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Calvinus Theologus: 신학자로서의 칼빈

미션(cmc) 2009. 8. 27. 17:39

Calvinus Theologus: 신학자로서의 칼빈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I. 칼빈, 신학자인가?

칼빈의 하나님의 섭리 교리에 관한 수작을 남긴 스타우퍼는 그의 책 [인간 존 칼빈]에서 그의 삶을 남편과 아버지, 친구, 목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기술했다.이 책이 칼빈의 “인간성(humanité)”에 중점을 둔 탓은 있겠지만 “신학자” 칼빈에 관해서는 아무 장(章)도 할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아스럽다. 많은 사람들은 칼빈을 신학자라기 보다 목회자 혹은 당대 새롭게 전개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 개화된 교사 정도로 여기는 듯한데, 과연 신학자로서의 칼빈의 삶은 주목 받지 못하는가?

칼빈의 삶은 건전한 교리(doctrinasana)에 서 있지 못했던 카톨릭신학자들, 재세례주의자들, 유니테리언주의자들, 이성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개혁주의를 표방은 하되 자연주의나 실존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론과 성찬론을 비롯한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비성경적 입장을 견지했던 루터란 신학자들에 의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루어져 왔음이 사실이다. 이들은 칼빈의 성경적 참 신학(theologiaverabiblica)에 의해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났던 만큼 신학자 칼빈 보다는 비신학적인 칼빈 혹은 탈신학적인 칼빈을 그려내기에 몰두했다. 과연 칼빈은 신학적 주견 없이 그저 논쟁만을 일삼던 어느 한 종교주의자였는가?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일어났던 가장 첨예한 신학적 논쟁들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그러한 논쟁들을 통하여서 생애의 후반부로 갈수록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더하였다. 그는 1509년 7월 10일에 났으며 1535년 8월 23일, 불과 스물 여섯 살을 막 넘겼을 즈음,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한 권의 책을 써서 당시 철권(鐵拳)을 휘둘렀던 불란서 국왕 프란시스에게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즉 『기독교 강요』라는 이름으로 헌정했다. 그것은 당대 솔로본 대학의 교황주의 신학자들을 겨냥한 신학적—교리적—서책이었다.

카톨릭주의자들에게 칼빈이 자신의 이름 Calvinus로 처음 각인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을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킨 콥 총장의 연설문을 쓴 신학자으로서였다. 재세례주의자들 역시 칼빈을 자신들의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며 영혼창조설을 주장한 신학자로서 그를 인식했다. 이신칭의의 교리로 새로운 시대의 기치를 내건 루터란들은 오직 성경적 진리에 기초하여 성찬론을 전개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구원론의 핵심으로 여기는 신학자 칼빈(Calvinustheologus)으로서 그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칼빈의 전기학자 가녹지가 언급했듯이 칼빈의 생애(주관)는 그의 작품들(객관)을 통하여서 읽혀져야 한다.칼빈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지극히 말을 아꼈다.그의 서간들은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가르침과 변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네바 감독회에서의 칼빈의 직무는 정치적 혹은 사법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성경해석적이며 나아가서 교리적이었다. 널리 알려진 셀베투스 공판은 목회자 칼빈으로서의 모습보다 신학자 칼빈으로서의 모습을 조명하는 사건이었다.칼빈은 15세기 말부터 유럽을 휩쓸었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작품을 통해서 말했다.그의 삶을 통하여서 계속된 신학적 긴장은 정립된 교리로서 문건으로서, 책으로서 해소되었다. 신학자로서의 칼빈의 삶은 오히려 아버지, 친구, 목회자로서의 삶을 압도한다. 칼빈의 삶의 가치는 역사적 영향이라는 모호한 다의성으로 막연히 파악될 것이 아니라 신학적 전승이라는 특정하고 고유한 업적을 중심으로 논구되어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그 자체 개혁주의의 기초, 본질, 정수로서 작용했다. 칼빈의 신학은 칼빈신학자들(Calvinians) 혹은 칼빈주의자들(Calvinists)에 의해서 비로서 “신학화” 된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성경의 진리로써 자신의 신학을 수립한 신학자였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칼빈신학의 역사적 적용이었다. 칼빈의 작품들은 칼빈의 신학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지 단지 그것의 자료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본고에서 칼빈 자신의 신학 함(doing theology)에 집중한다. 그것은 칼빈의 작품들을 “읽음”으로써 수행되는 일이다.

 

II. 초기 ‘신학적’ 작품들

칼빈의 초기 작품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구속사적 의의를 논술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1533년 11월 1일에 있었던 콥(Nicholas Cop)의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에서 칼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유일하신 진실한 중보자,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자신의 영으로 우리를 감화 하시는 가장 위대하신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진실한 믿음을 세워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독교 철학(philosophiachristiana)”을 “그리스도의 철학(Christiphilosophia)”이라고 명명한다.

1535년에 출판된 올리베땅의 신약 성경 번역에 부친 서문에서 칼빈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며 완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간략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수 많은 의식법과 청결법과 제사법을 포함한 기록된 율법을 그의 백성에게 수여하심으로써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을 확신시켜 그들이 위대한 메시아를 오랫동안 대망하게 했다. 율법은 단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 온 위대한 축복에 대한 형상이자 그림자였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들에 대한 실체이자 진리(lecorpsetverité,corpussubstantiaveritas)였다. 율법은 어떤 사람도완전함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제시했다. 율법은 마치 선생과 같아서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lafinetaccomplissement,finisetcomplementum) 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했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한 다음해에 기독교 신앙의 조목으로서의 전체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신앙교육서(catechismus)를 제네바 교회에 제출한다. 맥닐은 이 작품을 격찬하여 “칼빈의 가르침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하였으며,펄만은 “1536년 기독교강요의 정수(精髓)”라고 부른 후 그것이 “개혁교회의 살아 있는 믿음”을 제시한다고 하였다.헷셀링크는 이 작품을 통하여서 비로소 칼빈은 “독자적인 신학자”가 되어 가는 길에 서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1538년 라틴어판 신앙교육서 서문에서 칼빈은 신앙교육의 목적은 “날카롭고 고상한 지식보다 경건에 유익한 것으로” 행하여서 “교리의 열매(doctrinaefructum)”을 맺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가르쳐서 “복음의 순수함”을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하였다.제 일차 신앙교육서에는 칼빈이 평생 동안 발전시키고 심화시킨 그리스도와 율법에 관한 언약신학적 가르침들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칼빈은 율법의 본질을 “의롭고 거룩한 삶의 진정한 모범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 그 자체의 가장 완전한 형상”이라고 정의하면서, “영생의 약속”이 없다면 율법은 이러한 원래 사역을 다하지 못한다고 말한다.여기에서 칼빈은 율법의 규범적 용법의 기독론적인 기원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의(iustitiam)가 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함(sanctificationem)이 되심을 가르친다. . . .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 의함이 아니라, 부패한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율법의 의에 복종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드럽게 만드는 영적인 능력에 의함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을 위한 율법의 기능은 믿음이 없는 자들을 위한 율법의 기능과는 현격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단지 우리의 연약과 범법(犯法)을 정죄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곧은 길로부터 멀어져서 방황하지 않도록 빛을 비추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율법의 외부적인 가르침인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개진함에 있어서 칼빈은 그가 이중적 은혜(칭의와 성화)의 교리와 함께 전개해 온 성도들을 위한 율법의 용법—제 삼 용법—을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을 통한 그의 의의 교통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III. 기독교 강요: 교훈적, 신앙고백적, 변증적 서책

