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칼빈의 신학과 영성

미션(cmc) 2009. 9. 16. 11:41

칼빈의 신학과 영성

 

최태영 교수 (영남신대)

I. '경건'으로서의 영성

개혁교회의 영성에 대해 중요한 저술을 한 라이스(H.L. Rice)는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영성'(spirituality)을 의미하는 단어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경건'(piety)이라고 하였다.1) 칼빈의 영성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L.J. Richard)도 경건을 "칼빈의 영성의 본질적 표현"2)이라고 하였다. 배틀스(F.L. Battles)도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전반적인 이해와 실천에 대한 상징은 경건"3)이라고 하였다. 정승훈도 "칼빈에게서 경건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신학적 용어이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영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4)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상응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을 영성이라고 할 때, 칼빈에게서는 그것이 주로 경건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그의 저술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영성을 경건으로서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경건에는 관심이 없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사람으로 이해되어 온 경향이 있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경건이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최종판인 1559년판의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자신의 신학과 사역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표명했다. "내가 교회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은 이후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보존하여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의도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양심적으로 떳떳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또 천사도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는 교회의 교사로서의 직분을 경건의 교리를 위한 것으로 여겼다. 프랑스왕 프란시스(Francis)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의도를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칼빈이 의도한 것은 한마디로 경건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그 책에서 경건이란 용어를 무수히 사용한 것으로서도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1.2.1)5)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부연 설명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사랑으로 양육을 받는다는 것과, 자기들이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이 내셨다는 것과,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1.2.1) 그러므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에서 오는 자발적인 사랑, 즉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칼빈의 경건 개념은 철저히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웃이나 세상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칼빈의 경건은 이웃에 대한 의무 및 세상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II. 경건과 신학



칼빈의 사고의 주제는 경건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학이라면 그렇게 알게 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서는 앎과 경건이 분리되지 않는다. 경건과 하나님을 아는 것, 곧 신학은 상호의존적이다. 홀트롭(P. C. Holtrop)은 그의 책에서 "『기독교강요』는 교리와 삶, 신학과 경건을 통합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각 교리가 '우리를 위해' 제공하는 유용성 또는 유익을 일관되게 강조한다"6)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칼빈의 글에 나타나는 주요 주제들은 경건에 대한 강력하고 폭넓은 관심에 비추어 보아야 확연히 드러날 때가 많다. 다음에 칼빈의 신학에서의 몇 가지 주제들과 경건의 관계를 살펴본다.



1. 경건과 신지식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조건이다." 이것은 『기독교강요』1권 2장 1절의 제목이다.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1.2.1) 그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경건에 도움이 되어야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1.2.2) 뿐만 아니라 지식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일체의 선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1.2.2)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출발하고 또 경건이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으로 인도한다. 신지식은 경건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려면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참된 지식이 참된 경건의 출발점이며 근거이다. 이 지식이 없이 경건은 불가능하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pietas)과 '학문'(scientia)은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



2. 경건과 성경

칼빈은 성경의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을 만큼 절대적으로 성경에 의존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경건을 위해서이다. 경건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데서 시작하는데, 올바른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칼빈이 성경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 아니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길이 없고, 따라서 경건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강요』1권 6-12장에서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임을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참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안경이다.

또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사람에게 인도자요 교사이다. 성경 없이는 우상 또는 거짓 신들만을 고안해 냄으로서 경건에 이르지 못한다. 성경의 학생이 되기를 거부하면 참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됨으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성경연구의 최종목적은 그리스도이다. 성경의 학생이 된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3.2.6.)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고 그를 닮는 삶을 가르치는 경건의 책인 것이다.



3. 경건과 하나님

칼빈은 신론에서 하나님 자체보다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서술하고자 하는 관심이 더 크다.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그리고 특히 아버지로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경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자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후자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참하나님을 보여주는데,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한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아는 것은 경건을 위한 필수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영적인 본성을 가르치는 교리다. 이것은 참하나님의 특성으로서 이것으로서 하나님은 우상들과 구분된다.

