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한국 교회사

소래 예배당

미션(cmc) 2009. 12. 2. 13:05

소래 예배당

 

1. 초가집은 과연

 

일반적으로 소래교회의 시작은 초라한 초가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9세기 말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과 기독교 복음이 국금(國禁)에 속하였던 당시의 여건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인정케 한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교계에 널리 알려진 소래교회의 초가집 사진은 아무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져 왔고 보급되어 왔다. 더욱이 이 사진의 출처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50주년을 맞아 발행한 화보에 게재되었기에 더욱 돋보이게 되었고 권위를 인정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은 "소래교회가 서경조 목사의 사랑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서경조와 직접 생활을 같이 한 정용하를 비롯하여 대다수 소래 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진다. 정용하는 서경조 목사에게 들은 말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서경조 목사의 집에 세배차 가면 소래교회 초창기의 말씀을 곧잘 하시면서 [소래교회는 내가 사는 집 사랑채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누차 들었습니다"

서경조 자신의 글에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잇대 내 샤랑이 좁아셔 례배하기가 심히 곤난한지라"
( 서경조. 앞의 책. 99쪽).

소래에 정착한 서상륜은 아랫몰에 있는 기와집에서, 동생은 큼직한 초가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형이 수도 서울에서 전도할 뜻을 품고 상경하자 서경조는 형이 살던 기와집으로 이사하였고, 서경조가 살던 초가집은 타인들이 살도록 하였는데 정용하는 "그 초가집에서 2년간 생활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대구면지. 앞의 책. 135쪽).

 

 

1) 문제의 발단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가 서경조의 초가집에서 2년간이나 생활하였다는 사실은 그 집의 구조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확인한 후 교계에 널리 알려진 초가집 사진을 제시하며, 서경조의 사랑채 여부를 확인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오히려 소래에서는 전혀 보지도 못하고, 기억조차 없는 허름한 초가집 사진을 들이대며 묻는 것이 퍽 괴이쩍다는 듯이 필자를 쳐다 보았다.

이에 당황하여 이용희 장로에게 그 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는 서경조 목사의 뒤를 이어 소래교회의 제 2대 목사가 된 이승철 목사의 3남으로서, 월남 후 흑석동교회의 장로로 시무한 인물이다. 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였더니 그도 역시 "이 사진의 초가집은 서경조 목사의 사랑채가 아니며 소래의 중심, 큰 길가의 어느 집 같다"고 하였다.
(이용회 장로: 1984년 9월 15일 저녁 그의 사저로 방문하였다).

기실 이용희 장로가 지적한 초가집은 선교사 펜윅이 살던 집이었다. 후에 이 건물을 교회에서 구입하여 목사관으로 사용하였다. 소래교회 출신의 두 사람에게서 "아니오"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저으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교회 전체가 초창기 소래교회의 모습으로 알고 있는 이 사진이 사실과 다르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50주년을 기념하는 거대한 사업을 계획하면서 어찌하여 근거도 희박한 사진을 화보에 실었을까? 총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이고 허위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감격해 하는 한국 교회 전체가 우롱당하는 느낌이었고, 이 사진이 외국의 저명한 기독교 잡지에까지 소개되었는데, 사실과 다르다면 어떻게 이 일을 소화해야 할런지 막막할 뿐이었다. 이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서경조의 후손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저들의 증언을 듣기로 하였다.
(안광국(1962). 총회50주년기념화보. 대한예수교장로회종교교육부).

첫 번째로 방문한 사람은 계동에서 생활하고 있는 서효애 권사이다. 그도 역시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좀 더 충격적인 말을 들려 주었다.
(서효애: 서경조의 장남 광호의 장녀로 1898년생이다. 안국동교회의 권사. 방문일 1984년 10월 1일. 주소: 서울 종로구 계동 105번지)

"할아버지가 사시던 초가집은 매우 큰 집이었으며 이런 초라한 초가집은 아닙니다. 소래에서 이렇게 초라한 초가집은 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소래에서 이런 초라한 초가집을 본 기억조차 없다"는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다음으로 인천에 있는 서재환·서재민 등을 만나 문제의 사진을 보였더니 그들도 역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니오"라고 하였다. 이에 범위를 넓혀 소래에서 월남한 분들에게 서신으로 문의한 바, 인천의 이상수를 비롯하여 서울의 김인옥, 양평의 송병서 등 모두 "서경조의 초가집이 아니라"는 회신을 보내 왔다.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소래 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서경조의 초가집은 큰 집이며 사랑채를 뜯어 예배장소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사진의 초가집은 규모가 매우 작고 초라하다"는 이유로 그 집이 "아니오"라고 부인한다.
(
서재환: 서경조의 장남 서광호의 자손. 이들과의 면담일은 1984년 11월 13일임).
(서신발송일: 1984년 12월 6일)

그리고 서경조가 살던 초가집은 울타리가 돌담으로 되어 있고 돌담 한 가운데 문이 있어 펜윅(Fenuick)이 살던 집과 같은데 사진의 초가집은 울타리가 "바자"로 되어 있으니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사진의 출처는 어디일까? (사진참조)
(펜윅에 대하여는 본서 203쪽 이하를 참조하시오).

