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
* 다음의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펴낸 「다시 보는 성경」에 있는 글입니다. 무단으로 복제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직분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 직분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아니며 순서대로 수행하십니다. 그분의 대언자로서의 사역은 창조 때부터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이미 수행하셨고, 제사장로서의 사역은 승천하신 때부터 교회가 휴거를 받을 때까지 수행하십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사역은 7년 대환란의 마지막 시기에 땅에 재림하시는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께 왕국을 넘기사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 행하실 것입니다(고전 15:20)
대언자로서의 사역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분께서는 이미 대언자로서 많은 예언을 하셨지만 본격적으로 대언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은 성육신 이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이미 오래 전에 오시리라고 예언한 바로 그 대언자였습니다. "네 주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서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신18:15) 한편 사도 베드로도 성전에서 행한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언자임을 선포하였습니다(행3:19-26)
대언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친 말씀들 속에는 예언적인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특히 "올리브 산에서의 말씀"(마태복음 24:1-25:46)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승천한 뒤부터 재림할 때까지 일어날 사건들을 요약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언자로서 행하신 그분의 사역 중 가장 큰 것은 계시를 통해 팟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장차 올 일들에 대한 모든 비밀을 세밀하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계시에서 주님은,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교회의 역사와 7년 대환란에 있을 무서운 고통, 아마겟돈 전쟁, 사탄의 결박, 희고 큰 왕좌의 심판, 불로 땅을 정화시키는 것,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 등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백성의 죄들을 사해 줄 짐승의 피를 가지고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께 중보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구름의 휘장을 지나 땅에서 보이지 않게 되면서 하늘의 장막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회막이나 성전)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9:24)
현재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는 곳은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그분은 단 한번도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습니다. 비록 그 곳에서 가르치기는 하셨지만 희생을 드리거나 향을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장막이나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물이나 의식은 드리는 자들을 완전케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완전케 할 수 있었더라면, 더 이상 예물을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와 모형에 지나지 않습니다(히10:1-3). 그 대표적인 예가 속죄일입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홀로 거룩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예복을 벗고 물로 몸을 씻은 뒤 아마포 고의를 입고, 아마포 띠를 띠며 아마포로 된 미트레관을 씁니다. 그리고 분향의 단에서 취한 석탄을 향로에 채워서 휘장을 지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석탄 위에 향을 올려놓아 연기가 나게 하고 향연으로 계약의 궤 위에 있는 긍휼의 자리가 가려지게 합니다. 긍휼의 자리를 가리지 않으면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빠져나와 회막 뜰로 나오고 회막 뜰에서 자기와 자기 집을 위해 죄헌물로 소를 잡고, 그 소의 피를 취하여 다시 휘장을 지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피묻은 손가락으로 긍휼의 자리 앞에서 동편에 일곱 번 뿌림으로써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해 속죄를 합니다. 그런 다음 대제사장은 회막 뜰로 다시 나와서 속죄 헌물로 제비 뽑은 염소를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세 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가 소의 피를 뿌린 것과 마찬가지로 염소의 피를 뿌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뜰로 나와서 놋단으로 가서는 먼저 단 귀퉁이 뿔들에 수송아지와 염소의 썩은 피를 바르고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그 단을 정결케 합니다.
이어서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라 불리는 살아있는 염소를 취해 그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은 뒤 이스라엘의 자녀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자녀들의 죄들을 속죄 염소의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뒤 그는 적당한 사람을 시켜 그 것을 내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법을 짊어진 염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보냄을 받아 그 곳에 남게 됩니다.
