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예배회복
여주봉목사
요한복음 6장 57절입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지난 주에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뜻이 우리안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유업이 우리 가운데 주어질 수있다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인데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셨고 그 삶을 전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펴보되 예수님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내용은 십자가 복음 증보판 1단원에 있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는 편집해주세요. 제가 NWS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동안 한 분이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고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저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주신 감동을 편지를 썼어요. 전해주었어요.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기도하게 하신다고 하면서 그중에 하나가 저에게 하나님 말씀을 다시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셨다고해요. 읽으면서 점검해보고 있었는데 이 말이 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왜냐하면 NWS에서 말씀을 전하고 왔고 주일에도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오늘 아침 1부 예배 시간에 경배와 찬양을 하는데 또렷하게 비추셨어요.
하나님중심적인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비추어진 것이 그것입입니다 이사야 후반부에 회복과 부흥이 오늘 이 시대에 부어진다고 했어요. 그런데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전하고 나누었는데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그것을 이론적으로만 듣고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그 앞에 서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지 제 모습이 보였어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지금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원래 대로 돌아가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1.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신앙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자비로만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인데 예수님이 삶에서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모든 삶을 사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 보면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서 중에 어느 복음서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셨음을 강조하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등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함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것 등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NWS를 가서도 여러 사람이 나누는 것을 들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를 열망하고 있었어요. 여러분 포도나무 교회 나오는 정도면 하나님과 친밀함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중에 한 특징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셨는데 요한복음에 몇 가지 영역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래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도전을 받고 갈망이 있습니다.
1)예수님은 판단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판단하셨습니다.
요5장 30절입니다.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심판 판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의 무게가 무엇이냐면 바로 윗절 26-27절을 보면,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판단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과 능력을 받은 유일한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판단에 있어서 자기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하나님 자원을 의지하셨습니다. 듣는 대로 판단하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듣는 대로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판단은 옳다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이 정확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대로 해요.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사11장을 보면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여기 보면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을 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판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공의라는 말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판단으로 판단하니까 그 판단이 옳다.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하지 않는다고 말한 대로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지식과 작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었냐면 성경이 말하기를 내 뜻과 너희 뜻은 다르고 내 길과 너희 길은 달라서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고 합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찾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길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여기서 악인과 불의한 자는 자기 길과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지혜대로 경험대로 주님을 찾아서는 못 만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길은 여러분의 길과 다릅니다. 하늘에 땅에서 높은 것처럼 높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2장 9절 이하에서는 말합니다.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우리 생각으로 모른다고 합니다. 아이큐 높다고 박사학위를 가졌다고 사회적인 경험이 많다고 해서 모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는 몇 번 듣고 나면 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우리 삶에서 적용할 때는 전혀 그렇게 안합니다.
예를 들면 비전 프로젝트를 우리 생각으로는 모릅니다. 주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시라니까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의중을 발견하시라니까요. 하나님 앞에 나가서 여러분이 들으시라니까요. 뭐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릭조이너의 빛과 어둠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말세지말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를 세우시는데 대적자들이 대적합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탄 말이 성도들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성도들이 하는 말 언어였어요.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뱉은 말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제가 저에게 맡겨준 소명이 그러다 보니 교회를 많이 섬기고 목회자들을 섬기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대적하는 방법이 지금 말씀드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판단하는 말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권리를 부요받았는데도 그분은 스스로 안하셨어요. 저도 많이 배웁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한 것을 금방 깨닫고 회개한 적이 많아요.
2)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셨습니다.
요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의 본체였습니다. 본체니까 그분의 임의대로 전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한 마디로 임의로 하지 않았어요.
요14장 10절입니다.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2장 49절입니다.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NIV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할 것과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까지 내게 보여주셨다고 번역합니다. 말씀의 본체되신 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 시대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는 상관없이 그저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어요. 그들이 좋아하는 축복의 메시지,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어요.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6-18절입니다.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21-22절입니다.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예수님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세요.
