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칼빈주의(CALVINISM)

미션(cmc) 2009. 12. 16. 09:11

칼빈주의(CALVINISM)

칼빈주의의 총 주제성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제1강 칼빈과 칼빈주의 

A.칼빈(John Calvin ; 1509∼1564)

칼빈은 1509년 7월 19일 파리(Paris)의 근교인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동자이었으나 부지런하고 조직적이고 독립 정신이 아주 강하여 노용시 감독구의 서기가 되었다. 그의 모친은 그 성 내에서 신앙의 인물로 존경받는 여인이었다. 칼빈은 어릴 때부터 비상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 번 배운 학문은 모두 기억해내는 총명함과 지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가정은 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부친은 칼빈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하여 12세 때에 그곳 교회의 신부를 보조하는 목사보에 임명되어 장학금을 받았고, 14세 때에는 파리대학교내의 마르쇄대학으로 전학하여 공부하였다. 이 학교에서 그는 귀중한 개혁의 동반자인 화렐(Farel)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신부가 되기 위하여 성경과 스콜라철학을 배웠다. 그가 19세되던 해에 그의 부친은 그에게 신학을 포기하고 법학을 공부하도록 촉구하였다. 그의 부친은 노용시의 교권자와 충돌사건이 일어나 파문을 당하게 되자 아들에게 법학공부를 시켜서 세속적인 분야에서 출세시켜 보려고 애섰다. 그래서 그는 올레온대학과 부느제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 때에 복음주의자요, 헬라어의 전문가인 볼마르(Wolmar)에게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는 신학, 철학, 법학, 어학연구의 학문적인 배경을 통해, 후에는 조직적인 개혁 운동을 진행시키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1532년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경험을 그는 “너무나 완고하게 이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런 회개를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이 불붙게 하였다”고 그의 시편 주석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그는 복음의 사역자로서, 종교개혁자로서 두 가지 사명을 동시에 깨닫고 1533년 완전히 개혁을 위해서 개혁사상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칼빈은 1535년 불란서 남부에 있는 스트라스버그(Strassburg)로 가서 다시 스위스의 바젤(Basel)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경건한 호구라인부인 댁에서 투숙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1536년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ne Religionis)? 제 일 판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가 26세였다. 「기독교강요」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성경에 충성하였기 때문에, 개혁 교회의 영원한 기념비적 저서로 남게 되었다. 기독교강요에 바탕을 두고 개혁교회가 형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강요」를 로마 카토릭(천주교)에서는 “이단자의 코란”이라고까지 혹평하였다.

칼빈이 종교 개혁을 주도하게 된 제네바(Zeneva)시는 신교 사상이 점차 확산되면서 로마 교회에서 핍박을 더욱 심하게 가해왔다. 1533년 10월 화렐이란 청년은 바젤, 모우, 스트라스버그, 베른 등을 선회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가 제네바시에 돌아오게 되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와서 묵게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화렐이 칼빈을 찾아와서 개혁운동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칼빈은 경험도 없고, 연소한 사람이고,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아, 조용히 쉬면서 저술가로 보내고 싶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거절하는 칼빈에게 화렐은 큰소리로 “그대는 쉬는 것밖에는 생각지 않는군요. 요나의 이야기를 모르시나요? 그대가 만약에 하나님의 일보다 조용한 생활로 독서나 즐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저주하리라”고 선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칼빈은 화렐의 말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느껴져 화렐과 함께 제네바 시에서 개혁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때 결심한 내용을 “이런 말(화렐이 저주하는 말)은 흡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의 손을 들고 나를 주저앉히는 것같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세웠던 여행을 포기하였다. 만약에 나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면, 나는 결코 제네바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확신했기에 나는 나의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라고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7세였다. 그는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종교, 사회, 교육의 다방면에서 성경에 기반을 두고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하나님은 칼빈을 사용하였듯이 사람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섭리해 나가시는 분이다.

