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교/수원L.M.T.C.

GMS 역사와 정신/전 GMS 연구소장 /현 행정국장 정홍주

미션(cmc) 2011. 11. 1. 07:54

GMS 역사와 정신

 

전 GMS 연구소장

현 행정국장 정홍주

들어가는 말

 

GMS의 역사를 다루기에 앞서서 장로교 초기 선교역사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장로교선교는 1907년 장로회 독노회가 처음으로 결성되고 첫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을 처음 목사안수를 할 때부터 “선교”라는 말을 사용했다. 교단이 분열되기 이전 상황이라 다른 장로교교단들도 역사를 다룰 때 저마다 역사의 뿌리를 1907년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하겠다. 대한 예수교 장로교의 성장과 확장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대한 정신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초장기의 선교동기가 철저한 교단선교이며 작금은 2000명이 넘는 선교사가 GMS에 소속되어 있으며 100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처음 장로교 교단의 기초를 놓을 때 복음의 빚진 자로서 선교를 감당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제주도에 이기풍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이른다. 이후 계속되어지는 역사 속에서 1912년 대한예수교징로교 총회가 결성되면서 타문화권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결정을 하여 1913년에 공자의 고향인 산동반도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른다. 그 후 간헐적인 선교사 파송은 대부분 교포선교로 이어지다가 1955년 총회에서 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2010년 현재 이르기까지 많은 발전을 거듭해 온다. 이제는 한국교회뿐 아니라 GMS는 세계교회와 공동체를 주님의 마음(빌2:5)으로 섬겨야 하고 마지막 대위임령인 선교를 시대적인 소명으로 인식해야할 당위성을 가진다하겠다.

우선 장로교 초기선교를 역사적 배경과 함께 다루어져야 한국 선교역사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선교역사인 것을 피력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이 땅에 외국선교사가 오기 전에 먼저 조선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본국으로 들어와서 교회개척과 전도를 감당한 남다르고 독특한 열심이 있는 교회선교역사라는 것을 조명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은둔의 땅 조선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여러 경로로 통해 시도해 왔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보게된다.

 

1. 19세기말 조선의 시대적 상황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속에서 고려시대는 불교를 우대했으며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19세말은 종교적인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86년) 이후 미국은 1867년 1월, 4월 각각 조선의 해안을 조사 및 대동강 어귀까지 와서 이 사건을 조사했으며,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지만 퇴각한다. 1873년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물러나자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일본에 문호개방을 필두로 구미 여러 나라들에게도 개방을 하기 시작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1886년에는 한불수호조약이 있었으며 강제적인 개방과 함께 외세들의 힘겨루기에 흰옷을 즐겨 입었던 조선백성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이 일어났고 백성들 가운데서는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아래 조선 봉건사회체제를 붕괴하려는 동학농민운동까지 겹쳤고 그 배경으로 국제적으로는 청일전쟁(1894년)이 일어나 일본이 패권을 잡게 되었고 일본은 러시아와 러일전쟁이 일으켜 패권다툼을 하게 되어 조선은 그야말로 이웃집의 싸움에 국운은 풍전등화와 같게 된다. 그 이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은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라고 소개되었다. 당시 제물포항에서 내려 지금의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는 버섯처럼 보이는 집들을 볼 수 있었다고 언더우드선교사부인인 릴리아스 호톤여사는 그녀의 책 조선견문록에서 언급을 한다.

 

 

1. 조선 초기 개신교 접촉과 만주에서의 조선선교의 여명

 

1) 감자를 가지고 온 칼 쿠츨라프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는 독일출신 개신교 선교사이며 의사였다. 개신교의 동양선교는 18세기 말에 본격화되었다. 영국인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인도선교(1793년)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의 중국선교(1807년), 미국인 아도니람 저드선(Adoniram Judson)의 미얀마선교(1812년)가 시작되었다. 유태계 독일 태생의 귀출라프는 런던에서 모리슨의 중국선교보고를 듣고 선교에 대한 결심이 섰고 1826년 네덜란드선교회 소속으로 동남아 바타비아(Batavia)에 왔으나 아내가 죽자 중국으로 향했다. 요동반도와 산동 반도를 거쳐서 마카오에 모리슨의 집에 유하게 된다.

그곳에서 중국, 조선, 일본 오키나와 및 타이완을 탐방을 계획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로부터 귀츨라프는 통역 및 의사로 갈 것을 제의받아 수락한다. 모리슨은 그에게 조선에 반포할 한문성경을 주었고 그 자신은 기독교 전도문서와 약품 등을 준비했다. 1 천 톤 급의 군함인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의 선장 휴 렌세이 (Hugh H. Lindsay)는 1832년 2월 27일에 광동을 출발하여 타이완, 복주, 영파, 상해, 산동 반도의 위해를 거쳐 바다를 건너 7월 17일 조선해안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황해도 장산곶에 도착해서 조선노인을 만나서 글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나누었으나 관리들을 만나는 것은 실패했다. 다시 7월 23일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에 정박했고 귀출라프 일행은 지방관을 만났고 그를 통해 국왕에게 선물과 청원서를 보내었고 그 선물가운데는 서양물품과 한문성경 2권과 기독교문서 수십 종이 포함되었다.

답을 기다리는 일행들은 그곳에 있은 주민들을 만났고 황해도 장산곶과는 달리 그들 중 더러는 배에 올라와 기독교전도문서도 받았고 지방 관리들이 일행들을 초대해 식사도 했고 감자 심는 법도 가르쳐 주었지만 국법에 어긋난다면서 두려워하였다. 해안에 상륙하여 가까운 불교사찰을 탐방했으나 지방 관리들은 철저히 백성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의사인 귀츨라프는 주민들에게 약을 주어서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8월 9일 서울로부터 통역과 특사가 내려와 서한과 선물을 돌려주면서 중국의 조정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는 통상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귀츨라프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므로 통상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으나 관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관리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은 후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해안을 떠나면서 7월 27일 항해일기에 이렇게 남긴다. “가장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읽고 좋아하는 것을 알 때 아주 재미있었다. 관리들이 책을 받자 사람들은 밀려와서 책을 받았다. 이 나라에는 종교가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하여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파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일행들은 제주도에서 해안과 성책을 조사했는데 그것은 군사적인 목적에서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귀츨라프는 한 가닥 선교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는 또, “..어찌했던 이 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 나는 믿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를 열심히 전해야할 것이다....하나님께서 이 미약한 첫 방문도 축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조선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귀츨라프는 영국동인도회사를 통해서 왔지만 선교의 목적을 띠고 성경과 약품을 실고 조선 땅을 밟고 항해일기에 나오는 것처럼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를 기도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한 선교사임을 기도로 통해 증명될 수 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것은 조선해안을 탐색하는 군함에 승선하여 왔기에 순전한 선교의 목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배경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다.

