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29년 10월 10일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간의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비엔나 전투였다. 전력은 신성로마의 오스트리아 군이 2만여명으로 오스만제국의 12만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비엔나의 상징인 거대한 고딕 건축물 스테반 성당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숙영지로 변했다. 이슬람의 오스만 군대는 비엔나 성을 포위하고 총공세로 나아왔다. 전쟁이 상승곡선을 그리던 10월 비엔나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10월의 눈이었다. 가을전투만 준비했던 오스만 대군은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다.
당시 1529년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동생 페르디난드를 시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열개하여 루터파를 불법으로 선고한다. 여기에 분노한 개신교 영주들은 황제의 대리인 공작 페르디난드에게 항의문을 제출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브름스 칙령을 정지시켜 관용을 허락한 이전 합의를 존중해야 하며 신앙이란 양심과 자유의 문제이므로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 항의문 제목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에서 개신교회를 상징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유래했다. 황제 카를 5세는 독일 개신교 영주들을 처단하려 했지만 1529년 10월 오스만제국의 술탄 슬레이만의 군대가 헝가리를 장악하고 비엔나까지 쳐들어 왔기에 개신교 핍박을 미루어야 했다.
1530년 오스만 군대가 물러가자 카를 5세는 또 다시 루터파를 핍박하고자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개신교 루터파를 대변한 학자가 루터의 동료인 멜랑흐톤이었다. 이 때 제출한 신앙고백서가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이었다. 이러한 때 또 다시 오스만제국은 유럽침공을 계획하면서 1538년 그리스 북서해안 프레베자에서 카를 5세의 제후국인 스페인, 제노아, 베니스 공국은 교황의 이탈리아 군대와 신성동맹을 맺으며 오스만과 해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 전투는 오스만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카를 5세는 오스만의 슬레이만 대제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는다.
개신교가 뿌리를 내리던 1530년대 오스만과 신성로마제국의 대치국면은 개신교 확산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 전능자의 은총이었다. 이슬람의 비엔나 전투와 프레베자 해전이 생존의 위기에 놓였던 개신교도들을 구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