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의 비결 갈5: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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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며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금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 마음이 많이 퇴색해서 신선한 감동의 맛이 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신령한 감동을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아무튼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은혜를 소멸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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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을 좇아 행하라(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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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성령충만의 비결은 내가 성령을 좇아가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면 가만히 혼자 앉아 있을 때 내 속에서는 육체의 욕심도 생겨나지만 동시에 성령의 감동도 생겨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우리를 장악하려 하거나 종으로 삼아서 우리를 강제적으로 통제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분명히 성령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결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는 주인행세를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내가 선을 택하도록 도우십니다. 내가 성령의 감동을 택하고 육체의 욕심을 버리기로 작정하면 성령은 내 속에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또 나를 깨우쳐서 죄가 얼마나 나쁘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죄의 속임수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무시하지 않고 따라 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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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음 세가지에 대한 믿음이다.
첫째는 나는 여전히 죄인임을 믿어야 한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나와 함께 거하심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성령은 나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내가 죄인임을 믿으라는 말은 이것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감정을 믿지 말고 매사에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결재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흔히 자신의 감정을 성령의 감동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운전이 서툴러서 주차장을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의 감정인지 성령의 감동인지 분간하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안에는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엉뚱하고 비현실적이고 부정확하고 잘못 예측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나를 성령께서 껴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발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을 되찾고 온전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빨리 영적 초보 딱지를 떼고 당당히 대로에 나서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로 인해서 엎치락 뒤치락 할 때 말 없이 우리를 도우시며 기다리시는 분이시지 우리를 죄 가운데 내 팽개치고 우리를 떠나는 분은 아니십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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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느냐고 한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행운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행운이 나의 인생을 역전 시킨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내가 성령의 감동만 좇는다면 나는 항상 나에게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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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체의 소욕을 버리라(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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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육체라는 말과 소욕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육체는 단순히 삶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소욕이란 욕심을 말하는데, 정상적으로 생겨난 욕구나 필요가 아닌 비정상적이고 넘치고 지나친, 그래서 결과적으로 해악으로 작용하는 갈망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육체의 일, 즉 악한 일은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닙니다. 욕심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마비시킵니다. 욕심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마귀는 철저히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쓴 뿌리를 이용합니다. 이 쓴뿌리에서 욕심이 잉태하게 합니다. 욕심이 커가면 사악한 것들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럴듯하고 탐스럽게 보입니다. 그 속에 사악함과 해악과 불행과 병듬이 있지만 화려함이 그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게 숨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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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비결은 이 죄악의 실체를 깨닫고 버리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는 것이지 사실은 이미 이긴 싸움을 계속할 뿐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국지전이 있을 뿐이지 이미 마귀는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욕심은 가짜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속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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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율법 아래 있지 말라(18)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자신이 담당하는 일을 주인처럼 행하지 않고 하인처럼 행하여야 합니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력과 정당성을 스스로 버려야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으로서의 이성, 또는 정당한 권리로서의 자의적 결단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법의 태두리 안에서 자의적 판단으로 법정신을 존중해서 행하는 것은 정당한 행동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나 어떠한 책임도 모면하려는 태도는 스스로를 무능력한 사람이며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 뿐입니다. 그것이 율법적인 태도입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율법의 원리를 깨우치고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율법에 얽매입니다. 주위 시선 때문에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이 벌을 주실까 무서워서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해치우듯이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율법의 의미를 깨우친 다음에는 율법에서 말하는 의도를 알기 때문에 오늘에 알맞게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규칙을 교육 시킬때 지키면 상을 주고 어기면 벌을 주는 식으로만 가르치면 그 아이는 율법적인 사람으로 자라랍니다. 그러면 아이는 규칙을 어겼는데도 들키지 않으면 대단히 이익을 봤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가 좀 더 성숙하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된다면 그 아이는 그 범법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결국 죄인의 양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를 범죄함에 이르게 하고 맙니다. 나름대로는 매우 선량한 사람이지만 결국에는 자기 욕심으로 법조항을 적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행하는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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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겐 법이 없어도 죄를 짓지 않을만한 자기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병자를 살리고 죄를 사하는 선행까지도 안식일의 법을 적용해서 예수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나라를 전복 시키려는 단 하나의 의도나 행동을 범하지 않았지만, 반역죄로 모함을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장본인이 바로 자기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율법을 무시하고 그 법정신을 무효화하러 오시진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법의 의도를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내가 자유를 누리고 안식을 얻으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생활이 율법적이 되면 성령충만은 사라지게 됩니다. 예배드림이 마지 못해서 드림이 되고, 헌금이나 기도나 성경을 읽는 것들이 율법적인 의무감이나 액땜을 위한 것이라면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감동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며, 사랑하는 이웃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생명의 양식을 얻듯이 말씀을 읽으라는 뜻입니다.
예배가 기쁘지 않고, 말씀이 지루하고,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는 듯한 감동이 생기지 않고, 성경말씀을 펼치기가 너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고 진단 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나에게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힘들고 지쳐 있을 때 교회에 와서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면 그는 새 힘을 얻고 안식을 찾게 됩니다. 오직 성령께서 경건생활을 통해서 얻게 하십니다. 율법을 벗어난 경건생활이 곧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행동에서 벗어나야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믿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나와 함께 거하심을 믿고, 성령께서 분명히 나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심을 믿을 때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성령을 좇아 행하고,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율법 아래 있지 말므로 지속적인 성령충만한 삶을 이루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고 이땅에서의 천국의 삶을 소유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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