1536년 『기독교 강요』초판은 신약 성경의 사분의 삼 정도가 되는 작은 분량이었다. 이는 절의 구분이 없이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 1장은 율법 교리에 기본적으로 할애 되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이신칭의 교리 등 주요한 신학적 논제들이 망라되었다. 제 2장은 신앙의 개념과 조목을 다루는데 집중되었다. 제 3장은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를 제시했다. 제 4장은 성례를 개론, 세례, 유아 세례, 성찬의 순으로 다루었다. 제 5장은 잘못된 카톨릭의 성례를 비판하는데 할애되었다. 마지막 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 돌려졌다. 여기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유라는 개념이 아디아포라 교리와 함께 고급스럽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입법권, 사법권, 재판권이라는 측면에서 비교적 정치(精緻)하게 전개되었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전개된 교리의 순서는—율법, 믿음, 기도, 성례—는 1529년에 출판된 루터의 대. 소요리 문답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신앙교육서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그러나 중세 신학자들이 신앙교육서에서 보여준 입장과는 달리 칼빈은 여기에서 신앙고백적(confessional)이고 요리문답적(catechetical)인 핵심 교리에 대한 가르침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용과 카톨릭의 잘못된 성례들 그리고 교회 권력과 시민 정부를 포괄하는 개념인 기독교인의 자유와 같은 동시대인들에 의해서 민감하게 거론되었던 변증적인(apologetic) 주제들을 다루었다.

다만 이러한 변증은 단순히 기독교인의 자유와 교회적이며 사회적인 질서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프랑스 왕 프란시스 1 세 (Francis I)에게 보낸 헌정사에서 강조했듯이 “교리의 본질(qualissitdoctrina)”과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을 감화해서 진정한 경건의 능력을 갖추게 하는 어떤 근본들(rudimenta)”을 선포하는 것이었다.즉, 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전개된 칼빈의 신학적인 변증(apologia)은 논쟁적이거나 형식적이라기보다 교리적이었으며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그의 “개혁주의적(Reformed)”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또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시사(示唆)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기독교 강요』초판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우르로 내몰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설교하고, 심방하며, 목양하는 진정한 목회자의 생활을 체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열매로서 새로운 기독교 강요가 17장으로 획기적으로 증보, 재편되어 1539년에 출판되었다.

새 책에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교리가 조직화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각각 처음 두 장을 차지함으로써 교리의 교훈적 요소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앎” 자체가 계시를 내리받음과 예배를 올려드림과 함께 파악되어야 함이 논구됨으로써 지식의 경건성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회개의 장이 신설되었다. 당시 카톨릭 신학자들은 회개가 고해성사와 보속(satisfaction)을 포함해야 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여 잘못된 공로사상을 신학적으로 변호하고자 했다. 칼빈은 오직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회개를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와 선행에 대한 교리가 첨가되었다. 이 역시 변증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신약과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한 장을 신설함으로써 신약과 구약은 실체(substantia)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oeconomia,admistratio,dispensatio)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원리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구약이 성경의 예비가 아니라 성경 자체임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 장에 이어서, 우리가 칼빈의 칼빈주의(Calvin’s Calvinism)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다룬 장이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증적 성격과 더불어서 신앙고백적인 요소가 강화되었으니, 특별히 『기독교 강요』가운데서 “황금의 작은 책”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인의 삶의 교리라는 이름의 장이 새롭게 신설되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기독교인의 철학(philosophiaChristiana)은 “미래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으로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에 구현되는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iaChristi)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1559년 기독교 강요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들이 거의 빠짐없이 수립되었다.

1543년에 출판된 제 3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교회론과 시민정부론에 관한 논쟁들이 광범위하게 추가된다.이 새로운 판의 기독교 강요를 “가장 교부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칼빈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의 작품들로부터 상당한 수의 인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 부분이 세 개의 장을 구성했다. 첫 번째 부분은 믿음, 하나님, 그리고 창조에 할애되었다. 두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다루었다. 세 번째 부분은 교회, 죄용서, 그리고 부활에 대한 고백을 해석했다. 두 번째 부분을 기독론과 성령론으로 나눈다면 네 부분이 되는데 이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1559년 『기독교 강요』마지막 판의 각각의 주제에 해당한다. 칼빈은 사도신경을 부분별로 나누어서 이해함으로써 로마서에서 특징적으로 제시된 교리들을 재편성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새로운 관점이 목회 경험과 전망으로부터 배태(胚胎)되었다. 이로써 신앙고백적 요소와 교훈적 요소가 함께 조직화, 체계화 될 길이 열렸다.

제 4판 1550년 『기독교 강요』는 1543년 판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다만 성경 구절들과 교부의 작품들에 대한 인용이 크게 확대되었다. 제 4판은 칼빈의 신학과 목회가 심오하게 깊어지는 시기에 저작되었다. 교회법과 관련된 현저히 많은 수의 단락들이 1550년 기독교 강요에 첨가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각각의 장을 다수의 절로 나누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조는 교리교육과 변증에 있어서 더욱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는 무려 80장에 달하는 큰 책이 되었다. 장을 묶는 “권”을 넷으로 했다.그리하여서 권-장-절의 점강적(漸降的) 구조를 취하게 했다. 이제 책은 성경 전체와 맞먹는 분량이 되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전체 교리체계를 사도신경에 따라서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다.칼빈은 새로운 기독교 강요에서 그 동안 판들을 통해서 지향되어온 교훈적, 고백적, 변증적 교리 서술이 가장 합당한 순서와 방법에 따라서(adaptissimammethodum, enordreetméthodebienpropr)”이루어졌다고 믿었다.

1559년 판에는 비록 많은 곳의 내용이 변경되고 신설되었으며 위치 변화가 있었지만 주요한 교리들에 대한 이전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제 1권의 전반부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개괄적 고찰을 한 후 일반계시(자연법)와 특별계시(성경)를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삼위일체론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논구한다. 대체로 제 1권은 조직신학에 있어서 서론과 신론에 해당한다.

