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17쪽)
1534년 칼빈은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이 문제가 되어 방랑 길에 올라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1535년 1월에 바젤로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케도릭으로부터 잔인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유명한 기독교 강요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를 본 많은 학자들이 그를 '복음주의 신앙의 최상 위에 있는 개혁파 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라 하면서 극찬을 했다.
케도릭에서는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하고 말살하려 했지만 복음 주의자들은 이 책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진리의 변호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의 첫 출판으로부터 23년 동안 끝임 없이 수정 개정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출판은 1536년에 시작이 되고 그의 마지막 출판은 1559년에 마쳣는데, 그 두 사이에 사상적인 변화와 차이가 전혀 없었다. 즉 성경에 관한 지식은 점점 깊어졌으나, 처음의 사상과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그가 처음부터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학식을 가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성경에 입각하여 추호도 틀림이 없는 상태에서 첫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칼빈의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심원한 지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저자의 특징이 되는 충실한 해석과 조직화를 위한 세심한 관심" 등을 보게 된다.
만일 이 저서가 없었다면 루터가 죽은 후 신교는 극심한 신학적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말씀 위에 바르게 선 교회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1. 기독교 강요의 역사
초판은 1536년 1월에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Christian Religions Institutio)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초판은 총 6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4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 전으로 되어 있고(루터의 요리 문답 순서에 의해 배열) 5장과 6장은 논쟁적인 기술 법으로 거짓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기록을 했다.
5장에서 그는 이제까지 성례 전이라고 불리는 케도릭의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등이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말했다.
1년이 못되어 라틴어로 쓰여져 소수의 사람밖에 볼 수 없었던 초판이 매진되고 1539년 새로운 라틴어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 때 그는 책이름을 바꾸어 (Institutio Christian Religions )라고 했고, 6장이던 것이 17장이 되었다.
재판에서 칼빈은 그 서두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그는 삼위일체론을 상당히 확대해서 해석했다.
1541년 재판이 나온지 2년 후에 기독교 강요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이 책을 번역 출판했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스의 고전이 되었다.
1543년 그는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를 다시 출판했다. 그리고 1545년에 이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다. 세 번째 판은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 증보판에서도 서약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것들을 논했다.
프랑스 판이 나온지 5년 후에 즉 1550년에 또 증보된 라틴어판이 나왔으며, 1551년에 프랑스 번역판이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 해 다시 재판을 만들었다. 1550년과 1557년 사이에 이 책은 무려 7판을 출판해야 했다.
1550년 판에서 그는 성경과 그 권위, 성자의 형상 예배, 양심에 관한 설명을 했다. 그는 새로운 판을 낼 때마다 새로운 인용문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고대의 저작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독교 강요의 결정판은 1559년 라틴어판과, 1560년 프랑스어 판이다. 이 때 칼빈은 四日熱이라는 병에 걸려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의 저서를 계속 精査하여 증보하므로 21장에서 배가되는 80장이 되도록 하여 증보판을 냈다.
2. 기독교 강요의 목적.
앞에서도 말했듯이 케도릭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급히 이 책을 출판하게 된 또 다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1534년 7월 17일 밤에 일어 난 벽보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느카텔(Neuchatel)교회 목사인 '앙트완느 마르코르트'(Antoine Marcourt)에 의해 벌어진 일이 였다. 그는 미사의 남용을 비판하는 벽보를 사방에 부착했는데, 그 내용은 "유일하신 증보 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라는 것이 였다. 그의 논조는 매우 날카롭고 실랄 했다. 로마 케도릭은 이 일을 빌미로 여러 명의 복음 주의자들을 체포 화형을 시켰고 그 첫 번째 순교자는 '바델르미 밀론'이였다.
이 사실이 유럽 전역에 전해지자 독일 교회는 크게 개탄하고 폭군들의 폭력을 성토했다, 그러자 케도릭에서는 자기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로 가득한 야비하기 그지없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야비한 폭력이 제세례파에 의해 감행되었으며 그 폭도들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야욕을 가지므로 자행된 것이라는 모략이 였다. 독일과의 관계를 중하게 여겼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독일 교회와 국민들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정당화 하는 선언을 1535년 2월 1일에 공포했다. 그는 이 잔인하기 짝이 엇는 살인은 제세례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했으며,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거짓 말에 대해 칼빈은 크게 분노해서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글'을 이 저서의 첫머리에 기록했다.
여기서 그의 기독교 강요 강요를 기록한 두 가지 목적이 나타나 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능한 한 단순하고 쉽게 기록하고 조직화하므로 써, 그리스도교를 탐구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으나, 라틴어로만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질 수 없었으며
둘째는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3. 그가 죽기 전 5년까지 줄기차게 저술을 계속했는데, 그의 이런 저술은 그의 독창적인 특징이 있지만, 그가 다른 개혁자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개혁자들은 어거스틴, 루터, 쭈빙글리, 멜란히톤, 부처 등이 였으며 칼빈은 그들의 사상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했다고 해도 잘못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신학자들의 저술이나 사상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의 제일 되는 신학적 원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했고, 구약에 대한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성경에 대해 완전히 깨달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며, 사상적으로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고전들을 많이 인용했다.
칼빈이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곡해한 잘못된 생각이다. (신복윤)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생략
제 1 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75쪽)
주: 하나님의 존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지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 우리 가진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먼저 자기 자존적인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 (행 17:28)하고 있게 된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바르게 살펴 볼 수가 없으며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은사 중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들 자신의 존재 자체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이 축복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올라감을 얻게 된다.
실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빈곤은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들어낸다. 특히 아담의 타락은 더욱 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들의 영적 굶주림과 결함으로 인한 공포는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찾게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알도록 자극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라도 얻게 된다. 우리들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관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한,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며, 잊어버리고 있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해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즉 우리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한 깨달음 들은)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빈곤, 또는 어리석음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지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가 있다.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이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만은 인간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런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위선으로 기우려 져 있으며,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허한 의의 형상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부패해져서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신이 인간 부패 내에서만 모든 것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속과 주위가 마치 깨끗한 것처럼 느껴져,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즐겁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검은 것밖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에 히끄무례한 것이나, 갈색인 물체를 보았을 때, 완전한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과대 망상증에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더욱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 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을 본다면 아마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선을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눈을 들어 태양을 처다 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후에 우리가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이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을 영적 은사를 생각할 때도 적용된다. 우리가 이 지상 넘어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산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半神的적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의 절대 완전함을 생각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모든 것들이 최대의 불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것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던 것들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탈을 쓰고 있던 것들은 가장 비참한 무력 자로 증명될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를 당한다고 성경이 말하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서(인간의 부패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완전하며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다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실의 사례들을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삿 13:22; 사6:5, 1:28; 삿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함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함과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된다.(욥 38:1 이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18:27)에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곁 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13) (모세, 이사야, 사도 요한 등에게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되었거늘(사 6:2), 하물며 부패하고(욥 13:28), 버러지에 지내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사 24:23)
곧 주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나타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진다는 것이다.(사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해도 먼저는 전자에 대하여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제 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의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 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전하였더라면, 우리는 자연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기초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현재와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 증보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 시키시지 아니하는 한, 하늘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들에게 체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신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고후 4:6 참조) 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 우리는 여기서 전자(자신을 창조주 나타내신 하나님)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신 하나님)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한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성결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믿지 않은 한)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기대하며, 그에게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돌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를 낳게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바르게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을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단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누리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은 헛된 생각의 장난질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안내자가 되고, 교사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일체의 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음으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함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받쳐지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지 못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믿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음으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로써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여 행동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이 매우 무서운 것이지만, 그런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사람을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신자에게 여생의 상급을 주시고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몸서리쳐 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고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되 아무 끝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허식으로 흐르고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 박혀 있었다.
