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신앙 대탐험 / 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1. 인간 칼빈을 말한다 - 도망자에서 망명객으로
▲ 칼빈은 제네바에서 설교가·신학자로서 명성을 굳혔으며 제네바 시민들을 개혁신앙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예배 및 훈련지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림은 고 한풍렬 화가의 제네바 풍경. | ||
회심의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비 사제이자 인문주의 세속학자였던 칼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자리에 성경만을 손에 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우뚝 서 있었다.
포도원 농부로 변신하여 파리를 떠난 칼빈의 정처없는 나그네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향인 누아용을 비롯하여 오를레앙, 앙굴렘, 뿌와띠에, 끌래락 등 안전한 곳이라면 프랑스 어디든지 찾아 다녔다. 불안한 방랑객 칼빈은 대학시절에 만난 친구 루이 뒤띠에의 도움으로 앙굴렘에 도착하여 다소 평온한 가운데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름도 존 칼빈 대신 샤를 데스뻬빌이란 가명으로 사용했다. 뒤띠에는 당대에 최고 많은 개인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던 개종한 신부였다. 이곳은 <기독교강요>의 저술의 계기가 되고, 훗날 칼빈이 개혁사상을 펼치는 변화의 공간이 된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방랑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칼빈은 학문연구 뿐만 아니라 강가나 동굴 같은 곳에서 모임을 갖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신앙을 설파했다. 많은 사람이 안전을 의식하지도 않고 수배자의 말을 듣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몰려들었다. 당시 칼빈은 화형당할 이단으로 몰려 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프랑스 어느 곳에서도 신교도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
1535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떠나 1년 이상 머물면서 잉크에 깃펜을 적시며 참된 신앙에 대해 서술한다.
“폐하, 제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구도자들에게 참된 경건으로 지도할 몇 가지 원리를 밝히려는 것이었습니다.…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목말라 하는 동포 프랑스인들을 위해 시작하였습니다. …화염과 칼로 어지럽히는 이성을 상실한 자들의 거침없는 분노의 표적이 된 그 교리의 본질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대의, 그리스도 그 분의 대의를 변호하고자 합니다.”
그의 언어는 강경하고 통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적인 교리체계로 끌어낸 위대한 <기독교강요>는 이렇게 태어났다. <기독교강요>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며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다. 법률가의 논리로 명료하게, 문필가로서 능숙하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는 지성으로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열정으로 썼다.
칼빈은 1536년에는 이탈리아의 페라레를 방문하여 공작 부인 르네를 만나 개혁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회동하며 지속적인 우의와 신앙을 다진다. 1564년 칼빈이 동생 앙뚜안에게 대필을 부탁하여 르네 공작부인에게 전한 편지에 ‘절대적인 조언자요, 영적인 스승이 되어 주었다’고 한 점을 보면 페라레에서 칼빈은 이후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바젤도 더 이상 가명을 사용하며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연구하고 저술할 또다른 은신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기로 결심했는데 마침 동부지역이 전투가 한창이어서 우회의 길을 따라 제네바에서 머물기로 하고 들렀다. 제네바는 빼어난 자연경관이 경이롭지만 칼빈에게는 ‘신천지’인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펼치는 꿈의 도시로 다가서고 있었다.
제네바는 르페브로 교수 밑에서 신교로 개종한 파렐이 진을 치고 왕성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파렐 역시 파리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위험을 피해 도망쳐 온 담대한 복음전파자였다. 파렐은 ‘연구를 핑계로 하나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저주할 것이다’는 말들로 단판에 칼빈을 설득하고, 제네바에서 함께 동역자로 일할 것을 권면했다.
칼빈은 성 베드로교회에서 매일 강연했다. 이미 성상에는 로마 가톨릭의 제단이 제거되어 있었으나 구체제와 권위를 대체할 새로운 구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네바는 개혁신앙에 대한 심정적 호응만 무르익었을 뿐 교회 조직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1536년 로잔에서 로마 가톨릭과 회합을 가진 뒤 당대 최고의 개혁자 반열에 오른다. 칼빈은 성만찬론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통박했다. 이 반론으로 120명의 수도사와 80명의 사제들을 포함한 로잔시와 주변 도시가 완전히 개신교로 변화되었다.
칼빈은 설교가 뿐 만 아니라 신학자로서 명성을 굳힌 가운데 제네바 시민들을 개혁신앙으로 확고히 교육시키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쓰고 예배 및 훈련지침을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과 평의회 의원들의 압력을 받아 결국 스트라스부르그로 떠났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보낸 3년은 평화로웠다. 폭도들의 고함이나 총소리도 없었고, 성례를 집행할 때 소란을 피우는 자들도 없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급적 논쟁을 피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임했다. 그는 여기서 교구를 관장하는 법령을 쓰고 <로마서 강해>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 등도 출판했다. 특히 유럽 종교개혁자 사이에 가장 마음이 넓고 관대하다던 부써를 만나 인격적인 성숙과 목회자적 성품 그리고 학문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어둠 넘어서 빛으로’
▲ 제네바의 레만호수.
개혁 중심지 제네바
스위스 남서부 주네브 주의 주도. 프랑스 국경 레만호(제네바호)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이 시는 칼빈의 종교개혁 중심지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금융중심지로 공공 민간 할 것 없이 많은 국제기구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으며, 1864년 국제적십자사, 1919년 국제연맹이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제네바는 로마 제정시대부터 수상 및 육상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400년부터 주교좌의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1124년 주교가 도시 영주로 군림하고, 1533년 마침내 주교가 도시의 지배권을 양도하자 시민들은 주교를 도시에서 완전히 추방했다. 1536년 칼빈이 주도한 종교개혁 도입은 주교로부터 정치적 교회적 자립을 완성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개신교 도시가 된 제네바는 스위스 가톨릭 제주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지 못했다. 제네바가 스위스 연방에 가입한 것은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한 1815년이었다.
계몽주의 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장 자크 루소가 제네바 출신이며 이곳에 볼테르가 피신하기도 했다.
한편 1559년 칼빈이 설립한 아카데미(제네바대학교)는 국제학 식물학 교육학이 권위를 떨치고 있다. 1533년 제네바 종교개혁의 다음 모토는 오늘날 여전히 시의 구호(口號)로 사용되고 있다. “어둠을 넘어서서 빛으로(post tenebras l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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