 

 그의 말년에는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아서 두통, 위장병, 신경통, 허약체질로 설교도 서서 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할 정도로 약해졌다. 그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할 정도로 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가요 열정가이었다. 그래서 제네바시를 복음적 기독교의 예루살렘으로 만들었고,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왕국을 완성하였다. 1564년 5월 27일에 55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운명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존경하는 여러분! 나의 무거운 짐을 여러분이 친절하게 함께 져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친 교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만 위대하시고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십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가 소천하였다는 소식이 제네바시 전역에 울려 퍼졌을 때 제네바 시는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그의 평시에 가르침에 따라 장례식은 아주 간단하게 치루어졌다. 그의 무덤은 아주 초라하게 만들어졌고, 비석도 세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묘소에는 무덤도 없고, 비석도 없이 평토장한 무덤에 쇠줄로 얼기설기 얽어져 있고, 거기에는 조그마한 글씨로?J.C?라고 씌여져 있을 뿐이다. 칼빈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명예나 권력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비해 놓으신 면류관을 소망하며 일생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자세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일평생을 주관하게 된 신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리는 삶, 그 자체였다.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다 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B.칼빈주의(Calvinism)

 칼빈이 일평생 동안 하나님 앞에 선(Coram Deo) 자세로 형성이 되어진 개혁주의 교회에 기반을 둔 학자들에 의해 형성이 된 신학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에 궁극적 관심을 가진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참된 복음과 하나님의 법에 의한 신학의 체계이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포괄적인 사상 체계인데, 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교훈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칼빈주의의 대학자인 월필드 (B.B.Warfield)박사는 “칼빈주의자는 모든 만물의 현상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자이다. 따라서 그 만물의 현상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따라 일하는 그런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자는 기도하는 태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전생애를 살아가며, 그의 생의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참된 영혼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는 오직 자기 힘으로는 구속하지 못할 줄 알고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 중에 내어 맡기는 자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칼빈주의자는 자기 나름의 어떤 공로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모든 사고방식에서나, 특히 그의 삶의 모든 활동 범위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칼빈주의는 낙관주의 문화이나 철학도 아니고, 낭만주의도 아닌 하나님 제일주의요. 성경주의이다. 제이 그린(J.Green)은 “칼빈주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 중심주의임을 확실하게 말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칼빈주의자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전15;10, 민9;15-23) 칼빈주의자는 성경에 있는 대로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라는 말씀처럼 살아간다. 칼빈주의는 완전예정을 믿으며, 구원론적, 신론적, 인간론적, 교회론적인 면에 있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이므로 칼빈주의를 어떤 새로운 종교 개혁신학처럼 볼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과 속사도들과 바울의 신학에 맥락을 같이 하는 성경중심, 하나님중심, 그리스도중심, 은혜중심으로 형성되어진 신앙의 근본적인 신학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중심교리를 찾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무한한 영광과 능력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붙들 때 인간은 참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고, 무오의 성경을 붙들 때, 인간은 모든 진리와 경건함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가정이나 교회나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등의 모든 영역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서 된 것임을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칼빈주의자들이다. “개혁되어진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semper reforma)" 라는 명제아래 중단없는 개혁이 진행되어야 칼빈주의가 된다. 카토릭의 위식주의가 점차 개신교안으로 유입되어져 가고 있는 시점에서 진정 성령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개혁되어져야 한다.  

* 로마카토릭교회가 율법을 준수하면서, 베드로성당을 건축함에 있어서 부족한 제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강매하고, 성직매매를 일삼게 되자, 1517년 루터가 롬1;17절의 말씀인 ‘이신득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95개조항을 비텐베르그대학의 정문에 내걸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루터는 로마카토릭교회가 너무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것을 개탄하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기 때문에 율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라는 진리만을 주장하면서 구원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물론 루터의 주장이 성경으로 볼 때 합당하기는 하지만 율법을 무시함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의 생활표준을 제시해 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된다. 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루터란아워의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종교인은 많이 양산하였으나 신앙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행을 자아냈다. 루터에 반하여 칼빈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나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은 자의 삶의 표준으로 율법이 있어야 된다. 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율법을 구원받은 표준으로 삼았고, 루터는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향에 이르렀고, 칼빈은 율법을 구원의 표준으로서가 아니라 생활원리로서의 율법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더 잘 성취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리로 인정해야 된다.

제2강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5대 교리가 형성하게 된 배경은 17세기초 화란에서 발생한 신학적인 논쟁에서 유래한다. 그 당시 화란신학교의 교수이었던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 1560-1609)가 죽은 지 1년 된 1610년에 그의 제자들이 알미니우스가 가르친 내용에 기초하여 5개 조항을 만들어, 칼빈주의 기독교 국가이었던 화란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들이 이 항의문에서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of Ferth)와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Heidelberg Catechism)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을 해옴에 따라, 이에 반박하기 위하여 칼빈주의 5대 교리가 형성되었다. 알미니우스 교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서 화란 정부에 5개 조항의 항의문을 제출한 이들을 가리켜 “알미니안주의자”라고 하는데, 이들이 주장한 5개 조항을 보면 : 감리교, 경건주의교회, 구세군, 순복음교회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1)자유 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자유의지 인정)