 

2) 서경조의 사랑채

소래출신의 교인들과 여러 증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서경조가 살던 집은 대문 안에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으로 된 건물이었다. 건물 왼쪽에 안채가 있으며, 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마루와 방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소래교회라고 믿고 있는 초가집은 어디에 있는 집이며, 무엇을 하던 집일까? 초가집 사진을 볼 때마다 많은 의혹이 날로 깊어지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밝혀 줄 사료(史料)는 없을까? 우선 선교사들의 기록들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3) 선교사의 기록

한국에 최초로 내한한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소래교회와의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선교사들은 얼마나 자세한 기록들을 소래교회를 위해 남겨 두고 있을까? 소래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기록과 한국인의 기록 사이에는 많은 격차가 있어 갈등의 요소를 제공해 줄 뿐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앞으로 계속적으로 탐색해감으로써 어느 정도의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서는 소래교회 초가집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예를 들면, <한국의 소명>(The Call of Korea)에서 언더우드는 서상륜의 사진과 한국 최초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기와집 예배당 사진을 게재하였다. 한국 최초의 예배당은 기와집이 아니라 초라한 초가집인데도 불구하고 기와집 예배당 건물을 제시하였을 뿐 초가집 건물은 이 책의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또 그가 기록한 책에서 소래교회에 대한 숫자적 언급은 다음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건축된 예배당이며 1895년 7월 3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H.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Fleming H. Revell Company, London and Edinburgh 109쪽)

물론 자신들의 사역도, 관여한 사역도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기록을 남길 명분도, 밝혀야 할 의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소래교회 사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의 기록을 뒤적이며 초가집 소래교회와 관련된 해답을 구하는 것은 노력의 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용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이광린 교수도 "선교사들의 기록은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사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說敎集을 남긴 분들은 몇분 있지만 이러한 調査를 할 수 있는 資料나 回顧錄 하나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선교사들의 일부 報告書가 남아 있지만 이것은 많은 制限을 갖고 있다. 역시 西洋人들이 쓴 것이라 우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자료가 없으니 그들의 것을 利用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다."
(李光麟(1983).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숭전대학교출판부. 36쪽)

아울러 선교사들의 기록이 절대적인 자료가 될 수 없는 증거를 한 두 가지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언더우드의 부인은 그의 저서에서 "동학군이 소래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을 때 소래에 체류하고 있던 매켄지는 소지하고 있던 총기를 폐기하므로 동학군이 감동하여 물러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메켄지는 그가 소지하고 있었던 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L. H.언더우드 (1984). 언더우드부인의한국생활. 서울: 뿌리깊은나무. 122)

소래에 당분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펜윅은 그의 저서에서 "동학란이 발생하였을 때 매켄지가 동학군의 진중에 들어가 점잖게 설득하므로 동학군이 후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서경조는 "자신이 먼저 설득한 후에 매켄지와 함께 동학군의 진중으로 들어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MALCOLM C. FENWICK(1967). THE CHURCH OF CHRIST IN COREA. Seoul, Korea. BAPTIST PUBLICATION. 37쪽).
(서경조. 앞의 책. 98쪽).

이상의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반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기록이라도 절대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한다.  

4) 이상수씨의 증언일제시대 소래에서 관직생활을 하며 집사로 교회를 섬긴 바 있는 이상수를 방문하여 그의 증언을 직접 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듣는 중에 의문의 일부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초가집 교회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제공해 주었다.
(이상수 1910년생. 인천 거주. 면담일: 1985년 2월 10일 주소 : 인천시 북구 가좌동 하나APT A-208)

"소래 마을 북쪽 산 중턱 아주 구석진 곳, 매켄지 선교사의 무덤 근방에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고 합니다. 외따로 떨어진 곳에 초가집을 건축한 이유는 은밀히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서상륜 형제분이 건축한 것이라고 합니다. 초창기는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산속 깊은 곳에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나 교인의 수가 증가하고, 신교의 자유도 허락됨에 따라 서경조의 넓은 사랑채로 예배 처소를 옮겼고, 그 후 이 건물은 방치되어 폐허가 되니 헐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곳에 예배를 위해 건축한 초가집이 있었다는 말은 전해 오지만 젊은 세대들 중 그 집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첫째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석진 곳에 건축했다는 것이 타당성을 인정케 한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가 숨어 예배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구석진 곳에 예배 처소를 준비할 수 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건물 규모로 보아 공감이 간다. 사진상으로 보아 초가집은 큰 집이 아니다. 몇몇 사람이 모여 겨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초라한 집일 뿐이다.

셋째로, 아무리 인심이 좋은 마을이라고 하지만 낯선 타향사람이 국금에 속하는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릴 때 쉽게 예배 처소로 자기 집을 제공할 만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예배 처소를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행동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마지막 증언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 본다. 소래교회는 어느 사가(私家)를 임시로 사용하거나 교회로 개조한 건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 예배할 목적으로 건축한 예배당에서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한국식으로 건축된 한국 최초의 예배당이 바로 초가집 예배당이다.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우리 손으로 우리 양식대로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시작한 자랑스런 교회이며,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뿌리]이다.

이런 결론을 얻으면서도 이 사진이 초창기 소래교회의 건물이 분명하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아직도 "글쎄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사진을 자세히 살펴 보면 초가집 뒤에 또 다른 집 지붕이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사진참조).

또 다른 집 지붕이 보인다는 것은 은밀한 곳에 건축된 단독 건물이 아니고 마을에 있는 어느 집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 초가집 예배당이었다"고 명쾌한 해답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최초의 한국교회는 예배를 위한 독립된 건물을 가지고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바탕이 바로 [한국 교회의 뿌리]라는 것에 더 강조점을 두어야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2. 기와집 예배당 (1)

 

1880년대 이 후의 한국은 끝이 안 보이는 수렁 속을 헤매는 시대였다. 굳게 닫힌 쇄국의 문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국제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한반도 전체는 심한 충격과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계속되는 권력투쟁과 허약한 정부, 개화와 수구로 분열된 지도계급의 반목과 암투, 부패한 정부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이에 시달린 민중의 봉기,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제국의 외교적 각축전 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이 나라의 미래는 어느 누구도 예측 불능의 상태였다.