3)성령사역을 행하실 때도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원으로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임의로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5:17-19절입니다.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의 무게를 아세요. 요3장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에게 한량없이 부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으신다는 말이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임하셨을 뿐아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그 후에도 한량없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지속적으로 부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능력에 강하게 나타났던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는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나는 아버지가 행한 것을 보고 그것만 행한다. 여러분 이 하나하나의 무게들을 보세요. 얼마나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말하고 있는지를.
3)자기를 세우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만을 의지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우는 것을 철저하게 포기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세상의 방법대로 자신을 스스로 세우라는 사단의 미혹, 주변사람들의 미혹, 군중들의 미혹, 심지어는 동생들의 유혹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요8:50절입니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자신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초막절이 되었을 때 동생들이 말합니다. 명절에 올라가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알 티 킨달 목사님이 요셉이 생애를 가지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면서 마지막으로 빚으시는 과정이 스스로 세우는 것을 다루신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다루심의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때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이 들어왔고 꿈을 꾸었고 해석해준대로 되었습니다. 그때 술맡은 관원장에게 청탁을 합니다. 그런데 2년동안 잊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 앞에 빚어지고 있는데 스스로 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를 드러내야 사람들이 알아주는 시대입니다. 이 말은 자기를 소신껏 표현하지 말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주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세우시도록 잠잠하게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스스로 세우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그렇게 합니다. 개인적인 야망에 기초해서스스로 세우고자 합니다.
제가 이번에 NWS를 인도하면서 여러분의 간증과 소개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열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제로 살고 전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이 한국에 방문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가시는 과정을 말하면서 집시 이야기를 합니다. 집시 중에서는 훌륭한 사람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럽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답니다. 왜냐하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순례자들로 가득합니다. 큰 교회 1년에 수천명씩 등록하고 들어옵니다. 매년 수천명씩 들어옵니다. 또 수천명씩 나갑니다. 그러니까 매년 수천명씩 들어오면 5년 후면 수만명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들어온만큼 또 나가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 정해놓고 교회 순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좋은 교회에 가면 여러분이 변화될 것 같으세요. 소위 세상적으로 말하여 좋은 목사님들 설교 들으면 변할 것 같으세요. 좋은 목사님 설교 듣고 변할 것 같으면 예수님 설교 들은 사람들은 더 변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엄청난 기적들을 직접 보고 경험했고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엄청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도 120명을 빼놓고는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설교 듣는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교회에 속한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기준이 비추어질 때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께 대하여 하듯이 삶을 전환하여 그 길에 동참하고 주님만을 믿음으로 찾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속에 역사하도록 기꺼이 주님께만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영적인 순례를 해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순례자들이 있으면 순례를 중당하시고 교회에 정착하시고 주님을 찾으시라고 권면하세요.
예수님은 자기를 세우는 것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5)예수님은 자기 의를 선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선만을 의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까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아버지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답하십니다. 이 말은 얼핏보기에 자신의 선함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선하심을 부인한다면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히4장 15절에서 말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중에 자기 의를 의지해서 자기 선함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하신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분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의를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자기 의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핵심적인 삶의 한 부분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며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53절부터 보면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예수님이 우리안에 우리가 예수님안에 사는 친밀함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의 한 부분이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우리의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의 공로 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만한 의는 그분의 의요 그분의 거룩함만이 우리의 거룩함이요 그분의 선함만이 우리가 의지할 선이요 그분의 지혜만이 우리가 의지할 지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내 자신의 의가 걸레처럼 버려지고 주님의 의만이 내 의가 되는 삶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한 특징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2.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1부 예배 때 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말씀이 너무나 우리에게 맞설게 느껴졌어요. 골1:15-16절을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천사들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창조된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중심인 인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낯설잖아요. 그뿐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중심적으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하자 하나님이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저들을 구원하셔서 저들에게 살게 하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구원하셨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벧전 2:9
롬 14:7-8
고전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습니다. 옛날에 노예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값주고 사서 해방시켜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값을 주고 사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위해서입니다.