제 2권에서는 먼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다루고 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논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지 않고 먼저 율법과 신약과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해서 몇몇 장들을 할애한다. 이로써 칼빈은 전체 성경의 실체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침의 순서상(ordodocendi)이미 부각시키고 있다. 제 2권은 인간론과 기독론을 주로 다루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전통적인 주제인 로고스와 노모스 즉 그리스도와 율법의 교리가 중심 교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제 3권에서 칼빈은 먼저 성령에 관한 논의에 한 장을 할애하고 이어서 믿음-회개-기독교인의 삶-이신칭의의 원리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순서 자체를 구원서정(ordosalutis)으로 보는 것은 금해야 한다. 사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비록 따로 장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의 교리를 전체 구원론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위에 이신칭의의 원리를 세우고 있다. 처음 세 가지의 주제들(믿음, 회개, 기독교인의 삶)을 다룬 장들은 개인 구원의 서정을 다루었다기 보다는 이들 주제들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밝히고 이를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하고자 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전체 구원 서정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룬 장 안에서 함축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전의 판들을 통해서도 칼빈은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이해해야 우리는 칼빈이 왜 이신칭의의 장을 바로 이어서 나오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다룬 장을 “칭의의 부록”이라고 부르는지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제 3권의 나머지 부분은 예정론과 기도론 그리고 최후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종말론에 할애된다. 예정론이 은혜의 한 방편인 기도와 함께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칼빈이 이를 단지 선택자와 유기자를 나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교리로서만 경직되게 이해하지 않고 구원 받은 백성의 삶 가운데서의 확신이라는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종말론적 언급이 구원론의 마지막에, 교회론 이전에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 의미 있는 교리로서 이해된다. 이렇듯이 제 3권은 구원론과 종말론에 할애되었다.

제 4권은 교회론과 시민국가론을 다루었다. 교회와 국가 모두 입법, 행정, 사법의 관점에서 논구되었다. 특히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함께 논의하면서 참교회는 양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을 통하여서 그 일치를 추구해야 함을 전체 문맥 가운데서 도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수직적인 진리와 수평적인 사랑이 모이는 바로 그 점—십자가의 가로대와 세로대가 만나는 점으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의 언약성과 공동체성이 함께 강조된다. 마지막으로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시민국가에 대한 교리도 이러한 가시성과 비가시성, 수직성과 수평성이 함께 깔려서 전개된다.

마지막 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직과 중보사역을 강조함으로써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삶의 부유함을 부각시킨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칭의의 의의 전가로서, 성화는 그리스도의 성화의 의의 전가로서 다루어진다. 칭의는 단회적이며 성화는 반복적이다. 칭의와 성화가 구별은 되나 분리가 되지 않음은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단회적 교제(communio)와 반복적 교통(communicatio)이 분리되지 못함과 다를 바 없다. 칼빈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여전히 중보하시는 중보자의 사역에 중점을 두고 성도의 구원의 역동성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성도 개개인은 각자에게 맡겨진 삼중직을 감당하고 살고 있으며 또 그러해야 함이 파악된다. 그리하여서 새의 날개와 같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값 싼 은혜에 허덕이지 않고 위로부터 내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성도만이 누리는 삶을 미리 맛보고 살게 된다.

 

III. 소위 ‘칼빈신학의 중심 교리’가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작품에 나타난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 강요의 판별 특징을 일별했다.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은 어느 특정한 교리에 터 잡아서 발전한 것인가? 과연 그 동안 등식화되던 칼빈=예정론은 합당한가?

소위 칼빈신학의 중심 교리(the so-called central dogma of Calvin’s theology)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이 전개되어 왔다.그러나 칼빈의 신학을 일의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적 전제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계시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헝가리 출신의 개혁신학자 바써디는 칼빈의 신학을 역사적이거나 교단적 그룹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텍스트의 성격으로 논의할 것을 제안하였다.첫째로, 칼빈의 신학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실용주의(belief-ful pragmatism)”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실용주의는 철학적 실용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실제로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하신 그 분의 목적에 따라서 성도의 삶이 이끌림을 받는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실재주의(belief-ful realism)”가 논의되었다. 실재주의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성도의 삶 가운데 성취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그 분의 영의 임재가 강조되었다. 셋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전체주의(belief-ful totalitarianism)”가 언급되었다. 이는 규범과 약속이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고 고찰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시며 이루시는 분이라는 측면이 중심적으로 논의되었다. 넷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불가지론(belief-ful agnosticism)”을 말하면서, 비록 하나님의 섭리의 숭고함과 영광이 우리에게 맞추어져 계시되나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 가운데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칼빈이 강조했음을 주목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믿음으로 말미암은 반율주의(belief-ful antinomism)”가 제시되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입법자가 아니라 단지 사람의 준칙에 대한 판단의 기준 정도로 여기는 칸트의 이성주의적 윤리관과는 전혀 배치되는 칼빈의 율법관이 언급되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법의 수여자시기 때문에 이미 명령에는 은혜를 예지하셨다는 측면을 강조했다고 지적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 다섯 가지의 특징이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칼빈의 기독교인의 삶의 교리의 대원칙에 합치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입장은 칼빈의 신학을 단지 변증법적이며, 수사학적이고, 관조적이라고 보거나,혹은 그 역사적이거나 문체적인 특성에만 집착하여 단지 그것이 역동적이며, 포괄적이며, 상호적이라고 보는 오늘날의 비신학적인 피상적인 견해에 경종을 울린다. 칼빈의 신학이 전체적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오늘날 지나치게 인문주의적으로 칼빈의 신학을 다루는 학자들이 지향하는 감화는 대체 무엇인가? 오히려 현대적인 수사(修辭)들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칼빈신학을 “질서와 성령(order and the Holy Spirit)”으로 파악하여 무너진 질서의 회복으로서의 성령의 임재와 그 삶의 현상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언약적 은총을 강조하는 이전 시대의 어느 학자의 고찰은 한결 심오하지 않은가?

최근에 캠브리지 시리즈로 발행된 칼빈 글모음에서는 18개의 논문 중에서 칼빈의 신학”이라는 제하의 한 논문만이 그의 신학을 다루는데 할애되었다. 그 한 논문을 집필한 헷셀링크는 칼빈신학의 특징을 기독론적, 성령론적, 삼위일체론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적이라고 네 가지의 특징들을 들어서 설명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서의 칼빈신학을 전개하면서, 그는 반 세기전 강연된 월터 크렉(Walter Kreck)의 제안을 상기시킨다.첫째, 말씀과 성령이 하나로써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신지식은 성령으로 감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受納)함으로 인함이다. 둘째, 오직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성령이 하나가 된다. 셋째, 말씀의 계시가 곧 은혜를 수여하심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 분 안에서는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은혜의 선물이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과 유기의 말씀이다. 예정론은 선택과 유기에 동일한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사람이 그저 받은 은혜(gratiaimmerita)로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며 그 가운데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는 교리이다.예정론에 관한 마지막 고찰은 오직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특성들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이해된다.