이런 시기였으므로 일반 민중들은 참된 평안과 안정을 희구하게 되었고, 때맞춰 전파된 복음에 대한 민중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따라서 소래교회가 설립되자 소래를 중심으로 인근 여러 마을에는 많은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고, 또 부흥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인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부르시는 계기와 여건으로 이런 환경을 조성하셨다고 해석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문호 개방

서세동진(西勢東進)의 시대적 추세에 편승한 서구 열강들은 군함을 앞세워 힘으로 쇄국의 문을 부수며 이 땅에 상륙해 왔다. 그러자 이에 굴한 한국정부는 1876년 2월 26일 일본과 "강화수호조약"(江華修好條約))을 맺는 것을 효시로 1882년 5월 22일에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영국(1883. 11. 26.), 이태리(1884. 6. 26.), 러시아(1884. 7. 17.), 프랑스(1886. 6. 4.) 등과도 연차적으로 수교조약을 체결하면서 오백 년 간 폐쇄되었던 쇄국의 문을 서서히 열게 된다.
"강화수호조약"(江華修好條約)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함.

힘에 밀려 서구의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정부는 기독교 포교의 자유마저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일에 대하여는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저지하는 자세를 굽히지 아니하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프랑스 등은 이를 수용토록 정부당국과 외교교섭을 맹렬히 추진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통상수호가 곧 기독교 포교의 자유는 아니다.

한국 선교의 문은 정치와 군사의 힘에 의하여 열린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면에서 뜻하지 않게 열리게 된다. 그것은 매우 평화적인 방법이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1884년 6월의 일이다. 일본에 체재하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는 이수정의 주선으로 김옥균을 만났고, 그는 고종으로부터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게 된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VOL lX No8. 1895. 289쪽)

이 윤허가 도화선이 되어 1884년 9월 22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파송한 알렌(H. N. Allen)이 의사의 자격으로 입국하고 익년 4월 5일에는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미국 공사관의 부속 의사자격으로 입국한다. 이 날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부부도 제물포 항구에 상륙하기는 하였으나, 당시 한국은 갑신정변(1884)의 후유증으로 사회 분위기가 매우 불안하여 외국 여성이 정주하기에는 위험을 느끼는 때인지라 아펜젤러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언더우드만 상경한다.
   1) 알렌 Horace N. Allen; 한국명 安連. 1858-1932, 미국 의료선교사(1884.9.22). 왕립병원 광혜원 설립(1885.4.10). 1887년 선교사업을 떠나 정치와 관계하면서 주한 미국 공사관(1890) 대리공사, 미국 공사(1901)등을 역임.
    2
)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한국명 元杜尤. 1859-1916.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교육가, 성경 번역자. 최초로 내한한 정식 선교사(1884.4.5). 새문안교회(1877), 기독교 서회(1889), YMCA(1900), 연희 전문학교(1915)등을 설립. 1918년 건강악화로 귀국).
    3) 아펜젤라 Herey G. Appenzeller; 한국명 亞扁薛羅. 1858-1902. 미국 감리회 목사. 1884. 7월 내한, 배재학당을 설립(1886). 학교, 병원 등을 통하여 선교. 정동에 "벧엘 예배당"(정동제일교회 모체) 설립(1887.10.9). 성서위원회 서기(1887), 한국 성서서회 창설자(1890).

그 후 5월 3일에 감리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스크렌톤(W. B. Scranton))박사가 서울에 들어왔다. 아펜젤러도 헤론 의사 (John W. Heron)부부와 스크렌톤 박사의 모친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6월 16일에 일본을 떠나 6월 20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서울에 거주지를 준비하는 동안 제물포에 머물러 있다가 7월 19일에 상경하게 된다.
     1)  스크렌톤 William B. Scranton; 한국명 施蘭敦. 1856-1922.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 1885년 내한하여 의료선교. 정동병원 개원(1885.9.10). 상동으로(병원내 교회가 상동교회) 이전. 한글 성경 번역 위원회 번역 위원.
     2)   헤론 John W. Heron; 한국명 惠論. 1856-1890. 영국 태생의 미국인 의료선교사.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 후 내한(1885). 의료선교(1887-1890). 성경번역, 선교사 공의회 회장(1889) 등 역임.
     3)   이만열(1985). 아펜젤러.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89쪽).

이와 같이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속속 상륙하게 되면서 1886년 7월 23일에는 주한 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려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이 때까지도 한국인들에 대한 선교를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단적인 예는 1888년 4월 28일 고종이 내린 엄중한 "금교령"이다. 이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은밀히 싹이 트기 시작하였던 연약한 교회는 큰 수난을 겪게 되고, 복음 전파도 크게 위축을 당하게 된다.
     1)금교령, 1888년에 발표된 기독교 금지령(금교령). 원인은 천주교회 명동성당 건축부지가 궁궐과 종묘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을 명하였으나 불복하자 정부가 발표한 명령.

그러나 밀려오는 복음의 강풍과 이를 수용하려는 일반 민중의 소리없는 저항은 정부의 힘으로도 막을 도리가 없어, 1896년 7월 25일에는 교회가 고종탄신 기념 경축예배를 드리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 실로 시대적 변천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소래에서 시작된 전도는 계속 열매를 맺어갔고, 산간 구석의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는 어느덧 교인의 증가로 장소를 서경조의 사랑채로 옮기게 된다.

이 때 이 교회의 교세는 80여명으로, 58세대가 사는 소래에서 50세대가 신자가 되는 정도의 성과를 올리게 된다.
(서명원(1966). 韓國敎會成長史. 서울: 大韓基督敎書會. 47쪽).

