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추방 명령 후 갑작스런 정착…마틴 부처와 교류
위그노 대상 행복한 사역 펼치며 고등교육 중요성 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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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부처가 사역했던 성 토마스교회, 슈바이처 박사와 모짜르트가 연주한 파이프오르간이 유명하다. | ||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온 가이드와 인사를 하고 ‘프랑스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스트라스부르그를 훑어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깔끔하고 세련된 현대식 건물보다 잿빛 색깔의 고풍스런 가옥들이 도시의 무게를 한껏 대변하고 있었다. 거기다 도로마다 여기저기 피어있는 꽃과 수로의 한적한 물줄기는 ‘작은 프랑스’라는 애칭답게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칼빈은 1538년 시의회가 사흘의 말미를 주며 제네바에서 떠날 것을 명령하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학자로서 살기 위해 바젤로 갈 것을 결심한다. 바젤은 〈기독교강요〉 초판본을 쓸 때 조용히 은둔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난민을 위해 스트라스부르그에 와 달라는 마틴 부처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해 9월 갑작스럽게 이곳에 정착했다.
칼빈의 흔적을 더듬으며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노트르담대성당으로 향했다. 1176년 짓기 시작하여 19세기에 완성했다 하니 무려 700년에 걸쳐 작업을 한 셈이다. 대성당의 남쪽 회랑에 시간뿐 만 아니라 행성의 위치까지 알려주는 귀중한 천문 시계가 걸려 있었다. 매 시간마다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황금상이 튀어나와 종을 쳤으며, 특히 베드로가 시간을 알릴 때는 수탉이 나와 울었다고 한다. 성당 좌우 날개는 로마네스크, 예배당 회중석과 서쪽 문은 고딕양식이다. 게다가 시대에 걸쳐 다양하게 새긴 스테인드글라스가 일품이다. 돈이 없어 제대로 보수공사를 하지 못하다가 최근 그나마 제 모습을 찾고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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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이 위그노 난민에게 성경을 가르쳤던 부클리에교회. | ||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한동안 부처의 집에서 머물렀다. 칼빈 뿐이 아니었다. 많은 피난민과 여행객의 숙소는 ‘당연히’ 부처의 집이었다. 부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며, 개신교 신앙에 바탕을 둔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스트라스부르그대학을 설립했다. 아마도 칼빈은 부처와 교육가 쟈크 등을 만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 같다. 제네바대학교 설립도 부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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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라스부르그 노트르담대성당 정문의 조각상. | ||
스트라스부르그의 생활은 단꿈이었다. 제네바처럼 성례를 방해하는 자도 없었으며, 폭도들의 싸움이나 창문 아래서 터지는 총소리도 없었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로웠다.
부클리에 교회 현관은 굳게 닫힌 채 칼빈 탄생 500주년을 알리는 빛 바랜 포스터만 주인을 잃고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538년부터 1541까지 칼빈이 사역했다는 동판만 읽고 허전함을 달랬다. 그리고 어김없이 묵상을 한 뒤 일행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스트라스부르그가 배경인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에서 “국어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면 감옥의 열쇠를 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라고 하신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굳건히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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