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셀교회이어야 하는가?]
편집.정리 : 문각균 장로
1. 혹자들 가운데는 오늘날 교회와 목회가 위기에 부딪혔기 때문에 그 대안적 방법으로 찾아낸 것이 셀교회(목회)라고 생각한다. (UP)
그러나 셀교회는 대안도 목회 방법론도 아니다. 셀은 교회와 목회의 원안이라는 확신 때문에 우리는 셀교회를 지향한다.
‘많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Peter F. Drucker).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성경적인 교회가 셀교회라는 확신 때문에 우리는 셀교회를 추구한다.
2. 오늘 당신의 교회는 불신자 인구의 폭발, 이방종교의 도전, 과학물질문명의 도전, 신앙의 불확실성이라는 마지막 시대에 힘찬 추수를 할 수 있는 교회로 준비되어 있는가?
전통교회들은 이 질문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신약시대 교회가 오늘날 이 땅에 존재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을까? 그렇다. 바로 그 교회가 셀교회이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그리고 엄청난 추수의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더 힘 있게 일어날 것이다. 셀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제한 없이 받아들인다. 또한 셀 이외에는 마지막 때 엄청난 추수를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이나 도구가 없다는 확신 때문에 우리는 셀교회로 나아간다. (마9:37~38, 행20:20).
3. 제2의 종교개혁 :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 부름 받은 사역자이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예배의 갱신과 함께 만인제사장직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벧전2:9, 계 1:6). (1) 만인제사장직 이란 모든 성도는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2)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역자라는 것이다.
셀교회는 모든 성도가 사역자라는 성경적인 확신 위에 모든 성도를 사역자로 만드는 확실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1) 첫 번째 종교개혁이 사제들의 손 안에만 머물던 성경을 모든 성도들에게 돌려준 운동이었다면, (2) 두 번째 종교개혁은 사제들 안에만 머물던 사역을 모든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될 것이다. -William A. Beckham 「제2의 종교개혁」중에서-
4.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점점 깊은 소외감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간다. (IN)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 또한 저마다 깊은 관계의 갈증, 양질의 삶의 질을 추구함, 뚜렷한 삶의 방향성에 대한 갈망, 구체적으로 신앙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그 능력을 보고자 하는 욕구들로 가득 차있다. (죠지 바너). 셀교회는 바로 이러한 현대인의 다양한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5. 셀교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뚜렷한 목표가 있다. (OUT)
그것은 사탄에게 빼앗긴 가족, 즉 불신자를 건져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셀교회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불신자 전도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함에서 벗어나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셀 목회에서 전도는 개인이 홀로 영적 전투장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전도가 아니라 셀 가족이 함께 전도하는 공동체 전도이다. 개인전도가 낚시 전도라면 셀 전도는 그물 전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생활 속에서 만나게 해주시는 사람들을 된 영적인 가족, 즉 천국 귀빈 (VIP)로 삼고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 셀 모임이 있을 때마다 VIP List를 빈 방석에 반드시 올려놓고, 서로 중보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성령님이 인도하는 적절한 시기에 그들을 셀로 초대하여 그들도 우리의 가족이 되도록 돕게 된다. 이러한 셀을 통한 전도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라는 확신이 셀 교회에 있다.
건강한 목회는 균형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라는 분명한 초점이 있다. - 빌 하이블스-
6. 셀교회는 영혼 추수를 통하여 번식과 교회 성장을 가져온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유래 없는 영혼의 위대한 추수기의 한 가운데 살고 있다.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고 있으며 더 많은 교회들이 번식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년전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엄청난 추수를 하는 교회들을 보면, 강조하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셀그룹이다. 조엘 코미스키는 셀교회의 전문가인데, 그는 "셀그룹 폭발"이라는 책을 썼다. 대충대충 쓴 것이 아니고 수백 시간과 수천 달러를 들여서 가장 부흥하는 셀 교회들을 방문하여 그 교회 담임 목사와 인터뷰를 하고 그 교회들의 생활에 참여하였으며, 거기서 발견한 것들을 기록하였다.
그는 "교회가 성장하고 싶다면 성장하는 교회들로부터 배우라!" 미국의 베다니 세계기도센터, 에콰도르 기독교센터, 엘살바도르의 엘림교회, 싱카폴의 FCBC 교회, 콜롬비아의 MCI교회, 온두라스의 사랑의 교회, 페루의 생수교회, 한국의 여의도순복음교회 등은 셀교회로서 세계에서 가장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이다.