 

2) 조선선교의 후견인 알렉산더 윌리암슨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조선선교역사에 나타난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다가 1863년에 스코틀란드 성서공회 중국책임자로 와서 중국선교와 조선선교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1807년 모리슨이 선교할 당시 선교사에게 개방이 안되었기에 그는 영국동인도회사에 근무할 수 밖에 없었다.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중국남경조약이 있었고 중국의 다섯 항구가 개항이 되었고 1844년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 황포조약이 있었으며 다시 1858년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와 천진조약이 체결하여 본격적으로 외국인이 28처에 거하도록 중국이 허락해 주었다. 1854년 3월 1일 상해에 허드슨 테일러가 도착했다. 이 무렵 우리가 잘 아는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윌리암슨은 글로스고우 대학 출신이며 중국선교에 뜻을 두었고 이 대학출신인 그는 중국선교에 헌신하게 되었고 조선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푸(현 연태)를 활동근거지로 삼고 조선선교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언급될 만한 사실은 대동 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Robert J. Thomas)를 이미 후원했었다. 1865년 가을 중국 연태에 죽음을 무릅쓰고 서해바다를 건너온 조선인 2명을 만나는 것이 계기가 된다. 몸속에 염주와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지닌 천주교신자(김자평, 최선일)였다. 토마스는 이들과 함께 조선을 갈려고 결심한 후 다량의 한문성경을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제1차 조선방문을 착수한다. 1867년 만주여행을 했으며 봄철과 가을철 개시 때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동지사 일행 중에 이풍익을 만났다.

1883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 Douthwaite)가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하게 된 것도 윌리암슨이 일조를 했다. 스코틀란드 성서공회 일로 조선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했다. 물론 이것은 금지조치가 취하기 전이었다. 월리암슨은 일련의 조선선교에 대한 간접 지원한 스코틀란드 사람이고 이어 존 로스와 멕킨타이어가 조선 선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3) 대동강의 순교자 토마스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는 조선선교역사에서 첫 순교자이다.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학사 및 신학과정을 마치고 중국에 선교하러 왔다(1863년). 귀츨라프가 충청도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이었다. 그의 아내는 귀츨라프아내와 마찬가지로 선교지에서 사별한다. 또한 고난이 계속되기를 그는 런던선교회 상해책임자였던 무어해드(William Muirherd)와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1864년 12월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세관장에서 8개월 동안 청나라 해관에서 통역의 일을 맡았다. 그는 중국어, 러시아어, 몽고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연태)의 책임자였던 윌리암슨이 토마스를 이해하고 본국 선교부에 적극적으로 천거해 주었다. 해관의 업무와 함께 지푸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토마스는 1865년 9월 13일 조선 서해안에 도착한다. 이것이 순교당하기전 1차 조선방문이었고 2달 반을 머물면서 한국천주교인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윌리암슨으로부터 받은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게 된다. 그 후 서울을 향하여 떠났지만 일기가 좋지 않은 관계로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런던선교회로부터 새로운 임지가 북경으로 정해 졌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토마스는 북경에 체제하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그가 일전에 반포했던 성경이 평양에까지 흘러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조선에 대한 복음의 열정이 끓어올랐다. 프랑스함대가 조선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으로 갈 것을 제의받고는 기다리는 동안 프랑스함대가 인도지나에 긴급 투입됨으로 조선으로 가는 것은 무기한 연기되고 있었다. 미국의 프레스톤 소유인 제너럴 셔먼호 상선이 조선을 향해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 하고 선승하게 된다. 그 배는 중무장한 상선이었고 그 배안에는 영국인 호가스(Hogarth)를 비롯해서 백인 5명과 아시아인 19명이 타고 있었다. 1866년 8월 9일 지푸에서 조선을 향해 떠났다. 이것이 토마스가 조선을 향한 2차 여행이면서 순교하는 결과가 된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어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대동강을 타고 평양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조선측과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조선측 문정관은 배가 닿는 곳마다 상선의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토마스는 통역으로 평양으로 가려고 하고 통상을 원한다고 통역을 했다. 천주교와는 달리 야소교를 전파하는데 있다고도 했다. 처음에는 조선측에서도 호의를 베풀어 양식과 땔감을 주었다. 조선인 이현익이 배에 억류되자 조선측은 조총과 대포를 쏘았고 상선측에서는 조선측을 대응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조선측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평양감사로 있었기 때문인데 그는 개화론자였으니 이를 계기로 개국의 기회를 삼을려고도 한듯하여서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제너럴 셔먼호의 부적절한 태도가 사태를 더욱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 배는 대동강 양각도 모래턱에 좌초되어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때 불화살 공격으로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타살하기에 이른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일은 결국 뒷날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4) 성경번역과 한인촌 고려문을 열린문이 되게 한 존 로스와 멕킨타이어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으로 1871년부터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윌리암슨은 산동반도를 선교거점을 삼아 만주일대를 선교대상으로 삼는다. 1872년 멕킨타이어(John McIntyre)에 이어 존 로스(John Ross)가 중국선교사로 왔다. 당시 만주는 산동반도의 농업이민으로 개간을 시작하고 있었다. 1872년 8월 말 연태에 도착한 로스는 윌리암슨의 도움으로 10월에 만주 개항지 영구로 가서 그 해 겨울은 중국어와 만주어를 공부하고 사서삼경으로 독파한 결과 다음해 5월에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했다. 그는 겔릭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스코틀란드 목사로 언어에 남다른 은사가 있었다. 또한 6년 전 대동강변에서 순교당한 토마스에 대한 소식을 윌리암슨은 로스에게 전해준다. 로스는 그로 말미암아 1874년 10월 9일 영구를 출발하여 조선인이 거류하고 있는 1차 고려문을 처음 방문한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로 당시 청국과 조선국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무역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로스는 조선인들에게 한문성경을 팔며 전도했는데 조선인은 옷감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관에 머물렀는데 조선 사람들은 아침 일찍 와서 저녁 늦게까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 보곤 했다. 로스는 조선 사람들이 언덕을 넘어오는 모습이 중국인과 아주 대조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중국인은 검은 옷을 입었지만 조선인들을 흰옷을 입고 언덕을 천천히 삼삼오오 걸어오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한다. 그 상인들이 집에 돌아가면서 그 중 한명이 다시 와서 그에게 조선정세와 조선어발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상인에게 한문 신약성경과 훈아 진언(Peep of Day)을 건네주었다.