이 때부터 소래교회는 좀 더 큰 예배당이 필요하게 된다. 이 새로운 필요는 저들에게 무한한 신앙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면서 신앙의 위대한 능력을 만천하에 보여주게 된다.

 

2) 부지는 당골에

소래교회의 중진들은 예배당 건축의 필요를 느끼며,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건축 부지이다. 본격적인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워야 했고, 이런 막중한 고민은 자연히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교회의 중진들이 기도를 시작하자, 하나님은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전체 교인들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도록 하셨다. 그 결과 95% 이상이 교인이었던 소래교회는 마침내 마을 사람 전체가 예배당 건축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무언중에 어떤 합의를 이루어 가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저녁의 일이다. 마을 공동회가 모인 자리에 자연스럽게 교회 건축 부지 문제가 의제로 제기되었다. 이 문제는 그 곳에 모인 모두의 숙제였기 때문에 함께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도출해 낸 결론은 무당들이 살면서 당제를 드리는 "당골"에 새로운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으로 무장된 저들은 우상과 미신행위의 헛됨을 이미 오래 전부터 간파하고 있었고, 무당들에게 미혹당하여 살던 과거가 마냥 후회스러웠다. 이제 저들에게 당골은 눈의 가시와 같이 거치적거리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로써 마귀와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당골의 무당들은 이 소식을 듣자 황해도 내의 유명한 박수무당들을 총동원하여 매일 "큰 굿"을 하며 "예수와 마을 사람"들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실력으로 저지할 것을 다짐하였고, 일사각오의 임전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힘세고 날쎈 마을 청년들이 도끼와 톱을 가지고 기세당당하게 당골로 진격해 들어갔다. 바라지 않던 현실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이다. 굿을 하며 신령의 힘으로 무장한 무당들은 실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진입을 막을 것이라고 기세를 올리며 큰 소리를 쳤지만 도끼와 톱을 들고 다가오는 청년들을 보는 순간 그 위세에 눌려 혼비백산 도주하고 말았다. 청년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손쉽게 신주목(神主木)을 쓰러뜨렸고 무당들의 소굴은 깨끗이 소탕되어 훌륭한 예배당 건축 부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함으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옛날 히스기야 시대에 있었던 사건의 재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쫓겨가는 무당들은 저주와 악담으로 일관하였지만 그 저주를 받을 만한 사람은 소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 믿고 구원을 얻어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마저 놓친 불행한 사람들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은 이 장소에 붉은 세력이 마귀의 꼭두각시가 되어 다시 들어와 검은 날개를 펴고 있지만 머지않아 하나님은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는다.

 

3) 건축비

예배당 부지가 준비되자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건축비의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으로 쉽게 해결하였다.

첫째, 소래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한 것이다.

당시 건물은 나무와 기와를 주로 하는 건물이기 때문에 목재 구입에 가장 많은 경비가 지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소래마을의 개척자이며 재력가인 광산 김씨의 장손 김윤방은 서경조와 사돈지간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이 있는 집사였다. 그는 예배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 전량을 자진 헌납하였는데, 이 목재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선산의 소나무를 간벌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당 건축 목재는 쉽게 해결되었다. 김집사의 헌신에 큰 힘을 얻은 교인들은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기쁨으로 헌금과 노역봉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둘째, 미리 비축해 두었던 기금의 사용이다.

서경조는 성경 공부차 상경하였을 때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서울의 신도들과 예배당 건축계를 조직한 일이 있다. 이 계금은 매년 10냥씩 불입하도록 하였고, 한국 어디서나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기금을 사용하도록 약조한 것이다. 따라서 소래교회의 건축 준비가 무르익고 공사가 진행되자 계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계금을 수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우 미묘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서울 교인들의 자존심 때문이다. 한국의 모체 교회가 자체적으로 예배당을 건축하면, 그것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격려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감정과 행동은 신앙 원리대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수도 서울의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 시골에서 먼저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사실은 서울 교인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고, 결국 서울 교회에서도 서둘러 예배당 건축 부지를 준비하고 건축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계금은 자연적으로 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서경조가 인수해 간 금액은 비축금의 절반인 5백 냥이었다.

이런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래교회는 넘치는 주님의 은혜로 예배당 건축을 순조롭게 진행하였고, 건축이 끝났을 때에는 50여 원이 남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한 서경조의 글을 소개한다.

"先時에 셔울 원목사 샤랑에셔 교우와 우리들이 한 契를 조직하고 당오젼(저자주: 當五錢, 고종20년(1883)부터 사용한 화폐의 일종. 엽전 100푼이 이 돈 5푼에 해당한다).십 량식을 내여 利殖하다가 죠션네 처음 짓난 례배당에 쓰자고 한 일이 잇난지라. 乙未年 春에 숑쳔셔 처음 례배당을 지으니 그 돈은 보내라 하엿더니 셔울 교우들이 발분하야 엇지 셔울이 싀골한대 떠러진단 말이냐 하고 례배당긔디를 사고 쥬초돌을 놋코 회답하기를 셔울셔도 례배당 짓기를 시작하엿시니 이 돈을 반분하난 거시 올타 하고 당오젼 五百兩을 보내니라."
(서경조. 앞의 책. 99쪽).

성경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36:5).

이처럼 인간적인 조건과 방법은 미숙한 점이 있을지라도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소래의 역사를 통하여 실증해 주셨다.