 2)조건적 선택(예지, 예정)

 3)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만인구원)

 4)성령은 실제로 거스려질 수 있다.(가항적은총)

 5)은총으로부터의 타락

(성도의 보호와 견인이 불확실하다. 곧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지에 의해 구원받는다) 

이다. 이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면서, 연합 노력을 통하여 성취되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속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반응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을 예비해 놓으셨지만, 하나님의 예비는 스스로 자유 의지에 의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협동할 것을 택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해서만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라, 인간이 누가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견해는 1610년 도르트(Dort)회의에서 비성경적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알미니우스는 정죄를 당하였다. 이처럼 이들이 주장하면서 반대한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무능력, 무조건적인 예정된 선택, 제한된 구속,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성도의 견인 등의 교리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교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되어 1618년 11월 13일 화란 남부 지방의 도시인 도르트에서 총회로, 84명의 총대와 기타 행정원과 각국 대표를 합쳐 129명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이 회의는 그 다음 해 5월 9일까지 약7개월에 걸쳐서 154차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가 부당함을 결의하고, 알미니우스를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도르트총회의 의장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요한네스 보걸만( Johannes Bogerman)이었다. 그래서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확증하게 되었다.

*** 1. 벨직신앙고백서 :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사용했던 3개의 표준문서 중에 하나이다. (다른 두 개의 표준문서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와 도르트 신조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561년 브레스가 30대 후반의 시절에 벨기에의 여러 주가 에스파냐의 통치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 불법으로 설교하였다는 죄목으로 쫓기는 중에 만들었다. 브레스는 프랑스어로 만들고, 곧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였고, 1566년에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619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후에 네덜란트 전국 교회회의에서 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여 사용하였다.

2.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 : 독일의 제후였던 프레드릭 3세의 명으로 1563년 ‘울시너스와 오레바너스’에 의해 만들어진 칼빈주의와 루터주의를 조화시켜서 만든 신앙문답서이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 성공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열린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의하여 1646년 12월 4일에 완성된 신앙고백서이다. 일부 수정을 걸쳐 48년6월20일에 의회에 의하여 승인되어 왕정복고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잉글랜드교회의 신앙규법이 되었다. 그 후에 오늘날 까지 영국, 미국의 개혁교회, 재세레파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모두 33장으로 되어 있고, 성경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까지 기독교의 거의 모든 교리를 다르고 있다. 이것은 철저한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1.인간의 전적 부패 혹은 무능력(Total Depravity or Total Inability)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 함은 본질상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고, 비정상적이고, 죄악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그 존재 전체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훼손되었음을 가리킨다. 이 부패는 인간의 육체적, 영적, 모든 부분에 확대되어 있고, 죄가 사람의 마음과 의지 그리고 사람의 모든 기능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인간은 무능력해졌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전적부패, 전적 무능력, 영적인 무능력이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 문제에는 아무런 능력도 행할 수 없다.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만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없이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을 깨닫는 것도, 전적인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 주어지는 도우심이다.

(렘17;9, 롬3;10-12, 3;23 ,엡2;8-9)

 2.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인간은 누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악되고, 영원히 버림 받은 죄인으로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의 자손 중에서 어떤 개인을 개별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택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사랑에 의한 것이지, 결코 선택된 사람의 현재나 미래의 어떤 성품이나 행위를 보시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 택정해 주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감당하시고, 성령님께서 지켜주시고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성부의 선택 행위가 택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 성자의 구속 사업과 관련되어야만 하고 택함을 하시는 성령의 중생사역과 관련되어야 한다.

(요15:16, 행13:48, 롬8:29~33, 9;11, 엡1:4 ~6, 딤후1:9, 살후2:13~14, 계13;8, 17:14)

 3.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된 속죄

(Particular Redemption or Limited Atonement)

 선택이 구원 자체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표시이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이 구속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고, 인생을 취하셔서 법적인 대표자로서, 자기 백성이 받을 형벌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영원히 옮겨진 것이다.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면 완전한 의를 받게 되며, 모든 죄와 정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이 구원은 행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서만 성취되는 것이다. 이 구속적 사역이 구원받기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구속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시기로(유기하기로) 계획된 범위안에서 제한된 것이다.(요10:15,요17:2,9,12,24, 롬8:33 히2:17, 3:1, 9:15)