대제사장였던 아론은 다시 성막의 거룩한 곳으로 돌아와 아마포 옷을 벗고 몸을 씻은 뒤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예복을 입고 회막 뜰로 나갑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죄헌물을 받으셨는지 받지 않으셨는지 궁금해하며 기다립니다. 만일 그가 예상보다 더 오래 지체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헌물을 거절하시고 대제사장을 죽이시지는 않았나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 뒤 그들은 대제사장의 옷 끝에 달린 종에서 소리가 나는가 들어보고 그 소리가 나면 하나님께서 헌물을 받으신 것을 알게되어 안도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은 영광과 아름다움의 예복을 입고 나와 놋단으로 다시 가서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태운 헌물을 드리는데 이것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다시 청결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그러면 이제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행한 일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사(빌2:5-8) 영광과 아름다움의 예복을 벗고 수종들기 위해 인간의 아마포를 입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서 지성소에서 향을 드리거나 혹은 자기를 위하여 소를 속죄물로 드리는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분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 죄헌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속죄 헌물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두 가지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죄헌물이 되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시어 구름 휘장을 지나 하늘의 장막 안에 있는 지성소로 승천하사 세상의 죄를 모두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의 피를 헌물로 드리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 마리의 염소를 사용한 것으로 예표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염소는 속죄의 헌물이 되어 죽임을 당했고, 두 번째 염소는 '속죄 염소'가 되어 백성의 죄를 뒤집어 쓴 채 광야로 쫓겨났습니다(레16:8-10, 20-22)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일년에 단 한번 지성소에 들어갔으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에 있는 장막의 지성소에 단 한번 들어가셨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께서는 창세 이후에 매년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셔야 했을 것입니다(히9:26).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베일 안으로 자신의 피를 가지고 가서 현재 그 곳에 머물러 계시며 대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이 큰 속죄일이 끝나게 될 때 주님은 대제사장의 옷을 벗고 대신에 왕의 영광 중에서 자리하고 다스리기 위해 영광과 아름다움의 왕복을 입고 오실 것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에는 대제사장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헌물을 계속해서 드려야하기 때문에 앉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속죄물로 단 한번 드린 뒤에 하나님의 왕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히12:2). 이 왕좌는 현재 세대에서는 은혜의 왕좌입니다. 사도행전 7:55, 56에는, 스테판이 죽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선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께서 그 때까지 앉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배척을 받을 때까지는 자신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유다인들이 최종적으로 그분을 배척한 것은 스테판이 유다인들을 목이 곧고 성령님께 대항하는 백성이라고 고소하자, 그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때 절정에 달했습니다(행7:51).
현재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1. 중보자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즉,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세우셨다고 말했습니다(딤전2:3-6). 그분께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를 위하여 중보자가 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기 위해 반드시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과 사람의 본성을 모두 가진 '하나님-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사역을 마치신 뒤,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도 인간의 모든 품성을 지닌 채 가셨고 지금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늘에 계십니다(딤전2:5).
2. 변호자
요한1서 2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짓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서신서가, '나의 자녀들'과 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오직 의로운 자들에게만 변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며 변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재판이 끝나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리고 판사가 사형 집행일을 선언하면 변호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변호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면장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그러므로 모든 죄인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중재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변호하실까요? 죄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죄는 이미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저지른 죄들에 대해서 변호하십니다(요일2:1).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변호자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도 죄들을 짓기 때문에 아버지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법을 어겨 고소를 당하게 되면 제일 먼저 변호사를 찾습니다. 변호사는 그의 입장을 판사에게 대변하고 호소해 주며 공평한 판결을 받게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도 죄들을 짓게 되면 변호자가 필요합니다.
