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자유는 영생의 순종에 이른다
‘완전한 평온’ 얻은 성도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 따라야
'제21강좌' 그리스도인의 자유: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유(기독교강요 3.19.1-3.19.16) |
1. 칭의의 부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의 영으로서 각 성도의 속에 사신다(갈 2:20). 그리하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를 모두 전가하셔서 자신과 함께 한 형제와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롬 8:14-17; 갈 4:6-7; 히 2:11). 성도의 자유는 단지 현상의 양태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존재의 양상을 지시한다(빌 3:10-11). 그러므로 각자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성도의 자유의 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갈 6:17).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의 성도가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의 죽으심을 자신의 몸에 짊어짐이 아니겠는가(고후 4:10)?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는 그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채무자가 되셔서 죄의 값을 다 갚으셨다. 그저 다 갚으셨으므로 전혀 우리 편의 채무가 남아있지 않다. 어거스틴이 갈파한 바와 같이,
“신실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채무자(debitor)가 되셨다.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리하셨다”(3.18.7).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여김을 받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셨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이 우리의 자유를 위한 값으로 지불되었다. 그 분께서 다 이루시고, 다 주셨으므로, 더 이상 보속할 빚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빚이 다 속상되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빚진 자로서 남는 것은 이제 육체가 아니라 주의 영으로 은혜 가운데 살고자 함이다(롬 1:14; 8:12-13). 빚이 없으나 빚진 자로 사는 자는 복되다. 왜냐하면 그는 빚진 자로서 빚이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죄의 빚을 무름 받고 스스로 의의 빚을 진다. 의의 빚은 자유의 빚, 은혜의 빚이다. 그것은 사실 빚이 아니다. 이는 의의 종이 종이 아니라 자유자인 것과 같다(롬 6:18). 또한 이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자가 멍에로부터 해방된 자인 것과 같다(마 11:29). 주님의 멍에는 은혜의 멍에요, 쉼의 멍에요, 자유의 멍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쉬운’ 멍에를 메고 그 분의 ‘가벼운’ 짐을 지는(마 11:30)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롬 8:21).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깨닫지 못하면 복음의 진리나 내적 평화가 심중에 깃들 수 없다(3.19.1).
2. 세 가지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도가 지상의 삶 가운데서 누리는 구원의 은혜에 상응한다. 칭의의 은혜로 성도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이를 첫 번째 자유라고 한다. 성화의 은혜로 성도는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감동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다. 이를 두 번째 자유라고 한다. 두 번째 자유 중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되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삼가는 자유가 세 번째 자유로서 특정된다. 세 번째 자유는 규범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되 그 상대적 가치를 헤아려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자유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자유는 마치 칭의와 성화가 그러하듯이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①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의 확신’(fiducia iustificationis coram Deo)을 얻는데 있어서 행위의 공로를 헤아리는 율법의 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의지함으로써 그 양심이 자유롭게 된다. 칭의는 값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므로 그 은혜를 받는 자는 행위에 대한 보상 혹은 보속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없으면 성도는 ‘전체 율법에 대한 채무자’(debitor universae legis)가 된다. 그러므로 양심은 끊임없는 압박과 저주에 시달리게 된다. 스스로 율법의 의를 만족시켜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 다만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본질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전체 그리스도인의 삶이 ‘일종의 경건의 묵상’(quaedam pietatis meditatio)이 되어야 할진대(살전 4:3, 7; 엡 1:4), 오직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그 삶을 살게 된다(3.19.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갈 5:1). 이 자유를 확신하지 아니하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갈 5:4). 모세의 율법에 계시된 모든 순종의 의와 의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성취되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할례를 받으심으로써 ‘율법 전체를 행한 의무를 가진 자’로서 우리의 자리에 서셨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신의 할례를 폐하셨다(갈 5:2-3).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감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성도는 참 소망을 누린다(갈 5:5-6).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불필요한 일들에 있어서’(in rebus non necessariis) 구속(拘束)되지 않고 ‘완전한 평온’(plena securitas)을 얻는다(3.19.3).
②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유
두 번째 자유는 ‘자발적으로’(ultro) 율법에 순종하는 성도의 어떠함을 제시한다. 이는 율법의 제 3용법에 상응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volntas Dei)을 계시한다. 성도는 양심상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legis necessitate coactae)가 아니라 자원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성경은 ‘경성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에 이를 것’(alacri promptitudine in obedientiam Dei)을 가르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비록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나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로서 완전한 순종을 보여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완전한 것은 악한 것에 다름없으니 불완전한 것을 의롭게 보시는 분의 자비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그 분 앞에 기도나 예배를 드리거나 그 분께 헌신함으로써 그 분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가 불완전함을 인식하되 그것조차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유롭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여 순종하게 된다(3.19.4).
율법의 준엄성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자비를(말 3:17) 의뢰하는 사람은 ‘쾌활하며 생동력이 넘치게’(hilares et magna alacritate) 그 분의 이끄심을 좇는다. 성도는, 비록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전적으로 합하는 일을 수행할 수는 없어도, 그 분께서 ‘자신의 순종과 기꺼운 마음’(suam obedientiam et animi promptitudinem)을 기쁘게 받으심을 확신한다(3.19.5).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백성은 더 이상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의 종, 의의 병기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롬 6:12-14). 그러므로 사도는 거룩한 조상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헤아린다(히 11).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만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3.19.6).
