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100년을 열어간다 (7) ] 2-7 역사적 개관 |
⑥100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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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열매들, 꽃 피우다' 선교의 씨앗, 교회 기틀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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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최초의 한국인 세례식은 만주에서 이뤄졌다. 1872년 만주에서 선교를 시작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1874년 중국인 서기와 함께 조선인들이 집단거주하고 있는 고려문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목적으로, 한국인 선생을 물색했고, 그러다 어학선생을 자청하고 나선 이응찬을 만났다. 로스 목사는 이응찬을 만주 우장으로 데려가 같이 생활하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876년 4월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는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 땅 최초의 교회 설립도 존 로스 선교사와 관련이 깊다. 로스 선교사는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했는데, 당시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조선인 서상륜은 1883년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으로 쪽복음을 들고 들어왔다. 1883년 말 서상륜은 발각을 피해 동생 서경조 가족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솔내)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서상륜이 살던 집이 바로 조선 땅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되었다. 소래교회 신자는 1887년에 300여 명에 달했다.
최초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에 앞서 의료선교사였던 호러스 알렌이 7개월 앞서 입국했지만, 본격적인 선교사 신분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최초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성경번역과 선교 확장, 교육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특별히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 연합체를 만드는 등 조선 장로교의 기틀을 놓는데 앞장섰다.
'1907년, 교회사 큰 족적' 평양대부흥 불씨 타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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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 첫 졸업생도 같은 해 6월 20일 배출됐다. 1901년 새뮤얼 모펫 사택에서 시작한 평양신학교의 첫 열매이자, 최초의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졸업생은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총 7명이었다. 이들은 신학교 입학 전부터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검증된 신앙인들이었으며, 졸업 후에도 조선 복음화의 핵심 일꾼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이들은 같은 해 열린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7년은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된 해이기도 했다. 독노회는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3명, 조선인 장로 36명, 찬성위원 9명 등 총 78명이 모인 가운데 조직됐다. 임원 선거에서는 새뮤얼 모펫 선교사가 노회장에 선출됐고, 방기창이 부노회장으로 선출됐다. 독노회 조직은 또한 조선 선교에 참여했던 4개 장로교 선교회가 하나의 장로교를 설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사적인 총회 조직' 경이적 성장, 총회 조직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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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노회장 레이놀즈 선교사의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는 초대 총회장에 언더우드 선교사, 부총회장에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 부회계 김석창 목사를 각각 선출했다. 선교사들보다 한국인 총대들이 더 많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할 완숙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노회는 경기충청, 남평안, 북평안, 황해, 전라, 경상, 함경 등 총 7개였다. 창립총회에서는 또 외국 타문화권 선교의 출발을 알렸다.
'치욕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 결의 침묵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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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교총회는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회됐다. 총회에는 206명의 총대들이 참석했는데, 일본 무술경찰관들이 교회 안팎을 둘러싸 총회장소는 긴장과 공포 분위기였다. 이윽고 일본 경찰에 의해 회유된 목사들에 의해 각본대로 신사참배 제안, 동의, 재청이 이어졌다. 토의 절차도 없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곧바로 결의를 거치려고,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았다. 약 10명이 “예”라고 대답했고, 나머지 총대들은 침묵을 지켰다. 총회장이 만장일치로 가결된 것을 선포하자, 방위량 선교사가 “아니오”를 외쳤고, 곧바로 일본 형사에 의해 발언이 제지당했다. 이어 그의 사위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합니다”고 발언했고, 이내 경찰에 멱살이 잡혀 끌려 나갔다. 소란 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 하에 총회에 참석한 노회장 23명은 평양신사에서 머리를 숙였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순간이었다.
'기독교장로회의 이탈' 김재준 목사 지지파 나가다
조선신학교는 1946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남부총회에서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의 신학사상에 반기를 든 <51인 사건>으로 불리는 진정서가 제출되면서 일대 파란이 일었다. 진정서를 접수한 총회심사위원회는 김 목사가 성경유오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교수직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비껴갔다. 김 목사 지지파는 신학 문제를 호도한 채 교권과 지방싸움으로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기까지 했다.
