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6,25, 60 주년을 맞이하며!
오늘이 2010년 6월 25일 6,25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누구보다도 6,25 참
전 용사인 나는 미국에서 6,25, 60주년을 맞이하니 무엇 보다 조국의 안보가 새삼스럽게 염려가 되며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5,25의 진실을 전해 줄 의무가 있음을 깊이 느끼면서 60년 전의 6,25의 그 날을 되 삭여 본다. 내가 겪었던 6,25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 때 서울에서 우리 형님(고 김 영국 권사)과 같이 서울 중구 화원시장에 있는 목욕탕에서 낮에는 일하며 저녁에는 광화문에 있는 동아일보사에서 신문을 받아 가지고 서울역을 뛰면서 “내일 아침 동아 일보!” 외치면서 용산역 까지 달리며 신문 파리를 하였으며 목욕탕으로 돌아와 야간 근무를 하면서 고학을 하던 중 6월 23일 식량을 가지러 고향 연백으로 내려가 부모님으로부터 식량을 받아 가지고 6월 25일 오전 10시 기차를 타기위해 홍연 역으로 나가서 기차표를 끊어 가지고 역 홈으로 나가 해주에서 오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10시가 지나도 기차가 오지를 않아 어떻게 된 것인가?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역장이 마이크를 대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인민군이 전면전을 일으키어 남침을 감행하고 있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지 않는가? 그 때 나는 어떻게 하나 아연 실색이었으며 쌀 배낭을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새 맛을 ( 우리 동리에서 3마장 거리) 지나서 카브를 돌아 서니 국군이 M1소총과 박격포를 어깨에 메고 배낭들을 짊어지고 후퇴를 하고 있었다. 우리 동리 가무라 지는 (甘 村 洞 8,15 해방 후 38선 직경이며 38선을 경계하는 국군이 치악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6,25전쟁 발 발시 까지 수시로 지역 분쟁이 잦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6,25에 대하여 친히 목격한자로써 6,25에 대하여 젊은 세대들에게 간절히 전하며 6,25는 분명히 북한의 남침이었음을 증거 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6,25에 대하여 잘 기억하기를 바라며 오늘에도 호시 탐탐히 적화 통일을 획책하고 있는 북한에 대하여 경각심을 경고 하는 바이다. 우리 동리의 많은 사람들이 개나리 봇 짐 들을 지고 우마차에 짐들을 가득히 싫고 피난길을 나가는데 어린이들은 부모님들이 손을 잡고 행 길이 메여지라 하고 나가고 있지 않는가?.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세 동생들을 ( 고 영모 동생과 이북에 있는 영필이(73세)와 영운이 막내 동생( 71세)데리고 피난길을 떠나 해상 면으로 나가 병난도 해변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는데 사람들이 인산인해라 배를 탈수가 없고 배를 타는 사람들은 군경과 그의 가족들이 우선이었다. 배를 서로 타려고 바다로 뛰어 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먼저 탄 사람들이 배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떠 밀어 익사하는 장면은 목 불 견이었으며 그야 말로 아 수라장이었다. 나와 우리 가족 6명은(어머니와 세 동생과 나까지) 배 타는 것을 포기하고 친척 아주머니 댁을 찾아가 하루 밤을 자고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 마리 국민 학교 마당에 인민군1개 대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저들은 의기양양하여 인민군의 노래들을 부르면서 승리에 만끽하는 모습들이었다. 그 때 내 나이가 20세이었다. 순간적으로 의분이 치사 오르며 두 주먹을 쥐면서 저들 북괴군대가 남침을 감행 하였구나? 하는 적새심이 떠오르면서 1년 전에 개성 송학 산에서 적의 도치카를 공격한 육탄 10용사의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라 만일 나에게 수류탄이 있다면 저들에게 투척을 하고 육탄 10용사와 같이 산화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해방된 기쁨을 금치 못하면서 해방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님과 고당 조만식 장로님과 남강 이승훈 장로님과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해방된 조국의 앞날을 위하여 헌신 봉사 할 것을 다짐 하면서 믿지 않을 때이지만 형님과 같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공부를 하였다. 우리 형님이 먼저 서울에 올라가 성북 중학교에 다니면서 나도 형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고학을 하게 되었다.당시는 9월 학기가 개학이라 중학교 입학을 위하여 낮에는 일하며 저녁에는 신문 파리를 하고 밤에도 목욕탕에서 일을 하였다. 