로렌스콩 목사는 "우리교회는 셀 사역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일들, 전도, 훈련, 교육, 제자훈련, 기도, 예배 등이 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주일 예배는 공동의 축하예배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셀이란 개방적이고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그룹이다. 셀그룹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매주 마다 모인다. 셀그룹이 목표는 복음전도와 결신을 통하여 그들이 자라나서 번식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셀은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조직체의 최소 단위이다. 한 방울의 피 속에는 약 3억 개의 적혈구가 있다. 하나하나의 셀이 모여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셀 모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7. 셀교회는 교회 공동체를 회복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3년 동안 사시면서 사랑과 수용의 생활 방식을 몸소 보여주셨다. 12 제자는 공동체 안에서 숨기는 마음, 이기주의, 무시, 질투 등을 결코 숨길 수 없었다. 서로 드러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우선 서열에 서고자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여전히 사랑하시었다. 진정한 공동체는 타인의 결점을 너그러이 보아 넘기면서 오히려 잠재적인 가능성을 본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들은 경쟁적인 생활 방식을 버리고 서로 섬기고자 하는 자가 큰 자가 됨을 알았다. 이제 성령을 받으므로 이들의 공동체는 소속감이 분명하며 자신들의 명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형성되었다. 뚜렷한 목표 없는 공동체는 머지않아 갈등이 생기며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음의 고향이라는 저서에서 부르노 베틀하임은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가 그 목표를 외부로 지향할 경우에만 번성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 공동체가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아 깊이 매진함으로써 발생한 부산물이라면 존립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많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공동체를 통하여 몸소 보여주셨을 뿐이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거의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자리에 들어가셨다. 오늘날 제자 훈련을 보면 자료에 의존하며 자료와 교재로 공동체를 묶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며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될 수가 없다. 제자들이 기도를 배우고자 할 때 주님은 간단히 주기도문에 대하여 말씀하시었다. 기도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포착되는 것이다.
셀교회 형태에서는 어떤 성도가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즉각 대처할 수가 있으나 기존교회에서는 어떤 교재나 목사님의 설교를 기다려야한다. M.Scoot Peak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닐 뿐더러 심지어 하나의 작은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도 아니다. 교회는 먼저 공동체가 된 연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 된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사탄과의 전쟁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승리하기위해서는 섬기는 자로 서야만 한다. 교회의 사명은 갈등과 영적 전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 내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셀의 어려움을 서로 해결하여 승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 아비잔시에 대형 셀교회인 요푸곤에서 부활절 대형집회를 할 때 악한 영에 붙잡힌 사람들이 예배 중에 발작하며 난리가 났다. 전부 흰 눈동자만 보일 정도였다. 악한 영의 발작이다. 이때 소수의 훈련된 성도들이 무리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이들을 옮기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므로 80%가 구원을 받았다. 다음날 온전한 정신으로 이들은 나타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이처럼 영적 싸움에 동참해야한다.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영적인 싸움을 통해서만 간음한 생명을 치유하고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회복하며 질병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자유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1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과 등지지 않되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기도하시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공동체 생활을 할 때 이들은 설교를 듣지 아니하였다.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일정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서로 소유했을 뿐이다. 열흘 동안 지내면서 서로 친밀감이 발전되면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서로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로가 받은 주님의 진리에 대하여, 느낀 점에 대하여 나누기를 시작하였다. 서로 나누며 서로 기도하며 하나가 되어갈 때 성령이 임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위해 음식을 가져오며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섬기며 서로의 가정의 문제를 도와주며 섬기었다.
다락방에서 주된 관심은 언제나 서로 함께하는 삶이었다. 우리는 이제 성령과 동행하며 교제하며 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도행전 교회를 보면 이들은 먼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에 힘을 썼으며, 떡을 떼고, 기도하며, 한 가정에서 한 가정으로 옮겨 다니며, 영적 공동체를 더욱 더 견고히 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힘껏 전하였다.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소유를 나누어주므로 핍절한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생활은 셀모임의 공동체이었고 기적행위들은 이러한 공동체들이 예수님께서 안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의 가정 안팎에서 살았고 참된 신앙의 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서로의 관심을 가지며 서로의 아픔과 도움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며 서로를 세워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셀인 것이다. 셀그룹이 되어갈 때 모든 조직들은 필요하지도 않거나 효과적이지도 아니한 것이다.
