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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사야 53:4-9

미션(cmc) 2011. 10. 24. 10:43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성경본문: 이사야 53:4-9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 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 씀은 산상보훈이 말하는 팔 복 가운 데 두 번째 복입니다.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이 하늘로부터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봉 독한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 가 고난당하실 것을 선지자 이사야 가 7백여 년 전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주제는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이 번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모든 일에 근신하면서 주 님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주간 되 어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한없는 은혜 가운데서 믿음을 키울 수 있어 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보 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을 빌라도 법정에 넘겨서 십자가 고 난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 주세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본문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억만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친 히 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해 곡해를 했습니다.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매를 맞는다. 그리 고 고난을 당한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들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방탕 하는 아 들을 본 아버지가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릴 수 있는데 이 광경을 본 불효자식이 "우리 아버지는 무슨 죄를 저리도 많이 지었기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고"

이렇게 엉뚱하게 생각하면서 도리어 아버지를 비난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믿음생활 할 때에 엉뚱하게 해서는 주께 영광 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주님지신 십자 가 고난의 깊은 뜻을 생각하면서 함께 동참을 해야 합니다. 고난 당하 신 예수님에 대한 곡해를 해명하고 그 고난에 대한 참 진리를 설명하는 본문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 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고난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어떻게 참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을 주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 한 세 가지 내용을 묵상코자 합니다.

첫째, 고난당하신 이유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 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 물음에 대한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이 찔리고 피를 다 쏟으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창으로 허리 상하여 그리고 십자가에서 "엘 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까?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녹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를 보고 짜증내고 불평, 저주하지 아니하고 저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사랑이 넘치는 절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나 같은 죄인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을 용서하시 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내가져야 될 그 죄짐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지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이 무엇입니까? 본문 6절 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했습니다. 인생의 형편이 양과 흡사하다 는 것입니다. 양의 특징은 연약 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맹수와 싸 울 힘이 없습니다. 만나면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그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준비 없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겨 울 준비하는 양을 본 일이 있습니까? 이만큼 우둔한 동물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 못사는 동물입니다. 양은 제 갈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릇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길 가노라'하면서 가는 인생들이지만 다 각기 잘못된 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저마다 복 받는 길이라고 찾아들 갑니다. 그러나 고생하는 길만 골라서 갑니다. 저마다 행복한 길로 가노라 하지만 남은 괴롭히고 자기를 망치는 길로 만 골라서 갑니다. 이렇게 불쌍한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사 목자 되게 하셨습니다. 힘이 없어 마귀와 싸울 수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목자 되 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 리가 믿고 있는 복음입니다. 은혜를 입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 내 선한 목자 날 가르치시고 ..

하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이 제 길로 가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 은혜를 두고두고 감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은혜가 아닙니다. ♬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하는 삶이 믿음생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 53장이 고난주간을 맞는 모두에게 교훈 합니다. 기독교란 무엇이냐? 얼른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실패의 종교, 낭패의 종교로 여길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밝힌 대로입니다. 풍채도 매력, 출세의 가능성도 없는 기독교인 것처럼 보이나 기독교는 선언합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는다.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 이 있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예리한 창에 찔려 천대 받고 매 맞고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주님 당하신 고난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쓸개 맛 보다 쓰디쓴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왜 이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의 죄 때문입니다. 나 같은 것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문 4-6절에 보면 '우 리'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나'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허물, 죄악, 교만, 혈기 때문입니다. 나를 떼어 낼 수가 없습니다. 나의 위선, 부정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 하고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죄 값인 십자가 내가 져야 할 텐데 주님이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 모두는

"나 때문입니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굴욕, 멸시, 천대, 십자가, 죽음도 모두 나 때문입니다. 교회의 보족된 점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도 다 '나 때문입니다'고 대답을 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성전건축이 더디어진 것도 '나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마다 여겨야 성전건축이 더 활기차게 진전되어 질 것입니다. 모든 부족한 것이 나 때문입니다 고 생각하는데 서 성도들이 지녀야 될 미덕 '겸손' 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 리 모두가 이 겸허를 배울 수 있기 은 원합니다.

둘째, 고난당하신 태도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태도가 다릅니다. 한 사람이 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낙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짜증납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에게 시비를 겁니다. 만사가 끝장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들어만 갑니다. 결국 육신만 죽어가지 아니하고 영혼까지 죽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말합디다. 다.

"인생은 약한 존재야"

그러면서 인생의 의미를 배우니까 겸손해 집니다. 내가 병든 것은 내 잘못이야 내 허물 때문이야 이렇게 죄를 깨닫고 보니 회개할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인생은 믿을 수가 없어"

생각하게 되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세요. 그리하면 이후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겠나이다."