나는 그 때 식량을 가지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6,25을 만났으며 우리 형님은 서울에서 6.25를 맞으면서 적의 탱크 포화에 오른팔에 부상을 당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북한의 김일성 ( 본명은 김 형주)은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을 위하여 탱크와 야포와 비행기 등을 지원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T43 탱크 242대를 앞세워 남침을 감행하였다. 오늘 날 까지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6,25는 북침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남한의 전교조 선생들이 철부지 학생들에게 북한의 선전을 그대고 복습하여 중,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알고 있으며 친북 세력들 중에 강 정구 교수나 한 상열 기장 목사 같은 사람들은 6,25 전쟁은 해방과 통일전쟁이었다고 이적 행위를 하고 있어 6,25 참전 용사로써 분개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나는 9,28 수복 시 까지 숨어 지내면서( 집 나 까리 속과 들에 땅 굴을 파고 ) 라디오로 전쟁 소식을 들으면서 지내든 유엔군의 인천 상육과 9,28 서울 수복 때에 나와 당시 청방에 (후에 국민 방위군) 입대하여 북한에 들어가 선무 공작을 하며 청소년들에게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를 가르치기도 했다. 유엔군의 승승 장군으로 북 진로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앞 록 강 까지 이르고 북한을 거의 점령 하여 통일을 목전에 이르렀을 때에 그해 10월에 중공군 100만 대군대가 김일성을 지원하여 참전함으로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중국의 단동과 신의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속이 전쟁을 종결하려고 했으나 당시 트 루만 대통령이 영국의 처칠 수상이 그렇게 되면 소련의 참전과 제3차 대전이 발발 할 것이고 확전을 반대하는 건의를 하여 이를 받아 드려 매가던 원수를 해임하고 릿 취 에이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교체함으로 유엔군이 1,4 후퇴를 하게 되어 다시 나부여대하고 북한의 500먼 동포와 남한의 수백만이 다시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으며 나도 그때 같이 후퇴하여 해 월면 병 나 도에서 배를 타고 김포 반도에 도착하니 터키 군대가 우리들을 검문하여 조사를 받고 3일간을 걸어서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교실에 투숙하여 한 주간을 주먹밥을 먹으면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피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치 지붕위에 까지 올라타고 서로 부둥켜 앉고 (떨어 저 죽지 않기 위해) 그 추운 눈보라가 치는 겨울의 밤공기를 마시면서 입과 코에는 고드름이 얼어붙어 입으로 호호 하여 녹이면서 이틀을 달려 대구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차하고 우리 일행은 경산역에서 내려 어느 사과 밭에 들어가 사과 농장 창고에 들어가 얼은 사과를 먹으면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시 경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삼랑진역을 지나 진주역에 나려 사천까지 도보로 걸어서 사천 국민 학교에 피난민 숙소에 국민 방위군 제 55교육대에 배속되어 그 추운 겨울을 지내는데 당시 국민 방위군이 피난민들 중에서 청장년들을 강제로 입소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하였다. 나는 조교로 근무 했으며 그 때 군대훈련을 받는 청장년들은 먹을 것이 별로 없고 찬마루 바닥에서 담요도 없이 마가니를 뜯어서 덮고 자는데 너무 추어서 감기와 열병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나갔다. 그런가 하면 국민 방위군의 부정 사건으로 김 윤군 사령관이 해임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으며 국민 방위군이 해산되어 51년 3월에 나와 우리 동리 사람들은 트럭을 타고 경상남도 사천에서 전북으로 오는데 99구비를 돌아서 전주시에 이르러 전주의 유명한 비빔밥을 사먹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천안에 작은 누님 댁에 몇 일을 지낸 후 다시 걸어서 경기도 용인 역에 도착하여 피난민 수용소에서 몇 일을 지낸 후 다시 걸어서 강화도 교동에 이르니 당시 1,4 후퇴 시 낙오 되었던 사람들이 교동으로 건너와 을 지 병단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백 적지에 드나들면서 적의 진지와 인민군대를 기습 작전으로 적군의 후방 부대를 교란하게 하여 적들의 전의를 격하시키면서 인민군대들을 생포하며 피난민들을 돕는 일들을 하였다. 당시 교동 인 사리에 을 지 병단 21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황 금천 치안대장이 연대장으로 총 지휘를 하고 있었다. 