로스에게서 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그 상인은 의주로 돌아가 자신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에게 주었는데 그 뒷날 이들이 조선개신교의 최초의 수세자가 되었고 그 상인이 바로 백홍준의 아버지였다. 의주 상인들은 국경에서 무역을 했으며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해나갔다. 이들은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독서층이었고 새로운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매매상품으로는 고려인삼을 위시하여 금, 납, 문종이, 소가죽, 가발 등을 팔고 영국산 면세품과 차, 설탕 등이 대상이었다.

로스는 2차로 고려문을 방문한다. 1876년 3월의 강화도조약에 의한 조선 문화 개방소식을 접하자 4월말에 이루어진다. 이 여행에서 조선어교사인 이응찬을 만나게 된다. 로스는 한국성경 번역계획에 착수한다. 로스는 곧 봉천으로 이응찬과 돌아와서 한국어를 배워서 1877년에 조선선교사를 위한 조선어교재인 기초조선어(Corean Primer)를 상해에서 발간한다. 이때부터 로스는 한글성경을 이응찬과 또 다른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게 된다.

이응찬이 귀국하자 홍삼장사 차 왔던 서상륜을 만나게 된다. 동생 서경조와 함께 영구에 왔다가 열병으로 고생하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헌터(M. Hunter) 의사의 치료로 완치된 후 매킨타이어의 전도를 받은 후 로스에게 소개되었다. 누가복음을 번역한 후 서상륜은 세례를 요청하나 이응찬과 같이 확실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1879년 백홍준,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이 멕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인 조선기독교의 최초 수세사건이다. 백홍준은 의주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서상륜, 서경조는 소래교회와 새문안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모두 다 학식 있는 조선사람들이었다고 로스는 평가했다.

 

5)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한학자 이수정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민비를 구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수정은 고종의 신임을 얻어 일본사절단으로 일본을 가게 되는 것이 기독인이 되는데 큰 계기가 된다. 민비가 후원하는 군대는 신문물을 받아들인 신식군대였고 대원군측은 구식군대였다. 신식군대는 여러 가지 지원이 있었지만 구식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구식군인들은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군량미가 구식군인들에게도 지원이 되어서 배급을 타기위해서 기다려 배급을 펴보니 모래가 섞인 쌀이었다. 어떤 정치적인 배경이 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배후의 음모가 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었다. 삼삼오오 군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궁궐 앞에 집결이 되어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길이 휩싸여 궁궐이 불타고 격노한 구식군대의 군인들은 불을 놓기 시작했고 신식군대의 핵심인 민비를 체포하고자 이리 저리 수색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 때 마침 지게를 지고 궁궐을 빠져나오는 지게꾼이 하나 있었다. 검문을 당하자 거름이라고 위장하고 민비를 업고 무사히 궁궐을 빠져나와서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에 피신해 있었다. 난리가 지난 후 민비가 다시 복궐하여 권위를 회복한다. 그 때 그 공로자가 궁중 역사가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전라도 옥과현 출신의 양반인 이수정이었다.

한학에 능통한 이 수정은 고종의 신임을 받았고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신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사절단에 참여를 한다. 그는 또 선진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서 유학을 한 농업학자인 쯔다센 박사를 만나게 된다. 쯔다센 박사는 이미 기독인이었고 이 수정은 쯔다센 박사를 방문하여 현관에 결려있는 한문으로 된 산상수훈 마태복음 중 팔복에 관한 말씀이 들어있는 족자를 처다 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한문귀절을 보면서 사서삼경을 알았던 그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리는 영적인 음성을 듣게되면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쯔다센 박사로부터 한문성경을 빌려서 읽는 중에 회심을 하게 되고 기독인이 되기를 결심한다.

일본에 도착한 그 다음 해인 1883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해 1883년 5월 일본기독인대회가 개최되는데 참석하게 된다. 일본의 최초목사인 오쿠와 목사가 대표로 있었고 오쿠와 목사는 이수정에게 조선어로 기도하라고 한다. 이수정이 감동적인 기도를 한 후 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 때 찍은 기념사진에는 일본 기독인 지도자들이 함께 했는데 그 가운데는 우찌무라 간조가 함께 했다. 40명중 한명이 조선사람으로 흰두루마기 차림과 머리에는 대감들이 쓴 망건을 쓴 채 참석했다. 이수정이 우리 조선에도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일본기독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에 선교하겠다고 했다. 그 당시 일본의 기독역사도 2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정중하게 이수정은 그 같은 제의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조선에서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 적절하지 않으니 직접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면 좋겠다고 편지를 하게 된다. 물론 영어의 도움은 세례를 베푼 장로교목사 선교사인 존 녹스에게 받는다. 그의 편지는 조선의 마케도니야 사람으로 인식되면서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라는 선교잡지에 1883년 5월과 12월 2차례나 실리게 된다. 2번째 실린 편지를 미국 브루클린에 있는 라피엘교회의 멕윌리엄즈(D. W. McWilliams)가 읽게 되었는데 그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실행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아 조선에 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든 기금을 2년에 걸쳐 미화 5000불을 4차례 걸쳐서 보내겠다고 작정한다. 그것이 바로 미국 북장로교회의 조선선교가 시작되게 된다.