 4.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

(Irresistable Grace or the Efficacious Call of the Spirit)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 인간은 거부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구원 사역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가 다 함께 관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기 백성이 구원받도록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성자에게 주시고, 성자는 정한 때에 오셔서 구속하심으로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신 것이다. 예정과 구속이 구원 사역의 완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중생 사역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중생 사역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죄인은 틀림없이 구원받게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죄인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선한 사업을 하게 하신다. 성령은 이를 위하여 효과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요10;26-30, 행13;48,롬5;10, 8:14, 30, 전2:10~14, 6:11, 12:3, 엡2:1~10, 4:4, 디도3:5 겔36:26~27)

   

 5.성도의 견인 혹은 궁극적인 구원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or the Security of Believers)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신앙을 지키게 된다는 의미이다. 중생을 통하여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 영원하고 불변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들은 영원한 영광으로 예정되었으며,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 비록 참되고 성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시험에 빠져서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보호는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이러한 죄가 그들의 구원을 영원히 상실되고, 잃어버리도록 하지는 못한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궁극적인 기업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한 번 형성된 부모⋅자식관계는 영원히 불변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부⋅자관계는 형성된다. 영적인 부⋅자관계도 동일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사43:1~3, 54:10, 렘32:40, 요5:24, 6:35 ~40, 10:27 ~30 롬8:1, 29~30, 35 ~39,고전1:7~9, 엡1:5,13, 40, 4:30 살전5:23~24,벧전1:5, 유1:24~25)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영어의 첫 글자를 모으면 “TULIP” 이라는 단어가 형성되어진다. 튜립꽃을 연상하면서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외우면 좋다.

제3강. 칼빈주의의 구원관(1)

 사도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구원의 순서를 말하고 있다. 이 순서에 따라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라는 칼빈주의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3대 직분(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에 맞추어서 “부르시는 것은 선지자직으로, 의롭다 하심은 제사장직의 수고로, 영화롭게 하심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왕직으로 오실 때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신 일은 이미 과거에 되어졌으나, 성화는 현재 시간에도 계속 진행되어지고 있으며, 영화롭게 하시는 일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하였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셔서 정하셨으며, 성자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중생시키시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1.예정되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담당해야 될 도덕적인 책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기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대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정론을 부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만약 하나님의 예정을 믿게 된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윤리 도덕적인 책임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정을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유대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70년이 지나면 자유로운 몸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믿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하여 성결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이 로마에 죄인된 몸으로 끌려가면서 지중해 연안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죽을 고생을 하였을 때, 천사가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하는 음성을 듣고서, 배가 파선은 될지라도 생명만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였고, 용기를 심어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예정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자리, 고난의 자리, 사경의 자리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영국의 청교도들, 스코틀랜드의 계약론자들이 도덕 생활을 최고로 보여 주었는데, 그들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윤리 도덕적으로 모범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칼빈주의자들이 도덕 생활을 해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오셨고, 율법에서 해방시켜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구원받는다고 생각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마5:20)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척하는 외식적인 사람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마7:21)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율법을 지켜 그 공로로 구원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음에 감사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므로 도덕적 최고 수준에 도달한 생활을 하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의 새물결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된다.  

1) 순결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a. 육신의 순결(성적인 순결: 살전4;3-5, 고전6;18-20)

b. 삶의 순결(생활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롬12;1-2, 마5;13-16)

c. 영혼(영적인)의 순결(이단과의 전투에서 승리. 엡6;10-13, 벧전5;8-9 )

2) 사회(가정,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된다.

우리나라 경제사범을 종교별로 구분하였을 때 기독교인50%, 천주교인20%, 불교인20%, 기타10%으로 나타났다. 전체 경제사범중에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나타났다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은 결과에 따른 것이다.