사령부는 하 개산 밑에 읍 내리에 있었다. 내가 가보니 박 용 배 친구와 한 명수와 내 동생 영모와 사촌 동생 영태가 을 지 병단에 소속되어 정문 보초를 서고 있지 않는가? 반갑게 만나 그간에 지내온 이야기를 하며 오래간만에 동리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며 1,4 후퇴 시 못 나와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내가 이렇게 살아서 만나니 너무나 감격하여 포 응을 하여 얼굴을 맞대고 두 손으로 볼을 쓰다듬으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우리 일행은 살기 위해 저들과 같이 을 지 병단에 입대를 하여 강한 유격 훈련을 받아 용감한 유격 군대가 되었다. 나는 그 후에 21연대 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치되어 적지에 수 없이 침투 작전에 출동을 하였으며 한 번은 배를 타고 적지에 상육 작전에 나갔는데 쓸 물에 배가 펄에 걸려 적의 집중 포화를 받기도 했다.1952년부터 을 지 병 단이 미 8240 부대로 편입되어 (일명 ,K, A, L, O) 미 8군의 작전 지휘를 받으며 더욱 치열한 적지에 침투 작전에 임하여 많은 유격대가 전투에 나가 죽기도 하고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 때는 내는 예수를 안 믿을 때었다. 그래서 술과 담배를 얼마나 많이 먹고 피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한번 적지 나가면 십중팔구 죽기 아니면 적에게 생포되어 비참한 죽음을 당함으로 모두가 술에 만취가 되도록 마시고 해병대 보다 더 강한 군대였다. 그래서 어느 누구가 우리들을 건드리거나 만류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한번은 작전 명령을 받았는데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어 추체를 가누지 못하고 있어 소대원들을 인솔하여 중대 본부에 가니 이 형극 중대장이 나를 엎드려 뻗 처 하더니 고무 호수를 가지고 패는데 내가 80번가지는 세 었 는대 그 후 부터는 정신을 잃고 얼마나 맞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작전에 못 나고 중대장이 해 상면 전투에 나갔다가 작전을 마치고 후퇴를 하는데 우리 아군 기관총에 맞아 전사하여 장례식을 취하였는데 중대장에 대하여 미안한 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당시 지 석리 감리 교회에 한 은우 전도사님이 나에게 김 선생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여 내가 예수를 믿으니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아나 무인이여 얼마나 무식한 사람이었던가를 회개 하였다.) 그러던 중 1953년 3월 21일 새벽에 21연대가 육, 해 공군의 엄호 사격을 받으며 연백 도 마리 봉화감이 상육 작전에 출동하여 오전 중에 육박전과 수류탄을 적 고지 안에 투척하여 고지 탈환을 하여 부대가 사계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때 전투에서 나의 연락병(15세)적의 총탄에 이마를 적중하여 전사 했으며 우리 옆집에 살던 박 종 근 형님이 부상을 입어 그를 업어다가 아군 후송 선에 태워 보내고 나는 다시 고지로 올라가 적을 경계하고 있는데 적의 인민군대가 역습으로 우리들을 포위 작전으로 주력부대가 지그재그로 후퇴를 하여 배들을 다 타고 나갔으며 1개 소대 병력이 낙오가 되어 해변 가에 까지 나가 펄에 바싹 엎드려 배수진을 치고 있는데 인민군대가 우리들을 생포 하려고 아 시바 총을 우리들을 향하여 다가오면서 손들어 하며 생포하려고 할 때 우리들 중에 7,8명이 군복을 벗어 바다에 던지고 그 때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다라고 (임사 호천(O- MY GOD? ) 부르짖었다..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죽어 가는 군인이 부르짖는 말이 있는데 (1) 하나님 살려 주세요? (2) 어머니 하고 부르짖으며 (3) 부상당하여 갈증이 심함으로 “물” 하고 죽는다고 한다.) M1 소총을 분해하여 바다에 던지고 팬티만 입고 수류탄 핀을 빼들고 일대 일로 죽으려고 적을 향하여 투 촉을 학고 바다로 뛰어 들어 적의 유 효사 거리를 피하여 바다로 수영을 하여 나가니 아군 구조선이 우리들을 보고 다가와 3명이 구조되고 4명은 바다에 빠져 죽고 나머지 15,6명은 인민군대에 생포되어 그 후 저들의 생사는 영원히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건대 저들은 다 체포되어 가진 고문과 박해를 당하고 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왜냐 하면 당시 켈로 부대는 저들에게는 가장 악질적인 반동분자요 거의가 총살 하였을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어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종을 삼으려고 살려 주심으로 믿고 감사를 하는 바이다.