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
(출 8:24-32)
(출 8: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출 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출 8: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출 8: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 8: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출 8: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출 8: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출 8: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출 8: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오리엔테이션
출애굽 40일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지난주일 낮 예배에 출 1장을 통해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난은 희망의 돛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는 출애굽 4장까지 전체의 뼈대를 그려가면서 큰 그림을 그려보았고 샘플로 1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월요일부터는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매일 한 장씩 전체의 핵심 주제를 찾아내어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출 8장 차례가 된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당부한 말씀대로 매일 출애굽기를 한 장씩 읽고 묵상을 하면서 전체 줄거리를 이해한 성도들은 오늘 출 8장의 말씀이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출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게 무슨 메시지를 주실까? 하는 기대감을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서 론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독특한 점 중에 하나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신 존재인 반면에 우리 인간은 백년을 넘기기가 어려운 존재인데 감히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한 종교는 아마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 뿐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경적인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는 나를 낳아 기르신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근원이 미생물에서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고 그의 보살피심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과 잡신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과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축복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러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회에 적대감을 품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이 지으심과 보살핌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불신자들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마귀의 자녀는 어떻게 다른가?를 성경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두 번째 개구리 재앙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때가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왕의 학대에서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보내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한 말씀이 출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그 때 바로가 모세에게 보인 반응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는지요? 평생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상만을 숭배해왔기 때문에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신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반항적인 답변을 하였습니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오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그처럼 무지한 바로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재앙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내리는 중에 제일 첫 번째 재앙이 애굽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나일 강 물이 피가 되게 하여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두 번째 내리신 재앙은 그 나일 강에서 개구리가 엄청나게 올라와서 개구리 천지가 되게 한 재앙입니다.
(출 8:3) “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그때 바로가 애굽의 요술사를 불러 그대로 해보라고 하니까? 요술사들도 모세처럼 똑같이 나일 강에서 개구리가 올라오게 하는 것을 보고 모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술사들이 개구리들을 올라오게는 하였으나 그것을 없애지는 못하였을 때 비로소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해 줄 테니 개구리들이 나일 강에만 있고 올라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애굽 제국의 왕이 이스라엘 노예에게 부탁을 한다고 하는 일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여호와께 개구리가 떠나도록 기도해달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출 8:8)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왜 개구리를 씨를 말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왕궁에서 떠나 나일 강에만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하였을까요?
(출 8:9)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 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부하소서”
그 이유는 바로 왕과 애굽 백성들이 대대로 개구리를 번성을 상징하는 신으로 섬기며 1) 점을 치는데 사용을 하고 2)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다 개구리 미라를 만들어 넣고 3) 개구리가 크눔(Chnum) 신의 아내로 나일 강의 홍수를 일으키는 여신 헤카(Heka)라고 믿고 기념비나 조각품이나 신상으로 만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개구리들이 애굽 전역에 나와서 죽어 그것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으니 거기서 악취가 풍겨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출 8:14)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그러므로 개구리 재앙은 바로 왕과 애굽 사람들에게는 개구리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한 허구성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여호와의 신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기회였습니다.
2. 거듭되는 재앙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바로 왕은 시간이 좀 지나서 악취가 덜해지고 견딜만하게 되자 다시 마음이 변해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로는 개구리 재앙으로 마무리 될 줄 착각하고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그 즉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니 그것이 바람에 날리면서 그것이 이가 되어서 개구리와 달리 애굽 온 땅에 퍼져서 사람과 가축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출 8:17)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
비로소 애굽의 마술사는 그것을 따라서 하지 못하게 되자 티끌이 이가 된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바로에 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것처럼 바로의 마음은 더욱 굳어져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출 8:19)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물론 전국에 애굽 백성들과 가축들까지 이가 생겨서 피가 날정도로 긁고 또 긁어도 시원치 않을 만큼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머리털과 옷 속, 심지어 눈과 코 속까지 기어 들어가 쏘아대므로 피부에 고통스런 자극을 일으키고 마치 여름날의 하루살이처럼 몰려든다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사람에게 달라 붙어 피를 빨아댐으로 그 고통은 말로 표헌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미 요술사들이 이 재앙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리신 권능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이 점점 더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가는 것을 보시고 이 재앙보다더 강도가 높은 네 번째 재앙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파리 떼의 재앙입니다.