칼빈신학의 중심 주제로 Calvin’s Calvinism이라고 명명된 예정론과 섭리론이 주로 논해졌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일부 언약신학자들이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으로 주장하듯이 그가 엄격한 하나님의 의지만을 신학의 주제로 삼아서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 칼빈신학의 중심으로 전체 축자 영감 성경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론, 교회론 등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나, 필자는 칼빈신학의 요체를 다음과 같이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1.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며(존재), 스스로 진리시며(지식), 스스로 의로우심(도덕); 2.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고 일하심, 즉 살아계심; 3. 일반계시와 일반은총 강조; 4.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자로 삼으셔서 육신 가운데 구원을 계시하시고 이루심; 5. 성령으로 영감 된 말씀을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 받은 심령이 믿음으로 수납(受納)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부요한 지식에 이름; 6.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함께 강조; 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를, 다 전가하셔서 성도의 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도 의롭다고 받으심; 8.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의 영으로 중생한 성도가 그 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 자라감—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전체 율법의 과정을 은혜로써 주장하심; 9.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그 분과 함께 후사된 성도의 삶—미래를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10.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자유; 11. 거저 택함 받았음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감사와 기도의 삶; 12.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체된 백성들의 연합체로서의 교회; 13.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 참 성례신학—영적이나 실제적인 임재; 14. 공평을 강조하는 시민 국가의 삶. 이러한 칼빈신학의 요체를 형성하는 근본 원리가 곧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ascripta)!라는 슬로건으로서 표현된다.

칼빈신학의 중심 주제를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칼빈신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획일화할 수 없다. 필자는 칼빈신학의 부요함, 역동성, 보편성, 그리고 윤리성을 그가 제 신학적 견해들을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전개하였음에 기인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칼빈의 관점에서 칼빈을 읽기에 힘써야 한다. 칼빈의 신학에는 삼위내적 진리와 삼위와 우리간의 외적 진리가 함께 논구된다. 삼위내적 진리는 삼위 하나님의 진리로서 그리스도시며, 삼위와 우리간의 외적 진리는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진리로서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inse)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우리를 위하신(pronobis)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 분께서 우리 구원의 전체 과정을 주장하신다. 그 분께서 우리를 주장하심이 곧 하나님의 주권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말함으로써 전체를 말할 수도 있으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중보자 그리스도를 함께 말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심을 동시에 파악한다. 그리하여서 우리는 단지 관념적인 신관이나 인식론에 편향된 실존주의적 기독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관점하에 계시론,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론, 성령론, 교회론의 순으로 칼빈신학을 간략하게 고찰한다.

 

IV. 계시와 성경,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 사역

칼빈은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천명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기 때문에(행 17:28),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게끔 이끄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손”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명백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삼아야 할 유일한 규범(unicaregula)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고귀하심과 자신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깨달을 수 없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autoritas)를 논하면서 그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Deiloquentispersona)에 자주 문의(問議)한다. 즉 권위가 저자(autor)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부각된다.계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유래하며,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원의 길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함이 참 신지식의 길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참 지식이 없다.그리스도는 “중보자 혹은 사역자의 인격으로” 오직 아버지께 받은 것을 말씀하신다.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인류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계시의 저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주이시며 내적 교사(interiormagister)이시다.오직 그 분께서 중보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서 수납한다.그러므로, 이 말씀의 기록인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참되고 건전한 교리의 한 입 맛조차 볼 수가 없다.”구원의 은혜를 제외하고는, 성경 계시의 은총을 논할 수는 없다.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도의 심령 속에서 살아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고백에 이를 수 없다.“우리 밖에(extranos)”계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innobis)”중보하신다는 사실은 성경 가운데서 자신의 거룩한 입술로 친히 말씀하시는 성령의 은밀하고 내적인 증거(arcanumetinteriustestimonium)와 함께 확증된다.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친히 말씀하심은 그의 말씀이 믿음 가운데서 우리 속에 인쳐짐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침(obsignatio)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의 학교(schola)에서 겸손하고 가르칠만한 독자(modestusacdocilislector)가 된다.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경은 “신성한 어떤 것을 숨쉰다.”“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감화에 기초할 때에만 구원지식을 궁극적으로 충족시킬 것이다.”

말씀의 확실성과 믿음의 확신이 아버지께 받은 것을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고리 가운데 하나로 묶여져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역사한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이해 가운데 칼빈이 전개한 sola Scriptura 원리의 신학적 지평이 획득된다.

 

V.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

칼빈에게 있어서 내재적 삼위일체적(immanent-trinitarian) 이해와 경륜적 삼위일체적(economic-trinitarian) 이해는 상호 지향한다.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시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래하셨다”는 초대 교회에 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적 교리는 다음과 같은 경륜적 삼위일체적 교리와 함께 진술된다: “아버지는 사역의 시작이고 모든 일의 기원이자 근원이며, 아들은 모든 일의 지혜와 경륜과 작정된 바대로의 뜻이며, 성령은 그 사역의 능력이자 효력이다.”칼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신격(deitas)을 논함에 있어서 그 분께서 말씀이심과 교회의 머리이심을 특히 강조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하고 실체적인 말씀(VerbumPatrisaeternumetessentiale)”이기 때문에 아들의 중보가 없으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세상의 빛”(요 8:12)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원천”(시 36:9)이신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눅 10:22).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끌림을 받은 자(요 6:44; 12:32; 17:6)만이 아버지를 알게 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칼빈은 중보자의 필연성을 구속사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계속적인 중보의 의의와 관련해서 설명함으로써 개인 구원 과정에 전체적으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 오실 필연성을 “중보자가 없이는(absquemediatore)”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수사학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며,중보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고,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께 이를 길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맞추심(accomodatio)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광대무변한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아들 안에서 유한하게 되시고 우리의 작은 척도에 자신을 맞추셨다.”

중보자의 필연성은 인간의 전체적,인격적 타락으로 말미암는다.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여전하나 이제 사람이 타락하여 도무지 어찌할 수 없으므로 중보자가 그 큰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오셔야 했다.칼빈은 성육신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 주님은 아담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위해서 참 사람으로 나타나셨고, 아담의 인격을 입으셨고, 그의 이름을 취하셨다. 이는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해서 무름의 값(in satisfactionis pretium)으로 제시하시면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 값을 동일한 육체 가운데서 지불하고자 하심이었다. 요약해서, 하나님으로서 홀로 죽음을 느낄 수 없고, 사람으로서 홀로 그것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본성에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로 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인성의 약함을 죽음에 내어 주고자 했으며, 신성의 능력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죽음과 씨름 하시면서 승리를 얻고자 하셨다.