3. 조선초기 선교

 

1) 조선의 의료 교육 선교의 문

 

당시 조선은 조선 천주교전래로 인해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있었고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워서 외국 사람과 접촉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기독교에 대한 것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있었던 감리교 선교사였던 멕클레이가 1884년 6월 7일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의 도움을 받아 고종으로부터 기독교 전파와 교육과 의료사업을 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게 된다. 이어 중국에서 선교했던 알렌이 미국 북장로교의 후원을 받아 조선에 1884년 9월 20일 의사로 입국하게 되고 다음 해 의사 헤론선교사가 파송되기로 결정된다. 그것이 바로 제중원의 시작이다. 1885년 4월 부활절에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인 26세의 청년 언더우드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부부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일본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를 6000부를 가지고 도착하게 된다. 이미 선교사가 이 나라에 와서 번역하기 전에 만주에서와 일본에서 성경이 번역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 선교사부부는 의료선교사로 입국을 한다.

 

2) 언더우드와 장로교 선교 시작

 

언더우드는 이미 만주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존 로스와 멕킨타이어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은 권서인들을 통해 성경이 조선 땅에 전달되었고 그 중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황해도 소래에 당숙이 살고 있던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것이 조선 최초의 교회로 설립되게 된다. 로스는 서상륜에게 6000권의 성경을 제물포항으로 부치는데 묄렌드로프의 도움으로 책을 찾게 되어 서울에서도 활발한 복음 사역이 시작된다. 언더우드의 고백은 자신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지만 열매를 거둔다고 언급했다. 1886년 7월 11일 노도사라 불리우는 노춘경씨가 조선에서 첫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후 1년 뒤에 조선 내 첫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이 된다. 조직된 첫 장로교회이다. 그 후 1889년 8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es)가 입국해서 부산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그 이듬해 네비우스선교사가 내한하여 선교정책세미나를 인도하여서 조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정에서 사경회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학자적인 면모를 갖추어서 한국어문법책등 여러 가지 책을 발간했다. 북 장로교 평양선교부가 개설되면서 평양장대현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또한, 캐나다 출신 멕켄지가 소래교회에서 사역을 도왔고 건축을 돕다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활성화가 이루어졌다.

 

4. 독노회 설립과 최초 선교사 이기풍 목사

평양의 김종섭과 소래의 서경조가 장로장립을 받았고 평양신학교는 김종섭, 방기창 2인으로 설립되었고 길선주, 방기창은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1902년 새문안교회에서 제 1 회 장로회공의회 개최, 장로 3명, 조사 6명, 선교사 25명이 참석하였다. 1903년 화이트와 하디가 원산에서 기도회를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원산부흥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여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1905년 장로회 독노회 설립을 확정하면서 장로회 12신조를 채택 결의한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장대현교회에서는 평안남도 겨울 남자사경회를 개최하여 1000여명이 참석하고 저녁에는 1500여명이 참석하면서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이어 평양신학교를 비롯 전역으로 부흥운동이 확산되어져 간다.

대한예수교 독노회는 1907년 9월 17일 조직되었고 25개처의 조직교회, 1022개처의 미조직교회에다 6만의 성도가 있는 명실공히 교단의 기초가 형성되고 있었다. 독노회 때, 평양신학교의 졸업생 7명이 목사안수를 받는다. 제1회 졸업생에는 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인데 그 중 한 명을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결정한다. 그 때 처음으로 “선교(Mission)”라는 말을 사용한다. 현대의 시각으로 그 당시를 평가하는 시대착오적인 누를 범해서는 안될 것은 1900년대 초 제주도는 본토와는 많은 차이가 나는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이북출신이 제주도로 간다는 것은 문화충격이 심했고 말도 제대로 통할 수 없었다. 역사적인 첫 선교사로 1908년 년초에 장대현교회에서 이기풍선교사가 파송을 받는데 길선주목사가 설교를 맡게 된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의 사역이 힘들어 마포삼열목사에게 전갈하기를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니 마포삼열목사는 이기풍선교사에게 아직도 당신이 던진 돌에 의해 난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아물 때 까지만이라도 사역하라는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사역한 것이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다.

5. 교포선교

 

민족사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905년과 1945년 사이에 한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한민족의 삼분의 일이 한반도를 떠나 방황하게 되었고 이들을 위해 선교사들이 파송되었고 사실 교포선교 즉 교포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해방 후에도 장로교단은 한반도 밖의 동족을 향한 뜨거운 선교열정을 키워만 갔다, 1970년대 이후 이민의 물결을 따라 지구촌 끝까지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개척된 교회들은 타문화권에 있는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가 한 지구촌이 되면서 더욱 더 중국사람들은 식당을 일본사람들은 공장과 회사를 세우는 반면 한국사람들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한인교회들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일곱 명의 목사를 처음으로 안수하고 GMS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 독노회에서 전도국을 신설하고 공식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 기풍을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파송하고 전국교회가 헌금과 기도로 참여하였다. 특별히 더 언급할 내용은 목사만 보낸 것이 아니라 여전도사 이광선과 평신도 조력자로 김형재, 김창문, 김홍련도 제주선교사의 명단에 들어있다. 그야말로 협력선교와 팀선교의 정신으로 선교의 출발로 삼고 장로교회의 선교원년을 삼았다. 제주도 사역은 표적과 이적이 따랐고 나름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기풍선교사는 모든 것을 극복해 내어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해 한국교회 선교의 모델이 되었다.