( 사 43:1-3) 그 후부터 예수를 믿고 철저히 회개하고 ( 많은 눈물을 흘림) 지 석리 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주일 학교에서 서기로 헌신 봉사하면서 새벽 기도에 열심히 나가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죄 사 함을 받고 중생함으로 (요 3:1-16)새 사람이 되었으며 (고후 5: 17) 지금 까지 그렇게 많이 먹던 술과 담배를 다 끊고 신앙생활에 전염하였으며 1953년 7월 28일 정전 휴전 협정으로 우리 8240부대가 현역으로 편입되어 당시 나은 소대 선임 하사이었는데 현역으로 편입 할 때 육군하사와 군번 0772555번을 받아 10월에 엘 리스트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하여 밤에 군용 열차를 타고 춘천역에 하차하여 군용 제무시 트럭을 타고 진 분령을 고개를 넘어 15사단에 배치되어 그 이튼 날 21연대 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치되어 고성 남강 850 고지OP 주지앙선 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6,25 이후 3년간의 피 눈물 나는 전투와 8240부대(KALO) 유격대에서 육군으로 편입되어 1958년 4월 15일 육군 만기 제대 시 까지 만 8년간 군대생활을 하였다. 제대 후 61년 도에 서울 신학 대학에 입학하여 63년 12월 13일에 졸업하고 61년 12월 15일에 충남 직산교회에 부임하여 71년 6월 25일까지 만 10년의 농촌 목회와 71년 7월 26일에 수원 북부 교회에 부임하여 개척 교회를 하여 2001년 12월 13일에 북부 교회에서 만 30년 6개월과 직산 교회에서 10년과 합하여 만 40년 6개울의 목회 사역을 마치고 2001년 12얼 13일에 수원 북부 교회 원로 목사로 추대되어 9 그간에 나의 계속 되는 공부는 총신과(58회 63년도 졸업과 연합 신학대학원에서 선교 학 석사( M, A)와 연세 대학원에서 임상 목회 1년 수료와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연수와 페트라 성경 언어 학원에서 히브이어와 헬라어 2년 연수와 1998년 6월에 미국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R, T, S,에서 .D;min ( 목회학 박사와 논문 박사임)를 하였으며 수원신학교에서 이사장 9년과 신학교 건축 위원장으로 새 건축을 하였으며 교수와 은투티후에 명예 교수로 또는 수원노회 노 회장 2회와 기독교 연합 회장으로써 1984년 8월에 한, 미 수교 백 주년 경기지구 복음화 대회와 1985년 8월에 기독교 백주년 대회에 경기도 준비 위원장으로 대화를 성황리에 마치었으며 2001년 12월 13일에 원로 목사로 추대 되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지난 60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 6,25 60주년을 미국 워 싱 톤 버지니아에서 맞이하게 되니 그 간의 에벤 에설의 하나님께 ( 삼상 7: 12)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세세토록 돌리며( 계 4: 9-11) 6,25 60주년을 맞이하며 감회를 금치 못 하면서 6,25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내가 겪었던 6,25의 참상을 전하면서 휴전 이후 1,21 김 신조 사건과 칼 기 사건과 아 웅 산 사건과 동해안 침투 사건과 2009년 서해안 연평도 해상 전투와 2010년 3월 26일의 서해안 천안 함 사건을 감행한 북한이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며 남한의 중상모략이라고 하며 이에 뇌화 부동하는 친북세력들의 6,25 전쟁은 해방 전쟁과 통일 전쟁이라고 하는 종복 자들과 전교조의 좌편향 교육을 받은 386 세대와 486 세대들과 지금 자라나는 중, 고등부 학생들과 대학생들에 엄히 경고함은 6,25는 분명한 북한의 남치이었으며 그로 인해 천만 아신 가족이 생기고 200만의 전상자와 수십만의 과부와 고아들이 생기었으며 삼천리 금 수 강산은 초토화가 되었으며 북한의 2400만 동포는 지금도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김 정 일 일당 독재에 가진 고통과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으며 북한의 각종의 만행에 의해 남북의 평화 통일이 이룩되지 못하고 핵폭탄을 만들어 남한과 동북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 할 때 사랑하는 젊은 세대들이여 일대 각성하라. 제 2의 6,25가 발생하지 않도록 온 국민이 일치단결 하여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여 조국의 남북의 평화 통일과 국가 백년 대계를 튼튼히 세워 우리 후손 만대의 영원한 번영과 행복을 길이길이 누리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나아가 동북아와 세계 평화의 일익을 감당 하는 우리 대한민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불연이면 제2의 월남화로 수천만 명이 학살과 그대들의 앞날의 위험천만한 불행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 하면서 이 글을 마치는 바이다.
주후 2010년 6월 25일 0시 15분에
워 싱 톤 버지니아 South Riding 탄운 하우스에서
6,25 참전 용사이며 원로인 김 영 상 목사 씀
'선 교 > 아프리카선교후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회 정기총회 기념사진 (0) | 2010.01.13 |
---|---|
이근석목사 구순(2) (0) | 2008.11.24 |
이근석목사 구순(1) (0) | 2008.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