칼빈은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중보하시는 역사를 부활과 승천과 재위(sessio)의 은혜를 논하며 특히 강조한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셔서 자신의 왕국을 이루시며, 약속하신 일을 행하시고, “더욱 현재(顯在)하는 능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모시게 된다는 점이 또한 지적된다.전체적으로 승천의 의의는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caputecclesiae)”로서 다스리심에 있다는 점이 부각된다.

승천과 재위의 은혜는 무엇인가? 첫째, 주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이후 닫힌 문을 여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늘 성소에 계신다. 그 분이 화목주로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보좌에 가까이 갈 길을 얻었다(히 7:25; 9:11-12; 롬 8:34). 셋째,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성령을 내려주셔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고 각종 은사를 주셔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리하여서 종국적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을(ecclesiaesuaeaedificationem)완성하신다.”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의 범위는 복음의 범위와 일치한다. “완전한 구원의 전체”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포괄한다.그리스도의 대속적 무름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스도의 무름은 그의 계속적 중보를 통한 의의 전가에 미친다.그리스도의 무름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형용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은혜”는 끝날 까지 전체 구원 과정을 통하여서 역사한다.주님께서 보좌 우편에 재위하셔서 자신의 영을 내려주심으로써 우리를 다스리시기 원하셨다.그리스도의 무름의 공로는 그의 다 이루심의 중보와 다 이루신대로 이루어 가심의 중보를 포함한다. 무름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서 생명에 이르는 언약에 기초한다(롬 5:19).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므로(히 9:15), 언약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의 보호자 되심에 이른다.

 

VI. 성령의 일반은총적, 특별은총적 사역

화란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위퍼는 100년 전 칼빈 탄생 400주년을 맞이해서 발표한 “신학자 존 칼빈”이라는 글에서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the theologian of the Holy Spirit)”라고 부른다.카위퍼는 칼빈이 “일반은총,” “중생,” 그리고 “성령의 증거”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성령론을 발전시켰다고 말했다.칼빈 탄생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오늘날 칼빈의 영적 후예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과연 그의 성령론을 주목하고 있는가?

칼빈은 성령의 신위격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함에 있어서 그 분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exsistere)는 필리오께 교리의 기초를 제시한다. 성부와 성자는 같은 영으로 계심으로(constare)한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자신이 전부(totus)아들 안에, 아들 자신이 전부(totus)아버지 안에 계심과 같이 성령도 그러하다.성부, 성자, 성령은 위격적으로 존재하시는 가운데 본질에 있어서 자존(auvtoousia, auvtoqeoj)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 가운데 성령의 위격적 특성인 “힘과 작용(virtusetefficacia)”이 경륜적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이 두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로 창조주 성령(SpiritusCreator)으로서 성령의 영원성이 창조 전과 후를 통한 그의 사역을 통해서 적시된다. 성령께서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보존하실 뿐 아니라, 창조 전의 혼돈의 덩어리도 돌보셨다. 둘째로 중생주 성령(SpiritusRegenerator)로서 성령은 고유한 생명력으로 새 생명을 지으시는 분으로서 제시된다. 성령의 위격적 특성이 여기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virtusvivificans)으로서 부각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다.모든 자연인들에게는 “영의 선물들(donaspiritus)”이 수여되었다.성화의 영으로서 성령은 오직 성도들에게만 내주하여 그들을 성령의 전(殿)으로 삼지만, 창조의 법(lexcreationis)에 따라서 인간에게 주시는 뛰어난 지식도 모두 동일한 성령의 교통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자연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자연의지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의지할 수 없다.다만 자연이성과 자연의지는 성령의 은총으로서 인류의 공적인 선을 위하여 남아있다.

성령은 믿음을 통하여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그들의 정신과 영혼에 인친다(obsignare).대체로 칼빈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중보로 전가하는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적시하기 위하여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특정한다. 살리는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의 작용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죄와 의와 심판에 미친다.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그리스도는 진정한 임마누엘이시므로 우리 안에서 응답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영생의 백성이 되었다.성령은 감화(persuasio)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 되어서 “그와 완전히 하나되기 까지 줄곧” 자라간다.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 행하는 능력을 전가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전체 과정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에 칭의와 함께 성화가 시작된다.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을 부어주심으로써 그가 우리 속에 우리가 그의 속에 거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며 자신의 의와 은혜를 충만히 베풀어 주신다. 이것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거룩하고 신비한 연합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칭의에 관해서는 단회적이며 성화에 관해서는 계속적이다.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도 받으신다. 그리하여서 성도는 불완전한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큰 일의 도구로서 헌신하며 또한 그 만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로나 삶으로나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찢는 것이다.칭의와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며, 모든 삶이 그렇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도 은혜이다.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그것의 한 점(點)이라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VII.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라감

칼빈의 신학은 교회의 신학을 지향한다. 그는 교회의 신학자였다. 칼빈의 교회관의 기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사도신경을 해석하면서 교회 공동체(societas)가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고 일치되어서 한 머리에 의지함으로써 한 몸으로 자라가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1559년 기독교 강요에서는 이를 다시 확인하면서, 비가시적 교회로서 선택된 사람들의 총수가 오직 하나님의 은밀한 구원 경륜의 손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섭리의 극장(theatrumprovidentiaedivinae)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구원의 연속이며 혜택이고 하나님과 그의 택한 백성이 인격적인 연합(uniopersonalis)을 이루는 곳이다.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영으로 연합하여 함께 자라감이 곧 교회의 보편성과 거룩성의 표이다. 교회는 어린 아이에게는 어머니와 같고 좀 더 자란 사람들에게는 학교와 같다.칼빈이 설교했듯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이 다 사라져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영광을 즐거워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칼빈은 교회의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을 교회의 표지로 삼고 권징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진리”를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편적 교회라고 그는 말한다.즉 참 교회(ecclesiavera)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음, 그리고 기타 합당한 경건의 원리들”에 대한 선포와 들음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교회의 권징(disciplinaecclesiae)은 이러한 말씀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는 아버지의 매와 같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 교리가 교회의 영혼과 같다면 권징은 교회의 힘줄들과 같다.이와 같이 참 교회의 표지는 머리이신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중보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 교회의 참 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 가운데 하나임(unitasinunio)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속성으로부터 교회의 직분론을 전개한다.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감(inaedificationemcorporisChristi)”이며 이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써 성도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게로 날마다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의복음의 사역보다(ministerioevangelii)”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사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잔에 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고유한 기능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직분에 앞서며 성령의 은사로서 직분이 표현된다.성령의 은사들은 직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직분을 예비한다. 직분을 명령하시는 분이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이 직분을 합당하게 감당해서 지체들을 서로 세워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영은 하나인 것과 같이, 직분들은 다양하지만 몸은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사역의 신비이다.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으로만 합당하게 표현된다.