③ 구원에 무관한 것들로부터의 자유
세 번째 자유는 그 자체로 구원에 무관한 ‘중립적인 것들’(adiaphora)과 관련된다. 어떠한 경건의 의무에 절대적으로 매이지 않는 외부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 자유롭다. 예컨대 육식을 하는 것과 의복을 입는 것이 이러한 자유의 대상이 된다. 만약 이러한 자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도 쉼이 없을 것이며 끝없는 미신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양심은 한번 올가미에 얽어 매이면 이후에는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이 뒤엉킨 ‘미로’(labyrinthum)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만약 성찬의 보(褓)를 아마포로 사용할 수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후에는 대마포에 대해서 불안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삼 부스러기에 대해서도 의심이 일 것이다. 만약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이 불법으로 보이면 값싼 빵을 먹든지 상용 음식을 먹든지 하나님 앞에서 평화롭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uti)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an Deus velit) 먼저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voluntas)에 맞게 행하거나 금하거나 해야 한다(3.19.7).
‘외적인 것들’(res externae)에 대한 ‘자유의 논거’(libertatis ratio)가 하나님께 있다면 그것들의 용(用), 불용(不用)에 절대적으로 얽매일 필요가 없다. 다만 ‘미신적인 편견’(superstitiosa opinio)이 개입될 때에는 그 자체로 정결한 것들도 불결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그러므로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믿음 가운데 자유를 누려야 한다(롬 14:22-23).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법’(usus)에 따라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사용하여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의식(儀式)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덕을 세우기 위해서’(ad aedificationem) 유익해야 한다(3.19.8).
‘그리스도의 자유의 법칙’(lex libertatis christianae)은 어떤 형편에도 만족할 줄 알고 빈부(貧富)와 고하(高下)간에 대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기반하고 있다(빌 4:11-12).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나 무절제한 낭비, 허영과 교만을 버려야 한다. 오직 모든 일을 정결한 ‘마음과 양심’으로(딛 1:15) 행해야 한다(3.19.9). 중립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행하는 것이나 행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는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으로써 ‘연약한 사람들’(infirmi)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19.10).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candalum, offendiculum)과 관련해서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연약한 사람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것을 ‘주어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candalum datum)이라고 한다. 이는 혹은 경박함, 혹은 방자함, 혹은 무분별함으로 무슨 일을 그것 자체의 고유한 질서와 자리를 벗어나게 행하여 무식한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될 때 생긴다. 이러한 것은 ‘피해야 할 것들’(cavenda)이다. 사도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했다(롬 14:1). 그리고 부딪힐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했다(롬 14:3).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당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그들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롬 15:1-2). 자유하나 사랑으로 종노릇하므로(갈 5:14) 아무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전 10:29, 32).
또 다른 형태로서 바리새인적인 교만함으로 그렇지 않다면 사악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게 행해졌을 일이, 악의로 혹은 영혼의 못된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로 바뀔 때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candalum acceptum)이라고 부른다. 이는 ‘무시하여도 될 것들’(negligenda)이다(마 15:14). 연약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규범을 주신 목적을 생각해야 하지만(telelogically) 바리새인들에게는 규범 자체를 더욱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deontologically). 왜냐하면 이러한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악의로 스스로 걸림이 되기(마 15:12) 때문이다(3.19.11).
성도는 사랑을 추구하되 ‘이웃의 덕을 세우는데’(in proximi aedificationem) 특히 유의해야 한다. 자유하나 스스로 매임이 이를 위함이다(고전 9:19-20, 22; 갈 2:3-5).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되, 다만 사랑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즉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께 거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유는 사랑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사랑 자체는 믿음의 순수성 아래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연약한 자들을 언제든지 연약한 채로 두고 그저 사랑하고자 하지 말며, 교리의 젖을 먹여서(고전 3:2) 그들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3.19.1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선물이다(벧전 1:18-19). 우리의 영혼이 여전히 예속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다 할 것이다(갈 2:21). 우리의 양심은 세상의 법과 규칙이 아니라(갈 5:1, 4)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다. 우리에게는 이중적 통치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하나는 ‘영적인 통치’(regimen spiritualis)이다. 이로써 양심은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이르는 훈련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통치’(regimen politicum)이다. 이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섬겨야 하는 시민법적 직분들에 관한 교육을 받는다.
양심(conscientia)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올바른 지식(scientia)을 가지고 사리를 분변하는 지각(sensus)이다.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숨은 속을 드러내는 ‘일천 명의 증인들’(melle testes)과 같다. 양심이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송사하거나 변명하게 되므로(롬 2:15-16), 이는 ‘일종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medium)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양심의 법정’(forum conscientiae)에서 내려지는 선고에 따라서 하나님을 찾고(벧전 3:21) 거짓이 없는 사랑을 행하게 된다(딤전 1:5). 이러한 양심에 따라서 먹기도 하고 먹지 말기도 해야 할 것이다(고전 10:28-29). 양심은 하나님께 상관된다. 그것은 ‘마음의 내적인 순수함’(interior cordis integritas)이다. 양심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정치적 자유를 무한히 누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19.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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