죄인들이 범하는 죄들과 믿는 자들이 범하는 죄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짓는 죄들을 한결같이 미워하시고 특히 믿는 자들의 죄들은 더 미워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빛을 받고도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은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들의 죄를 다루시는 방법에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과 종을 보내 각기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비효율적이어서 일을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참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들과 종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고 특히 아들은 종보다도 더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종을 해고시키고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이제 그 종은 주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도 종처럼 해고시키고 집밖으로 쫓아낼까요? 상속자로서의 권한을 박탈해 버릴까요?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야단치고 용돈을 줄이고 또 종에게 한 것보다 훨씬 엄한 벌을 내릴 수는 있어도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아들이라는 신분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신분을 가졌다고 해서 죄를 짓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므로 죄를 지으면 변호자를 주시는 특혜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아들로서 죄를 짓는 것이 믿지 않는 자로서 죄를 짓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물론 저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므로 더 많이 죄를 짓자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왕으로서의 사역
그리스도께서 장차 행하실 일은 왕으로서의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로서의 일을 마치면 하나님 아버지의 왕좌를 떠나 자기와 약혼한 신부인 교회를 만나기 위해 이 땅의 대기권 안으로 내려오십니다(살전4:15-18). 그리고 자신의 신부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앉아 성도들을 심판하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주고 티나 주름이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영광스러운 교회 만들어 자기 앞에 둡니다(엡5:27). 그 다음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게됩니다(계19:6-9). 이 혼인 잔치가 끝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왕국을 넘겨받고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상으로 오사 아마겟돈 전쟁을 벌이고(계7:11-21) 그 후에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아서 민족들을 양과 염소 민족으로 나누는 심판을 행하십니다(마25:31-46). 그 다음에야 비로소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갈 무렵 사탄은 바닥 없는 구덩이(무저갱)에서 잠깐 놓임을 받고, 대배교를 일으키나 곧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악한 자들을 소멸하십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도 불사르십니다. 그런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거기에는 옛 땅에서 거하던 의로운 민족들이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어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왕국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됩니다(고전15:28).
통치자 메시아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아들이 영원히 다스릴 한 왕국을 지상에 세우려고 하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나단 대언자를 통해 다윗 왕에게 주어졌습니다.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좌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
후에 하나님은 이 약속을 맹세로써 더욱 굳건히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씨를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좌를 대대에 세우리라"(시89:3,4).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니 그의 씨는 영원히 견디며 그의 왕좌는 내 앞에서 해처럼 되리라"(시89:35).
이 계약은 무조건적이었으며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재확인되었습니다.
"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렘33:17).
그러나 이 약속이, 다윗의 왕좌 위에 앉을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 왕국은 두 개로 나누어졌고 주전 587년에 유다의 마지막 왕이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다윗의 씨에서 나오는 미래의 왕으로 다윗 왕의 위에 앉을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대언자는 이 미래의 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주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이 예언의 말씀을 다음의 여러 말씀들과 비교해 보면 이 왕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주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거하시리니"(사11:1,2).
이 두 구절에 '가지'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또 "주의 영이 그 위에 거하시리니"라는 말씀과 다음의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며, 영이 점차 강해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
한편 메시아는 다윗의 계보에 속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보에 속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문제를 풀기 전까지 이것은 수수께끼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후에 이사야는 마치 자기가 처녀가 아기를 낳은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어깨에는 정부가 있고 그 이름은 경이라,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라.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서의 그의 정부와 평화의 증가함이 끝이 없으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명하시고 굳게 세우시리라"(사9:6,7).
이 구절들을 푸는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자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한 도시에 가서,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 하는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가 그녀 있는 곳에 들어와 말하되, 크게 은총을 입은 이여, 평안할 지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니,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하니, 그녀가 그를 보고 그 하는 말에 불안해하며, 마음속으로 이 무슨 인사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말하되,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위대하게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것이요,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눅1:26-33). 어떤 사람들은 대언자 이사야가 말한 '처녀'가 그 당시의 어느 여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주장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마1:22,23). 처녀 탄생에 대해서는 "경건의 신비"를 다룬 제10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다윗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아들이며 다윗의 왕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분이라는 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해 주는 더 결정적인 증거로서 구약 성경은 그분의 탄생의 사실과 장소 뿐만 아니라 탄생시기도 언급합니다. 다니엘서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지으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 메시아 통치자가 일어나기까지 69주가 지나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단9:25).