결국 1948년 박형룡 박사 중심으로 남산에 신학교를 세워 제35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교단 내에 신학교가 두 개가 된 셈이다. 이후 전쟁 중에 열린 제36회 속회총회에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동시에 취소하고 대구에 신설신학교를 설립키로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52년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는 징계하지 않고 조선신학교 총회직영만 취소하기로 처리했다. 총회 이후 김 목사 지지파가 호헌대회를 열어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의 출현을 가시화 시켰다. 결국 제38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가 계속해서 성경유오설을 주장하고 있다며 목사 면직을 결의하자 김 목사 세력이 1954년 한국신학대학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출범시키며 이탈되어 나갔다.
'예장고신의 이탈' ‘고려신학교 출범’ 불씨 되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남한에는 조선신학교 하나만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1939년 교육정지를 당한 평양신학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면서 1946년 남부총회에서 교단 직영신학교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하지만 출옥성도인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는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송창근 목사와 김재준 목사가 신학교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부산에서 1946년 고려신학교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무인가 신학교였다. 1948년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고려신학교에 대한 헌의가 상정되자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상관이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고려신학교에 대한 총회의 태도는 강경했다.
1950년 대구에서 열린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와 조선신학교 문제로 비상정회가 선포되고, 이후 한국동란 중인 1951년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가 분열되면서 사실상 고신파가 분립됐다. 소위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10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 조직을 선포하고, 1956년 6개 노회가 조직되어 그 해, 9월 20일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를 발족했다.
'예장통합의 이탈' ‘에큐메니컬’ 교단을 가르다
역사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가장 큰 비극으로 남아있는 예장통합의 이탈은 결론부터 말해 기장이 이탈한 이후 교단 내에 일었던 에큐메니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신학의 흐름에 다소 둔감했던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기독교협의회(WCC)를 놓고 견해가 엇갈렸다. 1954년 미국 에버스턴에서 열린 총회에 참관했던 명신홍 목사와 김현정 목사의 보고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1957년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2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은 계속 참가하고 교회합동에는 반대한다”고 비록 결의는 했지만 이듬해 총회 임원선거에 에큐메니컬 지지자들이 개입했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총회에 분란이 일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는 예상대로 총회개회 전부터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난항이 이어지다가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증경총회장들과 상의하여 정회를 선포했다.
하지만 11월 24일까지 정회키로 했던 결의를 깨고 9월 29일 연동측이 총회를 속개하여 예장통합이 이탈했다. 총회는 예정대로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합동측을 발족했다.
'제1회 목사장로기도회 개최' 영적 각성 총회 대표행사로
제1회 목사장로기도회는 1964년 2월 5~28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렸다.
1964년 9월 서울 성도교회에서 열린 제49회 총회 보고서에는 제1회 전국목사기도회가 총회 임원단과 신학교 이사진 공동주최로 열렸으며, 강사는 박형룡 목사와 박윤선 목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현재와 달리 긴 시간동안 기도회를 진행했다. 또한 집회 기간 중에 총회 현안을 위해 하루나 이틀간 금식하기도 했다. 교역자수양회와 주일학교 교사강습회도 10일 동안 개최할 정도로 예배와 기도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그 이후 1965년에는 제2회 기도회가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렸으며 제3회는 충현교회, 제4회와 제5회는 승동교회와 성도교회에서 각각 열렸다. 1964년부터 2011년 올해까지 48회의 역사를 이어온 목사장로기도회는 총회와 한국교회, 나아가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은혜의 말씀으로 영적필요를 채우는 명실상부한 총회 대표 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초창기 기도회에 비해 현재 목사장로기도회는 순수성이 많이 변질됐다는 우려를 받고 있다. 9월 총회를 염두에 둔 회합이나 몇 십 명에 이르는 예배 순서자, 각종 전시와 홍보부스 등 눈물과 통회 대신 정치성이 눈에 띄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기도회 기간 중에는 은혜로운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하루의 금식과 외출 금지, 각 노회와 지교회의 행사를 일시 중지 또는 연장(기독신문 1967년 2월 25일자)”했다는 초창기 기도회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
'일만교회운동 시작' 적극적 전도운동 활기 얻다
일만교회운동은 제59회 총회에서 결의한 뒤 제60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추진된 사역이다. 이 운동은 1974년 11월 25일 500교회에서 500명의 대표들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지면서 가시화됐다.