본 문 : 롬 1:8-15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징
하나님은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지각을 주셨다. 이것은 아무도 무지를 핑개삼아 하나님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는 이 하나님를 아는 지식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칼빈은 그의 주석 요 1:5에서 "부패한 인간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두가지 빛의 요소가 있다. 그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인 씨앗이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를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으나 하나님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를 경배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들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는다. 사람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증거는 많다. 특히 문명인들 보다 원시적인 사람들에게 그 증거가 많이 있다. 짐승과 다를바 없는 생활을 하는 미개인들은 그들 속에 종교적인 씨앗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없는 곳은 없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좋은 실례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좋은 증거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하는 종교적 행위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를 아는 인식을 부인하고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타고난 천성적인 버릇을 고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와같은 전재 아래 인간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우매한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들이 만든 하나님를 믿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같은 종교적 사교 집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를 찾는 본성 속에 씨앗이 새 봄에 굳은 땅을 뚫고 움을 돋듯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없었다면 오늘의 하나님를 믿는 기독교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속여 사교 집단으로 만드는 거짓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기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종교를 부인하고 하나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오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 속에도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있어서 가이우스 칼리쿨라(Gaius Caligula)-로마 황제, AD 37-41까지 로마를 다스린 Tiberius Caesar의 증손-는 방자하게 하나님를 부인하고 기독교도를 핍박한 사람이였지만 천둥만 처도 벌벌 떨면서 침대 밑으로 숨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우수꽝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피해 보고자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하나님를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온 갖 구실을 찾지만 그럴 수록 더 하나님의 두러움이 떨게된다. 그들이 그들의 양심의 두러움에서 잠시 놓임을 받는 것은 술이 취했을 때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다.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에 쫒기는 자의 두러움에서 피할 수 없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의식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람이 나면서 부터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인간의 골수와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처도 이 하나님의 의식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것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종교는 점점 개량되고 왕성해 진다. 이 세계를 주장하는 사단은 될 수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지식을 몰아 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예배를 부패하게 하려 온갖 짓을 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왕성하고, 하나님를 섬기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학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모태에서 부터 터득한 하나님를 부인하는 지식이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살아 가는 목적이 하나님를 인식하고 그 분을 섬기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이런 본연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괴로움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을 거스려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며, 그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플라톤(Plato)의 말을 아주 잘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악을 피하고 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라고 했다.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낳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끝임없는 불안과 혼란과 불안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를 경배하는 것 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영생을 동경하게 된다.
제 4장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에 의해 질식 부패되었다
1. 迷信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것은 인간 경험이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소중한 씨앗을 자리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에 한 사람 정도도 안된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하여 때 가되면 열매를 거두도록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3 참조) 게다가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버렸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으며 그 맹목은 항상 거만한 허영으로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수준 이상의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을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발을 내디디던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발언을 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롬 1:22)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 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우준 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 졌다고 부언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 뿐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53:1)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 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끄며,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자들에 대한 말이다.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生來的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 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시의 본질을 아직 제거하시지 않으셨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개으름뱅이로 가두어 둠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 역시 운명에 마끼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게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 (마 13:14-15; 사 6:9-10; 시 17:10 참조) 다윗은 자기의 사상을 가장 잘 해석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1)라고 말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했다(시 10:11).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해도, 그들이 인정하는 신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한다. 바울이 증거 한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딤후 2:13)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잇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슬려 싸우며, 하나님을 그 의식에서 몰아 내고, 천상에서 파멸되기를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 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미신에 애한 변명과 공허한 변호가 허물어진다. 그것은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부니 없는 것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시하시다 는 것,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亡靈 혹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얼마나 조롱하려 하고 있다는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들을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마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강퍅한 그들의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 였다고 했다(엡 2:12).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던, 다신을 생각하던,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음이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은 우상이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라고 말 할 수 없다고 단정해야 한다.
4. 僞善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강요를 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지 전까지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의 말은 이런 종류의 무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은 잘 부함이 되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심판하기 위한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심판대가 없어지기를 열심히 염원한다. 그런 심정으로 심판하시지 않고는 참으실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을 부패하는데 열심이며, 악에 악을 더하여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체 위장하여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않고 자기로 만족하며,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에 빠지길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런 혼란한 지식과 정교의 기원인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로지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런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 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심이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 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데 팽개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더 신뢰한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이런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들을 얽어맴으로써 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였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꺼져 버리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씨앗이 매우 부패해 있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하는 나의 주장은 더욱 명백해 진다. 이는 遺棄者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온한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회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 속에 엄습해 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형식적이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들이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제 5 장: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지식은 우주의 창조와 섭리에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본문 : 시 139:15
1. 하나님의 自己 顯現은 명백하여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사람의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서 제외시키시지 않기 위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이 알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모습이 그의 창조물에 너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시 104:2 "주께서 옷을 입은 같이 빛을 입으시며"라는 말씀은 이런 하나님을 잘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하시던 사람에게 보여 주신다.
시편 기자는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시 104:3]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라고 말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지혜를 더욱 찬란히 나타내시기 때문에 흔히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히브리 기자가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상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울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2]"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시인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2]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시 19:3]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4]"라고 말씀하시므로 온 우주에 하나님의 언어가 통하고 있음을 말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히 밝혔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2. 하나님의 지혜가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천문학, 의학, 기타의 자연 과학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많고,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도 눈을 똑바로 뜨면 반드시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천문학이나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기술에 감탄을 한다.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도 우주의 신비한 현상을 알면 감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우주와 만물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갈렌이라는 고대 헬라의 최고의 의학자요 철학자며 해부학의 권위자였던 그는 인체의 각 부분의 기능을 기록한 그의 저서에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성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3. 사람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다.
옛날의 철학자는 사람을 가르쳐 소우주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사람의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행 17:27]"라고 하셨다.
다윗도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 하시고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 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나이다[시 8:2]"라고 하셨다. 다윗의 말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우주에 가득찬 섭리와 은혜를 안다는 말이다.
바울도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탁월하신 재능과 은총을 인간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의 자녀며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4. 인간은 배은 망덕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고로 하여 아름답고 복된 모든 삶의 은총들을 무수히 준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들을 마치 자기들의 것인 양 마구 파괴하고 남용하면서 교만을 떨었다. 만일 사람이 이 우주에 가득찬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탐욕이나 더 가지기 위한 싸움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빌미로 오히려 더 하나님을 대적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구실로 하여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 탁월한 기능과 은혜들은 자연의 한 법칙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불신한다.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돈.
어떤 사람은 영혼이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육체를 돕는 기능만 가지고 있지 안다. 우주의 신비를 캐고, 인간의 신비를 캐는데 육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천문학의 경이로운 발견들은 사실 육체적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활동에 있는 것이다. 천체를 관찰하여 별의 신비를 캐며,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알고,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과 斜行의 정도를 아는 것이 어찌 육체의 힘이겠는가?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즐거운 것을 즐거워하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감탄을 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좋은 것을 분별하고, 훌륭한 판단과 그릇된 판단을 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어찌 육체에 속한 일인가?사람이 잠자는 시간에도 여기 저기를 배회하고 신기한 일을 행하며, 심지어 좋은 발명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사람이 어찌 육체 밖에 없다 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를 인정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인가? 잠자는 중에도 우리의 신비한 모과 정신은 움직이고 있듯이 하나님은 잠시도 수시지 아니하시고 일하시며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계신다.