 

VIII. 결론: 칼빈의 칼빈신학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의 칼빈신학을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주로 고찰하였다. 이곳에서, 칼빈의 신학은 단지 신학적 자료를 제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성경 진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후 개혁신학의 토대를 놓았음을 지적되었다. 칼빈신학의 심오함과 역동성은 그것이 sola Scriptura의 원리에 확고하게 서 있기 때문이라고 논증되었다. 보수 장로교단의 신학으로 대표되는 한국 개혁주의는 칼빈의 교리들을 신앙의 규범을 제시한 조항들로 여긴다. 오늘날 많은 경우 칼빈은 단지 이용될 뿐 신앙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대의 요청이 다시금 말씀을 들음으로써(exauditu)성도와 교회가 마땅해지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칼빈으로의 ad fontes 합당하게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 분량의 한계상 칼빈의 주요 교리들을 모두 소개하지는 않았다. 그것들 가운데는 예정론, 섭리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 성찬론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 교리들이 터 잡고 있는 칼빈 신학의 기초를 본고는 분명히 제시했다.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내재적-경륜적 이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나아가는 교리로서 파악되었다. 칼빈은 성도와 교회의 본질, 의의, 삶을 이러한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합당하게 파악함으로써 이후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책임, 복음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은혜 언약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개혁주의의 길을 열었다.

칼빈은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데 있다” 라고 말하였다.이로써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신학이 어떠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신학은 참되고 확실해야 하며 성도를 세우는데 유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악으로부터 선을 분별하고 그 선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성도의 양심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신학자로서 칼빈은 말씀 가운데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서 오직 들은 것만을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기록하기에 힘쓴 주님의 일꾼이었다. 신학자는 주님의 일꾼으로 주의 남은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일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분께서 모든 것을 다 전가해 주신다는 오직 은혜, 절대 은혜의 선포이며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의 공로만을 찬미함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전체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서 그것이 “그의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고전 1:30). 만약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들은 그의 기름부음 가운데 발견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권에; 순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에;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의 나심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심으로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우리의 고난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수난에 있다; 형벌로부터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의 징계에;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갈 3:13);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 제물에;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 삶의 새로움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 영생을 구한다면, 역시 그곳에; 하늘 왕국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의 하늘로 들어가심에; 만약 보호, 안전, 모든 축복의 부요함을 구한다면, 그의 왕국에; 떨림 없는 심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능력에 있다. 요약하면, 모든 종류의 선함으로 부요한 곳간이 그에게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자.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히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1] Richard Stauffer, The Humanness of John Calvin, tr. George Shriver (New York: Abingdon Press, 1971).

[2] Alexandre Ganoczy, The Young Calvin, tr. David Foxgrover and Wade Provo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7), 242.

[3] Responsio ad Sadoleti Epistolam (1539), Opera Selecta (이하 OS), 1.460: “나는 나에 대한 말을 놓고 하지 않는다(De me non libenter loquor).” 

[4] 졸저, Byung-Ho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Calvin’s Christ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Law as the Rule of Living and Life-Giving (Milton Keynes, UK: Paternoster Press), 130-139.

[5]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144-147, 163-170.

[6] Cf. Richard A.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7] Concio academica nomine rectoris universitatis Parisiensis,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이하 CO), 9.873-876, CO 10/2.30-36. 학자들은 대체로 본서가 칼빈의 저작임을 확인한다. Jean Rott, “Documents strasbourgeois concernant Calvin,” Revue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44 (1964), 290-305; Joseph N. Tylenda, “Calvin’s First Reformed Sermon? Nicholas Cop’s Discourse—1 November 1533,”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38/3 (1976), 300-310.

[8] “The Academic Discourse. Delivered by Nicolas Cop on Assuming the Rectorship of the University of Paris on 1 November 1533,”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tr. and annot. Ford Lewis Battles,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86), “Appendix II,” 365 (CO 10/2.31).

[9] A tous amateurs de Iésus Christ, et de son S. Evangile, salut, CO 9.801-802.

[10]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ève of 1537, CO 22.33-74; Catechismus, sive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of 1538 (이하 Catechismus), CO 5.317-362. 본서에 대한 번역은 다음 참조. Catechism or Institu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Ford Lewis Battles (라틴어판), in I.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7, hereafter First Catechism): 7-38; Instruction in Faith, tr. and ed. Paul T. Fuhrmann (불어판, Philadelphia: Westminster, 1949).

[11]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140.

[12] John Calvin, Instruction in Faith(1537), tr. and ed. Paul J. Fuhrmann(Philadelphia: Westminster, 1949), “Historical Forward,” 8-10.

[13] I.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Featuring Ford Lewis Battles’s Translation of the 1538 Catechism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41.

[14] Omnibus Christi Evangelium Religiose Colentibus . . . 1537 불어판에는 서문이 없다.

[15] Catechismus, CO 5.317.

[16] “verum iustae ac sanctae vitae exemplar, adeoque imago iustitiae ipsius absolutissima,” Catechismus, CO 5.327-332 (CO 22.38-46).

[17] Catechismus, CO 5.335-336 (CO 22.49-50).

[18]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의 1 신앙교육서는 단지 1536 기독교 강요의 요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1539 기독교 강요로 넘어가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있다. Cf. Jean-Daniel Benoît,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the Institutio: How Calvin Worked,” tr. the editor, in John Calvin, ed. G. E. Duffield (Grand Rapids: Eerdmans, 1966), 102; Olivier Millet, “Le premier ‘Catéchisme’ de Genève (1537/1538) et sa place dans l’oeuvre de Calvin,” in Catéchismes et Confessions de foi, ed. Jean Boisset (Montpellier: Université de Montpellier, 1995), 212, 224.

[19] Cf. August Lang, “The Sources of Calvin’s Institutes of 1536,” Evangelical Quarterly 8 (1936), 134; Wilhelm Neuser, “The Development of the Institutes 1536 to 1559,” in Institute for Reformational Studies, ed. Bahrend Johannes van der Walt et al. (Potchefstroom: Potchefstroom University, 1986), 38.

[20] Cf. Albert Rilliet, “Notice Historique.” In Le Catéchisme Français de Calvin publié en 1537, réimprimé pour la première fois d’après un exemplaire nouvellement retrouvé, et suivi de la plus ancienne Confession de foi de l’église de Genève, avec deux notices. Ed. Albert Rilliet and Théophile Dufour. Genève, 1878: 42-44. 저자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이 이미 이후 칼빈주의의 신학적 단초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21]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totam fere pietatis summam, et quidquid est in doctrina salutis cognitu necessarium, complectens; omnibus pietatis studiosis lectu dignissimum opus, ac recens editum, 1536, CO 1.9.