성경이 이교도들의 모든 신들을 명백하게 배척하며 거절하는 이유는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1.10.3) 칼빈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파괴되기" 때문이다.(1.11.1) 그가 형상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경건을 약화시키기 때문이었다. "유형적인 형상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류를 더하게 된다."(1.11.6)



4. 경건과 창조 및 섭리

창조교리는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려는 데 있다.7) 칼빈은 창조의 세계를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극장에서 하나님의 사역인 창조세계를 보면서, 만물이 하나님의 솜씨와 권능으로 된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1.14.22) 창조 자체보다 그것이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빈의 섭리교리의 배경에는 차갑고 메마른 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성(父性)이 깔려 있다. 그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호의를 거듭해서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섭리를 묵상하면 그리스도인은 가장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된다.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1.17.11) 하나님은 인간 역사 안에 자신의 선한 계획을 넉넉히 이루어 가실 만큼 권능을 갖고 계시며,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섭리교리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 곧 경건임을 알게 된다.



5. 경건과 예정

칼빈에 의하면 예정교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3.21.1) 예정교리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한다.(3.21.1) 그러므로 예정론은 경건을 강조하는 교리다. 칼빈은 예정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이 예정에 대해 말하는 목적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불경건하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찾아 덤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교만을 꺾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3.23.12) 성경이 예정을 말하는 목적은 경건이라는 것이다.

예정론에 대한 오해가 야기하는 폐단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선택된 목적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씀에(엡1:4) 근거하여 칼빈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고 하기보다는,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3.23.12)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 중에서 예정론의 목적은 후자이다. 예정은 결코 선행을 중지하게 하는 교리가 아니라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게 하는 경건의 교리다. 예정은 사람들의 생각을 자신들의 행위를 바라보게 하는 데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로 전환시킨다. 그렇게 올바르게 이해하면 예정은 믿음을 조금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3.24.9)

예정론은 경건이라는 칼빈의 신학목적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교리다. 예정론이 말하는 바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므로 선한 것이 없으며, 그러므로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따라서 만일 인간이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정론은 타락한 자를 경건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설계이다.



6. 경건과 교회

칼빈은 교회론에서 권징의 필요성을 말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신자들을 회개시키고 전체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징을 통해 신자는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굴복시키고, 그리하여 최후부활에 대비하는 성화에 이르는데 도움을 받는다. 교회의 조직에서 장로회를 중심에 두었는데, 장로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경건이다.

성례전 논의의 전체 배경도 역시 경건이다. 성례의 목적은 연약한 신자가 경건에 더 자라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성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것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례를 통하여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놀라운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자가 되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그가 땅에 내려오심으로서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게 되었고, 그가 우리의 죽을 생명을 취하심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생을 취하게 되었고, 그가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셨음으로 우리는 그의 힘으로 강하게 되었고, 우리의 빈곤을 받으셨음으로 우리는 그의 풍부함을 받았고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심으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는 것이다.(4.17.2) 곧 성례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경건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경건과 국가

칼빈에 의하면 국가라는 제도 역시 성화를 돕는 제도다. 국가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4.20.2) 국가제도는 사회공동체적인 차원에서 경건을 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제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를 폐지하려는 시도는 말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가 된다.(4.20.3) 정부는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등을 막고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하는 일을 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4.20.3)

칼빈은 집권자들의 권위에 마땅히 복종해야 하지만 거기에는 예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불복종하는 것이 될 경우, 곧 경건에 위배될 경우는 집권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경건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당하는 편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도록 하자"(4.20.32)



요컨대, 성경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국가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칼빈의 신학의 목적 및 그 중심은 경건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80개 장 중에 어느 장도 경건을 다루기 위해 특별히 할애하지 않았지만, 어느 한 장이 아니라 그 책 전체를 경건에 할애했다고 말하면서, 칼빈은 무엇을 논하든지 궁극적 관심은 경건이며, 그것은 "그의 신학의 한 주제라기 보다는 그의 신학 전체의 방향이며 목적이었다"8)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을 경건의 신학으로, 그를 경건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III. 경건과 삶