 

4) 보조금 사절

소래교회가 건축을 시도하던 시절의 한국 경제는 매우 어려웠고 국민 소득은 거의 무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러기에 풍요로운 미국 선교사의 눈에는 가난한 형편에서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것은 무모한 계획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언더우드는 경제적으로 돕고자 서경조에게 건축비 보조를 제의한 바가 있다. 이 제안은 순수한 것이었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며, 자신의 선교지에서 교회가 성장하여 자체적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겠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갸륵하고 감사하여 제안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 제안을 받는 서경조의 입장은 언더우드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민족 교회라는 자부심과 맞물린 생각이고, 한국 교회의 미래를 바라보는 원대한 선각자적 시각에서였다. 그리하여 건축비 보조를 제안해 오는 언더우드에게 민족 교회를 자생시킨 지도자답게 자립적인 힘으로 예배당을 건축할 것을 확고히 하는 대답을 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소래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무렵 언더우드 목사는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비 일부를 부담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서상륜씨 형제분은 지극히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나 어느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서경조목사가 생시에 우리에게 들려주었고, 고 김명선 박사께서도 누누이 얘기하시던 일이다)."
(대구면지. 앞의 책. 138쪽).

현재의 어려운 처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지도자다운 경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을 소래교회 출신으로 소래교회의 3대 목사이며 서경조와 같이 생활한 바 있는 김응순 목사도 그의 자필 자서전 <항부소전>(航夫小傳)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서목사님은 내가 숭배하는 어른이다. 그는 초대 복음 전도자로, 영웅적이요 자주 독립성을 가지신 이로 당시 소래교회에 큰 기초를 정해 주신 분이다. 한 예를 들면 송천에서 한국의 처음되는 예배당을 건축할 때 선교사의 도움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성전을 지으셨다. 이것이 본이 되어 어디든지 예배당을 지을 때에는 초막이라도 자기들의 힘으로 짓게 된 것이다. 한국에 장로교가 왕성한 이유 가운데 이 자립정신으로 한 것이 큰 동기가 된 것이다. 장로교는 국내에서 자립정신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자력으로 외국선교까지 하게 된 것이다."
(金應殉(1955). 抗夫小傳. 인천: 34쪽).
김응순(1891-1958); 호 항부(航夫), 소래 출생, 평양 신학교 졸(21회. 1927), 소래교회 3대 목사. 소래교회, 흥수원교회, 해주제일교회, 보합교회 등 시무. 황해 노회장(1937),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1942).

오늘의 이익과 영달에 관련된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현대 목회자들은 필히 명심해 두고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도움을 거절당한 언더우드는 돕고 싶어도 돕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미국에서 큰 양등을 다섯 개를 사다가 교회에 기증하는 것으로" 달래야 했고, 소래 교인들은 "그가 기증한 양등을 남녀방에 각각 두 개씩 걸고, 한 개는 강대상 위에 두어 아주 밝은 등불 밑에서 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대구면지. 앞의 책. 139쪽).

이 때의 사항에 대하여 서경조 자신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두었다.

"이때 동학에 유명한 쟈들이 숑쳔을 피란쳐로 알고 만이 모혀드니 매 쥬일 八十餘名이 례배하니라. 이때 매동리 집곡 집젼과 동학밥 아니해 먹인 동리가 업고 병대의 란리 아니격근 동리가 업스대 숑쳔은 두 란리를 다 피하엿스니 극랏셰계가 된지라. 이때 내 샤랑이 좁아셔 례배하기가 심히 곤난한지라. 새로 례배당 짓기를 시작하고 연보를 시작할새 우리의 례배당은 죠션에 처음이니 外國人의 재물은 드리지 아니하기로 작졍하고 혹은 기둥을 젼당하며 혹은 연목을 젼당하며 혹은 다른 재목을 당하며 곡식셤과 혹은 돈을 내며 혹은 몸으로 역사하야 기와집 팔간을 필역하니 남은 돈이 五十餘원이라"
(서경조. 앞의 책. 99쪽).

한국 최초의 교회가 타국인의 자본을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예배당을 건축한 기쁨과 감격, 그리고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이런 믿음의 뿌리를 후에 모든 교회들이 본받아 각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는 선교사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여 건축을 시도하게 되었다.

 

3. 기와집 예배당 (2)

 

5) 언더우드와의 관계

여기서 잠시 언더우드가 남긴 기록을 참고하고 다음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때의 일에 대하여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최초의 예배당이 세워지다"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1890년 봄, 소래에 두번째로 여행한 뒤였다. 마을의 기독교 신자 일행이 우리들을 찾아와 그들의 전도진행 상황을 이야기하고, 신자가 많이 늘어났으니 예배당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선교부에서 예배당을 지어줄 수 없겠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일지 몰라도 우리들은 이런 일에 대해 익숙지 못하였으므로 그 물음에 즉각적으로 [네,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예배당은 여러분들이 짓도록 하세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놀라면서 자기들은 할 수 없다고 말함에, 나는 [여러분들이 쓰고자 한다면 기와, 벽돌의 재료로서 나무와 돌과 짚이 얼마든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예배당을 지을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주면 나는 기꺼이 그 곳에 가서 나무를 자르거나, 건물을 세우는데 도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소래교회에서 파견된 일행이 선교부에서 할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갖고 돌아갔다. 그러나 뒤에 신자의 수도 많아지고 신앙도 굳건히 되자 지금은 고인이 된 매켄지의 지도로 외부로부터 아무런 원조도 없이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예배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헌당식이 거행된 것은 1895년 7월 3일이었다."
(H.G.언더우드. 李光麟譯(1989). 韓國改新敎受容史. 一潮閣. 89쪽).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였는데 두 사람의 기록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서경조는 언더우드가 원조를 제안해 오자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였고, 언더우드는 소래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들의 원조 요청을 자신이 거절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망측한 일이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부인인 릴리어스 호톤은 약간 다른 기록을 남기면서 이 이상한 일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솔내의 교회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돈을 내어 지은 최초의 교회이며, 실제로 조선에 세워진 첫 장로 교회였다. 서울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우리 집의 자그마한 손님방과 그밖의 다른 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니까 솔내가 그 대열에 앞장을 섰던 것이며, 다른 모든 곳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장로교 선교회의 경우) 그 일을 따랐다."
(
릴리어스 H. 언더우드(1984). 언더우드부인의 한국생활. 서울: 뿌리깊은 나무. 124쪽).

