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땅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미션(cmc) 2010. 3. 25. 07:33

[피플_‘지성에서 영성으로’ 낸 이어령 박사 ]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열림원 펴냄)는 이어령 박사의 신앙 간증집이다. 따지고 보면 여느 간증집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고민이 담겼지만 이어령이라는 특별한 한 사람의 고민들이어서 또 다른 감동이 절절하다. 책을 읽으며 사람의 일에 얽힌 슬픔과 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고, 사람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는 하늘의 큰 품에 또 감동하였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 모든 여정을 ‘이어령다운’ 글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글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의도를 밝혔다.
“누구보다도 이 글들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고자 합니다.”
그의 글은 무신론자로서 쓴 기도문 또는 시 한 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모래알만 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 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에서

그는 무신론자였다. 무신론자였으나 그는 누군가를 향하여 기도를 올렸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신을 찾았고, 가까이 가고자 몸부림쳤다. 이제 돌아보니 그렇게 신을 향하여 무신론자로 기도하는 이들이 세상에는 많을 것 같다.

   

 

“나만이 아닐 겁니다. 먹을 것이 족하고 목을 적실 물이 넘쳐나도 그리고 또 추위를 막아주는 단단한 벽이 있어도 어디엔가 나처럼 무거운 쌀자루를 내려놓고 빈방에 앉아서 몰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무신론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강한 체 오기를 부리다가도 누가 옆에서 조금만 보고 싶다 사랑한다, 고 손을 내밀면 금시 울음을 터뜨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무신론자이기에 그 기도는 더욱 절실하고 더욱 높게 올릴 수 있지요.”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그러면서 돌아보니 그에게는 여섯 살 키 작고 어린 아이에게서도 하나님이 계셨다. 아이들과 떨어져 홀로 보리밭에서 굴렁쇠를 굴리던 그때 아이는 연유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던 게다. 아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또 생각난다. 잠을 자다 눈을 뜨면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시계의 추가 오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아이는 어머니의 코에다 손을 대어 보았고, 어머니의 숨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들었다.
그것은 ‘메멘토 모리’ 곧 죽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죽음은 그때부터 그의 곁에 늘 가까이 있었고, 하나님도 함께 계셨다. 그러고 보니 간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만난다. 하여 그는 지금 삶의 욕망으로 눈물짓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믿기지 않을 때에는 그냥 목숨이라고 불러보세요. 그러면 이 뜨거운 나의 생명 속에 나도 모르게 숨 쉬는 호흡의 리듬, 바다의 썰물과 밀물처럼 나의 날숨과 들숨의 운율을 타고 그분의 음성이 들려올지 모릅니다.”
탕자의 귀향처럼, 오랜 시간 이방에서 방황하던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누구보다 그의 곁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던 사람은 딸 이민아 씨였다. 그는 유난히 딸을 사랑한 아버지였다. 딸은 똑똑하고 착하였다. 그 딸이 이제 새로운 아버지, 곧 하늘의 아버지를 만나 헌신하겠다고 말할 때 이 땅의 아버지인 그는 불평할 수 없었다.

“나는 민아가 대학을 졸업하는 졸업식장이나 헌팅턴 베이의 고급주택가에서 요트를 타고 다닐 때의 행복한 장면에서만 함께했을 뿐, 혼자 아이들을 기르고 있을 때, 암에 걸려 병원에서 수술 받고 있을 때, ADHD로 아이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여 매일 밤 울고 지낼 때, 대체 이 아버지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하늘의 아버지 그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지상의 아버지도 해주지 못한 그 이상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내 딸을 수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딸 이민아 씨가 아버지에게 목사님과 함께 자리하고 싶다, 했을 때 선뜻 응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그는 목사님의 축도 끝에 “아멘”이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그 의미를 잘 알던 그였다. 이제 돌아가야 할 집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탕자처럼 노래했다.

날 위해 노래를 불러줘요. 집으로 갈 수 있게
믿음의 빛을 주어요.
-시 ‘탕자의 노래’에서

그러면서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 다니고 싶다, 고 마음에 담았다. 그를 이끄는 끈은 더 강하고 굵은 힘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아침 하와이에서 딸의 전화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망막분리로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딸의 전화를 받고 하와이로 갔을 때 딸은 오히려 담담하였다. 아빠 엄마가 걱정할까봐서 그렇지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고 말하는 딸을 보면서 그는 하염없이 흔들렸다. 딸은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었지만 그는 속으로 소리치고 싶었다. ‘이 바보야, 노래가 나오니. 책이 읽혀지니.’
그리고 주일예배에 참석하자는 딸의 청을 받아 원주민예배에 참석하였다. 교인들은 가난한 교회당에서 행복하게 예배하였다. 그들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딸을 보면서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지나갔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저들을 어이할꼬, 그 실망과 절망을 어이할꼬,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아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다면 무엇이 남을까, 하는 순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말았다.
“제발 민아를 위해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꼭 하나님은 계셔야 합니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서울에서 다시 검사를 받은 딸에게서 “아빠 수술 안 받아도 된대. 망막에 이상이 없다네” 하는 전화를 듣는 순간 가슴이 폭발하는 기쁨과 함께 가슴이 쿵 내려앉는 불안이었다. 딸이 실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여생을 바치겠다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세례 받겠노라 딸에게 약속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집으로 찾아오기까지의 여정은 길고도 험하였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치열하게 하나님과 대화하고 사고하였다.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무엇보다 그의 글로 풀어놓은 귀향의 여정이어서 감동이 깊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지성이 그의 걸음을 무겁게 하였다면 얼음장 밑으로는 오히려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이 흘렀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방해한 땅의 아버지 사랑을 이야기하였으나, 땅의 아버지가 가진 사랑은 오히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만나며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승화하였다. 지성과 영성의 간격을 이어주는 통로가 된 셈이었다.

박명철 기자



   
이어령은…
1934년 1월 15일 생. 교육자, 소설가이자 작가, 사회기관단체인, 정치인, 문학평론가이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여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20대에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이 되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전 세계에 그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그는 대한민국 문화 정책의 10년 대계를 새로 세우는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했다. 1999년에는 대통령 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정책 자문활동을 펼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