GMS의 일본선교는 조선선교의 마케도니아 사람 이수정의 편지로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역이 있었던 것처럼 역시 일본유학생들의 요청인 마케도니아의 부름의 응답으로 출발하였다. 동경 유학생 중에서 YMCA과 관련된 자들이 본국 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GMS 전신인 독노회 전도국(이하 GMS)은 초대 7명 중 한명의 목사를 3개월 단기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이른다. 박영일, 임종순 장로가 이어받아 학생선교의 범위를 넘어서서 교민전체를 상대로 전도가 진행되었고 감리교회와 협약하여(1912년) 공동사역을 추진하였다. 1932년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연합하여 1934년에는 재일 대한 기독교단을 창설한다. GMS는 해방될 때까지 14명 이상의 공식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해방 이후 GMS 공식파송은 아닐지라도 장로교 목사들이 이 기독교단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 들어와서 GMS가 이 교단에 김형탁과 백병수를 선교사로 파송한 이후 지금까지 수 십 가정이 파송되어 있다. 1980년대에는 이성우외 14가정, 그리고 1990년대에는 21가정을, 그리고 2000년대 와서는 3가정을 파송하였고 계속 파송되어가고 이제는 일본에서 자라난 MK들이 선교사역에 임하고 있고 현재 파송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GMS 일본 사역은 여러 지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포상대를 넘어서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교회개척사역하는 선교사들도 있다.

러시아에서도 교포사역은 있어왔다.1909년 러시아 첫 선교사 최관홀을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였는데 그 당시 시베리아 조선인교포는 이십만이 넘었다. 그 다음해에 해삼위로 한병직을 보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 러시아선교는 러시아정교의 방해공작으로 만만치가 않았다. 1922년 러시아에 독노회가 형성할 정도로 활발한 선교를 하였으나 러시아의 공산당 스탈린 치하에서 소수민족 이주정책으로 수십만의 동포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당하여 선교의 위기에 봉착했다. GMS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함경노회와 주한 캐나다 선교부에 러시아선교를 맡아하도록 하였는데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사역은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 후 반세기동안 어두운 밤은 계속되어 오다가 러시아의 개혁개방정책으로 복음의 빙하기는 해동을 하게 되고 1990년대부터 GMS는 옛 선교고토에 전략적으로 선교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동포들은 몇 대에 걸쳐 이민자로 살아오다보니 그 땅에 문화에 점점 동화되어가고 우리말을 잃어버려서 사역하는데 있어서 통역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의 문이 열린 것을 알고 GMS가 속한 교단 노회나 지교회에서 파송 받아 서둘러 러시아땅을 밟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나중 GMS로 편입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만주선교는 GMS 교포선교 중 제일 범위가 넓고 인구도 제일 많았으며 가장 오래된 사역이었다. 고구려의 고도였던 이양자에 1884년 이미 로스와 멕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75명이 세례를 받았을 정도였다. 사실 수 천년 동안 만주는 한민족의 영토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이후 고구려와 발해시절은 한민족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때 주권 잃은 설움을 달래기 위해 오랜 동안 민족들이 살았던 그 땅을 찾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수백만의 한민족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고토를 찾게 되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1902년 중국 주재 스코틀란드 선교부가 만주의 한국교회 선교권에 대해 문의해 왔을 때 공의회전도위원회는 한국의 책임이라도 규명해 주었다. 1901년에서 1945년까지 백 명이상의 선교사를 만주 땅에 파송하였다. 그 결과 6개 노회가 조직되고 1941년에는 모국과는 독립된 총회까지 조직하였고 만주 땅에 조선신학교까지 설립하여 운영했다. 만주지역도 나누어서 남부는 인접한 평안도노회와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만주 즉 간도지역은 함경도 교회들과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책임을 지도록 했다. 2차대전 후 일본이 만주에서 물러가고 공산권이 장악하자 지역교회는 귀국의 길에 오르고 나머지는 러시아와 같이 지하로 스며들게 되었다. 중국만주는 러시아 개방정책이후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펴기 전까지는 복음이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개방이후 지하교회는 활발한 부흥을 하게 되었고 1990년대 GMS가 다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지하교회지도자들은 훈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국교포선교는 이전 동포들이 이주해 갔던 만주가 일차 목표지점이었다.

중국본토에 교포사역은 교포들이 주변 여러 곳으로 흩어져가서 대도시마다 교회를 시작하였다. 거대한 대륙으로 퍼져간 한민족의 이민물결은 2차세계대전후 철수하기까지 1940년대 북경. 천진, 소주, 청도, 제남, 무한 등 여러 도실들을 중심으로 교포노회가 설립되었다. 중국공산당정권이 국민당을 몰아내어 선교사도 교회도 철수한 시기를 지나 1970년대 다시 개방정책의 물결에 따라 수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 때 GMS는 그 요청에 부응하여 다수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기에 이른다. 한민족을 넘어서서 한족의 요청이 있게 된다.

미국 동포들을 위한 선교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흩어져간 한민족을 위시하여 역사의 뒤안길에서 갖가지 이유로 한반도 밖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교포들을 향한 선교는 GMS의 중요한 정책이었다. 초기에는 이들 가운데 선교사 신분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포가 살고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전도목사와 같은 신분으로도 파송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교포선교사역을 초문화 선교와 구별할 필요가 점차 생겨났다. 특히 북미에 이민이 급증하여 노회와 독립된 총회까지 조직하였으며, 초문화 사역을 하던 선교사들이 이들 이민사회에 더러 정착하여 사역을 하게 됨으로 GMS는 이곳에 사역하는 자는 선교사 명부에서 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위시하여 유럽에 이르기까지 흩어진 교포들을 아직도 동포선교를 선교형태로 보기 때문에 약간의 논란의 여지는 있다고 하겠다.

1970년 말까지만 해도 선교사 대부분이 교포선교에 매달려 있었지만 1980년 들어서면서 초문화선교사가 교포선교하는 선교사 수보다 증가하기 시작했다. 상당수 교포선교사는 재정적으로 독립하여 교포교회를 중심으로 현지인 선교, 곧 초문화 사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즉 유대민족이 회당중심으로 선교센터 역할을 한 것을 계승이라도 한 듯이 전초기지로 삼아 초문화선교에 임했다.