바젤의 詩
"최초에 한 영이 있어/ 이것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먹인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 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빛나는 태양과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한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제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여 날 때 실날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민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도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만은 하늘 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6. 하나님은 자신의 주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며, 자연계를 다스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며, 예배드리게 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머리 신호로 만으로도 우주를 놀라게 하시며 격동하게 하셨다가 잠잠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들어내시기 위함이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다스릴 때 경건한 사람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한 사람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와 은혜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보호자요 변호사요, 선한 사람을 벅 주셔서 축복하시고 그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재난에서 피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어떤 경우에 그렇지 않게 보이는 점이 있으나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한가지 범죄에 대하여 엄격한 심판을 하심은 모든 죄에 대하여 엄격한 다스림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여러 가지 죄를 즉시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은 장차 올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활을 주관하신 다는 증거는 많다. 선지자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갑자기, 기적적으로, 예상 밖의 사건을 통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강조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시 107:4]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시 107:5]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 107:6] 또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7]" 궁핍하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8]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사로잡힌 자들을 침침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게 놓아주시고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시 107:10]"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 병으로 죽어 가는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교만한 자들을 그들의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
이런 사건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분명하고 찬란한 섭리에 대하여 깨달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편견과 오만과 뻔뻔스러움이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걸음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간교한 자로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며[욥 5:13]"하셨을 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9.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숙고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명백히 이 온 세상에 들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더 상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상고는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과 생활에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은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해 더욱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이 아닌 다른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공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지나친 사색에 의해 하나님을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행 17:2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라고 했고, 자기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했다.(시145:3; 145:5-6).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를 당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도록 하며, 내세의 소망을 가지게 하며, 삶의 용기를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이제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치 않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핍박을 당하는 것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경건히 사는 사람들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고 주님이 세상을 사신 것처럼 살게 될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의 선하심과, 의, 자비, 겸손을 보여 주셨는지를 자세히 살펴 그 분의 모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은 죄와 자신의 육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빠져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 특히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는 어리석은 철학자들과 미신에 의해 더욱 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생략)
13. 성령님은 인간이 고안한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자는 사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자기의 종교에 만족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교적인 행동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 2:13]"라 하셨다. 근본적으로 죄를 짖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 드리는 방법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잘 몰라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할 때 비록 무지로 말미암은 죄라 해도 그 죄가 가벼워 사죄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또한 마땅히 섬기고 예배 드려야 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 자도 죄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어떤 세상적 전통이나 습관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한 그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14. 이런 점에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매우 미급하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충분히 알려 줄 수는 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섬기는 일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 점이 자연 계시의 한계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한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이다.
15.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 둔감의 죄가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 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 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말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 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주는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 볼 수 없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용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우리가 방랑자요 방황자로 길을 잃고 헤메이고 있다면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긴 하나님에 대한 지시의 씨앗을 부패시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태만에 그 원인을 돌려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神知識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추겨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아가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에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악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그 역사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다.
제 6 장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온 만물에 널리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은망덕한 죄에 대해 일체의 변명의 여지를 없앤다. 그것은 하나님 실존의 생생한 증거를 피조물의 자연 세계 속에서 너무 명백히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얻은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자연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인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한 울타리 안에 둘러 싸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눈이 나뿐 사람이 좋은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혼란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신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족장들이 자신들과 불신자들을 구별하게 한 명백한 지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적인 교리로서가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말씀으로 들었다. 즉 하나님을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 주로서도 믿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원적 믿음을 가진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한 지식이다. 이 구원적인 지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지식에서부터 오게 된다. 이 지식이 있고 나서 구원적인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원적인 믿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모든 지능과 지혜를 초월한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도록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 율법이 공포되고, 이 율법의 해석자로 선지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율법의 핵심적 교훈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계시하신 이외에도 거짓된 一群의 神들과, 그들의 명백한 특징들을 말씀하여 참 하나님과 혼돈 되지 않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아야 건전한 종교적 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증거를 경건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가능한 것이다.
3. 성경에서 떠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에 빠지고 날조된 그릇된 종교에 심취하고, 세속적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며 인간의 잘못된 감정과 종교적 오류가 얼마나 그릇되고 방자한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한 계시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지 않았고, 자연 계시보다 더 확실한 계시를 해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부패한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수한 구원의 말씀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미혹하는 미신은 추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다윗은 말했다.(시 93:1, 96:10, 97:1, 99: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권능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이라고 말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께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 19:7]"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 29편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이 우주의 우뢰, 바람, 소나기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고"라고 말하고 나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말씀을 맺고 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8]"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 하도다[시 93:1]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2]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시 93:3]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시 93:4]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5]"라고 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도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라고 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다 말씀 밖에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공허와 오류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제 7 장 : 성경의 권위는 성령에 의해 확증되며, 교회의 판단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지 교회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성경의 권위와 신성은 교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의 신성한 진리를 영원히 신성하게 복종 하시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어야 말씀의 신성한 권위가 살게 된다.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그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한다면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다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가공할 일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케도릭 교회의 주장을 말한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들은 바울의 말 한마디로 깨끗이 정리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이 말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있기 전에 사도들이 있었고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은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말씀이 교회를 세운 것이지, 교회가 말씀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조금도 주저없이 성경을 진리로 인정해야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하신 말씀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 세울 수는 없다. (생략)
4. 성경의 증거는 모든 다른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적 증거를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복종시키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한 최고의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에서 보다 언제나 최고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순결한 마음과 건강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들이 마땅히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논쟁을 해서 성경 말씀을 판단하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좀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도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면 권위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내적 증거를 가지게하고, 사람이 말씀을 받아 들일 때 능력을 나타내신다.
5. 성경은 자증한다.
참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은 이성에 종속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과 지기를 성경에 예속 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게 효과적으로, 절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 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추호의 오류도 없는 진리임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사 54:13]"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들에게(신자)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신 30:12]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신 30:13]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대인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사람들만 안다"(사 53:1)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라고 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도록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상고하여 은혜를 받자.
제 8 장 :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이는 성경을 보호하고, 성경의 권위를 세울 수 없다. 성경은 어떤 다른 외부적인 지원을 받아서 그 권위가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어떤 다른 것에 의해 권위가 세워진다면 성경의 권위는 늘 다른 것에 의해 흔들릴 것이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그 지혜의 배치가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완전한 말씀인지, 그리고 그 위엄을 스스로 지키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아야 한다. 천국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극히 평범한 언어로 기록이 되고 진리의 말씀들이 소박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의 기교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라고 하였고 그의 설교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이라고 했다.
사람의 저서가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 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만큼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더욱이 죄인을 회개케 하여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저서가 어디에 있겠는가?
2.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다.
어떤 선지자의 글은 그 문자체가 화려하고 명쾌한 어떤 사람의 글에도 손색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기록을 하셨지만, 이런 선지자들을 통해 얼마든지 멋있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음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누구든지 보고 알고, 믿어 구원 얻도록 쉽게 기록을 한 것이다.
사단은 복잡하고 교묘한 언어를 써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고상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나, 그들의 이런 사기극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죄인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로 자기를 과시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주-:문서설에 대한 반론. 문서설이란 성경이 고대의 어떤 문서에 영향을 맏아 기록되었다는 학설을 말함)
성경의 고전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애급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급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화를 주장하는 문서들도 사실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며, 모세 이전에 있었던 것은 없다.
그러나 (모세가 고대의 문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이전에 있었고, 애급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나라와 문화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다.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하신 것에 그 기초를 둔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만일 모세가 알아 듣지도 못한 것을 그 백성들에게 전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 모세의 전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음으며,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 15: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에 거주한지 사백삼십년이라[출 12:40].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즉 모세는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를 다른 여타의 민족들이 주장하는 시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다른 어떤 문화권의 문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 주는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 사람들은 애급의 기원을 창조 이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믿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터부니 없는 말을 세속적인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경이 다른 문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런 사악한 자들 주장을 봉쇄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신다.