[22] Cf. Elsie McKee, “Calvin’s 1536 Institutes: The Church’s Book,” in Calvin Studies III, ed. John H. Leith (Richmond: Union Theological Seminary, 1986), 35-37.

[23]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nunc vero demum suo titulo respondens, 1539.

[24] Cf. Paul Wernle, Der evangelische Glaube nach den Hauptschriften der Reformatoren, vol. 3, Calvin (Tübingen: J. C. B. Mohr, 1919), 3.23-24, 166 ff.

[25]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nunc vero demum suo titulo respondens, 1543.

[26] Cf. Benoît,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the Institutio,” 107-108; Neuser, “The Development of the Institutes 1536 to 1559,” 45-46. 

[27] Johannes van Oort, “John Calvin and Church Fathers,”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From the Carolingians to the Maurists, 2 vols, ed. Irena Backus (Leiden: E. J. Brill, 1997), 675-676; Neuser, “The Development of the Institutes 1536 to 1559,” 47.

[28] 이런 측면에서 1539 기독교 강요에 대한 로마서의 영향은 1543 판에서 확연한 열매를 맺었다고 것이다. Cf.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129-130. Muller 1539 기독교 강요가신앙교육이 어느 체계로 전환되었다기보다는 신앙교육적인 주제와 순서가 바울의 구원론의 주제와 순서에 따라서 통합되었다 본다.

[29]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nunc vero demum suo titulo respondens, 1539.

[30] Cf. Paul Wernle, Der evangelische Glaube nach den Hauptschriften der Reformatoren, vol. 3, Calvin (Tübingen: J. C. B. Mohr, 1919), 3.23-24, 166 ff.

[31]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nunc vero demum suo titulo respondens, 1543.

[32] Cf. Benoît,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the Institutio,” 107-108; Neuser, “The Development of the Institutes 1536 to 1559,” 45-46. 

[33] Johannes van Oort, “John Calvin and Church Fathers,”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From the Carolingians to the Maurists, 2 vols, ed. Irena Backus (Leiden: E. J. Brill, 1997), 675-676; Neuser, “The Development of the Institutes 1536 to 1559,” 47.

[34] Cf. Ford Lewis Battles, “The Future of Calviniana,” in Renaissance, Reformation, Resurgence, ed. Peter De Klerk, presented at Colloquium on Calvin & Calvin Studies in 1976 (Grand Rapids: Calvin Theological Seminary, 1976), 133-173; Charles Partee, “Calvin’s Central Dogma Again,” in Calvin Studies III, ed. John H. Leith (Richmond: Union Theological Seminary, 1986), 39-46; Wilhelm Neuser, “The Work of the Calvin Congresses and Their Future Tasks and Goals,” in Calvin Studies V, ed. John H. Leith (Davidson, NC: Davidson College, 1990), 21-27; Richard A. Muller, “Directions in Current Calvin Research,” in Calvin Studies IX, ed. John H. Leith and Robert A. Johnson (Davidson, NC: Davidson College & Davidson College Presbyterian Church, 1998), 70-87.

[35] Bela Vasady, The Main Traits of Calvin’s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51)11. 

[36] Vasady, The Main Traits of Calvin’s Theology, 15-41. Cf. Inst. 2.8.1 (CO 2.505):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Nostri non sumus . . . Dei sumus).”

[37] Randall C. Zachman, John Calvin as Teacher, Pastor, and Theologian: The Shape of His Writings and Thought (Grand Rapids: Baker, 2006), 77-79.

[38] Donald K. McKim, ed., Calvin’s Institutes, Abridged Edi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onx, 2001), Editor’s Introduction, xviii-xix.  

[39] Cf. M. Eugene Osterhaven, The Spirit of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71), 31.

[40] M. Eugene Osterhaven, The Faith of the Church: A Reformed Perspective on Its Historical Develop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2), 162-193.

[41] 글은 Calvin Studien 1959 심포지움 (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60)에서 발제 되었다. 

[42] 한편 유기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마땅한 형벌(poena debita)” 받는다. Inst. 3.23.11(CO 2.707).

[43] I. John Hesselink, “Calvin’s Theology,” in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44] Inst. 1.1.1(CO 2.31).

[45] Inst. 1.1.2(CO 2.32).

[46] Inst. 1.1.3(CO 2.33): “hominem humilitatis suae agnitione nunquam satis tangi et affici, nisi postquam se ad Dei maiestatem comparavit.”

[47] Inst. 1.7.4 (CO 2.58).

[48] Cf.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102-104.

[49] Comm. Jn. 17:8 (CO 47:379). 이하 칼빈의 구약 주석은 The Commentaries of John Calvin, 46 vols., Calvin Translation Society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48-1950) 사용 (vols.1-15). 그리고 신약 주석은 John Calvin,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0-1972) 사용. 주석 표기는 전체적으로 Comm. 성경 .절로 표기. 

[50] Inst. 2.1.1(CO 2.393-394).

[51] Inst. 3.1.2, 4 (CO 2.394-395, 396-397). 이와 같은 이해 가운데 성령은 우리의 내적 교사가 된다. Comm. Eph. 1:17 (CO 51.156).     

[52] 이는 신학의 원리들(principia theologiae)로서 논해진다. Cf.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ume 1: Prolegomena,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3), 89, 207 ff.; Abraham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tr. J. Hendrik De Vries (Grand Rapids: Eerdmans, 1980), 341 ff.

[53] Inst. 1.6.2(CO 2.54).

[54] Cf. Willem van’t Spijker, “The Sealing with the Holy Spirit in Bucer and Calvin,” in Calvin, Beza and Later Calvinism, Calvin Studies Society Papers 2005; John Calvin and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Calvin Studies X and XI 2000, 2002, ed. David Foxgrover (Grand Rapids: CRC Product Services, 2006), 262-266. 

[55] Cf. Willem van’t Spijker, “ ‘Extra Nos’ and ‘In Nobis’ by Calvin in a Pneumatological Light,” in Peter De Klerk, ed. Calvin and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89), 44-46.

[56] Inst. 1.6.1 (CO 2.53). 

[57] Inst. 1.6.4 (CO 2.55).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성령의 학교(schola spiritus sancti)라고도 불린다. Inst. 3.21.3 (CO 2.681). Cf. Kenneth S. Kantzer, “Calvin and the Holy Scriptures,” in Inspiration and Interpretation, ed. John F. Walvoord (Grand Rapids: Eerdmans, 1957), 154-155.

[58] Inst. 1.7.5 (CO 2.60-61). 칼빈은 가르칠만함(docilitas) 중생의 표로서 인식한다(Inst. 1.7.3, CO 2.58). “우리의 지혜는 겸손히 가르침만한 심령이 되어서 성경에서 가르쳐진 무엇이든지 예외 없이 껴안는 것이다”(Inst. 1.18.4, CO 2.174).   