6. 타문화 선교시작

 

GMS의 타문화 선교는 중국 산동반도에서 시작되었다. 1907년 독립노회 조직 시 제주도 선교를 시작했듯이 1912년 총회가 조직되면서 감격스럽게 타문화권에 선교사를 파송결정을 한다. 그 해는 만주족은 청나라가 붕괴되고 현대 중국의 새 공화국이 손문을 대통령으로 정권이 시작할 때 중국의 선교의 황금기에 접어든다.

중국의 한국 첫 초문화 선교지는 다름 아닌 공자 맹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한국에서 가까운 산동반도였다. 이 산동선교는 GMS의 초문화 선교의 포문을 열었다. 창립총회 석상에서 황해노회의 박태로 목사가 후보로 선임되었다. 위원들은 현지답사를 할 정도로 관심이 지대했다. 당시 현지교회와 주재하고 있던 서구 선교단체와 협의를 거쳐 래양현을 사역지로 확정하였다.1913년 11월에 추가로 선임된 김영훈, 사병순 목사와 함께 박태로는 가족을 대동하고 제물포를 떠나 선교지가 도착한다. 산동선교부는 시작은 창대하게 시작하였으나 산동선교부는 한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던 박태로 선교사도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본부와 충분한 연락이 없어서 이후 철수하고 말았다.

선교본부는 이 사실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방효원을 파견하였으며 총회는 철수한 그곳을 방 효원과 홍 승한을 다시 1918년에 파송을 한다. 이 두 선교사들은 래양현 남관에 본부를 두고 사역을 하였고 그 다음해애 박상순이 참여하여 팀을 구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산동사역이 시작된다. 방효원과 홍승한은 바울과 바나바처럼 사역과 팀을 잘 이루어갔다. 1922년 평북 여전도회 연합회가 이 대영을 파송했다, 산동 선교부는 래양현 서남부에 위치한 즉묵에 새 지부를 열고 홍승한과 팀을 이루어 사역하게 하였다. 박상순은 교육과 행정에 뛰어나서 선교사자녀학교를 열었고 그 후에 성경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대영은 능력있는 부흥사였다. 홍승한은 선교비의 어려움으로 총회선교부가 선교사 2명을 소환하게 된다. 그 당시 김윤식이 1918년에 의사로 래양현에서 개업을 하고 자비량선교를 하였고 협동선교사가 되어 선교사를 돕기 시작하였다. 그를 이어 1923년 주현측, 1931년 안중호등도 의료선교사로 동역하였고 대구에서 1922년에 조소임, 1924년에 이영애, 1930년에 편순남 등이 선교사 자녀학교의 교사 선교사로 봉사하게 된다.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여성을 위하여 첫 여성선교사로 김순호를 후원하여 총회가 1931년 파송한다. 이는 독신여성으로 초문화선교사가 되었다. 이 시기는 산동선교의 전성기였다.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에 감동한 중국교회와 북장로교 선교부는 140만 인구를 포용하는 래양현 전체를 한국 선교부에 이양하였다. 더 나아가 근접해 있던 해양현의 일부까지 선교지로 편입하였다. 사역은 날로 발전하여 1933년에는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지에 노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20여곳, 기도처가 30여 곳으로 증가하였고 세례교인 또한 1,000명이 넘어섰으며 10곳의 학교도 운영하였다. 한국식 사경회와 송상철, 김익두 등 초청강사와 이대영이 인도하는 부흥회가 있었고 성경읽기 운동, 성경학교로 통한 지도자 양성, 십일조 헌금장려 등으로 선교지 교회가 한국교회처럼 든든히 서갔다.

산동선교의 2기 개척자나 다름이 없었던 방효원이 1936년 은퇴를 하자 그의 아들이 승계를 하면서 대동아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선교부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1938년 김순호는 선교지를 만주로 옮기게 된다. 이제부터는 신임 2세 선교사와 박상순, 이대영으로 구성된 산동선교 3기 팀이 가장 어려운 선교여정을 맞이한다. 방지일은 선교초기부터 전쟁으로 인하여 선교지 래양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일시 철수하였다. 결국 전쟁으로 초토화된 래양을 양보하고 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박 상순도 전쟁으로 래양으로 왕래만하다가 결국 1940년 귀국하게 된다. 이대영은 즉묵을 중심으로 장개석이 대만으로 옮겨가던 해 1948년에 귀국하였다가 가족을 둔 채 영영귀임하지 못하고 만다. 방지일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시작하던 때가지 선교지를 지켰다. 공산당이 지배할 때까지 있었던 최후의 선교사였다. 방지일은 20년을 보내면서 전쟁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여 전쟁난민소와 먹이고 입히는 일이며 핍박 중의 교회를 지키며, 격려하면서 꿋꿋이 버텼다. 1957년 9월 방지일이 부산에 상륙함으로 산둥선교는 막을 내렸다.

산동선교가 문이 닫히자 대만선교가 열리게 되었다. 1956년 GMS는 공산치하 산동에서 사역하고 있는 방지일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대만에 선교사를 보내어 산동선교를 위해 장차 준비하였다. 그 목적으로 선정된 계화삼선교사는 자신은 항상 산동선교를 위한 준비된 기다리는 선교사라고 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자라났고 신학을 하였던 연고로 신학을 훈련받은 그로서는 교민들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장개석과 본토에서 피난 온 정성원전도사는 1949년 이후 길륭과 교웅에 한인을 위한 교회를 개척해 있었기 때문에 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후일에 산동 화동성경학교 졸업생들과 피난교회를 시작하였다가 1969년 선교지를 아르헨티나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67-1971년 동안 계화삼을 이어 채 은수가 대만선교를 하였으나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다.

산동선교는 GMS 선교에서 자리매김은 독특하다. 첫 초문화선교지이며 구조적인 면에서도 전략적인 면에서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선교현지에서 현지교회와 서구선교단체와 협력도 그러했고 선교사 자녀학교 운영 또한 자비량선교사의 협력선교 모델도 찾을 수 있다. 평신도들도 다수 참여하여 선교의 팀을 이뤄서 선교하였다는 점이다.