야곱은 모세 보다 300년 사람이다. 야곱은 그가 죽을 때 그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창 49:5-6)"
여기서 레위족은 모세의 가문이고, 모세는 성경을 기록할 때 자기 가문과 자기 선조에게 치욕적인 이런 예언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조상들이 잘못한 일을 숨김없이 말하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전혀 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불쾌한 일들도 낱낱이 기록을 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민 12:1]"
이런 모세의 기록이 어찌 사람의 말이겠는가? 그리고 그는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지 않고 가장 낯은 자리에 머물게 했는가. 이 모든 것이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일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일들이다.
5. 이적은 하나님의 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
모세는 수많은 이적을 행한다. 그 이적들은 모세가 말한 율법과 공포된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모세의 40일간의 하나님과의 교제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출 25:1].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 40:34].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민 16:24].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0-11].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민 11:9].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있더니[출 16-1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고전 10:3]"
이 모든 이적들은 모세가 진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6. 모세의 이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모세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이 모세를 반박하고 반대하여 군중들을 동원하므로 떠들썩한 분위기와 불유쾌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어떤 가증한 사람들은 모세의 이적은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모략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출 7:11]" 그러나 그들은 모세 앞에 설 수 없었다.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출 9:11]"
모세는 박수나 술객들을 아주 싫어해서 그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추방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그런 그가 어떻게 공공연히 많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 것도 아님을 밝히므로서 일체의 비난들을 일축해 버렸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출 16:7]"
그리고 어떻게 마술을 가지고 날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신선한 음식을 백성들이 먹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9-20]" 백성 중에는 날마다 모세를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어서 모의를 하고 작당을 해서 모세를 제거 시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마술로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겠는가? 마술로 그 백성을 기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3번씩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7. 예언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성취되는 일이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
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는 예언이 있다.
이 말씀은 야곱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말하기 300년에 말씀된 것을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엄격한 말씀은 400년 후에도 이루워 지고, 2,400년 되는 지금도 이루워 지고 영원히 이루워지는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 유다의 왕권이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 이월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 11:15]" 그러나 사울은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다. 그 사람은 백성들이 억지로 하나님에게 때를 써서 세운 백성들의 왕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즉시 이세의 집을 찾아가 유다 왕을 따로 기름 부어 세운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이렇게 해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엄격히 이루워 진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이와같은 예언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확실히 증거된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므로 바벨론에 대한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이사야는 그들의 나라와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공공연히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6-7]"
그들에게는 전혀 들을 필요 없는 사건의 예언이었는데, 그 예언이 사실로 그들에게 닫친다. 이사야는 그들의 멸망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레스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 얻을 것도 예언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사 45:1-2]"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고레스라는 메데 왕은 이사야 사후 100년에 세상에 나타나 이사야가 말한데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여기서 고레스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그 글에 쓰인데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예레미아는 그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이 되면 고향 에 돌아 오게 될 것을 예언하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렘 25:1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그리고 이 예언들은 모두 사실로 이루워 진다.
이런 사실 앞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선지자들이 예언 한 것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9]" 선지자들은 600년에 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하고 그 후에 있을 일들도 이렇게 예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9. 율법의 전승
어떤 사악한 자들은 모세나 이사야의 글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의 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반박한다. 심지어 모세가 실제 인물이었는가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만일 우리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셨다. 어리석고 미련한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을 개을리 하여 한때 하나님의 말씀이 유실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왕 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어 내셨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대하 34:15]"
이렇게 발견된 성경은 대대로 게승되어 내려 왔다. 요시아는 그 성경의 원본을 성전에 보관하고, 그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8-1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허락하셨다.
10. 하나님은 말씀을 기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마카비 일로 로마의 안티오커스가 유대의 모든 책을 다 불태우라 했는데 어떻게 성경이 남아 있겠는가 하면서, 오늘의 성경은 모조품이요 가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본들은 박해가 가라않자 즉시로 사람들에게 전해 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개편되지 않은 성경이 경건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믿어 질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지독한 핍박을 당했고 그들이 쓰는 히브리 말은 죽은 언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하 나님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계승 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을 통해 매시아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성경책을 보존 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의 말씀을 죽도록 믿고 사는 유대인들을 통해 해 주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말씀-믿지 않으므로-을 생명을 걸고 지킨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書籍商"이라고 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구약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존되고 전파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히 서 있는지를 알게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그 평범한 문체에 경멸과 조소를 보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문체만 보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이 구원의 진리를 볼 수만 있다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아주 쉽게 기록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할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사람은 눅 1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교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이 간단히 기록한 그리스도의 강화는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을 치듯 강하게 책망하신다. 그들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트집장이들은 모든 사람 앞에 끌어 내어 요한 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고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구경하자.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각성시키시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회개하여 옳바른 사람이 되게하시는 능력의 말씀을 접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저작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 속에 있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사로잡는다. 원래 마테는 이전에 그의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 배를 몰아 고기를 잡던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요 7:15]"했다
그들이 말한 글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 등등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는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그가 반대하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성경이 공포된 후 장구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성경을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종려나무 자라뜻 점점 더 자나라서 감히 공격할 수도 말살 할 수도 없는 탁월한 위취를 차지하며 자랐다. 사실 탁월한 괴변가나, 웅변가나 사상가들 치고 성경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평생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같은 사실이 사소한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무장했으나, 그런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들의 보호에만 의존되었다면 어떻게 사방으로부터 오는 그 강력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일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성경은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우려 학대하고 말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 들이고 포용하는데 일치한 것은 한 민족이나 한 국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면에서는 전혀 공통성이 없는 지구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거룩한 일치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을 크게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 적지않는 중요성이 이에 더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새 사람이되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사람을 변회시키는가? 사람을 용감하게, 대담하게, 심지어 큰 정렬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위대한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순교를 했는가?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킬 때 광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경건하게, 가장이 진실하게, 가장 탁월한 믿음으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보존되여 내려 온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존 되여 내려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더 확실하개 작용을 하고 있었던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을 확실히 보존하도록 사람들을 사로 잡으신 것이다. 그럼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지키고 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 보다는 광란에 사로잡혔다고 해야 한다.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진 사람들이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서 성경 읽은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고,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 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 도대체 어떤 영인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그 확신은 참으로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더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그는 "내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내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내 입에서와 내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여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곧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잇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 이끌려 다녀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은 것이 착념하라고 권했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찬사를 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거시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성령으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영으로서 예수 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ㅂ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처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우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들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갈 1:6-9). 그 이유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히 우리들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찾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이 가련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하셔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투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또는 다른 어떤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님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다. 즉 노예 상태로 떨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겋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림하려고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신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너 사턴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산대로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자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거ㅏ 다를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타락시키는 것이 명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성경을 경시 한데 대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바울이 고후 3:16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으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가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효과적으로 세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는"(시 19: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8).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말은,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서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잇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신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이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눈 성령이 임하시면 즉시 말씀을 패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를 위해 말씀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워 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27, 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지혜를 믿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히 암시했다.