  2.중생하여 거듭난 사람의 모습

  중생은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말을 “거듭난다” 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중생이란 단어를 “Re-gener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곧 두 번 태어난다 는 뜻인데 한 번은 어머니의 태에서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또 한 번은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라고 하였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3;4)”이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라고 대답합니다. 곧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됩니다. 그래서 중생은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의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의 피 흘림을 통해서 태어나지만,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중생해야만 되는 이유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뜻을 발견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중생하지 않으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지 않는 소경이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해야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중생할 수 있을까? 인간의 어떤 판단이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생은 구원의 시작에서부터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주의 말씀이 능력으로 증거 되어지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진행되어진다. 오순절 사건 또는 고넬료 가정, 루디아의 가정에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먼저 말씀선포가 선행되어진 후에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생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인이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인격이 새롭게 변화 받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정⋅의의 인격체가 새롭게 변화받아 하나님을 더욱 더 알고 섬기게 되어진다. 또한 구원받기 전에는 죄악의 길을 좋아하여 즐겁게 따라 갔으나, 중생한 이후에는 죄악 자체를 싫어하고 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게 되고, 신앙으로 살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자라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흔적을 닮아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중생과 믿음과 회개와는 어떤 전후 관계가 있을까? 대체적으로는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태여 구분을 해야 된다면 중생이 먼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오시고, 은혜를 주셨음에 따라 중생하게 되고, 중생되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9~13)이라 하였다. 주님의 이름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중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제4강. 칼빈주의의 구원관(2)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4~28) 하였다.

  1.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

 위에서 인용한 바울의 선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중생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의롭다하여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가리켜 칭의(稱義 : Justification)라 하는 것이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 싸웠다. 그 싸움에서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는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 참패를 당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네가 이겼다고 해 주었다. 이것처럼 죄인인 인간에게는 의로운 모습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해 주는 것이다. 곧 다시 말하면 인간 자체에게는 전혀 의롭다고 할 자격이나 조건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의지하여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다고 불러 주는 것이다. 의인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런 존재에게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천국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는 자랑해야 되지만, 인간 자체로는 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칭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의 내적인 모습은 중생이고, 외적인 모습은 칭의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은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가리키고, 칭의는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하시는 구원의 표시이다. 루이 벌곱(L.Berkhof)이란 신학자는 칭의에 대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하고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고하시는 법적 선포이다”라고 하였다. 마치 판사가 죄수에게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것이 죄수의 마음속에 어떤 작용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판사의 결정에 따라 선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신다. 아담이 범죄한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부활은 그를 의지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로움과 부활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다시 정죄받지 않는다. 그것은 칭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윤리 도덕적으로 완전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칭의의 거룩함을 받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거룩케 되어져 가는 사람 

 칭의는 하나님께서 외적인 외부 세계에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법적 선포이며, 거룩케 되어 가는 것 곧 성화(聖化:Sanctification)는 인간 영혼에서 인격이 성결해지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칭의가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믿음으로만 되어진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어지고, 성화는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굳이 구별한다면, 칭의는 밖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원죄에서 놓여 자유로워져서 완성된 것이다. 그런 반면에 성화는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자범죄에서 놓여지는 것이고 미완성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칭의가 완성적이고 성화가 미완성적이란 말은 칭의는 단 한 번에 다 주어진 것인 반면에, 성화는 인간에게 완전히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화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으면 칭의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으면 완전한 성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화는 영과 육이 모두 이루어져야 된다. 그 이유는 인류의 죄악이 영에만 극한된 것이 아니라, 육에도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의 성결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면 육의 성결도 뒤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새롭게 변화받은 사람은 자연히 인격과 신앙이 고귀하고 순결하게 이루어져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이 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은 향기로운 성도로 변하게 된다. 작은 예수의 모습이 되어지고,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합당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 앞에서, 이웃들 앞에서 살아가게 된다.

행11:24에 보면 바나바에 대하여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하였다. 바나바의 인간됨과 신앙인으로 서게 되었을 때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목회하였을 때 주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다. 바나바는 권면과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그에게서 바울과 마가가 큰 영향을 입게 되었다.