이 구절에는 "69주"라는 명확한 시간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 "69주"(weeks)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지으라는 명령"이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제6장에 있는 "다니엘의 칠십주"에 대한 그림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지으라는 명령은 느헤미야 2장 1절에 있는 것처럼 아르탁세르세스 왕 20년 니산월 즉, 주전 445년 3월 14일에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통치자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는 주후 30년 4월 2일 종려 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들간의 시간 차는 실제의 69주를 훨씬 넘습니다. 445와 30을 더하면 475 즉, 두 사건 사이에는 475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성경 안에 여러 가지 시간의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에는 시, 일, 주, 달, 년, 때, 또 때와 때를 나눈 때 등이 있습니다. 지혜롭게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동일한 척도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척도는 무엇일까요? 민수기에 그 척도가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곧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불법을 질지니"(민14:34). 이것은 또한 에스겔서 4장 6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년이니라."
그러므로 주님의 척도는 하루가 1년입니다. 이제 이 척도를 "다니엘의 70주"에 적용시켜 봅시다. 예루살렘을 지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날로부터 메시아의 입성 때까지는 69주이므로 69 곱하기 7(1주일)을 하면 483일이 나옵니다. 만일 하루가 1년이라면 이는 483년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전 445년부터 주후 30년까지는 475년으로 483년과 475년 사이에는 8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우리는 한 해가 정의에 따라 여러 날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력으로 1년은 354일이며, 유다인들의 역년은 360일이고, 양력은 365일이며,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1년은 365일이며 4년마다 한번씩 하루를 더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달력에 따라 계산해야 될까요? 그 열쇠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에서 24절과 8장 3, 4절에는 노아의 대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대홍수가 시작된 2월 17일부터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7월 17일까지의 5달이 150일이라고 되어있으며, 따라서 1달은 30일이고, 1년은 360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예언의 연대를 따질 때 1년을 360일로 계산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연대에 따르면, 주전 445년부터 주후 30년까지의 475년이란 기간은 1년을 365일로 하는 태양력에 따른 시간입니다. 실제로 주전 445년과 주후 30년을 포함하여 계산하면 태양력으로 476년이 됩니다. 이 476년에다 태양력의 1년 날수인 365를 곱하면 173,740일이 되고, 여기에 윤년에 따른 119일(476 나누기 4)을 더하면 총 173,859일이 됩니다. 이 수치에다 3월 14일부터 4월 2일까지의 날수인 20일을 더하면 총 173,879일이 됩니다. 이제 이 173,879일을 성경 예언의 해석시 적용 할 1년 날수인 360으로 나누면 하루가 모자라는 483년이 됩니다. 따라서 69주는 483일이며 1일을 1년으로 치면 69주는 곧 483년이 됩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69주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 한 주후 30년 4월 2일에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예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 다니엘의 70주에 대한 예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메시아를 고대했을 것이며 그분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통치자 메시아가 오는 것을 언급하는 바로 그 구절의 말씀은 다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육십 이 주후에 그가 끊어질 것이나,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은 아니며"(단9:26).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끊어진다면, 그가 다윗의 왕좌를 받아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며' 그의 왕국은 끝이 없으리라'는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은 단 하나 뿐이 없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첫 단계에서 고난받는 구세주로,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왕으로 오셔야만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바로 성경의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고난과 메시아의 영광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벧전1:11). 그들은 어떻게 메시아가 강력한 왕이 되면서 동시에 자기 백성의 죄와 불법으로 인해 끊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바로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유다인들은 시편 16편이 메시아에 대한 것으로 인정했지만 10절에 예언되어 있는 예수님의 부활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버려두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설교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일을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되, 그분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고 그분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다, 하더니,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1,32).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바로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며 따라서 다윗의 왕좌에서 다스리실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 왕국을 취할 때가 오기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다윗의 왕좌는 땅 위에 있었으며 하늘이나 영의 세계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에 다윗의 왕좌에 앉아서 통치를 하고 있고 왕국은 영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의미를 크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현재 다윗의 왕좌는 비어 있으며, 또한 지난 2,500년 동안에도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을 때가 오면, 다윗의 왕좌가 다시 세워지고 그리스도께서 그 위에 앉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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