(출 8: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이 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파리가 아니라 독성을 가진 파리로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곤충으로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그와 같이 독한 파리 떼가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급속하게 번성하여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애굽 땅 전역을 휩쓸고 있는 파리 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얼씬도 하지 않음으로 자연히 애굽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구분이 될 정도였습니다.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과연 곤충에게도 국경이 있으며, 곤충도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 누가 애굽 사람이며 어디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훤히 꿰는 곤충이 세상에 있습니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애굽 사람이나 짐승들은 아무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애굽 전역이 황폐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출 8: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여기서 ‘황폐하였더라’는 말(tj'v;, 샤하트)은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부패하다’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를 끼치는 파리떼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땅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그동안에는 모세를 무시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파리 떼를 제거할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되면서 모세에게 허락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1)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구태여 광야까지 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 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그러나 그것이 현실 불가능한 이유는 만일 이스라엘의 장정 육십만명이 애굽 땅에서 소나 짐승들을 잡아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린다면 소를 신성시 하는 애굽 사람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큰 충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 8: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 백성이나 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2) 둘째는 모세와 아론이 계속 광야를 고집하며 재앙의 강도가 더해지자 바로는 좀 사흘 길을 고집하는 모세에게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출 8: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모세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조적으로 바로는 모세에게 ‘너희의 하나님’께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거듭되는 재앙을 통해서 점차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가면서 여전히 그 마음이 완악한 상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면 마음을 열고 모세처럼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파리 재앙이 떠나가기를 직접 기도했어야 합니다.
3. 완악한 바로 왕
바로가 모세에게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나를 위하여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를 위하여 ‘너희의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한 것은 진심이 아니라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면피용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로 왕이 모세에게 광야에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하고 자기를 위해 너희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쇼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바로를 떠나면서 더 이상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부탁하고 돌아가서 ‘우리의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파리떼가 일순간에 애굽 전역에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출 8: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출 8: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출 8: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과연 바로 왕은 그 후로 모세와의 약속을 지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을 하였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지칭을 했던 바로 왕은 모세의 기도로 말미암아 숨통이 트이게 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출 8: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마음을 ‘완강하게’라는 말(db'K;, 카바드 )은 ‘무겁다, 짐이 되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뜻하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속은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속은 것이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앙을 물러가게 하는 능력은 모세에게 없고 다만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어리석게 속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너희의 하나님께 간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모세가 바로의 말을 듣고 기도할 때 거절하셨어야 합니다. 거절하시지 않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파리 떼가 물러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도 바로에게 속으신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도 속이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도 우리들처럼 거짓말에 속는 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바로가 여러 번 속일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 볼 때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이미 예고하신 대로 바로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볼 때 하나님도 거짓말에 속으시는 분처럼 생각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미워하실 뿐 아니라 거짓말에 속지도 않는 분입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기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다는 말을 쉬운 성경에서는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바로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의 마음이 간경화증 환자처럼 그의 양심이 돌처럼 점점 굳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로가 그렇게 될 것을 다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거짓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 그르치거나 지연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단이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묘하게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속여 자신을 유리하게 하고자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 때문에 손해를 보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왕이 거짓말을 함으로 일시적으로 파리 떼의 고통에서 벗어 났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바로에게 강도를 높여 파리 떼보다 더 큰 재앙을 차례로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사실을 바로는 깨닫지 못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바로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더 큰 고통과 자멸으로 자초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그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너희의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을 모세처럼 우리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과, 바로처럼 하나님을 너희 하나님이라고 불신하는 사람과의 차별화된 삶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거짓의 영이 온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단은 무엇보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능숙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오늘도 거짓말쟁이 바로와 같은 이단은 정체를 숨기고 기성교회에 침투하여 온갖 거짓말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 거짓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지혜로운 모략이라고 신도들을 쇠뇌하여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하여 맹신도가 되게 합니다. 그 래서 신천지가 아니라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왕 노릇하고 있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은 마치 거짓말 천국처럼 생각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여 유명한 정치인이 되고, 진위를 가리는 법조인이 되고, 심지어 종교 지도자가 되었어도 카멜리온처럼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보다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우상숭배를 금하시는 이유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참신이 아니라 거짓된 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거짓말이라는 말이 1083 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강조하는 까닭은 인간이 그만큼 거짓말에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에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진실보다 거짓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조차 때로는 고의로나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이 튀어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거짓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우리의 약점을 다 아시고 그 죄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병원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방법이 회개입니다. 만병의 대의사되신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마다 십자가의 보혈로 사죄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십니다. 그 시간이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짓을 행하고 있다고 판단이 되거든 그것이 치료 불가능한 중증이 되지 즉시 입원하여 회개함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그 사람의 양심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여기서 ‘화인’이라는 말(kausthriavzw, 카우스테리아조) )은 목장에서 주인이 자기 가축을 구별하기 위해 불도장으로 낙인을 찍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로처럼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은 이미 사단이 ‘내 꺼다’ 손대지 말라고 불도장을 찍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을 모세처럼 우리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과, 바로처럼 하나님을 너희 하나님이라고 불신하는 사람과의 차별화된 삶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오늘 우리는 아무리 천만금이 생길지라도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고, 거짓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지난날의 거짓을 버리고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거짓을 멀리 멀리 내버려야 합니다.
(요일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 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오늘 성경의 모세처럼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바로처럼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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