더욱 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져 간다. 주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기도하며 애쓰게 된다. 교만함을 떨쳐 버리고 겸손과 온유와 섬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어진다. 그러면서 죄악을 멀리하면서 마귀 권세를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쳐 승리하게 된다.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고,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간다.(롬14:7~8)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 대한 대가로 면류관을 받게 된다.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뇨 사람 시몬은 자기가 지고 간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는 평생 자기가 억지로 지고 간 십자가에 의인 예수가 달려 죽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였다. 그의 아들이 루포인데 루포는 로마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성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를 죽이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신실한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기가 지고가면서 감당해야 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면서 자신의 의를 죽이는 작업을 할 때 거룩케 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항상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해 드리고(Lordship), 그 분의 지시하심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Discpleship) 성화되어져 갈 수 있다. 여기에는 항상 성도의 견인(堅忍: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 곁들여진다. 곧 성령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지속시켜 나가신다는 것이다. 겉모양으로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아 체험된 성도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며, 성령의 체험을 한 성도는 완전히 타락하여 지옥 가는 일이 있을 수 없도록 지키신다는 것이다. 한 번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를 했건, 안했건, 살이 있든지, 죽었던지, 착한 삶을 살았건, 악한 삶을 살았건, 그것에 상관없이 영원히 그 부모의 자녀가 된다. 어떤 때는 자녀가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자녀가 되지 않았다가 하는, 변동이 일어나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영원한 불변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지니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령받은 사람도 완전히 타락하여 지옥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에서는 외형적이고 가식적인 교인은 완전히 타락하여 버림받을 수 있으나, 참으로 중생하여 거듭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도록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굳세게 성도들을 지켜주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품안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반드시 구원받고 승리케 하시는 것이다. 그러려면 주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며, 읽고, 배우고, 순종해야 된다. 주님의 말씀만이 능력이요 방패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신령한 젖이요 떡이라고 하였다. 신령한 젖과 떡을 먹음으로서 영혼이 자라고 성화되는 것이다. 또한 성례에 참여함으로 성화되어질 수 있다. 성례는 죄인들을 위해서 대속제물(代贖祭物)로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인 성찬과 신앙을 고백하는 세례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화가가 캠퍼스에 자신이 그리기로 착상한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에 대한 캠퍼스를 올려놓고 하나님께서 구상한 하나님백성으로서의 모습을 차곡차곡 그려가고 계신다.

  3.완전히 구원을 받은 사람

  이제 하나님의 예정된 가운데 부르심을 입어 성령의 감동하심과 조명하심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중생하여 의롭다고 인정되어지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켜주심과 도우심을 받아 거룩케 되어지는 사람이 주님께서 재림하시거나 사람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때, 구원은 완성되어진다. 이것을 이름하여 완전한 구원, 성도가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다. 곧 성화의 단계를 지나 영화(榮化:Glorification)가 되어지는 것이다. 성화가 화가가 자기가 그리려고 의도하는 바를 캠퍼스에 그려가는 과정이라면 영화는 모든 그림을 다 그리고 마지막 화가의 직인을 찍고 판넬까지 만든 상태. 완성된 그림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신앙을 신실하게 지키고 사명을 감당한 주의 백성들에게 예비해 놓으신 상급을 받아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중에 지내게 되는 것이다.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질병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천국의 백성으로서의 누리는 영생(永生)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이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감사하고, 순종하고, 찬양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면서 영광중에 지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나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3:12~15) 하였다. 성도들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빌3:20)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사모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험난하고 역경이 많은 이 세상을 승리하며 나아가야만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빛된 삶을 살고 주님의 온전하심을 따라 온전해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해 나가야 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완전한 구원을 사모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 나가야 될 의무와 사명과 권한이 있다. 이것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 볼 때, 반드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축복이다.

*** 천국의 모형도 ***

천국의 도래

미완성된 천국

(전투하는 천국)

(이미) (아직)

완성된 천국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재림)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이미 천국이 임재하게 되었다. 나라가 형성되려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영토와 주권과 백성이 충족되어질 때 나라꼴이 형성되어진다. 하나님의 주권은 예수님에게 있다. 절대군주주의 형태로서 신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백성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성도가 곧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살고 있는 처소가 하나님 나라의 영토가 되어진다. 눅17:20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너희 안에’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는 ‘너희 마음속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너희 무리들 속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곧 하나님나라의 주권자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그들이 서 있는 장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 장소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천국은 이미 이루어진 천국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천국. 미완성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의 천국은 바리새인들과 지속적으로 전투해야 되는 천국이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셔서 이 땅위에 완전히 심판하고 변화시킨 후에 공중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위에 임재하게 된다. 이것을 완성된 천국이라 한다. 천국이 완성되면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음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고, 하나님나라의 제사장으로 살아야 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9-10)”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상급을 예비해 놓으셨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성도를 위한 것임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상급은 구원받은 자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온 행적을 따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산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상급이 바로 면류관이다.

성경에서 성도들이 누릴 면류관

1) 의의 면류관(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2) 생명의 면류관(약1;12, 계2;10)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3) 인자와 긍휼의 면류관(시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4) 승리의 면류관(딤후2;5, 4;8, 계3;11)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5)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6) 기쁨의 면류관(빌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7)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9) 금면류관(계4;4,14;14,시21;3,슥9;16)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 한 낫을 가졌더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0) 가시면류관(마27;29, 요19;5)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11) 영화로운 면류관(잠4;9, 12;4, 16;31, 17;6, 사28;5)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