고후5:15절입니다.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너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너희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중에 하나인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릭 웨렌은 1장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고 시작한다면 삶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니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 예수님의 경우에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 8:49-50, 12:28, 13:4 등에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을 자신의 양식 밥으로 아셨습니다.
요4:30, 34절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오해나 대적이나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가 요구되어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아버지의 목적에 삶을 드렸습니다.
요5:16-17절을 볼 때.
그래서 요8장 49절만 해도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50절에서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과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5장 30절을 봅시다.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NIV를 보면 이럽니다. 내 스스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듣는대로만 판단한다. 그런고로 내 판단이 옳다.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입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다.
요8장 29절에서 똑같은 말씀하십니다.
NIV입니다.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와 함께하신다(현재동사입니다). 항상 함께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항상 함께하셨다. 그 이유는 왜냐하면 나는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자원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 때 하나님이 자원이 함께하십니다.
2)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자기 목적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는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을 기회가 있어서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니까?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요 하고 대답하시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혹은 살기 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를 기쁘게 하려 한다. 나는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도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기 목적과 영광을 성취하는 범위내에서만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목적과 영광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 앞에 내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전형적인 우상숭배가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살고. 실제로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4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제가 어떤 분에게 책을 몇권 주었어요. 거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헌신적으로 주의 일에 삶을 드린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헌금만 해도 팁을 주듯이 한답니다.
아시아 선교센타만 해도 한구좌에 100만원 하게 하는 이유는 자기 지교회에 헌금을 하고 그러는 가운데 그렇다고 해도 100원정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본적인 표현에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했어요. 어떤 사람은 그것 하나 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오늘날 자기가 세워놓은 수준 길 세상적인 영화 자기 목표 자기 계획을 조금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확보도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에수님이 그렇게 살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겠어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겠어요.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복음이 확장되었겠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만큼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자기 영광이 내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하나님의 목적 앞에 자기 목적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없는 자로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이유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 우리 영광은 하나님이 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8장 49-5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NIV는 내 영광을 구하는 이가 계시니라 그런데 그분이 심판자시다. 만군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높이면 높일수록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여러분의 영광을 하나님이 추구하십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십자가 복음을 나누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이 말씀을 들었다. 오래전부터 선교회에 왔다 하면서도 우리 삶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삶에서 멀어진 그래서 이론이 되었고 습관적인 문구가 된 것을 볼 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힘을 얻었어요. 여러분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저는 힘을 얻을 것 같아요. 대학청년들만 해도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삶을 드리기 원하고 하나님의 길에 서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삶을 헌신하기를 원하는 저들을 보면서 저들이 지금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삶을 드리면서 신학적으로 무장되고 세상적으로 무장될 때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덮을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이 보여지면서 제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선교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밖에 안되는가 할 때, 그런데 그 날을 바라보면서 다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이길수 목사님과 나누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요한 웨슬레가 그렇게 헌신하고 사역했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은 것을 보고 너무나 낙심했답니다. 그런데 10몇년이 지난 후에 한 사람이 변한 것을 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망을 얻게 되었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된 삶이 아니라 내 목적이 하나님 앞에 내려진 나를 보내신 이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이 시대가 너무나 타락해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3.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삼상 23장 2-3, 삼하 2:1 5:19 등등을 보면,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 30장 같은 경우는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돌아왔는데 자기 가족들과 가축들을 빼앗아 갔고 부하들이 항명하려는 위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하나님 앞에 묻지 않음으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처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입니다.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끌고 오다가 실패합니다. 웃사가 심판받고 죽고 모든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다윗이 화가 났습니다. 분이 터졌지만 나중에 깨닫지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왜냐하면 언약궤는 수레에 메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블레셋의 방법, 세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레위인이 어깨에 메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면서 하는 말이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역대상 15장 13절입니다.
“13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NIV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고 유업이 주어지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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