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50·최종회> 언 강의 겨울낚시 ④

미션(cmc) 2009. 6. 12. 10:15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50·최종회> 언 강의 겨울낚시 ④ [중앙일보]

바다를 발견한 한국인은 무섭다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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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 달 동안 어머니 태내에서 20억~30억 년의 생명 진화과정을 겪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내 또래 닭띠(계유생) 아이들은 6년 동안 ‘국민학교’ 공간에서 36년 동안의 식민지 상황과 그 역사를 치르고 해방된 한국 땅에 태어났다. 요즘 아이들이 잘 본다는 미국 드라마처럼 내 한국인 이야기 ‘시즌 원’은 그렇게 끝난다.

태내는 어두웠다. 그러나 알고 보면 폐쇄적인 공간에서도 탯줄을 통해 바깥과 교신하고 태어난 뒤에 홀로 서는 연습도 했다. 식민지 교실도 깜깜했다. 하지만 아무리 학교 담이 높아도 후문이 있고 몰래 드나들 수 있는 개구멍이 있다.

그곳을 통해 세 가지 파랑새들이 아이들의 가슴으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일장기가 걸린 교문이 활짝 열리고 우리가 독립 공간으로 향해 날아갈 때 그 파랑새들은 우리의 깃이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칠칠과 미칠의 파랑새는 수천 년 대륙만 보고 살아온 한국인에게 바다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사학자들은 그것을 ‘한국의 근대화’라고 부르고 있지만 겨우 열 살을 넘긴 아이들은 그저 ‘양(洋)’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쓰메에리의 제복과 여자는 몸뻬를 입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왜복(倭服)’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복 옆에 있는 것은 ‘양복’이었다. 한식에는 양식이, 한옥에는 양옥이 있었다. ‘한(韓)’자에 대응하는 말은 ‘왜’가 아니라 바다 ‘양(洋)’자였던 것이다. 모든 물건이 ‘양품(洋品)’으로 변하면서 바가지까지 양재기가 된다. 신작로의 양버들(포플러), 돼지 우리의 양돼지 등 모두가 바뀌어갔다.

어머니도 이제는 양산을 쓰고 집안에서는 인장표 싱어 미싱을 돌린다. 아버지는 개화경(開化鏡·안경)에 개화장(開化杖)이다.

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문단은 지난해에 근대시 100년을 맞이했다. 육당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한국 최초의 신체시는 바다를 예찬하는 노래였다. “철썩 철썩 우르르쾅” 아직 바다가 ‘해(海)’로 표기돼 있었지만 분명 그 시는 파도가 바위와 뭍을 치면서 “네까지게 뭐야”라고 바다의 힘을 과시한다.

육당이 창간한 ‘소년’지의 내용은 더욱 확실하다. 번역 소설들은 『로빈슨 크루소』 같은 표류기이고, 시는 바이런의 『오션(大洋)』 등이다. 그리고 역사는 대한제국의 해양사(海洋史)다.

하지만 육당은 아직은 영국 시인 바이런처럼은 아니었다. 바이런의 『대양』은 젊은이가 바다를 향해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육당은 거꾸로 바다가 소년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대륙문화에서 해양문화로 시선을 돌렸지만 불행하게도 그 바다에는 일본이 있었다. 우리가 방방곡곡(坊坊曲曲)이라고 할 때 그들은 “쓰쓰우라우라(津津浦浦)”라고 한다. 그 ‘진’은 주문진의 진이요, 목포라고 할 때의 그 ‘포’다. 나라 전체를 바다와의 접속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다와 면해 있는 지명에도 진이나 포보다 ‘산’ 자가 붙어 있는 곳이 많다. 부산(釜山)이 그렇고 원산(元山)이 그렇고 군산(群山)과 서산(瑞山)이 모두 그렇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구문처럼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올 때 보이는 산을 랜드마크로 삼은 것이다. 노래도 떠나는 부산항이 아니라 돌아오는 부산항인 것이다.

수동적이기는 해도 한국인은 지정학자 매킨다의 ‘랜드 파워’와 ‘시 파워’의 흐름을 알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장보고처럼 이순신 장군처럼 바다를 향해 슬기와 용기의 돛을 올린 것이다. 바다를 알고 양(서양)을 알게 된 한국인은 ‘은자’로 불린 옛날의 한국인이 아니었다.

식민지 교실에서 읽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다시 읽는다. 그 무대가 열릴 때 “돌이라는 것은 다 같은 거야. 돌은 전부가 다 보석인 거지.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그중 몇 개만 귀중한 돌(보석)로 보일 뿐이란다”라고 말하는 대사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꿈에서 깬 아이가 바로 자기 집 처마 밑 새장 안의 파랑새를 보고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먼 데까지 찾아다닌 것이 여기 이 파랑새였단 말야.” 그러나 겨우 찾은 파랑새는 달아나고 그 아이들은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그 새를 찾으면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어쨌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꼭 파랑새가 있어야 하니까요.” 한국인의 파랑새는 한국의 집 안에 있었는데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파랑새의 동극이 막을 내린 그 자리에서 ‘시즌 Ⅱ’ 한국인의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다. 파랑새와 바다를 찾은 무서운 아이, 한국인의 이야기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