믿음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그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어찌했습니까? 그의 태도가 우리에 게 교훈을 줍니다.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부분을 믿음 생활 하는 우리 모두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찌합니까? 입을 열어야 할 때에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아야 할 때에 너무 입을 열어서 탈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입을 열 바에야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섯 가지 입을 열어야 합니다.

▶ 눈을 감으면 기도의 입을 열고,

▶ 눈을 뜨면 감사와 찬송의 입,

▶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구제의 입,

▶ 죄인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 전도의 입,

▶ 때가 되어 천국가게 되면 하나 님 앞에 보고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입을 꼭 다무는 경건한 훈련도 해야 합니다.

▶ 자랑하는 입,

▶ 잘못을 핑계 하는 입,

▶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입,

▶ 책임을 전가하는 입을 열지 말고

▶ 특별 히 형제를 헐뜯는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우 리의 취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부흥에 나의 태도는 직 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태도는 크게 보면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적극적이든지, 소극적이든지 아니면 할 수 있다, 할 수 없어 태도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 한 태도는 두말할 것 없습니다. 적극적인 태도, 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리되기 원할진대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합니다. 대체적으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이 일을 방해합니다. 가능하면 성경을 읽지 못하게,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말합디다. 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요"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폭포처럼 강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서는 새벽에 조용히 내리는 이슬같이 잔잔한 메시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고난주간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침묵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입을 다무신 주님.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마27:12에 보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예수님께 무슨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워도 억울해도 입을 열지 아니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사랑이 입을 다물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못 박는 무리를 보고 탓하지 아니했습니다. 시비를 걸지 아니했습니다. 그저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면서 고난을 감수하고 눈물을 꾹 삼키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 생활하면서 이것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 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셋째, 고난당하신 결과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그로 존귀한 자 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고난 그것으로 끝나 버리게 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는 승리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하지 아니 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 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 에 여섯 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19:30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이요, 승리입니다. '다 이루었다' 조금도 유감이 없고, 아쉬움이 없고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틀림없는 예수님의 실패요, 낭패라 할 수 있고 기독교의 막이 내린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무슨 뜻입니까?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전의 휘장을 찢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 고 운명하셨을 때에 놀라운 장면이 지금 일어났습니다. 성전에 있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는데 위에서부터 저 아래까지 쫘악 찢어지는 이적 사건이라는 말 입니 다. 그 휘장이 찢어지지 않은 채 있을 때에는 누구도 지성소에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휘장 이 찢어질 때에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휘장이 찢어졌기에 지성소에 들어간 사람은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이렇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인 된 인생들이 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면회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찢어진 휘장이 무엇입니까? 찢어진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 고 있었던 죄의 장벽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 길이 열렸습니다. 천 국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 난을 당하신 목적이요 결과라는 말 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철학 자 하이덱거의 말대로

"sein zum Tode"즉

"죽음에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있는데 반드시 죽는다는 것 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놀다가, 잠자다가, 일하다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죽 을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죽음 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죄 값은 사망인데 내 힘으로 는 내 죄를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 생명,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격이 별나서 아주 하찮고 적은 일에도 속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교훈 합니다. 고난주간에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 고 침 뱉는 그래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에 내가 만난 고난이 무슨 문제며, 내가 당한 시련이 무슨 대견스러운 것인가. 내가 만난 수치, 부끄러움 이 무슨 큰 것이나 된 것양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대를 받으신 우리 주님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모두가 고백해야 합니 다.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구주로소이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고난을 당했습니까? 환난을 만났습니까? 질고를 당했습니까? 예수님의 인내를 보십 시오. 히12:2을 보면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 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참으 사'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 경은 말합니다.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했습니다. 우리 믿음 가운 데 으뜸가는 믿음이 있다면 참는 믿 음입니다. 참는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실패를 참는 자 가 성공을 가져옵니다. 성공이 무 엇입니까? 실패의 뿌리에서 맺혀진 열매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 고통, 견딜 수 없는 것, 마음속에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참으사' 그랬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을 타고난 명문가의 예수님이 아닙니까. 희망 과 꿈이 무르익은 나이 30대의 청년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예 수님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낭패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참으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는 우리에게 열 매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버리 지 않습니다. 상급, 훈장, 내일,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이 답합니다.

"그 앞의 즐거움을 위하여"

앞에 즐거움이 있으면 오늘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낭패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 여 참았습니다. 그 즐거움이 무엇 입니까? 예수님이 바라보는 그 즐 거움이 무엇입니까?

"사셨네 사셨 네 예수 다시 사셨네"입니다.

고난을 생각하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지 못하면 금메달 딸 수 없습니다.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참지 못하면 부활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주일 부활주 일을 준비하면서 고난주간을 지킬 것입니다.

고난당한 성도여, 참으십시다. 굉장히 힘든 일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십시다. 고난 당 하신 우리 주님. 그러나 참으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두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정 규 목사 (김제 홍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