이에 대하여 거만한 광신자들은 무엇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결솔하게 버리며 그 말씀에 걀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 나는 몽상들을 확고히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이와는 훨신 다른 절제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된다고 생까하는 사라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워 주시는 도구로 알고 잇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셨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정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교리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에서 당신에 대한 계시를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말씀을 주시어 더욱 생생하고 상세히 계시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겠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목록과 같은 정도를 마련해 주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인도하는 정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원수로 행하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맞아들일 때는 그 사람들에게 이미 구속 주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것과 같이----"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창 17:4]"
그러나 이 장에서 우리는 천지의 주제이신 친히 세우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 가를 연구하기로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부성적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이 엄격하신 분임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징벌을 주시는 가도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계시할 때 간결히, 그러나 확실히 묘사하려 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여기서 우리는 그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이 선언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성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공허한 사색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 열거되고 있는바 그것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는 그 이름을 사용한다. 그 예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2]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 145:3]"에서 볼 수 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이 총체적으로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시 145:5]" 이 시편에는 피조물이 볼 수 없는 것들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예레미아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1). 인애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 사역이 여기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2). 공평한 심판 : 행악자들은 날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고 영원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3). 정직 또는 의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고 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을 터득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 거룩하심, 권세 등을 정확히 말씀하시고 있다. 시인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 하시리로다[시 25:8]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말씀했다.
실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세겨져 있는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이 없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3. 이러한 하나님의 유일성이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상 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올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이교도들의 모든 우상을 배격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다른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서도 알려 졌으며 존경받은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일아 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성이 사람의 마음에 세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도 이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허망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들어 그 지각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신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음에도 어리석게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기는 스스로를 속이고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를 뼈아프게 경험할 것이다.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신"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하신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산 자로 하여금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 11 장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 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 하나님은 가시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떤 노력도 금하신다. (예배에 있어서의 형상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참되신 신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우상과 대립하신다. 그것은 어떤 철학자나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인간이 만든 신을 무로 돌린다.
인간은 그들이 신을 만들 때 언제나 물질로 신을 조형화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수한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게 되면 그 불 경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라고 하셨다. 그리고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을 거짓 것으로 바꾸고 있음을 경고하셨다.
페르시아 인들은 태양과 별들을 형상화하여 신으로 섬기고, 애급 사람들은 모든 동물을 신으로 섬기고 희랍인들은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전능한 신이라 했다. 이런 많은 우상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모두 나쁜 것으로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은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 4:15]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신 4:16]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신 4:17]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신 4:18]"라고 하였고 이사야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다."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사 40:18]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사 40:19]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사 40:20]: (41:7,29, 45:9, 46:5-7)
바울은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인간이 만든 조상과 화상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네카는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천한 물건들을 사용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사람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물건에게 짐승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야수와 괴물의 형상을 새겼으며, 어떤 것은 남녀의 추잡한 모습을, 어떤 것들은 몇 개의 다른 몸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생기라도 가져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아무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말씀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인간들을 어떤 목적에 의해 적절히 교훈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엄의 임재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임재를 사람에게 명백히 말해 주는 것들이 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11)은 비록 이것들이 천적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응답 받지 못하고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는 말씀만 받았다.
신약에서 성령님은 한번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그러나 그 비둘기 모양의 성령님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이 이렇게 임재 하신 것은 성령님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능력으로 만족할 것이요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서곡일 뿐이다.
구약의 제단에 속죄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속죄 소를 덮었다. 그리고 그 속죄소는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며, 그곳은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다 볼 수 없이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17-21).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속죄소를 가리고 있는 소 형상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자들이 있으니 한심하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사 6:2]"라고 해서 스랍들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4. 형상과 화상은 다 같이 성경에 반대된다.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 진 것이요 신아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막연히 만들어 숭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열 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시 135:1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시 115:4]" 이와 못지 않게 나쁜 것은 사람들이 이런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갈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사 44:12] 목공은 줄을 느려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사 44:13]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사 44:14]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 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사 44:15]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사 44:16]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 도다[사 44:17]"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자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우상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화상을 그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희랍인들은 화상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
5. 우상에 대한 성경적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 라는 말은 그레고리우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졌다. 예레미아는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8]"이라고 했고, 하박국은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합 2:18]"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임을 들어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한 자들이 우상을 보고 하나님을 배운다는 억지 주장이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언자들이 그렇게 꾸준히 우상을 버리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했겠는가?
그러나 교황 주의자들은 확실한 원리로 우상이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한 결정은 예언자들에 의해 전적으로 정죄 되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런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위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 않았을 거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된 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다시 예언자들이 가르친 그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형상으로 보이는것은 모두 可死的이라고 주장했다. 어거스틴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 예배드리는 것 뿐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에빌라 교회 회의에서 제정된 것이 였다. 그 중 36장에서 "교회 안에 화상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예배를 받던가 찬양을 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라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했다"라는 말이다. 한 이방인이 이 말을 한 것으로 끝이 났다면 그 말은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은 이 말, 즉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류를 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진술한 것이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께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형상)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형사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지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이 아닌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 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 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하나님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속임수를 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서 명백히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해서 그런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안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의 화상, 혹은 彫像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을 받아야 한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彫像)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 주의자, 우상을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적당히 징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일 교회가 의무를 다했다면 무식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스러운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분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전파와 성례 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하여 마음과 주의를 성실히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해서 다만 우상 이외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교황 주의자 말하는 그 신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의 제자로 인정한 자들이며, 하늘 나라의 철학의 계시로 광명의 옷을 입은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은 교육하기에 적합한 교리를 탈취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직무를 우상에게 넘겨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지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며(계 1:5)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셨다는 것을(롬 5:10), 충분히 또는 진실히 배웠다고 한다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 세웠겠는가? 이 한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개의 십자가상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저들의 마음과 눈을 더욱 더 집착하게 된다.
8. 형상의 기원: 유형적 신격에 대한 인간의 욕구 (교회의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예배 부패의 원인이 된다)
우상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은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천박한 갈망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한 우상 숭배의 최초의 원인은 아니다.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死者像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로부터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비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이라고 바랬다(창 31:19). 이 사실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工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수 이후에 세계는 새롭게 재생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무서운 심판으로 정화시킨 땅에 우상이 득실거리는 것을 노아는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 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 였다(수 24:2)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하여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로 완전히 젖어 버리기 때문에 그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 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해 버린다.
이런 악에는 또 다른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手工으로 표현하려 애를 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지 아니하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우상의 기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일들이 증명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애급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 그러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 에서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故國 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자기들과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부분별 하게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상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그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 물들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여러 종류의 공상(우상 숭배)에는 즉시 예배가 따르게 마련이다. 인간이 형상에서 하나님을 보냈고 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서 마치 거기에 신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완전히 감탄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하게 되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 들어 가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 주 한다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신들을 형상으로 표현하여,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끓어 엎드릴 때에는,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를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떤 것도 금하신 것이다(출 20:25).
같은 이유에서 제 2 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 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 그것에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단순한 우상만을 예배하던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던 지의 차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를 받기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다., 그 저주받아 마땅한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라. 그들은 (케도릭)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4), 하나님[서 친히 그들 손으로 그들을 애급에서 인도해 내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았다(레 26:13). 그러나 금송아지가 바로 그들은 애급에서 구원한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동의하여(출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굼송아지에게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금 송아지 형상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하다고 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냈으나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동일한 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많은 형상들의 신이 각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하는 것들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속에 보이지 않게 내 주 하시는 한 실재라고 주장했다. 즉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해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에 대한 記號를 바라본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형상물을 통해 더욱 확실하고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만들고 나서 끊임없는 새로운 계교에 미혹이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우상을 통해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제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오 같은 형상으로 예배해도 된다고 확신했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했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이런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뻔뻔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찌해서 우상 앞에 부복하는가?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귀를 향하는 것처럼 우상을 향해 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은 "우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루워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 어떤 것은 무시를 당하고, 어떤 것은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존영을 받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상들에게 이처럼 차별을 한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들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을 보기 위하여 서원(誓願)을 위한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제단과 火床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름 쓰고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떠날 수가 있는가? 그들은 우상 숭배에 대한 자신들의 결백을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주장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목석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27; 겔 6:4이하; 사 40:19-20; 함 2:18-19; 신 32:37). 그런데 이런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 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며 또한 감추어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언굽하기로 한다. 그들은 형상물에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께 아무련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 곧 영광이라는 것이 彫像이나 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련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심고 있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 "예배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련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두움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샘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고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하여 디른 별명을 붙인다고 해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부니 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그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機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순수한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정당하게 아름답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익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건실한 예술가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물 이외에는 무엇이나 만들거나 그려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흉측한 형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가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요,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전자는 교육에 있어 필요하나 후자는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것 외에 아무 목적도 발견할 수 없다. 케도릭 교회에서 발견되는 형상물들은 후자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다.