칼빈은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일종의 경건의 연습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화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3.19.2). 그의 핵심적인 교리인 성화론은 다름 아닌 경건의 교리다.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그것이 완성되는 곳에 부족한 것이란 없다. . .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직 경건에만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9)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가 경건이므로 우리는 경건에 집중하여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진력하고 훈련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경건한 삶은 어떻게 사는 삶인가?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거룩을 목표로 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는 말씀을 붙들고 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세상의 사악과 부패에 잠겨 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거기에 주저앉아 있다면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표인 거룩한 삶에로 나아가야 한다.(3.6.2)

경건한 삶은 그리스도를 모범(example)으로 삼는 삶이다. 칼빈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라는 모범 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고,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아주실 때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는 것이었다.(3.6.3) 그러므로 경건한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제자로 삼으신 목적은 자신을 닮게 하시기 위함이다."10)

이제 칼빈은 경건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인생을 내적, 외적인 측면 및 미래와 현재라는 측면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내적으로는 자기를 부인하고,11) 외적으로는 십자가를 지며,12) 내세에 대해서는 묵상하며 동경하고 현세에 대해서는 경멸함과13) 동시에 선용하는14) 특징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하나에서 시작하여 또 다른 하나로 수렴되는데, 곧 자기부인에서 시작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수렴된다. 이제 이 각각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살펴본다.



1. 자기부인(self-denial)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요점(sum)으로서 칼빈은 자기부인을 제시한다. 그 근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우리의 유익을 구해서도 안되고,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소유를 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묵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3.7.1)

자기부인은 두 가지 관계에서 우리를 올바르게 만든다. 먼저는 이웃에 대한 태도로서 곧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 칼빈에 의하면 이웃사랑의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 자체에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 안에 있으므로 그 형상에 대해 경의와 사랑을 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3.7.6)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부인은 헌신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의 뜻에 맡기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다.(3.7.8) 주님께서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부인은 또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인내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즐거워하고 아직 복이 미치지 않으면 그것도 하나님께 맡기고 평온한 가운데 겸손히 인내하는 것이다.(3.7.9)

칼빈은 여기서 경건과 운명론의 차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역경에 처했을 때 그것이 운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며, 운명은 소경이고 사리분별이 없어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상처를 준다고 말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선악간 운명을 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뿐이라고 믿으며 그 하나님의 손이 행복과 불행을 가장 공정하게 배정한다고 믿는다.(3.7.10)



2. 십자가를 짊(bearing the cross)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하는데, 칼빈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부인의 일부로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며 일정한 시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3.8.1) 이에 대한 모범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칼빈은 우리들로 하여금 고난을 통하여 하늘의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친히 인내의 본을 보이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그 상황을 달게 받으셨는데, 왜 우리는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처하셔야만 했던 그 상황을 면하려고 하는가?"(3.8.1)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는 교만과 자랑을 꺾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기 위함이다.(3.8.2) 자신에 대한 맹목적 사랑을 없애고, 자기의 무능을 깨닫게 하고, 그리하여 자기를 믿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인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3.8.3) 십자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순종을 가르친다. 결국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편이 된다.

칼빈은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것을 완전한 마비상태가 된다든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스토아철학자들이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이나 순경이나 슬픈 때나 기쁜 때나 꼭 같은 느낌, 돌과 같이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한 것을, 칼빈은 우매하고 냉혹한 철학이라고 비판하였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불행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음을 상기시켰다.(3.8.9) 경건이 무감정 무감각을 의미하는 것은 전연 아니라는 것이다. 고난과 불행 앞에서 두려워하며 슬퍼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서 전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경건은 이러한 감정과 싸워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3.8.10) 무감정, 무표정 이런 것들이 경건의 표징이 아님을 말한다.