Jean Vanier은 말하기를 “공동체는 돌격대나 특공대 또는 영웅들의 집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고 축하하며 함께 일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공동체는 사람들이 너무나 흔히 무시하거나 서로 싸우는 물질적인 세상에서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 세상을 등지는 사회가 아니요, 자신의 피난처도 아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자유를 향하여 성장하도록 돕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8. 현대인들에게 교회를 영적인 집으로 되돌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상영된 이정향 감독의 우리영화 ‘집으로~!’가 사백 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방화사상 공전의 히트작이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영혼의 근원인 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은 우리의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의 초상화이며, 할머니의 마음으로 현대인의 잃어버린 고향을 회복시키는 꿈의 마당입니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 곧 가족이라고 증언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려진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에 여전히 성실하면서 교회를 집으로 회복하는 유일한 대안은 셀목회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주일의 예배만을 유일한 교회의 마당으로 고집하는 한 현대인의 영혼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종래의 전통적인 구역예배가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대부분의 구역예배가 주일예배의 복사판이 되고 있는 한 거기에 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투명하게 열린 대화, 서로의 영혼을 진하게 책임지는 돌봄이 있기 위해서는 단순한 예배 모임이나 소그룹 모임 이상의 교회이어야 할 필요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 셀교회로서의 셀목회의 긴박한 시대적인 요청이 있다고 믿습니다.
9. 종교개혁의 이상인 만인제사장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가 첫 번째 종교개혁은 사제의 손에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으로 넘겨주었지만, 평신도의 손에 있어야 할 사역(ministry)은 아직도 사제들의 손에만 있다고 진단한 것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넘쳐나는 비판 가운데 어떤 것들은 매우 불공정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의 밑바닥 평신도 정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사역의 기회를 달라!”는 외침으로 들려옵니다. 필자는 이런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 내 평신도 사역 기회의 극대화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본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아무리 그와 같은 기회 창출을 위해 노력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에 이런 딜레마의 해답으로서 필자의 영혼을 두드리며 다가온 환상이 셀목회 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 아무리 평신도 사역이 활성화 되어있어도 일꾼은 20%에 불과하고 80%의 교인들은 여전히 구경꾼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셀교회의 경우에 적어도 80%까지 일꾼을 세울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12명 이내의 인원이 모이는 셀교회 구조 안에서는 구성원들의 은사가 쉽게 관찰되고 은사에 따라 적절하게 일감을 나누어 배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동역자들은 모두 진실로 그들이 제사장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0. 초대교회적 코이노니아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의 허실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결코 완전한 모델 교회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의 교회 못지않은 만만치 않은 대내외적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사도행전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마다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이노니아에 관한 한 초대교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교제라는 낱말로 번역될 수 없는 깊이를 안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실로 진지한 삶의 나눔, 혹은 삶의 참여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벌써 오래 전에 이미 이 코이노니아의 영성을 상실했다라고 지적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스코틀랜드 국교회 내에서 셀교회 운동을 주도한 톰 알렌(Tom Allen)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메마른 교회 안에서 오아시스처럼 물을 내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살아있는 셀들 - 이 밀접한 공동체 그룹들만이 모든 문제와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으로 삶의 처방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참되고 역동적인 공동체의 생활, 즉 신약적 코이노니아를 드러내 보일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그 교회 된 기능을 발휘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속적인 세상에 성공적으로 침투하게 할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교회의 능력은 바로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던 그 역동성에 있었음을 그는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주님의 지상명령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셀은 생명의 기본 단위이며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그런데 셀, 즉 세포의 존재 이유는 성장이 아닌 증식에 있습니다. 세포는 분열을 통해서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셀교회는 일정한 숫자가 되면 반드시 나누어짐을 그 특성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눔의 이유가 전도를 통한 나눔일 때 교회는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포의 존재 이유가 증식인 것처럼 셀교회의 존재 이유도 증식, 곧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고자 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마지막 부탁으로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희를 택한 이유가 너희로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셀 중심 교회에서 셀교회에로의 전환”을 선포한 이래 짧은 기간이지만 ‘이동 성장은 현저히 줄고 ‘회심 성장이 현저하게 증폭됨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 인구의 80%는 교회 밖에서 서성거리는 이때에 우리가 바람직한 교회 상으로 작은 교회, 대교회, 혹은 분립 교회 등의 논쟁을 벌이는 것 그 자체가 필자의 눈으로는 소모적으로 보입니다. 전도자의 진지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일꾼은 절박하게 모자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셀목회는 이런 현실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안이라고 믿어집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셀목회를 추구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 그것은 셀 교회운동이 우리의 목회를 거듭나게 하고, 신약성경적 교회 본질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12. 신약시대의 가정교회의 회복
여기서 가정교회는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는 당시의 교회의 형태가 가정교회였음을 발견합니다. 평신도라는 표현을 썼지만 신약시대는 평신도 개념이 약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라고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직업을 갖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력투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과 지금의 평신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신약 시대에는 뚜렷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성도가 평신도이고 모든 성도가 다 목사였습니다. 바울도 사도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평신도처럼 일하면서 사역을 했습니다.(살전2:9) 빌립은 평신도였지만 침례를 주었습니다.(빌8:39) 이 말은 초대교회는 평신도들이 목사같이 헌신되어 신도들을 맡아서 자기 집에서 함께 모이면서 목회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정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했던 평신도의 좋은 예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천막 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행18:1-3)
이들을 가리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리고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롬16:3-5상) 이 말은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 집에서 이 부부를 지도자로 하는 가정 교회(셀교회, 목장교회)가 모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골4:15에 보면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게 문안하라!” 가정교회가 있었습니다. 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빌레몬1:1-2입니다.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신약교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각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에베소교회 하나, 로마에는 로마교회 하나 그러나 도시마다 집집에서 모이는 수많은 가정교회가 있었습니다.