이 기록은 서경조의 기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서경조가 염려하며 선교부의 원조를 거절하게 된 근본 취지가 그대로 반영되어 모든 교회가 자립적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언더우드의 또 다른 기록에는 언더우드가 소래교회의 건축 보조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경조가 거절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입증하는 자료가 있다.

"1895년 봄에 서울 정동에 있는 장로교에서는 예배를 볼 장소를 자기들 스스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조선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더라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인 도배쟁이, 목수, 가계점원, 농부, 순검, 역관, 군인, 서기, 필생 심지어는 교구꾼, 행상들이었고, 그들중에 가장 잘 사는 사람조차 한 달에 금화로 5 달러도 채 못 벌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들은 그들을 최대한 격려하려고 그 일에 필요한 이만원을 거의 전부 우리가 마련하기로 결정을 했다."
(앞의 책. 126쪽).

서울 정동에 있는 교회란 새문안교회를 뜻한다. 이들이 자력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는데도 언더우드는 선교부에서 건축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결정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 소래교회에서 보조를 요청하였을 때 이를 거절하였을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이 <사기 상>에는 "至是에 宣敎師 補助로 京城 西大門에 基地를 買收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
앞의 책. 11쪽).

언더우드가 관련하고 있는 선교부에서 새문안교회의 부지를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건축비까지 보조해 주려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소래교회의 건축비 보조청원을 거절하였을까?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없는 한 언더우드의 기록은 신빙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나름대로 소화하기를, 소래교회의 건축비 보조요청은 서경조의 정식 요청이라기 보다는 어떤 철 없는 교인들의 염려를 듣고 그들에게 언급한 것이라고 해석해 본다. 그리고 이런 풍설을 듣고 있던 언더우드가 예배당 건축의 소식을 듣고 정식으로 원조를 제안하자 서경조가 이를 거절하였다고 추리하는 것이 순서에 맞을 것 같다.

이런 사례는 안동교회의 경우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안동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계획했을 때 교인들 일부에서 선교부의 보조를 은근히 바랬으나 담임목사 한석진은 이를 단호히 부인하고 독자적인 힘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蔡弼近(1971). 韓錫晉牧師와 그 時代. 서울: 광명인쇄공사. 200쪽).

6) 양보와 여유

소래교회와 경쟁적으로 예배당 건축을 시도한 새문안교회에 대한 서경조의 개념은 "형님 교회"였다. 이런 생각은 그의 형 서상륜이 관계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가지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본의 아닌 경쟁을 하며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소래에서는 넓은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고, 서울에서는 시골 교회에 뒤질 수 없다는 경쟁으로 공사를 서둘러야 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구금되어 있을 때 "어떤 이는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는 착한 뜻으로"(빌 1:15)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동기는 어떠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과 같이, 동기는 여하간 한국에 예배당이 두 곳이나 세워지게 된 것으로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소래교회가 먼저 건축에 착공한 관계로 공정이 빨라 먼저 상량 준비가 완료된다. 그러나 새문안교회가 건축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서경조는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서울의 교회가 상량을 끝내기를 기다린다. 좋은 것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윗자리를 사양하는 군자다운 넓은 도량을 읽게 하는 사건이다. 양보와 사양을 모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승리요, 인생의 전부로 알고 있는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필히 배워야할 덕목(德目)이라고 생각된다.

언더우드 부인은 새문안교회의 건축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선교부에서 부지를 마련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단되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건물을 짓는 데는 전부 만원이 먹힐 것이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일하러 나왔고, 목사와 전도사 한둘은 옷을 벗어 젖히고 일을 도왔다. 사내아이들은 돌을 날랐고, 붓보다 더 무거운 것은 평생 들어 본 적이 없는 점잖은 어른들이며, 선비들, 훈장들이 몸소 집 짓는 일에 뛰어들었고, 목수들은 이틀에 하루만 벌이를 나가면서 하루 걸러 한 번씩 그 숙련된 기술을 제공했고, 여자들은 식구들에게 밥을 지어 줄 쌀을 조금씩 덜어내어 모아 그것을 팔아 돈을 기부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이 들어왔고 일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더 들어올 돈이 없어 집 짓는 일은 중단되고 말았다. 선교사한테 비는 것이라도 빚을 지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길이 생길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앞의 책. 126쪽).

선교부에서 예배당 건축 부지를 헌납 받은 새문안교회조차 선교사들에게 빚을 얻어 예배당을 완공하기 보다는 차라리 공사를 중단하고 길이 생기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는 한국교인들이 아닌가? 그러기에 서경조의 원조거절은 당연하다고 결론을 내려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7) 소래의 경사

이 때 건축한 예배당은 [一]자형으로 면적 8간의 기와집 건물이다. 이 예배당 건축은 언제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고, 다만 1895년 6월 23일에 완공하여 7월 3일에 성대한 봉헌식을 거행한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예배당 건축과 봉헌은 교회와 마을 전체의 경사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경사였다. 그리하여 각처에서 교인들이 모여들었고, 서울에서도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선교사들이 내려와 헌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때 서경조에게는 또 다른 감격스러운 일이 있었다. 이 날 그는 장로로 장립이 되고 김윤오·안제경은 집사로 장립되었으니,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런 일이지만 소래교회는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았고, 온 교회는 기쁨이 충만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서경조는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두었다.