 

7. 본격적인 타문화 선교

 

1954년 말레지아 쿠알라룸프르에서 동아시아 교회 협의회모임에서 태국에 아시아 선교사 파송을 권유하는 기회가 있었다. 참석하였던 한국 대표단은 도전을 받고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다음해 GMS는 최찬영과 김순권을 선교사 후보로 선정하였다. 6·25한국 동란이 남기고 간 상처는 컸고 당시 여권조차 내기 힘든 상황에서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그 둘 중 김순권은 여권 발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하여 김순일이 결정되었고 1956년 5월과 11월 최찬영과 김순일은 방콕에 도착하여서 산동선교 이후 타문화권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두선교사들의 선교사 자질을 언급한다면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어학에 능통하였으므로 태국어를 배우는데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짧은 시일에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여 사역에 임할 수 있었다. 최찬영은 병원과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고 김순일은 치앙마이의 지역교회에서 임무를 맡아 사역을 하였다. 최찬영은 성서공회 사역에 집중하여 후일 마닐라와 홍콩을 무대로 아시아지역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김순일은 1956년에서 1976년까지 선교의 최첨병으로 사역하며 넓은 선교지의 밀림과 지역교회를 넘나들었다. 그는 또 서구선교사들을 뛰어넘는 사역으로 신뢰를 얻었고 현지 교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으며 태국노회로부터는 노회장으로 피택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그는 미국 프린스톤에서 연구하였고 풀러신학교에서 제 1호 한국 선교학 박사가 되었다. 태국교단 신학교에서 교수를 하다가 아시아와 세계에 선교지도자로 발돋음하면서 풀러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두 선교사로 말미암아 한국선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태국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비서구교회로는 가장 선교교회라는 인상을 깊이 심어 주었으며 서구 선교사들에게도 한국 선교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음이 틀림이 없다.

1960년대 들어오면서 GMS는 태국을 넘어서서 먼나라까지 흩어진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교동원가인 조동진은 선교훈련원을 세워 선교사를 양성하고 또한 서구식 선교단체를 설립하여 선교사들 파송하였다. 이 가운데는 윤두혁, 신홍식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 선교의 태동기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가까운 나라에서부터 먼 나라에까지 선교사로 가는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특히 합동측 GMS가 선교에 있어서 앞장서게 된 것은 선교지도자인 조동진, 김준곤, 김의환 등이 교단의 지도자였고 총신에서 학생운동을 전개한 것과 민족복음화운동에 복음주의적 운동이 큰 역할을 했으며 선교운동을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추호도 의심이 없다.

 

8. GMS 현대 선교

 

1959년 교단분열 후 1970년까지 공식적으로 3가정만 총회파송선교사로 있었다. 그러나 1970년도부터 2000년까지 놀라운 선교의 발전을 가져왔다. 90개국에 700가정을 파송하였다. 이런 선교사수의 증가는 여러 가지 환경과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라고 밖에 설명할 기리 없다. 선교제도와 사역의 방안이 발전되고 지교회들의 참여와 선교사들의 헌신도 지대했다.

장로교단으로서는 미국의 연합장로교단 다음가는 큰 교단으로 성장했으며 선교중심적인 교단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70년대 일어나 교회의 급성장을 들 수 있다. 특히 보수신학아래 70년대 초부터 총신을 중심으로 학생선교운동은 현대선교활성화의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 때 선교학생운동은 전위부대로 있었던 학생들이었고 그들이 곧 ,GMS 신임선교사가 되었다. 둘째, 교단과 신학교의 지도자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한국선교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김활란, 조동진, 김준곤, 그리고 김의환이었다. 이 중 합동측에 속한 목사들이 3명이었다. 이들은 교단적으로와 교계적으로 활동한 선교운동에 있어서 동원가 역할을 감당하였다. 개교회 목사들로서는 김창인, 김창렴 등이다. 한국선교사들의 선임자 대부분이 합동측에 소속된 목사선교사들이었다. 한국인 제 1호 선교학 박사도 합동측이었고 선교현장사역과 선교학관련 학위소지자들의 대부분도 GMS 소속선교사였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개교회 중심 선교체제였다는 것인데 이는 한국교회의 독특성이라 할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개교회선교사는 없었고 전부 교단 파송선교사만이 존재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교단선교부는 개교회의 열심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80년대에는 개교회마다 교회 단독파송을 목회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교회들이 허다했으며 실제로 많은 교단교회들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국가적으로 전무후무한 경제성장과 88 서울올림픽 개최 등 국제적인 지도력향상, 외교적인 지위, 수많은 대학생들의 증가와 대규모집회를 통한 선교헌신 모든 것들이 선교환경에 걸맞는 것들이었다.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대규모 전도집회와 교회마다 부흥회 열풍과 선교지향적인 교회들이 양산되었던 것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1990년에는 서울충현교회에서 선교 관련 집회인 Asia Missions Consultations이 열렸고 1995년에는 충현교회와 사랑의 교회에서 GCOWF가 열렸으며 이는 실제로 한국교회의 재정과 지도력으로 모인 명실상부한 국제선교대회였다. 그 외 미국에서도 한인선교사대회를 개최함으로 한민족 디아스포라에게도 선교의 열정을 집합시켰고 미국의 한인교회들도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고 선교대회에 대거 참석한 자들도 합동측 선교사들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곧 동원가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인도네시아 故 서만수 선교사가 개교회의 후원을 받아갔으며 나아가 일본, 이집트, 필리핀, 태국, 대만, 유럽과 남미로 개척해 나갔다. 당신 대부분은 교포사역을 하였거나 현지인사역을 겸하였고 드물게 현지인 사역을 하였다. 한인교회를 통한 현지인사역은 괄목한 정도는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는 이전까지 있었던 선교비 송금과 파송에 대한 제약이 없어졌다. 이는 국가경제가 좋아졌으며 해외여행자율화라는 것도 한 몫을 하였다. 이때부터는 타문화권선교사역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교포사역은 선교사역으로서는 약간 위축이 되었다.

