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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수리 아빠는 펭귄은 물론이고 기러기 아빠보다도 행복하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어 아무 때나 날아가 떨어져 사는 가족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아내와 자식이 없기에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자기는 어떤 새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안심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아버지 없는 가족’ ‘아버지 부재의 사회’가 되어 간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런 농담도 생겨나고 있다. 유학 간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받기가 무섭게 “아, 너냐. 엄마 바꿔줄게.” 늘 그랬듯이 교환수 노릇을 하려고 한다. “아니에요. 아버지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왜? 할 말이 뭔데. 니 돈 떨어졌나.” 그러자 아들은 또 “아니에요. 돈이 아니라요, 절 보내시고 외롭게 사시는 것 같아서 아버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그 말을 듣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니 술 먹었나.”
이것이 기러기·펭귄·독수리 아빠보다도 더 심각한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 모습이다. 한국인 이야기가 뭐 별거냐. 아무리 심각하게 써봤자 이런 농담만큼도 제대로 우리의 얼굴을 그려내기 힘들다. 그래, 그러면 옛날 아버지는 어땠는가. 한마디로 새는 새지만 그냥 새가 아니라 수탉이다. 암컷이 수컷 발등에 알을 낳으면 털로 품어 부화시키는 진짜 펭귄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새는 모성의 메타포다. 알을 품고 병아리를 달고 다니는 것은 오로지 암탉의 일이기에 수탉은 원래부터 펭귄이니, 기러기니, 독수리니 견줄 필요가 없다.
암탉은 알을 낳지만 귀신과 도깨비가 판치는 어둠을 내몰고 광명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수탉의 몫이다. 그래서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닭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예찬한다. “머리에 관을 쓴 것은 문(文)이요, 발에 갈퀴(距)를 가진 것은 무(武)요, 적에 맞서서 감투하는 것은 용(勇)이요, 먹을 것을 보고 서로 부르는 것은 인(仁)이요, 밤을 지켜 때를 잃지 않고 알리는 것은 신(信)이다.” 이러한 오덕(五德)은 주로 수탉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닭의 이미지를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천년 사는 단정학(丹頂鶴)이 될 것이고, 더 올라가 오동나무에 오르면 봉황(鳳凰)이 될 수도 있다. 신라 때까지 올라가 신성한 숲을 만나면 계룡(鷄龍)까지 나타난다.
암흑기라고 부르는 일제 36년 그때의 아버지들은 비록 날개가 퇴화하고 깃이 뽑혀 나가 가축처럼 길들여졌어도 각혈처럼 어둠 속에도 빛을 토할 줄 알았다. 대낮에도 높은 장대 위에 올라 홰를 치며 우는 장닭들도 있었다. 다만 발갈퀴의 ‘무’와 적에 맞서 싸우는 ‘용’이 일본에 꺾여 그 자랑스럽고 아름답던 닭 볏마저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먹이를 나누던 ‘인’과 시를 알리는 ‘신’의 목소리도 변성돼 갔다.
일제 강점 시대의 한국인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 문화인류학은 일종의 조류학(鳥類學)과 같은 것이 되고 아버지에 대한 새 이미지는 식민지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해방 뒤에서 오늘에 이르는 부권상실의 추적도 용이하게 한다. 가령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인간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정’과 ‘자비’의 상징으로 인도의 교리에서는 모두가 남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동아시아)으로 들어오면 모두가 여성으로 바뀐다. 마치 서양의 천사가 남성적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데 한국에 오면 선녀처럼 여성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미국의 소설을 대표하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 또한 헤밍웨이의 소설이 모두 여자 없는 남성들의 세계로 꾸며져 있고 그 유명한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이란 영화도 부성애가 중심이다. 그리고 식민지 아이들이 따라 부른 일본의 군가(軍歌)들은 모두가 ‘니혼단지(일본남아·日本男兒)’의 이미지로 “지지요 아나타와 스요갔다(아버지여 당신은 강했습니다)”란 노래를 원형으로 삼은 것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들은 수탉처럼 울었는가. 이야기해 보자.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