"이해 교우의 열심이 불길 니러나듯 하야 동리와 린근에 젼도하여 다수이 밋어 나오니 집집이 찬미셩이더라. 이해 가울(저자주: 1895년)에 원목사가 내려와 교회일을 쳐리하고 직분을 택할새 내가 長老 피택이 되고 金允五와 安制卿은 집사가 되니라.
(
서경조. 앞의 책. 100쪽).

서경조는 인생 최고의 기쁨을 주님께 선물로 받은 것이다. 주님은 전적으로 그에게 헌신하는 종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소래교회가 예배당 봉헌식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은 지금은 우리 곁에 있어서 영원한 기념이 된다.
(김명선(1978.10.14).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8) 증축

이렇게 건축된 예배당에서 소래 교인들은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고, 교회는 계속 부흥의 길을 달리게 된다. 당시 사회적인 혼란과 아울러 일어난 동학란과 청일전쟁은 소래교회를 존폐의 위기까지 끌어가는 듯 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교회와 소래를 피난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의 날개로 보호하여 주심으로써 난리 속에서도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된다.

동학란 후 동학의 접주 이기선을 구출하기 위하여 헌신한 서경조의 행동은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 때 구출받은 이기선은 일가친척과 함께 회심하여 교회에 나옴으로써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일 예배에 200여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게 되어 예배당 건축 일년만에 다시 증축할 수밖에 없는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때에도 소래 교인들은 작은 힘이지만 단합하여 8간을 증축하였는데 이로써 소래교회는 16간의 건물이 되었다. 통상적으로 초대 한국 교회의 건물 양식은 [ㄱ]자형으로 되어있고, 중간에 휘장으로 남녀석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소래교회는 [ㄱ]자형이 아니라, 처음 [一]자 형으로 건축하였고, 그 다음 해에 증축함으로 [T]자형이 된다. [T]형의 한쪽 부분을 숙직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므로 예배를 드리는 내부는 [ㄱ]자 형이 되었다. 이 부속실에서 제일 처음 기거한 시람은 매켄지 선교사이다. 16간 기와집에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은 다음과 같다.

"救世主 耶蘇 基督降生一千八百九十六年六月二十三日 上午十點 上樑 陰乙未四月營建此殿 又於今年慘作前面八間"
(
오문환(1955). 앞의 책. 15쪽).

 

4. 희년 기념 예배당

 

1984년 4월 12일 황해노회 제 126회 정기노회에서 소래교회를 총신교정에 복원하기로 결의한 직후의 일이다. 본 노회에 소속한 인천 보합교회 장로 고 이원열씨는 "북한에서 소래교회 건물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교회에서 개최되는 노회와 사경회에도 참석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억이 나는 대로 소래 예배당의 모습을 스켓치하도록 부탁드렸더니 현대식으로 건축된 거대한 예배당 건물을 그려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건물은 애당초 복원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 삼기로 하였고, 소래교회를 직접 목격한 분이 본 노회 안에 계시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했다. 고 이원열 장로가 기억을 더듬어 스켓치한 예배당 건물을 소래 교인들은 희년 기념 현대식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1) 희년기념 사업

이 현대식 예배당이 건축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소래교회는 교회 설립 50주년이 임박해오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첫째, 회년 기념 예배를 성대히 거행하는 것이고 둘째, 희년 기념 예배당을 현대식으로 건축하는 것이다.

소래에서 시작된 복음이 인근 지방으로 퍼지면서 주변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고, 인근의 교회들이 크고 작은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다. 더욱이 중·소도시의 교회들은 순식간에 크게 부흥하여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재령 서부교회는 2만 2천원의 예산으로 붉은 벽돌 2층 예배당을 건축하고(1921년) 동양 최대의 예배당이라고 자랑하였고, 안악읍교회도 교인 500명(1911년)의 대교회로 성장하면서 석조 예배당을 건축한다(1930년). 장연읍교회도 1만 2천원의 예산으로 붉은 벽돌 예배당(1936년)을 건축한다.

이와 같은 추세를 감안할 때 소래 교인들도 현대식 건물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이고, 자연 그런 방향으로 희년기념 사업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저들은 드디어 희년 기념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여 중점 사업으로 기념식과 아울러 기념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게 된다. 

2) 건축기금 조성우선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건축기금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의 경제는 의욕만큼 따라 주지를 못하였다. 소래는 평화로운 고장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융성한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의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경제 문제였다. 가난한 농촌교회로서 현대식 건물을 건축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들은 다시 힘을 집결시키기 시작하면서,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흥회를 개최할 때마다 건축헌금을 하였고 이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소래 교인들은 새 예배당 건축 자금을 비축하면서 기도로 마음의 성전을 지어가고 있었다.

사실 소래 교인들에게 있어서 희년기념 예배당은 한국 최초의 교회라는 자존심이 걸려 있는 공사이기도 했다. 한국의 모체 교회이면서도 빈약한 경제 사정 때문에 새 예배당 건축의 기선을 뺏겼다는 중압감에서 저들은 해방되기를 바랬을 뿐 아니라, 사용하고 있는 기와집 예배당은 낡고 퇴색하여 예배를 드리는 데도 비좁고 불편하였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은 필요 불가결의 사업이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사유 때문에 준비에서 건축까지 전심을 기울이게 된다. 