또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은 필연성 때문이라는, 즉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므로 그렇게 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필연성이라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라면 도피할 수 있는 때에는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고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와 평온한 마음으로 고난을 당해야 하며, 마음이 아프더라도 동시에 영적인 기쁨과 감사함이 넘칠 수 있다.(3.8.11) 마지못해 받는 고난이 아니라, 피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유익이라는 확신 하에 동의하는 고난이 경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기쁨, 감사, 그리고 평안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3. 내세에 대한 묵상(meditation on the future life)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 곧 고난이 내세에 대한 묵상에로 이끈다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가지지 못하도록 고난을 보내주신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치면 그것의 목적은 현세를 무시하고 내세를 묵상하기 위한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3.9.1)

칼빈에 의하면 경건은 내세에 대한 묵상을 요청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너무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내세를 묵상하지 못하고 경건에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건을 위하여 세상의 것들을 우리에게서 없어지게 함으로서 세상의 선이란 것이 얼마나 무상한 것임을 보고 세상을 경멸하게 만드신다.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삶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현세를 경멸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내세를 참으로 깊이 열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3.9.1)

칼빈은 우리가 세상을 과도히 사랑하든지 아니면 세상을 경멸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게 되므로 중간지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인 양 모든 일을 한다. 죽을 운명조차도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지상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상 생활에 최고의 선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인생에 대한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이 세상을 무시하고 전심전력하여 내세의 삶을 묵상해야 한다."(3.9.2)

세상을 경멸해야 하는 이유는 요한복음 20:8 주석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지금 그리스도가 승천해 계신 하늘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하늘의 생명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3:1 주석에서도 승천의 의미를 강조한다. "부활 뒤에는 승천이 따른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마땅히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고 나서 우리를 자기에게 끌어올리시기 위해 하늘로 끌어올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세에 대한 경멸은 현세에 대한 증오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치 않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 이생의 삶은 무시되어서는 안될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말한다.(3.9.3) 그에 의하면 현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를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죄가 된다. 현세를 경멸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참으로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칼빈은 덧없는 현세를 경멸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세의 경멸은 내세에 대한 묵상과 결합되어 있다. 목적은 내세에 있다. "하늘의 삶에 비하면 지상의 삶은 당장에 무시하고 짓밟아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게 하지 않는 한 증오해서는 안된다."(3.9.4)

내세에 대한 묵상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배격한다. 경건은 죽음에 대한 열망을 낳는다고 칼빈은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기는 고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벌벌 떠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3.9.5)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 뒤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다. 죽음을 통해서 순례를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일어나 머리를 들라"(눅21:28)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머리를 높이 들어 모든 지상적인 것들을 초월하게 되기를 원한다.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신자의 눈이 부활의 능력에 돌려진다면, 그들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귀, 육, 죄 그리고 사악한 사람들을 마침내 누르고 승리할 것이다."(3.9.6)



4. 현세의 선용(enjoying the present life)

칼빈은 현세의 선한 것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즐길 것을 제의한다. 현세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하늘나라를 향하여 서둘러 행하는 하나의 순례다. 그 순례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면, 현세의 선한 것들을 선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약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종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양심에 맡기자는 자유방임적인 주장과 반드시 필요한 것만 허용하자는 엄격한 주장을 다 비판한 칼빈은 성경의 표준을 제시한다. 그 중심원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우리의 유익에 있다는 것이다.(3.10.2)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더라도 유익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사용을 필요에만 제한하는 것은 몰인정한 철학이라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빼앗고 우리를 무감각한 목석으로 만드는 생각이다.(3.10.3)

