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기독신문 창간 50주년 연중기획

생명과 생기, 생활 아우르는 ‘청교도 개혁주의’에 철저2. 교단 역사 그리고 정체성 ⑥ 죽산 박형룡의 장로교 신학

미션(cmc) 2016. 7. 30. 06:51

생명과 생기, 생활 아우르는 ‘청교도 개혁주의’에 철저2. 교단 역사 그리고 정체성 ⑥ 죽산 박형룡의 장로교 신학

성경의 진리 세속화 막는 일에 필생의 수고
정통 장로교 신학 지키는 방파제 역할 감당
유형과 무형교회 유기적이며 역동적 관계 주목
온전한 변화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 강조



 

   
▲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조직신학
1. 죽산과 장로교 전통
 
죽산 박형룡 박사는 영미의 보수신학과 대륙의 언약신학을 두루 섭렵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였다. 무엇보다 교단신학자로서, 그는 장로교 신학과 정체(政體)가 칼빈-녹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신앙고백서)를 잇는 개혁주의의 전통이 만개(滿開)하여 핀 꽃과 같다고 여겼다. 죽산은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서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죽산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형식적 원리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실질적 원리를 ‘프로테스탄트주의의 2대 건설적 원리’라고 부르면서 ‘정통신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통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천계(天啓)와 영감(靈感)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하는 초자연적 성경관을 가진다.”
 
죽산은 뛰어난 저술가였다. 그의 펜은 쉼이 없었다. 죽산의 신학적 노정은 단지 조직신학 전권의 저술과 강의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가 다룬 주제는 당대에 논란이 되었던 신학적 사안들, 교역(敎役)과 교정(敎政), 그리고 성도의 삶의 문제들에 두루 미친다. 무엇보다 초기 작품 <기독교 현대 신학난제선평>은 가히 시대를 지로(指路)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는 오늘날도 인구에 회자되는 수작(秀作)이다.

죽산의 신학은 결코 사변적이지 않았으며, 교훈적이면서도 변증적이었으며, 또한 실제적이었다. 그는 성경의 진리가 세속화되거나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라는 이름으로 희석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필생의 수고를 다하였다. 성경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이나 양식을 잣대로 삼아 첨삭(添削)하거나 재편(再編)하고자 하는 고등비평이나, 비(非)성경적이고 반(反)교리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하는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이러한 엄정함 가운데, 죽산은 이성적 전제에 매인 모호한 신학이 아니라 성경의 자증(自證)을 전제하는 역사적 개혁주의에 서서 장로교 신학의 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2.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자유주의 비판
 
1907년 개교한 평양신학교는 미국 4개 선교부의 대표를 포함한 선교위원회가 운영하던 학교로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역사적 칼빈주의를 토대로 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을 수납(受納)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여겼다. 이러한 입장은 핫지(Charles Hodge)와 워필드(B. B. Warfield)로 대변되는 프린스턴 신학교 구학파의 신학과 맥이 닿았다.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이러한 기치를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시켜갔다.

19세기 말 국내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입국한 시점은 대체로 미국 선교의 황금기에 해당하며, 국내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논쟁이 총회적 사안으로 점점 첨예화되어 가던 1920년대 이후 시점은 미국에서 근본주의 논쟁이 심하게 일었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 국내의 주요쟁점은 과연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용인하면서도 완전축자영감설(完全逐字靈感說)에 서서 성경의 무오(無誤)와 무류(無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신학의 문을 자유롭게 열어둔 상태에서 보수적인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에 있었다. 죽산은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때부터 생애 전반에 걸쳐 이러한 신학 논쟁의 중심점에 서서 정통 장로교 신학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감당하였다.

죽산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무오를 믿지 않으며, 계시신학을 버리고 자연신학을 좇고, 철학적 불가지론 혹은 회의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신비주의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절대시하지 않고 종교다원주의에 편승한다고 비판하였다. 죽산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계시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성경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로 여기지 않고, 단지 신의식(神意識)이나 공동체의 선(善)을 가늠하는 자료 정도로 여기는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의 내재주의와 리츨(A. Ritschl)의 윤리주의를 자주 도마에 올려 비판하였다.

