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시진핑은 왜 최치원의 詩를 인용했을까?
한·중 오랜 인연과 교류 강조
최치원, 열두 살에 조기 유학… 당나라 선진문화 신라로 전파
양저우시, 최치원 기념관 짓고 매년 '최치원의 날' 기념해요
얼마 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신라 말의 대석학 최치원(崔致遠: 857~?)의 시 '범해(泛海)' 일부를 소개하여 화제입니다.
최치원은 8~9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자 국제통이었습니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조기 유학을 떠나 빈공진사에 급제하는 등, 당나라가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했던 외국인이었습니다. 최치원이 남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은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이며, 당나라 실록(實錄)을 보완할 수 있는 사료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황소(黃巢)의 난 때 적장(賊將) 황소에게 보낸 격문(檄文)은 명문 가운데 명문입니다. 중국에서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대단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지성인 퇴계 이황, 율곡 이이는 몰라도 최치원은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최치원이 벼슬살이를 한 적이 있는 양저우시(揚州市)에서는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 기념관을 짓고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학자를 이처럼 기리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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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최치원의 시 '범해'는 28세 때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신라로 돌아오면서 항해 도중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득한 대해(大海)에 배를 띄우니 속세에서의 욕망이 덧없이 느껴진다는 내용입니다.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적벽부(赤壁賦)'에서 인간의 존재를 '푸른 바다에 좁쌀 한 톨'로 비유한 것과 비슷한 정취가 엿보입니다. 이런 시정(詩情)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소재가 봉래산입니다. 봉래산은 전설상의 산으로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는 듯, 나도 신선을 찾아보리라"고 한 것을 보면, 최치원은 항해 도중 삼신산을 생각하며 가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시 주석이 인용한 구절은 첫 부분입니다. "돛 걸고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에 만리를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라는 내용입니다. 돛과 바람이 조화를 이루어 배가 만리라도 흘러갈 듯하다는 것입니다. 시 주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구절을 해석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국과 중국이 인연이 깊고 문화 교류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위 구절을 인용했음을 생각할 때,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유구한 전통문화'(長風), 특히 당나라 문화가 최치원 같은 훌륭한 인재를 통해 '주변 제국으로 전파됨'(萬里通)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말기 육두품 출신으로 857년 태어나, 12세 때 당(唐)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6년 만인 18세에 빈공진사에 급제했다. 당나라 말기인 875년 소금장수인 황소(黃巢)가 일으킨 '황소의 난' 토벌에 참전하여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해지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신라로 돌아온 뒤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육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올라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귀족세력의 반대 등으로 좌절되자 은둔을 결심하였다. 유·불·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등이 있다. 부산 해운대의 빼어난 절경에 매료돼 동백섬 바위에 자신의 호 '해운(海雲)'을 새겨 해운대 지명을 유래시켰다.
[NIE 이렇게 해보세요]
[활동 1]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인용한 최치원의 ‘범해’라는 시의 전문을 찾아보세요.
[활동 2] 부산 ‘해운대’ 이름의 유래에 대해 친구에게 설명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