GMS는 아프리카로 들어가면서 국제적인 선교단체와 동역하게 된다. AIM과 SIM은 GMS의 중요한 국제 동반자였다. 아시아 쪽은 친근감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 중 필리핀을 집중적으로 선교대상으로 삼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된다. 70년대 후반부터는 교단선교부도 발전하였지만 자체적으로 교회들이 연합하여 선교단체를 만들어서 사역하기도 하였고 전략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선교현장에서는 팀들을 구성했으며 특히 필리핀은 시범적인 경우가 되었다. 교단도 이제는 구조를 변경하여 선교국이 신설되어 상설 선교사 관리기구가 생기게 된다. 80년대 말에는 선교국장 한 사람으로 수백명의 파송선교사를 관리하기에는 불가능했다. 이때부터 선교훈련원을 조직하여 자원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는 선교 현장이 확대되었다. 공산권도 무너지게 되었으며 러시아와 중국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자 동구권과 구소련이 붕괴하여 민족들이 독립하면서 GMS는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선교의 지경의 넓어져만 갔다. 중국의 수천만에 이르는 지하교회 성도들은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선교사들이 투입되고 미전도 종족이 주요대상이 되었고 10/40 창문지역의 관심으로 선교지도와 전략이 바뀌게 되었다. 많은 숫자의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사역하게 되면 자연스레 팀별로 연구하게 되었고 지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당시 80개 국가와 14개 선교지역산하에 53개 지부가 있었다. 현지사역에서는 지도자양성이라는 목표아래 많은 신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유치원사역을 시작으로 학교사역도 하긴 했지만 GMS 선교사 대부분은 한국교회의 요청에 따라 교회개척사역이었다. 그 와중에 빚어진 파행적인 과오는 교회지어주기 사역이었는데 어려운 결과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시기 이후에 GMS 선교본부와 구조에서도 대 변혁을 가져왔다. 우선 선교사 출신으로 경험을 가진 자가 본부 행정을 맡게 되었고 그러므로 지교회들의 총회를 향한 관심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선교사 파송에 수반하는 모든 짐을 개교회가 지고 있다가 신뢰가 되는 구조가 되자 점차적으로 지교회들은 총회선교부에 그 짐을 나누게 된다. 우선 선교비 창구일원화가 생기게 되고 선교사의 복지나 사역의 공동화를 위한 기반이 구축되기 시작한다. 선교사 파송교회들이 모여 해외선교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선교센터 건립위원회, 훈련원이사회 등을 조직하여 선교부 사역을 보완하여 오다가 1998년에는 총회 선교부에서 총회세계선교회 조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상비부에서 총회 직속기관으로 독립하여 선교행정을 독립적으로 하게 된다. 이전 보다 역동적이고 확대되어 성장케 된 것이다.

GMS 본부는 선교사 출신으로 국내사역을 하게 되었고 본부의 실제 업무를 분담함으로 행정의 실제성과 전문성으로 극대화하게 된다. 총회선교부에 있을 때 조직이 10명이었던 것이 본부직원이 40명 정도 될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고 사무실도 총회사무실에서 현재 월문리에 오게 되었다. 이곳에 훈련원시설과 선교사 숙소와 은퇴 선교사 숙소까지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는 복지법인 시설까지 들어오게 됨으로 선교사훈련부터 시작하여 선교사가 사역하다 지치서 노환이 되어 오면 맞이할 시설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의 요람부터 무덤까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GMS는 현재 99개국 2084명의 선교사가 나가 있으며 미국 남침례교 교단 약 5000여명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선교단체가 되었다. 이제는 이 방대한 것을 전문적으로 다 감당하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아래 3부서를 독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선교사 현장을 섬기는 사역본부가 있고 파송교회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본부행정부서가 있으며 선교사 훈련과 연구를 다루는 연구개발센터가 나누어져 있어서 서로 협조하여 사역한다면 조화의 꽃을 피울 수 있다하겠다.

한편 개혁측 교단과 통합함으로 선교사수는 급증했으나 여러 가지 행정적으로 통일을 이루어가야 할 시점에 있다. 각 선교지 대부분에서는 GMS 정책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그 동안 GMS는 미국을 선교지로 여기지 않았으나 이미 구개혁측에서는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문제도 있다. 현재는 지역선교부를 활성화하여 각 지역을 팀선교로 일원화하고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선임선교사들을 지역선교부에 맞게 재훈련을 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9. GMS의 전망과 미래

 

GMS는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는 일을 목표로 하여 세계교회와 협력해 나갈 것이다. 국내외 교단들과도 긴밀한 공조를 해 나갈 것이며 우수한 인재들이 GMS에 들어와서 세계 선교를 주도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는 목사선교사들이 대부분이어서 사역의 편중이 심하다. 21세기의 지식정보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역의 다양화가 심화되었다. 선교사의 개념도 목사, 장기, 주재 선교사에서 단기, 움직이는 선교사들도 대체되어야 할 것이며 평신도도 대거 참여하여 효율적인 조화있는 단체가 되어 갈 것이다. 현재 46개 지역훈련원을 통해 평신도선교사들을 양성하여 한인디아스포라선교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GMTI 정기훈련과 재훈련, 특별훈련과정을 통해 정예요원을 양산할 것이며 앞으로 선교사 복지를 위한 대책마련, 자녀교육, 노후 보장을 마련해 나가는 방향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센터가 개발되어 선교사 행정만 아니라 선교사복지문제도 전국 각 지역 선교지부를 통해 선교사 복지문제를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선교사 안식관 운영과 쉼터운영을 활성화하여 선교사노후복지를 해결해 나갈 전망이다.

사역면에서는 FTT(Finishing The Task)을 하기 위해 미접촉미전도종족을 연구개발하여 개교회마다 입양과 함께 전도하여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하며 섬김의 도로 세계 교회 공동체를 섬겨나가야 할 것이다. 세계 교회에는 125년의 한국교회 역사는 선교중심으로 출발한 교회였으므로 선교에 대한 부담을 늘 안고 존재한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지도자 양성에 치중하여 제 3세계 지도자를 양성하여 그들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일조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