13. 건전한 교리를 가진 교회는 형상물을 예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기독교의 아주 순수한 교리가 왕성했던 500년 동안은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형상물이 없어 던 때 보다 형상물을 가질 때 교회는 타락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형상물은 높고 숭고한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이 없는 것이라 해도 생명이 있는 지체와 감각이 있는 생명체와 비슷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고 결국 그것들이 살아 호흡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우상이 수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으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을 안할 수 없게 만든다." "우상은 눈과 입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 많은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우상은 말하거나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상을 섬겨서는 안되는 이유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생각을 했지만, 니케아 회의가 우리의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간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780-802년까지 동방 제국의 여왕. 칼빈은 그 녀를 "Irene"라고 하는 사악한 Proserpine(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여왕)이라고 하였다).의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 안에 형상물을 설치할 뿐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했다. 이 회의는 우리들의 반대자들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했다.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을 가진 자들의 발광이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말하는 욕망 만큼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는 있다. 오늘 날 형상물 사용을 지지하는 옹호론자들은 형상물 사용을 허용하는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룰마뉴 대제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문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서다. 여기에 당시에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여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창 1: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형상물을 마땅히 제단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나니"(마 5:15)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형상물을 우러러 보는 일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 4:6)라는 말씀은 印證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했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8)이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靜觀함으로써 알게된다는 것이다.
데오도루스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요컨데 그들의 어리석음이야 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誤用
우상 숭배자들은 성경을 오용하여 우상 숭배를 옹호한다. 즉 "야곱이 바로 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10]" "야곱이 그 지팡이에 머리를 의지한 것(창 47:31; 히 11:21). 야곱이 세운 돌 비에 기름을 부은 것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 28:18]"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 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시 99:9]"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12]" 같은 말씀들을 우상 숭배를 뒷받침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미라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이 마치 하늘에게 내려온 것처럼 신성시하기도 했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 예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들은 황제의 상에 분향을 하는 사람들은 성자의 상에는 더욱 분향을 해야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고 강요했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 감독 콘스탄티누스는 형상물을 경건히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똑 같은 예배와 영예를 그 형상물에 드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나 마르키온파와 동류로 정죄를 했다. 동방 교회의 요한 사절은 "그리스도의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배라는 말인 "라트리아"와 봉사란 말인 '둘리아'를 동일시하고 있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제 12 장 : 하나님은 우상과 달리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 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강의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수반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말할 때 하나님의 어떤 속성도 다른 곳에 귀속시켜서는 안된다. 종교라는 헬라어 '유세베이아'는 예배를 뜻하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외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에 대한 확실한 법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와 우상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셨는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그리고 율법에 다음 두가지를 첨가하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유일하신 분으로 역사하시고, 둘째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람들이 당연히 영광을 돌리도록 규범을 정하신 것이다. 즉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신성하시고 고유하신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귀속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간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지고적 위취를 지키면서도 다른 신들은 하나님만 못하지만 섬긴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신이시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2. 차이 점이 없는 구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천사를 섬기는 것이나 아무 구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성자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것에게는 봉사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봉사라는 말이 예배라는 말이고 그 말은 어떤 경우에 더 광범위한 섬기는 말로도 쓰이는 말이다.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까지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말했는데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라고 했다. 여기서 '종노릇하다'라는 말은 '둘리아'라는 말로서 우상 숭배자들이 성자 숭배을 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예배 해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라 하신 말씀에서 경배라는 말에 '라트리아'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사단이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은 '경배'라는 말을 '둘리아'라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천사 앞에 무릅을 끓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계 22:8]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9]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라고 했다.
사도 요한 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 한 것은 그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대신으로 '절(프로스쿠네인)'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사람에게 절을 받게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윤리적인, 세속적인 존경을 의하는 것이지 종교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행위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종교가 일단 예배와 결합이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에게서 볼 수 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 10:25]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 10:26]"
고넬료의 인격과 신앙은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보고 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런 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과 실라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라 하고 바나바를 쓰스라 하여 경배하려 했다. 이 때 두 사도는 기겁을 하여 말하기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행 14:11]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행 14:12]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행 14:14]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행 14:15]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 14:18]"라고 하여 그들을 만류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죄가 되는 것인가를 너무 잘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슥 14:9]"라고 분명히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릴 예배를 다른 것에도 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도 좋으시고 다른 신들이나 사람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적극적인 영광의 훼손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미신은 처음에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광을 태양, 별, 우상을 위해 고안했다. 그러나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썩어질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큰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최고의 신을 섬기는 원리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저급한 신들, 수호신들,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련 차별없이 제물을 바치는 일반적인 행위를 하고 결국 하나님도 그런 신들 중의 하나로 취급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런 행위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가지신 특별한 은총과 영광을 수 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제 13장: 성경은 하나님은 한 본체 시나 본체 안에 3위가 존재함을 가르치신다.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일축하시고 교묘하게 꾸민 이론들을 말살하시기 위해서다. 고대의 세네카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하나님일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염려하시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나타내시지 않았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계시를 하셨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실로 우리들을 두렵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또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없게 만드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하늘 나라에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셔서 당신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
마니교 사람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러므로 하나님도 인간의 몸과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한다. (이 마니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 졌으며 이 파의 교주는 주후 372년에 사망한 아우디우스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손, 발, 눈이 있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 유모가 어린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손, 발들의 말들이 신인동성동형적인 표현일 뿐인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 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사 5:25]"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사 30:30]"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사 40:12]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 40:13]"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눈이 있고 팔이 있으되 사람의 그것과 같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2. 하나님 안에는 삼위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상과 구별하시기 위해 아주 독특한 특징을 사람에게 보이셨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그것이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그러나 단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세분이시다 라는 다신 적인 사상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세 분으로 분활 되었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위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를 인용 예수 님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시고 밀초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은 파생 체라고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예수 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일하시며 분할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모든 완전을 포함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본체를 예수 님을 통해 세상에 들어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 님은 하나님의 그림자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본체는 예수 님에게 나타나셨으나 예수 님 자신의 본체도 있어서 예수 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성령 님에 대한 것도 결론 지을 수 있다. 성령 님도 본질은 하나님이시나 성령 님의 본체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본질은 하나이시지만 본체로서는 세 분이시다. 이것은 위라고 말한다. 이 본체를 사람들은 더 알아듣기 쉽게 '실재' 또는 '실체'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준다.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실체 하시는 완전한 분이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성경 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삼위 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잘된 표현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성경에 없는 말이라고 해서 쓰지 못할 말로 말하는데, 성경 자체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외래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 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민일 이와 같이 불러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 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자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부패한 교의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광설을 늘여 놓는 불경 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리우스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 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것을 당연한 일이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하였기 때문에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이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아리우스 파가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 신앙을 들어내었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 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했더라면, 저들은 까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잇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 파와의 구별지은 것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은 구별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구별하는 데 불과하며, 이런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해서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순서나 구별이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이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함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거절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 때문에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한 이 문제를 다룬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 일괄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그 예로, 힐라리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條文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했던가?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런 문제를 다루었던가?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했다.