세상에 있는 선한 것들을 너무 부정해도 위험하고 너무 방임해도 위험하다.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육의 정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현세의 삶을 멸시하고 하늘의 불멸을 묵상하는 것이다. 칼빈은 즐거움을 주는 세상의 것들이 사람의 정신을 고결함과 순결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였다.(3.10.5)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로서 이것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헛된 사랑으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함이다. 내세를 동경함으로서 세상을 경멸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경멸이다. 승천하신 주님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세상을 정당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사들이므로 그 목적대로 은사들을 사용한다면 잘못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내세를 묵상하면서 현세의 삶을 경멸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순례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경우 현세적인 것을 선용하는 것이 경건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 대한 훨씬 적극적인 태도가 칼빈의 영성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는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15)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일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말하고, 묵상하고, 행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성별되고 헌신되어졌다는 것이다."(3.7.1)

리차드는 칼빈의 자기부인이 단순한 부정적 자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긍정적 자세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부인은 남을 향한 사랑과 봉사라는 능동성을 나타낸다.16) 경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자기부인의 목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며, 자기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인의 정신이 세상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형성한다.

칼빈의 영성은 수도원 타입의 영성과는 매우 다르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로 대표되는 수도원적 영성의 특징은 세상을 경멸한 나머지 거기서부터 퇴각하는 것인데 비하여, 칼빈의 영성의 특징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데에 있다.17) 칼빈의 세상 경멸은 세상에 대한 미움이나 배은망덕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삶의 요체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일부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현세를 경멸하고 내세를 묵상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삶에 대해 경건한 사람이 취하는 태도는 자기를 위해서는 세상의 삶을 부인하되, 하나님을 위해서는 선용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며 사는 것이 세상 삶의 목적이요 의미가 된다. "기독교인은 세상 물질을 자기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위해 사용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18) 이러한 삶의 철학을 리차드는 '내 세상적 금욕주의'라고 표현하며 칼빈의 영성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칼빈의 이상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퇴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세상의 정복이다.19)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 하늘은 현 세계의 완전한 붕괴와 와해를 수반하는 것인데 비해,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세계의 회복 곧 창조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20)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진정한 아버지 나라를 열망하는 동안 지상에서 순례자들로서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리고 그 순례가 이러한 도움들을21) 필요로 한다면, 이것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사람들은 바로 그의 인간성을 빼앗는 것이다."(4.20.2)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국가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칼빈은 국가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성을 강조했다.22)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글로 시작했는데, 거기서 그는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전제하고 있었다. 또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시민정부에 대한 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의 경건의 영역이 시민정부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서 그는 시민정부를 질서의 수호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하였다. 시민 정부는 우리가 이 땅을 순례하는 동안에 우리에게 필수적인 도움들을 주기위해 하나님에 의해 지명받았다는 것이다.(4.20.2) 그러므로 만일 시민정부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곧 왕이 하나님을 대항하거나, 경건을 위해 기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시민들이 저항할 수 있는 정당성을 말했다.23)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그로써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행실을 보고 같은 노력을 기울일 마음을 일으키는 것"(4.15.13)이라고 칼빈은 말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실천하는 곳에 칼빈의 경건이 위치한다.





IV. 경건과 성령



경건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앞에서 살펴 보았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경건이 과연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경건한 삶의 가능성을 성령의 역사에 두었다. 그에 의하면 경건한 삶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성령께 있다.

경건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경건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힘으로 경건에 이를 수 없다. 칼빈은 경건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 사람의 마음속에 심겨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경건은 오직 신자들의 마음에 서서히 심겨지는(instillation) 것이다."(1.4.4) 경건이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신자들'로 제한하지 않았을 것이며, 서서히 심겨진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 후서 1:3은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였다. 칼빈은 이 말씀을 주석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자연은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경건과 구원을 이루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지며. . . 구원을 향한 모든 경건과 모든 도움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에 기원하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베드로는 여기서 그것들을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으로부터 떼어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약간의 미덕도 없는 존재가 되게 한다."24)