13. 셀교회를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경험한다.
비전통적 교회로서 교회 안에 있는 셀그룹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가정에서 모여 불신자 들을 향한 전도, 신자들 간의 사랑의 교제, 양육, 그리고 서로간의 돌봄과 사역을 시행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의 교회는 셀그룹을 "그리스도인의 기초공동체" (Basic Christian Community) 로 부른다. 셀그룹들을 지역별로 연합한 모임을 "회중" (congregation)이라 부르며 모든 회중들을 포함시킨 교회 전체 모임을 "축하 예배" (celebration)라 부른다. "셀교회"와 "셀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본질상 그 성격이 다르다. "셀교회"의 경우 교회의 모든 활동, 조직, 자원, 프로그램 등이 셀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며 사실상 셀그룹 자체가 "교회 속의 교회들"(Ecclesiae in ecclesia)이며 셀리더는 셀에서 목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셀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주일학교, 남, 여전도회, 성가대, 제자훈련, 성경공부, 구역예배 등이 사실상 셀그룹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그룹들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주일 낮 예배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 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본질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14. 셀교회는 현대 교회가 부딪힌 문제점의 돌파구이다.
셀교회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이중구조라 할 수 있다.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전체로 모일 때는 수천, 수만 명까지 한꺼번에 모였으나 동시에 그들은 작은 셀그룹으로 나뉘어져 가정에서 모였던 이중구조를 가졌듯이 셀그룹을 기본으로 하여 대부분의 활동이 거기에서 이루어지지만 회중 또는 축하예배의 형식으로 전체가 하나로 모이는 구조를 가진다.
한국교회는 교회 역사상 유례없는 교회성장을 이루어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지 100년 만에 1,000만이 넘는 성도, 4만여 개의 교회, 그리고 100여 개의 신학교가 이 땅에 세워졌다. 그리고 7,000여명이 넘는 선교사를 오대양 육대주에 타 문화권 선교사로 파송하는 대과업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으며 교회의 성장이 불신자들의 회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이동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각 교회는 물질주의, 권위주의, 성공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교회 성장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바로 알고 오늘날의 한국적인 상황 가운데 신약적인 교회원리를 잘 적용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교회의 모델을 교회사에서 찾지 않고 신약교회에서 모델을 찾아 현대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발전시킨 셀교회 운동에 관하여 한국교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셀교회 운동은 랄프 네이버가 창립한 국제 터치 셀 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전 세계의 대표적인 셀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랄프 네이버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터치사역의 창시자인 랄프 네이버는 미국교회의 현실 - 교회성장의 둔화와 주일학교의 영향력 쇠퇴,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훈련에 치중한 나머지 교회의 관심이 불신자로부터 신자에게 옮겨감 - 을 보면서 지금의 전통적인 교회라는 가죽부대를 가지고는 세계복음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교회라는 가죽부대를 새롭게 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가 전 세계를 여행하며 발견한 사실은 성령께서 전 세계적으로 부대를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각 곳에서 셀교회들 간의 상호 연관성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새로운 교회모델들을 보면서 그는 20여 년 동안 전 세계 셀교회들을 방문하면서 1990년에 출간한 셀교회 지침서라는 책에서 현대 셀교회의 모든 흐름과 내용을 교과서적으로 잘 정리하였다. 이 책이 목회자들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랄프 네이버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고 도움을 입은 목회자들이 셀교회들을 발전시켜 놀라운 셀교회들의 성장이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교회는 싱가폴에 있는 신앙 공동체 침례교회인데 불과 10년 만에 1,000여 개의 셀과 12,000명의 교회로 급성장했고 미국에 있는 베다니 교회는 셀교회로 전환한지 2년 반만에 800개의 셀과 10,000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1990년에 남미 보고타 국제 은사교회는 70개의 셀그룹에서 8년 반 만에 24,000개 셀로 폭발했다. 금년 말까지 5만개의 50만 성도를 예상하고 있다.