제롬은 역시 다마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을 독자들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롬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毒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안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성실히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 였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그는 보았는데 이런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제 6권에서 "휘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을 무시한 사람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히 공언했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로운 용어를 제시 한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저들이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람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하여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지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해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 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 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혹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던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성부와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까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다고 주장해 보라. 그리면 그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 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세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해 보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런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이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그 말이 본체가 하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 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리 간계 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의 숱한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저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더 낳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실재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며 교통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 다른 뜻을 가진다. 만일 '말씀'이 다만 하나님일 뿐 아무 특징도 없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부당하다. 그는 즉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첨가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킨다. 즉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실재의 관념이 분명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히 본질과 밀접히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 없지만, 그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삼위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님이 대조될 때 삼위의 두드러진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위는 서로 잘 전달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성부에 대한 독특한 구별의 표시가 성자에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는 없다.
7. 말씀의 신격 (성자의 영원한 신격)
이 장에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발전시킨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쪽에서부터 나온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소리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덧없는 소리가 아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영원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10]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벧전 1:11]"과 같이 사도들이나 전대의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이 말씀의 영이라 한다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매개자로 제시하시므로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것이 있으라' '저것이 있으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바로 성자라고 증거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괄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시적이며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당신의 계획을 말씀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주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모세가 말한 것보다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세 분의 실제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하시고 게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이라고 선언을 했다.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영원하신 본질을 말씀하시고 특수하신 실재 즉 위를 귀속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가도 보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어야 옳은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게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어야 하며 이 말씀은 불변하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8. 말씀의 영원성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거시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즉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새롭게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없었던 무엇이 새롭게 생성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외부적인 사역에 대한 명칭들은 창조 사역 이후에 그에게 적용된다. (예: 창조주)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없었던 것이 우발적으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역 1:17)"이라고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즉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셨을 때 말씀의 능력이 세상에 뚜렷하게 들어 난 것이지 없던 말씀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오래 전은 시작이 없는 오래 전이다. 주님은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시므로 존재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명백히 하셨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분명히 못을 밖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서 주님의 영원하신 참된 본질, 주님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여기 쓰인 엘로힘이라는 말씀은 천사라는 말도 되지만 하나님이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 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격이 성자에게만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구약에 나타난 천사는 자신을 영원한 하나님으로 불렀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느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 도다[삿 6:12]"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삿 6:20]"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 6:21]"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 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 6:22]"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삿 7:5]"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삿 7:9]"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 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삿 13:16]"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으리니라[삿 13:20]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 13:23]"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18]" 야곱의 경우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주님은 창조된 천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하셨고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슥 2:3]"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 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슥 2: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 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 물 속의 초개의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사 25:10]"
말라기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하셨다.
11. 신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증거가 많다. 그 수많은 증거들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추려 말한다.
1)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증거된 신성이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신성이다. 로마서에서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 9:23]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4]"은 이사야의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사 8:14]"의 예언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즉 그리스도는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 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것도 주님은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이 영광을 자신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또 바울이 적용한 시편에서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시 68:18]"하신 말씀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를 인용하시므로 그 하나님이 바로 주님이심을 증거했다.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해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이 말씀에서도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한다.
히브리 서에서 사도들이 성자에게 드린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101:26]"에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돌린 영광이었다. 또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7]"라고 하신 말씀은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에서 예수 님에게 돌려지고 있다.
주님은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시 102:14]"와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의 은혜를 베푸신 분이심을 스스로 말씀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바울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이라고 하셨고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
주님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이다 아멘[딤전 1:17]"의 말씀과 같이 영광을 세세히 받으실 분이시다.
또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하시기 위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를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라고 하셨다.
바울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 8:5]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하셨으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하셨다.
그렇게 의심이 많은 도마도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요 20:28]"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겠으며, 하나님의 제 이의 위인 신임을 부인하겠는가?
12. 사역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주님은 태초에 성부와 함께 일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주님의 말씀에 극도로 무관심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큰 자극을 받아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라고 기록을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신성에 대해 이토록 어리석게 판단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주님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적을 통해서도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또한 그리스도는 만물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을 소유하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해 증명된다.
선지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이적을 행한바 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적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적은 주님 자신이 행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가끔 기도를 하셨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그러나 대부분 주님 자신이 직접 이적을 행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권위로 사도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막 3:15. 6:7]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의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말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이적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 5:36]""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요 10:3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얻을 우리들에게 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구원 그 자체가 되신다.
주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이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 역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선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이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라 하신 말씀을 믿고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 분에게 영원한 소망을 둔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도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구세주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하셨고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 18:32]"라고 하셨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마지막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라고 기도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 하셨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성자의 이름만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자랑인데 누가 감히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 첫머리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영광을 성자에게도 동일하게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등)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주님이 성부의 모든 일에 동일하게 참여하심으로서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실로 경건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성령 님의 신격도 그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모세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는 성령 님에 의해 보존되고. 이 아름다운 세계가 있기 전에 성령 님은 혼돈 된 세계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 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은밀히 말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의 말씀은 아무도 교묘하게 다른 말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은 파송하실 때 그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님은 온 우주에 편제하셔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을 성장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시며 이 우주와 자연을 초월해 계신다. 그러나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대하여 확실히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 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신다. 이 중생은 어디서 빌려 온 능력이 아니라 성령 님 자신이 영생의 창시자로서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 님에게는 성자에게 속한 모든 속성들이 있으시다. 피조물들 중에 누구도 성령 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성령 님은 스스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이라 하셨다. 또한 성령 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 나니[고전 12:10]"를 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런 일들은 하나님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출 4:11]" 즉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성령 님이 하신다는 것은 성령 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고 의롭다 함을 받고 진리, 구원, 사랑, 은혜, 성화가 모두 성령 님의 하시는 구원 사역이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성령 님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 아니라 창시자이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라고 하셨다.
15.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 님의 명칭에 대해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전 3:16-17; 6:19; 고후 6:16).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말씀은 성령 님으로 내주 하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만일 우리가 나무나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 님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성령 님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 하시지 않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라 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
사도들은 성도들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이라고 부르셨다.
성령 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시면서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바울은 그 만군의 주가 성령 님이시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9]"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행 28:26]"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 님이야말로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이사야는 그 백성들의 완고함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말을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라고 하시므로 성령 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
주님은 성령 님에 대한 범죄에 대하여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막 3: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므로 성령 님의 신적 위엄에 대해 말씀하셨다.
또 시인은 우주 만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임을 말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이라고 하셨다.
16. 하나님의 하나 되심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더욱 명백히 계시하셨다. 삼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밀한 하나님을 알리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증거들 중에 탁월한 증거가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주),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을 시켜 놓았다. 그는 믿음이 하나요 주도 하나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삼위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여기 저기를 두루 다녀 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론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만일 참 신앙이 여럿이라면 그 신앙을 위한 신도 여럿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례는 신앙의 성례다. 그것은 유일한 하나님에게 기초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나서는 세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 님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삼위 하나님을 함께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님이 한 분이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7. 삼위
한편, 성경은 성부의 말씀,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구별이지 분활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이 말씀들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신다는 뜻이지 말씀이신 성자와 성부가 다른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님은 성부와 자신을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5:32]"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이라고 하셨지만 다른 성경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이라고 하셔서 만물을 함께 창조하셨다고 하셨다.
성부는 이 세상에 죄인을 위해 죽으려 오시지 않으셨다. 성자 되신 예수 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님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셨으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부와 상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라 하심으로 삼위 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셨다.