전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전도활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시작된 일만교회운동의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성령운동, 선교운동 등의 3가지였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당시 총회 소속 교회는 2300교회였고, 그 이후 총회가 작성한 계획안대로 추진하면 10년간 7000교회가 설립된다는 전망이 나와 일만 교회 달성은 무난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일만교회운동은 특별집회와 병행해 전개했다. 1975년 19개 노회가 특별집회를 개최한 후 일만교회운동은 더욱 활기를 찾았다. 1976년에는 10개 노회가, 1977년에는 13개 노회가 특별집회를 개최했다. 실제로 1978년 5월부터 1979년 4월까지 교세가 11만이 증가해 120만 성도를 넘어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그 후 성장률이 저조해 제78회 총회에서 일만교회운동본부가 재가동됐다.
그 후 개혁교단의 영입으로 일만교회가 달성됐다고 보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 특별위원회로 재구성된 이만교회운동본부가 활약하고 있다.
'비주류측의 이탈' 비주류 이탈 후 결국 사분오열
1979년 3월, 소위 비주류측은 방배동에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고 박아론 교수를 교장으로 추대했다. 1975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60회 총회에서 평양노회 총대권 문제를 제기하며 벌어진 교단의 분열이 사실상 가시화된 셈이었다. 비주류측의 이탈은 박형룡 박사가 총신대를 떠난 후, 세력을 잡으려는 그룹이 제대로 뜻이 관철되지 않아 딴 살림을 차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교단 정치권에서 밀린 비주류측은 교단정화위원회란 이름으로 <총회뉴스>와 <신학교보>를 발행하여 그들의 주장을 홍보하고 교단분열을 끊임없이 획책했다. 거기다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회보>를 발간하여 교단인사의 비리를 폭로하기도 했다.
1979년 대구동부교회에서 열린 제64회 총회는 방배동 신학교를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동 집단에 동조 내지 조장하는 등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자는 해 노회에서 즉각 권징토록 결정했다. 비주류측은 동부교회를 점령하여 총회를 방해하려고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탈해 나갔다. 이후, 자체 분열을 거듭하다가 사분오열 되었다.
'총회회관 건립, 자립교단으로' 개혁주의 교단 역량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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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총회회관 건립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총회센터 건립을 논의하고 여의도에 대지도 구입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건축규제가 까다로워 총회는 총신대학교 앞 부지를 고려하고 연건평 1740평 규모의 센터를 건립할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이곳 역시 여의치 않아 1981년 8월에서야 현재 위치인 삼성동에 560여 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또한 공사를 맡은 건설사가 재정난을 겪으면서 1983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총회는 1981년 10월 25일을 총회회관 건립을 위한 특별헌금주일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총회회관은 전국 교회의 사랑과 교단 지도자들의 헌신을 보여준 협력의 작품이다. 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교유들이 참여하여 자립교단의 성장상을 세계 교회에 앞에 보이며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하며 전승하는 일에 힘을 집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회세계선교회(GMS) 출범' 외환위기에도 선교 역량 강화
1998년 11월 18일 총회세계선교회(Global Mission Society, GMS)가 탄생했다.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의 설립이라 더 의미가 크다. 당시 선교단체마다 선교사 귀환조치를 단행하고 기관마다 기구를 축소시켰다. 그러나 총회는 상비부였던 선교부를 확대시켜 선교회를 조직한 것이다.