[59] Inst. 1.8.1 (CO 2.62).

[60] Inst. 1.8.13 (CO 2.69).” 

[61] Cf. Cornelius Van Til, The Protestant Doctrine of Scripture, In Defense of the Faith, vol. 1 (Ripon, CA: Den Dulk Christian Foundation, 1967), 29-30;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280-289.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관한 종교개혁자들과 카톨릭의 이해에 관해서, Heiko A. Oberman, “Quo Vadis, Petre? Tradition from Irenaeus to Humani Generis,” in The Dawn of the Reform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86), 269-296.    

[62] Inst. 1.13.18 (CO 2.105).

[63] Inst. 1.13.8 (CO 2.95-96).

[64] Inst. 1.13.7(CO 2.95).

[65] Inst. 3.2.1(CO 2.398).

[66] Inst. 3.1.4(CO 2.396-397).

[67] Inst 2.6.1 (CO 2.247-248).

[68] Inst 2.6.2 (CO 2.248-250).

[69] Inst 2.7.16 (CO 2.264).

[70] Inst. 2.1.9 (CO 2.184).  

[71] Inst. 2.2.1 (CO 2.185).

[72] Cf. Inst. 2.12.6 (CO 2.345), 3.11.5, 10 (CO 2.536-537, 540-541).

[73] Inst. 2.12.3 (CO 2.341-342).

[74] Inst. 2.16.14 (CO 2.381-382).

[75] Inst. 2.16.15 (CO 2.382-383).

[76] Inst. 2.16.16 (CO 2.383).

[77] Inst. 2.16.5 (CO 2.370-1).

[78] Cf. Comm. Rom. 1:17 (28, CO 49.20); 3:21 (70, CO 49.57); Rom. 3:22 (73, CO 49.60); Comm. Rom. 6:1 (121, CO 49.103); 6:22-23 (136, CO 49.118).

[79] Inst. 2.16.14 (CO 2.382).

[80] Cf. 3.1.2 (CO 2.394-395); Comm. Jn. 14:16 (2.82, CO 47.329); Rom.1:4 (16-17, CO 49.10-11); II Cor. 3:6 (41-43, CO 50.39-41).

[81] Inst. 2.17.3 (CO 2.388).

 

[82] B. B. Warfield,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56), 484-485.

[83]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 “Introductory Note,” xxxiv.

[84] Sinclair Ferguson, The Holy Spirit (Downers Grove, IL: IVP, 1996), 11-13. 퍼거슨은 개혁 성령론이성령의 신학자칼빈, 오웬, 그리고 카위퍼에 의해서 계승되어 왔음을 적시한다.   

[85] Inst. 1.13.19 (CO 2.105-106).

[86] Cf. B. B. Warfield,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Calvin and Augustine, 233-252.  

[87] Inst. 1.13. 14 (CO 2.101-102).

[88] Inst. 1.15.5 (CO 2.140).

[89] Inst. 2.2.15 (CO 2.198-199).

[90] Inst. 2.2.16 (CO 2.199). John Bolt, “Spiritus Creator: The Use and Abuse of Calvin’s Cosmic Pneumatology,” in Peter De Klerk, ed. Calvin and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89), 27.

[91] Cf.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92-95. 

[92] Inst. 2.2.16 (CO 2.199).

[93] Comm. Eph. 1:13 (CO 51.153).

[94] Comm. Jn. 16:8-11 (CO 47.358-361).

[95] Comm. Rom. 8:2, 8:10 (CO 49.136, 145).

[96] Comm. Jn. 14:1 (CO 49.321-322).

[97] Inst. 3.2.24 (CO 2. 418).

[98] Inst. 3.1.1 (CO 2.393-394); 3.2.16 (CO 2.411); Comm. Eph. 1:13 (CO 51.153)..

[99] Inst. 3.2.24 (CO 2.418). : “. . . sed mirabili quadam communione in unum corpus nobiscum coalescit in dies magis ac magis, donec unum penitus nobiscum fiat.”

[100] Comm. Jn. 15:26, 16:12-13 (CO 47.353-354, 361-363).

[101] Cf.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vol. 2, Select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7), 277-293.

[102] Comm. Jn. 14:20 (CO 47.331).   

[103] 필자는 칼빈의 이러한 입장을 이중적인 의의 전가 교리라고 부른다. Cf. Catechismus, CO 5.336-337; 1536 Inst (CO 1.49, 53); 1543 Inst (CO 1.787); Inst 3.17.10 (CO 2.598).

[104] Comm. Rom. 8:9 (CO 49.144).

[105] Inst 3.17.10 (CO 2.581).

[106] Cf. David N. Wiley, “The Church as the Elect in the Theology of Calvin,” in Timothy George, ed., John Calvin & the Church: A Prism of Reform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0), 96-117. 

[107] 1536 Inst (CO 2.72-73).

[108] Inst. 4.1.2 (CO 2.746).

[109] Comm. Eph. 5:28-33 (208-211, CO 51.225-228).

[110] Comm. Eph. 4:15-16 (184-185, CO 51.202-203).

[111] Inst. 4.1.1 (CO 2.746); 4.1.4 (CO 2.749).

[112] Joh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tr. Arthur Golding (London, 1577), rev. tr. Leslie Rawlinson and S. M. Houghton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3), Eph. 4:15-16 (404, CO 51.592).

[113] Inst. 4.1.10 (CO 2.753-754); “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I of France,” Inst. 24-25 (CO 2.23).

[114] Inst. 4.1.12 (CO 2.12).

[115] Inst. 4.12.1 (CO 2.905).

[116] Inst. 4.12.1 (CO 2.905).

[117] 특히 이와 관련하여, Catethismus, CO 5.341-342, 351-352.

[118] Inst. 4.3.1 (CO 2.776-778); 4.3.3 (CO 2.779). cf. Geddes MacGregor, Corpus Christi: The Nature of the Church according to the Reformed Tradi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8), 57.

[119] Cf. Werner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7), 322-323.

[120] Comm. Rom. 12:6-8 (CO 39.238-240).

[121] Comm. Eph. 4:11-14 (CO 51.196).  

[122] Comm.. I Cor. 12:1 (CO 39:496).

[123]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사역에 대한 기독론적 의의에 대해서, Leonard Sweetman, Jr., “The Gifts of the Spirit: A Study of Calvin’s Comments on I Corinthians 12:8-10, 28; Romans 12:6-8; Ephesians 4:11,” in Exploring the Heritage of John Calvin: Essays in Honor of John Bratt (Grand Rapids: Baker, 1976), 274-284. 

[124] Inst. 1.14.4 (CO 2.119-120).

[125] Inst. 2.16.19 (CO 2.3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