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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남루했지만 언제나 단정한 의관을 한 김 학사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김홍도의 풍속도에 나오는 서당 선생 그대로였지만 몸만은 대추씨처럼 작고 야무져 보였다. 무엇보다 이 서당 선생은 내가 아는 한 유성기와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를 죽을 때까지 믿지 않았던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소리 나는 그 상자들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김 학사의 고집에 대해 수군거렸고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유성기나 라디오 앞에 이상(李箱)의 표현대로 펭귄 새처럼 모여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보다는 김 학사의 모습이 훨씬 당당하고 숭고하고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교실 뒷벽의 대동아 지도에는 매일 황군(皇軍)의 점령지에 빨간색이 칠해지고 히노마루의 일장기 표시가 찍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김 학사가 그렇게 믿으려 하지 않았던 라디오에서는 싱거포루(싱가포르) 함락, 랑군(양곤) 진격 등 연일 낯선 아시아의 나라와 도시 이름들이 다이홍에이(大本營) 발표로 시끄럽게 울려 나오고 있을 때였다. 그런 전쟁 속에서도 봄은 오고 있었다. 먼 친척이 와서 혼자 남은 김 학사를 데려간 것인지 아니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인지 기억이 헷갈리기는 하지만 빈집 허물어진 담 너머로 흘낏 들여다본 마당에 피어 있던 것은 분명 민들레 꽃이 아니라 백매화(白梅花) 꽃이었다.
뒷날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한중일 비교문화사전』을 편찬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리고 그중에서도 ‘매화’부터 발간하게 된 것도 아마 그때의 내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던 매화꽃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뜰에서는 아이들이 천자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고목 그늘에서는 김 학사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온다. 생전의 김 학사도 다른 선비들처럼 늘 가난하고 추워 보이는 매화나무 같은 한사(寒士)의 한 분이었다. 그리고 다른 선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 학사도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리며 추운 겨울을 나려 했을 것이다. 동지가 되면 바람이 들어오는 영창을 백지로 봉하고 그 위에 여든한 송이의 흰 매화꽃을 그린다. 그리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 칠을 해 가면, 그러다 마지막 백매가 홍매로 바뀌면 소한도로 봉했던 영창 문이 열리고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마당에는 정말 매화가 피어나 암향부동한다.
새것이라고 주눅 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김 학사는 바로 이 몇 송이의 매화꽃을 위해서였던가. 남들이 다 떠나가고 기왓골에 잡초가 나는 가난과 외로움이 눈 속에서 핀다는 이 매화의 전설 때문이었는가. 김 학사는 어디엔가 눈 속에 핀 설중매를 찾으러 방금 집을 비우고 떠난 것일까. 아마 지금의 나라면 대동아 지도에 꽂혀 가는 일장기가 아니라 매화가 피어 있는 김 학사의 빈집 뜰에서 아시아의 대륙을 보았을 것이다. ‘구구소한도’의 매화 한 송이에서 아시아의 작은 뜰을 보았을 것이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일생을 살았다는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 도산서당의 마당 절우사(節友社)에 매화를 심고 그 제재로 시첩을 만든 이퇴계 선생 그리고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따라 천 리를 날아온 일본의 비매(飛梅) 설화. 『만요슈(萬葉集)』에서 벚꽃보다 더 많이 읊어진 노래 매화. 이렇게 중국의 대륙과 한국의 반도와 일본의 섬을 하나로 묶은 동북아시아의 신화를 만든 것은 그 서당 집 마당에 핀 매화였다.
그러나 매화에서는 천자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벚꽃에서는 “이로하니호에도”를 암송하는 일본 가나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가갸거겨”가 들리는 꽃은 어디에 피었는가. 매화가 피어 있는 골짜기를 찾다가 민들레에서 그 소리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아스팔트의 틈 사이에서도 피는 민들레 꽃이다. 굳이 심지 않아도 글방 마당에 저절로 피었을 꽃이다. 중국·일본의 인터넷 검색에서도, 한·중·일 그 어느 사전에서도 민들레의 구덕(九德)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이규태의 칼럼집 이외의 어떤 전거에서도 그런 민들레 이야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한국의 인터넷 블로그에서만 민들레의 구덕 찬미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민초들이 밟혀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민들레 신화를 만든 집단지(集團智)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가갸거겨” 소리를 내는 한국 내셔널리즘의 꽃이 얼마나 아쉬웠으면 그 아홉 개나 되는 꽃말을 한꺼번에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 속에 담으려 했겠는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