총회의 선교역사는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노회를 조직한 신앙의 선배들은 최초로 장립을 받은 목사 7명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를 조직하고 외지전도부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을 중국에 파송하기도 했다. 이후 외지전도부는 1925년 제14회 총회에서 외국전도부로, 1940년 제29회 총회부터는 선교부로 발전되어 오다 1998년 총회세계선교회로 재조직 됐다. 이렇듯 장로교의 역사는 선교의 맥과 같이 했다.
1998년 11월 18일 왕성교회에서 열린 설립 총회에서 조중기 목사가 초대 이사장에, 사무총장에 김활영 선교사가 선임됐다. 그리고 기존의 선교부, 해외선교위원회, 선교센터건립추진위원회, 총회선교훈련원 등 4개 기관이 하나의 행정체계로 통합시켜 효율적 선교관리를 구축했다. 당시 83개국에 흩어져 있던 860여명의 선교사들이 한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총회세계선교회는 이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2003년에는 한국 교회 최초로 선교사 1000명 시대를 돌파했으며, 2008년에는 2000명 시대를 열었다.
'제비뽑기 선거제도 시행' ‘획기적 선거제도’ 10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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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총회 선거법 개정연구위원회가 제비뽑기를 총회에 제안한다고 알려졌을 때, 교단 주변에선 교단 정서상 통과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개정연구위원들 조차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몇차례 총회에 상정되었으나 별 반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원회가 마지막날 오전 총회현장에서 보고를 통해 선거법 제도개선안으로 제비뽑기를 제안하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총대들이 ‘허락이요’를 외쳤기 때문이다. 몇몇 회원이 시간을 갖고 연구해 보자고 제의했지만, ‘선거운동의 타락상을 개혁하기 위해선 제비뽑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총대들의 기세를 꺽지 못했다. 결국 제비뽑기를 상정한 지 5분여 만에 △각 정임원은 부임원이 승계 △미비점은 총회 임원회에 맡기기로 등 단서조항을 붙여 전격 통과됐다.
그리고 1년 뒤인 제86회에서 총회 역사상 초유의 제비뽑기 선거제도가 실시됐다. 9월 19일 총회 이튿날 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여 치른 임원선거는 우여곡절 끝에 제비뽑기 임원선거를 채택, 목사 부총회장에 한 한명수 목사(수원노회·창훈대교회)가 황승기 목사보다 구슬 수가 앞서 당선됐다.
이렇게 시작한 제비뽑기는 10년이 지나면서 산하기관과 일부 노회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제비뽑기에 대한 문제점들도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2010년 제95회를 앞두고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보완하여 현실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제비뽑기 도입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총회 리더십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규칙부는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미봉책, 차선책이란 딱지가 따라붙는 제비뽑기 선거제도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예장개혁교단과 합동' ‘형제의 극적 상봉’ 역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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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4년 물밑작업이 시작됐으며, 4월 27일 개혁교단영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8월 19일에는 예장 개혁교단영입위원회와 예장개혁 합동추진위원회가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전체회의를 갖고 교단합동을 총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90회 총회에서 1979년 분열해 나간 개혁교단과 역사적 합동이 이뤄졌다. 26년간 헤어져 있던 형제교단과 전격적이고 특단의 총회적 조치로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당시 서기행 총회장이 합동을 발표하자 모든 총대들은 돌아온 형제들(48개 노회 461명의 총대)을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특별기획팀:강석근 부장, 정형권·조준영·박용미 기자
한국 장로교회 100대 사건(예장합동 기준) 1 -1832년 7월 17일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 서해안 전도
- 100대 사건 자문위원: 증경총회장 최기채·신세원·서기행·장차남 목사, 홍치모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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