1990년대에 랄프 네이버가 전세계 여러 셀교회에서 직접 컨설팅 하면서 경험하고 배운 모든 노하우의 결정체인 Advanced Cell Training (셀교회 지도자 훈련과정)의 과정을 국제 터치본부에서 개발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이 과정을 이수한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교회를 셀교회로 성공적으로 전환하였다. 터치코리아에서도 이 과정을 개설하여 진행하고 있다. 국제터치본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싱가포르, 홍콩,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 이어 한국에 사역본부를 설립했다.
터치코리아 (Touch Korea) 는 랄프 네이버가 창립한 국제 터치 셀사역 한국 본부이다. 터치코리아는 미국 최대 셀교회인 베다니 교회와 세계 최대 셀 교회인 콜럼비아의 ICM교회(G-12 원리로 24,000 셀그룹)와 네트워크를 가지고 공동사역을 하고 있다.
15. 셀교회 모델은 신약성서 교회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의 셀교회들은 신약성서에서 교회의 모델을 찾아 구체화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셀교회 모델은 신약성서 교회 모델과 그 구조면에서 동일하다. 주일학교, 남, 여전도회, 성가대 등 다양하고 복잡한 교회구조나 프로그램보다는 단순하고 거의 단일화된 교회 구조로 말미암아 신약교회들은 사실상 역사상 어느 시대의 교회들보다 강력한 복음의 전파와 교인들의 삶의 철저한 헌신을 이룰 수 있었다. 혹자는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 구조는 보다 다양화되고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셀그룹을 중심으로 단순화된 교회 구조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에 좌우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적 상황을 뛰어넘는 보편적 원리라 믿어진다.
16. 셀교회 모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기체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표현은 단순히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실제로 생명체이며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기체적인 신앙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교회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는 그 교회 속의 교인들 간의 강력하고도 밀착된 교제의 모습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들은 서로의 삶에 관여할 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지는 관계로 그 교제의 질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형제들이 서로의 필요를 공급하며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과제라 믿어진다.
셀교회 안에서는 실질적인 사랑의 돌봄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가족들이 서로간의 삶에 책임을 지고 피차간에 가족으로서 돌볼 수 있으려면 그 숫자가 적절한 수준이어야 하는데 이 수준은 소그룹일 수밖에 없다. 수백 명, 수천 명이 한데 어우러져 각자의 삶을 서로 돌보며 책임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전체 교회를 8~12명의 셀로 나누고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서로 세워 주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랑의 돌봄과 서로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
17. 오늘날의 사회가 소그룹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보다 복잡하고 다양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비인간화 문제와 서로에 대한 소외 현상은 보다 심각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만남과 사랑의 교제를 크게 결여하는 현상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 사회의 엄청난 문제일 것으로 예상된다. 개인주의도 그 극을 향해 치달을 것이라 믿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다운 인격적 만남과 어우러짐을 절실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인격적 사랑과 만남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는 마땅히 셀그룹 형태로 변화되어야 하며 또 그러한 변화만이 다음 세대의 인간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교회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18. 셀교회 모델에서 셀은 복음전도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셀그룹은 교회가 위치한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사회 전역에 걸쳐 위치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셀그룹 그 자체는 복음을 위한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 배치된 지휘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아파트, 직장, 이웃 등 어디에나 셀그룹들이 위치하여 주위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셀그룹은 강력한 복음전파의 수단이 된다는 말이다. 불신자들이 교회로 나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셀그룹을 방문하거나 참석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셀모임을 할 때마다 불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적극적으로 셀 모임에 초대한다. 각 셀 멤버들의 삶의 영향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의 유형을 분석하고 그들에게 복음 전할 전략을 세운다.
한 셀 그룹은 6~12명으로 구성되며 셀 그룹을 돌보며 인도하는 책임자는 셀 리더(shepherd)이다. 이러한 셀 그룹 다섯 개는 한 명의 지역장(zone servant, 또는 zone supervisor)의 돌봄과 관리 책임 하에 있다. 다섯 명의 지역장은 한명의 지역 목사(zone pastor)의 돌봄과 관리 책임 하에 있게 된다. 그리고 지역 목사들의 모임이 목회자 팀(pastoral team)이며 담임목사(senior pastor)는 이 목회자 팀을 이끌어 가는 책임을 지닌다.
* (예) 담임목사 ---> 교구목사 ---> 지역장 ---> 구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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