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생가, 노트르담 성당과 500m 남짓 거리
아버지 뜻따라 파리로 떠나기 전 14살까지 살아
칼빈을 찾아 나서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우리는 칼빈을 표본실의 박제마냥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칼빈은 친근한 인물인데 우리는 가깝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뭘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인천에서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다시 프랑스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파리에서 내렸다. 조반은 커녕 몸을 씻을 겨를도 없이 바로 누아용(Noyon)으로 내달렸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0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누아용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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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생가는 단순히 태어난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칼빈이 저술했던 주석, 설교집 등 많은 <기독교강요> 원본 등 개혁주의의 귀한 원고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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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이 유년시절 대부분을 보낸 누아용 노트르담대성당. 현재 보존되는 건물은 12세기 고딕양식 성당이다. | ||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대성당 참사회의 법률 자문관이었다. 거기다 누아용 주교의 비서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는 성직자들과 언쟁을 벌이고 자식들이 출세하도록 갖은 노력을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빈은 1521년 11살에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았다. 제라르 코뱅은 아들이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길 원했으나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고 갑작스럽게 회심을 하는 바람에 꿈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생가는 각종 전쟁과 침략 속에서도 잘 보존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918년 독일군이 누아용을 점령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프랑스 개신교역사협회의 도움으로 유적지를 구입한 뒤 17세기 이전의 건물로 복원했다. 1930년에 박물관을 개관하고, 1944년 폭탄테러의 아픔을 겪으면서 1983년 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반들반들 윤기나는 목조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벽 좌우에 칼빈을 비롯한 동판화 초상과 정치·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 눈에 띄었다. 앙굴렘 등지에서 피신할 때 쓰던 의자와 16세기 당시의 가구 그리고 칼빈이 강의할 때 사용하던 복제용 의자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보다도 신약성경, 주석 등 많은 자료가 원본으로 소장되어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1535년에 프랑스어로 번역한 성경, 1536년판 〈기독교강요〉 원본도 역시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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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이 강의할 때 사용하던 복제품 의자. | ||
칼빈의 길을 가로질러 올리베땅 길로 접어들었다. 칼빈은 14살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고향 누아용을 떠나 파리로 간다. 그리고 고향을 찾지 못하다가 1531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생가를 방문한다. 사제가 된 형 샤를은 이전부터 사제단과 불화를 겪고 있었고,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등졌으나 대성당 참사회원과 분쟁으로 인해 교회 묘지에 묻히지도 못했다. 칼빈은 1534년 마지막으로 누아용을 방문하여 사제직을 반납한다. 이후에 고향을 찾았다는 기록은 없다.
칼빈에게 누아용은 어떤 존재였을까? 단순한 고향이었을까. 아니면 생각하기도 싫은 회한의 도시였을까.
칼빈탄생 500주년 되는 7월 10일, 누아용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곱씹으며 한참동안 앉아 있었다. 성하(盛夏)의 햇살이 무척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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