죽산은 신정통주의를 대변하는 바르트(K. Barth)에게는 성경이 없다고 단언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성경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경은 계시가 아니라 계시의 자료에 불과할 뿐이며, 성경이 계시가 되는 것은 실존적 체험과 해석을 통하여 의미가 부여될 때이다. 성경을 계시로 여기지 않으니 계시를 절대적, 객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계시의존신앙(啓示依存信仰)이 인정될 리가 없다. 이렇듯 정곡을 찌르는 비판을 통하여 죽산은 바르트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도,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참 믿음도 없으며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언약의 공동체로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죽산은 1960년대 이후의 비정통적인 신학을 통칭하여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구속사에 대한 실존적 이해를 강조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세속적 가치에 부응하는 신의 존재와 사역을 말할 뿐인 사신(死神)신학,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와 그 역사 자체를 혼동한 몰트만(Jürgen Moltmann), 역사로서의 계시를 계시로서의 역사와 동일하게 여겨 구속사를 일반사와 다를 바 없이 보편화시켜 버린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범신론에 진화(進化) 개념을 추가하여 하나님을 생성 가운데 있는 존재로 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과정신학이 포함된다.

3. 유형(가시적) 교회와 무형(비가시적) 교회의 유기적 역동성

 죽산은 이러한 신학적 변증을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기회를 삼고자 하였다. 죽산은 장로교의 정통성을 가장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여기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고 불리는 돌트(Dort) 신경의 가르침은 모두 예정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했다. 죽산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7문과 <신도게요서> 제3장을 수시로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도 제한도 없으며 오직 그 분의 주권적 작정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선택이 ‘보편적 무형교회’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대속을 전제한다. 선택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을 백성을 정하심이다. 그 백성이 ‘주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는 <신도게요서> 25장 1조를 정확히 반영하는 입장이다.
 
“무형한 공동 즉 보편의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피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는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며 충만이다.”
 
교회가 본질상 ‘신도의 교통’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한 분 그리스도의 동일한 의를 공유하는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상 ‘신도의 교통’으로서 ‘신도의 모(母)체’가 된다. 교회의 근간은 성도의 회개에 앞선 소명에 있으며 믿음에 앞선 중생에 있다. 교회는 공동으로 부름 받은 소명체이다.

죽산은 소명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무형교회’가 ‘보편적 유형교회’의 존재를 담보한다고 본다. 보이지 않는 머리요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보이는 교회를 그의 지체요 신부로 이 땅에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은 이단시된다.

죽산은 개혁주의 입장을 좇아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를 분리해서 보지 않고 그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관계에 주목하고, 장로교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여기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지상에 존재하는 대로의 교회가 유형적이며 무형적’이라고 말한 칼빈의 말을 부각시키면서, 무형교회는 택함 받은 자들의 총수이고 유형교회는 ‘참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고 한 <신도게요서> 25장은 한 교회의 양 측면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4. 오직,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죽산은 교회의 본질을 논할 때 유형교회나 무형교회의 어느 한 쪽을 앞장세울 수 없는 것은,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여전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신인(神人)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기원은 오직 아들의 대속적 공로 위에 기초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를 성도의 고백 위에 세우신다(마 16:18). 그리스도는 교회의 ‘언약적 머리’시다. 그는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역사적 언약을 역사상 성취하셨다. 그 분은 이제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우리가 자라가게 하신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 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 곧 성도 서로 간에 하나가 되는 유일한 길이 된다. 각각의 성도는 무형교회의 일원이지만 유형교회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교회의 직분은 권리이자 의무이다. 장로교의 직분론이 여기에 터 잡고 있다.

죽산은 장로교의 기원을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4권 교회론에서 찾는다. 그가 청교도적 삶을 장로교의 요소로 강조한 것은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성도의 확신이 경건의 출발이라는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는 구원을 다 이루시고 지금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죽산은 장로교의 고유한 특성은 언약의 백성에게 전가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각자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생기를 더하여 생활도 온전히 변화시킨다는 점을(롬 8:30, 32; 요 17:23; 히 10:14; 겔 37:5-6), 즉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롬 1:16) 우리의 전 생명과 삶, 만방, 만물에 미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있다고 본다. 이렇듯 죽산의 신학은 생명과 생기와 생활을 아우르는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서, 그가 한국 장로교회를 정의한 ‘청교도 개혁주의’에 철저히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