경건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에서 나와서 우리 마음에 심겨지는 것인데,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성령이다. "본래 우리는 거룩하지 않으나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한다."25) 경건한 삶의 출발은 자기부인이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세상과 육을 포기하고, 악한 욕망을 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칼빈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죽임'(mortification)이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낸다. "성령의 칼에 의하여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여 무(無)로 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할 수 없으며, 경건의 초보도 배우지 못한다."(3.3.8) 경건한 삶의 출발인 자기 부인은 자기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해진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성령의 역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경건은 선행하는 성령의 역사에 응하여 성령의 은혜와 그 힘으로 거룩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한 삶의 양식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경건의 길에서 전진하려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된다."(3.24.13)

칼빈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띠다.(3.1.1)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다. 성령은 모든 하늘의 부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샘이며, 하나님의 권능이 행사되는 하나님의 손이다. 성령을 배제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유익과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와 연합하신다. 칼빈은 이것을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혼인으로 비유하였다.(3.1.3)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통로와 같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일을 말할 때, 그 전적인 힘을 성령께 돌린다."(4.17.12)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완전히 소유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우리 안에 머물게 하신다.

요컨대,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거룩을 목표로 하고, 경건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인데, 거기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현세를 경멸하고 내세를 동경하는 것, 그러나 현세를 선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 결국은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건한 삶의 가능성은 우리 자신에게는 전혀 없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심으로서 경건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분이신 것이다.





V. 결어: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



기독교 역사는 신학과 영성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어왔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의 영성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의식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물을 묘사하듯이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교리는 하나님 체험을 보존하고 설명하는 것이지만, 그 표현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신학과 영성은 이분법적으로 그 영역을 달리하게 되었다.26)

그러나 칼빈은 학문적 신학에 대해 비판하고, 선한 지혜, 거룩한 지식으로서의 경건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학문적 신학 같은 것은 없고, 오직 경건의 지혜(sapientia)만 있을 뿐이다.27) 그의 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건의 신학이다.28) 그는 모든 교리를 경건의 관점에서 해설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과 영성은 더 이상 이분법적이지 않다. 그의 신학은 경건의 신학이며, 그의 경건은 지성적 경건이었다. 그는 지식과 거룩한 영성을 통합했다. 그것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경건은 교리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회중의 영적인 진보를 그 목적으로 삼지 않는 교리는 신실하지도 경건하지도 않다.29) 그러므로 오늘날 칼빈의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칼빈이 경건의 신학자임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리고 경건을 위한 신학이 바른 신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경건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칼빈은 경건의 신학자로서 그의 영성은 경건으로서의 영성이다. 끝.

1) Howard L. Rice, Reformed Spirituality, 황성철역, 『개혁주의 영성』(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58.

2) L. Joseph Richard,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칼빈의 영성』(기독교문화협회, 1986), 163.

3) Ford Lewis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289.

4) 정승훈,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대한기독교서회, 2000), 16.

5) (1.2.1)은 J. Calvin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권2장1절을 가리킨다. 이하 같은 형식.

6) Philip C. Holtrop, 박희석,이길상역, 『기독교강요연구핸드북』(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13.

7) Ibid., 64.

8) 이수영, "경건론", 『칼빈신학해설』(대한기독교서회, 1998), 269.

9) Calvin, 딤전4:8 주석.

10) Calvin, 마11:29 주석.

11) 『기독교강요』3권7장의 주제.

12) 『기독교강요』3권8장의 주제.

13) 『기독교강요』3권9장의 주제.

14) 『기독교강요』3권10장의 주제.

15) Richard, op.cit., 160.

16) Ibid., 175.

17) Ibid., 177.

18) Ibid., 178.

19) Ibid.

20) Ibid., 232.

21) 정부를 비롯한 이 세상의 제도나 질서 등을 가리킨다.

22) Rice, op.cit., 194.

23) Calvin, 다니엘서6:23 주석.

24) J. Calvin, 벧전1:3 주석.

25) J. Calvin, 고전1:2 주석.

26) Richard, op.cit., 248f.

27) Ibid., 230.

28) Holtrop, op.cit., 44.

29) Richard, op.cit.,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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