도나이 야훼는 창세기 15장 2절에 처음 언급되었고 5경 문맥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주 여호와”(개역개정)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이름은 예언서(주로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와 시편에서 보다 자주 등장하면서, 에스겔서에서 가장 많은 빈도수인 222회(!)를 나타낸다(E. Jenni, C. Westermann, Theological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Vol.1, Hendrickson, 1997, “아돈” 항목, 24쪽 이하 참조).

 

에스겔서에서 아도나이 이름이 이렇게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유다왕국이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미증유의 파국적인 상황에 직면하면서, 모든 기존의 제도권들과 권위들이 파괴되고 와해될 때, 만군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바벨론 포로기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제 바벨론에 종(노예)노릇하는 위치로 전락되었고, 바벨론의 주신 마르둑을 위시하여, 바벨론의 왕과 그 사회의 새로운 주인들을 섬기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실적 맥락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의 “아도나이”(주님)되심을 거듭 강조하는 에스겔 예언자의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유명사로서 야훼 이름의 발음을 삼가는 전통이 점차 강화되고 확산되면서(아마도 바벨론 포로기 시대부터?, 시 137:4 참조), 아돈 또는 아도나이라는 이름을 보다 자주 사용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주전 250년 경을 전후로 칠십인역에서 야훼 이름을 “호 퀴리오스”(그 주인, 주님)로 번역하기 시작함으로써, 구약본문 전승에서 아도나이 이름의 보다 활발한 사용과 신명사문자 발음 대신에 아도나이 발음을 적용하는 전통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아이히로트가 주장하는 바 비로소 주전 1세기 경에 이르러서야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아도나이“라는 이름이 맛소라 본문에 가필되어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구약 본문전승사에서 그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Walther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Vol. one, SCM Press, 1969, 204쪽 참조).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 본대로 엘, 엘로힘, 야훼, 야훼 츠바오트, 아도나이 등 다양한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자료들(자료비평)이나 구약신앙의 상이한 전승들(전승사비평 내지 편집비평)에서 비롯한 이름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야훼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주어진 계시의 다양성으로 파악되며, 오늘 우리는 그 계시의 다양성속에서도 통일성을 가지고(예컨대, 히 1:1-3)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