18. 성자, 성령의 차이점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민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 님께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존재하실 수 없으시고, 또한 영원에 있어서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성은 동일한 영원성이다. 그러나 구태여 순서를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모든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그 다음은 지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을 생각하는 것이 편해 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성자는 성부에게 발생되고 성령 님은 성부와 상자에게서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의 말씀에 나타나 있고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 말씀하셨다.
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이 구별은 하나님의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영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부와 상자와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제 안에서 이해되고 각자가 자신의 독특한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님이 전적으로 피차의 안에 거하신다. 이 사실을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이라 하셨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라 불린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는 성부라 불린다.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부가 아니며,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 불리우신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 불리우신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20, 삼위 일체 하나님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고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이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이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을 구별해 내는 거이다.
그러나 각 위의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또는 상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특별히 성부에게 적용된다. 이와 같이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신해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 갈 필요가 잇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르쳐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떤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도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 말에도 밝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인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랍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런 신들메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욜 2: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했다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말하고 잇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全 本質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된다.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반 삼위 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사탄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부터 뒤집어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부분적으로는 위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했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음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의 그 왜곡된 광란을 반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 냉정하고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들의 사상과 우리들의 언어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작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 자신에게 아끼기로 하자.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하신 충분한 증거 자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에게 마끼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이 아노모에오스파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다섯 편이나 있다. 그러나 이 설교들이 그 건방진 쾌변론 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보다 더 신중히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그런 경솔한 행동의 불행한 결과로, 우리가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이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아니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하지 아니할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의 이해력에 대한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한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天來 神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 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하는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들은 야수와 같이 광란하며,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훼손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신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하던 분파가 많은 분파로 갈라졌으며,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찟어 놓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위의 구별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미 성경에서 입증이 되었듯이,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아니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하여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령도 성자와 구별되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견지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들을 주장한 자들에 대해서도 문은 굳게 닫쳐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세르베투스나 그의 동료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저들의 허위를 논하는 게 필요하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모든 삼위일체론 자들을 향하여 보통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상치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도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에 따라 그로 인하여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자기의 불합리한 주장을 비유로 말했는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들 안에와 나무와 돌 가운데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그는 실로 "위"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설에 대하여 장황히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였기 때문이다.(요 1: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였다고 하면(요 17: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관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제이시다 는 결론이 나온다.
2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자들은 세르베투스의 불 경건한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와 비슷한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가공스러운 말을 삼가지 않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하신 "본질의 수여자"이시며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다고 했다.
저들의 그 가시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 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저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때때로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저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를 한 位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7,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증보 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리고, 더욱이 명료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데 ,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일 성부 이외에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할 바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한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 되여서는 안된다. 분명히 이사야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1), 이 하나님을 가르쳐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전하였기 때문이다(요 12: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롬 9:38).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을 끓겠고-----"(사 45:23)라고 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했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위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시 102: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시 97: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므로(히 1: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옮겨진다고 하는 쾌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라는 명칭이 언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예레미아의 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로다"(렘 10: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이후에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물을 존귀케 하신 창조주가 자존하지 아니하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他者로부터 빌려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상부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만일 전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던가 아니면 성자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Rlelfr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던가 또는 전체에서 인출된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저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고(롬 8:9)고 바울의 증거에 의해서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저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 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는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상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면 저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한다면 성부가 이 본질을 상자와 공유하였는가 아니면 공유하지 않았는가를 우리들에게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실로 이 대답은 부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자가 절반만 신이라고 하는 말이 되는 것이고 이런 말은 가증스러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저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고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 같이 전적으로 완전히 공통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한다면, 본질에 관한 한 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저들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조건이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저들은 말한다.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반박할 수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을 들어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相關的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位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한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라고 저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이런 반대는 한마디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칼뱅) 다른 곳에서 더욱 자세히 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 였다는 이유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증보 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저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저들이 반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저들의 불 경건은 저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말씀이 선하다고 한다면, 저들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시지 않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들의 주장을 한층 더 확실하게 해 준다.
사실은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17), 지혜로우시며(롬 16:27), 참되시다고(롬 3: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되는가 묻고 싶다.
태초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 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운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다는 말인가?
저들은 그리스도를 당연히 예배를 받으실 분으로 todrr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자기에게 끓기를 요구하셨다고 한다면(빌 2: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3).
만일 저들이,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고 말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 저들의 잘못된 이론을 반박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이라는 묘한 구별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나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중보자의 전 인격에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히 마무리 지어 놓았다(빌 2:6-7).
실로 그는 여호와로 불리시고, 구릅들을 타시며(참조, 시 18:10, 80:1, 99: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 성을 부인할 수 있는가?
이사야는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될 수가 없는 말이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에까지 회복시키시는 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 이였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동작 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다양하게 되던가 아니면 저들이 다만 그리스도를 이름뿐인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다음 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 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으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 자들이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한 하나님 안에 여럿의 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세의 이 말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이 세상에 창조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적으로 속하다 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 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기지 반론을 쉬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라는 명칭이 성부에게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정용 된다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23).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은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2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
그러나 저들은 이 문제에 있어 속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 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라는 점에서는 발생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저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삼위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들은 저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들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저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가 아니라 諸神의 삼위일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했는가 안했는가를 묻는 그들의 무익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 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저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곳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의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이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하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그가 성부로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옛날의 전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위에만 적용시켰다. 그것은 본질을 그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 아니라 가장 큰 불 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와 성령의 본질을 변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돈 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한다면, 성부는 어떤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이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격하시키는 것이 불과한 결론을 낳게 될 것이다.
26. 성육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자들은 반대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적인 근원이신 상부에게 한정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물른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인격으로 말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증간 위치를 취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었다고는 하지만(빌 2:7) 성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추어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 보다 못한 자 였다고 하였으나(히 2: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인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하나님께로 가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참조 16:7, 20: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 빛나는 그 광채의 완전함이, 육신을 입은 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하여 훨씬 더 뛰어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고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니라(고잔 15:24, 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시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1; 요일 5: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2- 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새 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다른 참되신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도한 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에게서 많은 구절들을 수집했다. 이것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미지를 들어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 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 할 경우, 옛날 종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로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사실상 성부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이 종식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 3권 6장을 일고 보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한다. "성경에는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이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 2권 제 46장에서 밝힌대도,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외에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자와 성부를 다 같이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제 3권 제 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시며 왕이시오 하나님이시며 심판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 제 3권 제 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 주시며 모세의 손을 통해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 였다고 터부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 에서부터 오시며(합 3: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 3권 제 18장, 제23장). 제 4권 제 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잇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동권 제 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 자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28. 터툴리안을 인용한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저들이 터툴리안을 저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의 표현 방법이 거칠고 모호 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에메하게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사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라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 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만 위를 적응할 때만 이라고 했다. 그는 어디선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는 바로 말씀이 되신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저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가 성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일괄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런 구별에 대하여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된다고는 한,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위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이외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서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 일체의 교리를 인정했다.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불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들을 지지한다. 져스틴과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이다. 힐라리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예리하게 역설했다.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아니 그와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연결이 안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저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들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 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저들의 파렴치함에는 더 참을 수가 없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희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이전 학자들이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는 않았다. 이 악한 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 들었던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생기면 그 달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에메하거나 모호한 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異論도 없이 받아 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쳤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 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라는 저서 제 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어거스틴이 그 때 자신을 망각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을 해병하며,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갖 쾌변으로 오늘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이제까지의 고찰로 인해 사탄의 일체의 쾌변을 물리쳤다고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으로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한 내용들은 무분별한 사변들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회의 건덕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별로 유익 되지 않는 일이나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 실로 성부의 발생이 계속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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