3) 건축 부지는

소래교회가 기념 예배당을 건축할 즈음 당골에는 교회 건물 뿐 아니라 해서제일학교의 남녀 교사 건물이 예배당 정면 좌우에 건축되어 있었고 기숙사도 있었다. 따라서 당골에는 예배당과 교회의 여러 부속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준비위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어디에 건축할 것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당골에 건축하는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기존의 기와집 예배당을 철거하느냐 않느냐의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당회와 준비위원들은 여러 번 숙의 끝에 기와집 예배당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초가집 건물이 없어짐으로써 역사적 유물이 전무한 소래교회로서는 이제 기와집 예배당마저 철거하면 최초의 교회로서의 역사유물은 전무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터를 기와집 예배당 동북쪽으로 확장하여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의하였고, 기존 건물은 기념관으로 영구 보존하여 교회와 학교에서 큰 행사를 거행할 때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전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모리아 언덕에 건축되었다. 이 언덕은 세월이 지나면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다윗이 이 곳을 은 50세겔로 구입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소를 삼았고(삼하24:24), 솔로몬 왕은 이 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것이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건축하여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소래에서 당골의 무당들을 소탕하고 제 2의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 곳을 성역화하여 한국의 모리아 언덕으로 변모케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더니, 이제는 다시 제 3의 성전을 현대식으로 건축케 하여 또 다시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이다.

 

4) 건축자재현대식 소래 예배당은 함석지붕의 목재 건물이다. 벽면까지 나무로 하였으며, 지붕의 함석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빨간색 페인트 칠을 하였다. 총 건평 70평의 장방형 건물이다. 이런 큰 건물을 목재로 건축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목재가 필요한 것을 간파한 건축위원회는 목재를 소나무 대신 포플러를 사용하기로 했다.

소래 교인들이 현대식 목재 건물을 건축할 것을 미리 아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소래의 선각자들에게 소래 마을 주변에 많은 포플러를 심게 하셨다. 이 때 선배들이 심은 포플러는 소래 전역에서 자라고 있었을 뿐 아니라 3·4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퍽 좋은 재목감이 되어 있었다. 이 사실에 착안한 건축위원들은 마을 사람들의 양해를 얻어 이 포플러를 간벌하여 예배당 건축에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예배당 건축에 자원 봉사하기로 작정한 청년들에 의하여 포플러는 간벌되었고, 장연읍의 제재소로 운반되어 쓸모 있는 목재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5) 특별헌금

소래교회 부설 해서제일학교 출신들 중에는 많은 의사들이 있다. 저들은 일인들에게 예속되지 않으며 사회의 존경을 받는 직업으로 의사를 선택하였고, 이런 이유 때문에 세브란스 제 1회 졸업생부터 소래교회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졸업생들 중에는 세브란스와 함께 평생을 보낸 김명선 박사를 비롯하여 박헌식, 박승원 등 개인 병원을 개설하여 명성을 얻은 분들도 허다하였다. 이들은 소래교회가 희년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가 생긴 것에 내심 감사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건물 일부를 독자적으로 맡아 헌금하기로 하였다.

이 일에 처음으로 참여한 분은 장연읍에서 개업하고 있던 박헌식 의사였다. 그는 예배당 지붕에 필요한 함석을 독자적으로 부담하기로 하여 헌금을 했다. 이 소식은 멀리 연백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박승원 의사에게 전달되었고, 그도 역시 뒤질세라 예배당 마루 목재를 단독으로 부담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소래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은 한가지씩 주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된다.

세브란스 출신 의사들이 자진하여 예배당 건축헌금을 하였다는 소문은 서울에 있는 김명선에게도 전달되었고, 그도 오늘이 있기까지 자신을 인도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와 소래 교인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건축헌금을 하기로 결심하고, 예배당에 소용되는 유리 전부를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세브란스 의전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던 그는 거액을 헌금할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이런 고민을 연희전문의 언더우드(H. H.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박사에게 호소하자 그는 내심 매우 기뻐하였다. 그의 부친 언더우드가 소래교회 건축을 돕고자 했으나 돕지 못한 과거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김명선을 돕는 것이 바로 부친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협조할 것을 선뜻 약속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거액의 건축 자금을 일시에 준비한다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사용하고 있던 승용차를 처분하기로 결심하였고, 그것은 곧 150원에 판매되었다. 이 판매대금 전액은 즉시 김명선에게 전달되여 건축비에 사용된다. 이로써 김명선은 유리를 헌납할 수 있었고, 언더우드는 그의 부친의 소원을 풀어 드리는 효자가 된 것이다. 

6) 희년 기념 예배

소래교회 설립 50주년은 한국 교회의 희년이다. 그러기에 희년기념 예배는 성대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면지>에서는 이날 "전국적으로 교회 대표들이 모여들었고 각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희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곁들여 "황해노회도 새 예배당에서 거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 진행한 예배 절차에 대하여 알 길이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 

7) 헌당식희년 기념 예배당의 착공일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총회 제 23회(1934년) 회의록 부록 각 노회 상항보고에 의하면 "장연군 송천교회에서는 함석제 70평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는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문을 보아 소래교회는 1934년 가을 이전에 예배당 건축이 완료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을 입증해 주는 사진 자료도 있다. 즉 1934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사진이다(사진참조).

희년 기념 예배당은 1934년에 준공은 되었으나 "성전 봉헌식은 1936년 봄에 있었다"고 소래 교인들은 말한다. 이는 당시 농촌 교회의 경제사정이 예배당 건물을 준공한 후에도 정리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헌당식이 늦어진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자력으로 현대식 건물을 가지게 된 소래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헌신, 그리고 이미 소래를 떠나 있는 분들까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진 건축헌금에 참여한 사실들은 두고두고 본받아야 할 일이며, 이런 신앙의 유산들이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라고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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