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는 복되도다
기도는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믿음으로 자라게 하는 도구
'제22강좌' 기도: 믿음의 주요한 훈련 (기독교강요 3.20.1-3.20.52) |
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함
우리 자신에게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풍성하게 넘치며(골 1:19; 요 1:16) 그것이 산곡에 흘러내리는 샘물과 같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믿음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그저 헛될 뿐이다. 왜냐하면 기도로 캐낼 ‘하늘 보화’(coelestis thesaurus)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하여 우리가 우리 공로로 스스로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아들을 믿는 자만이 모든 선한 것들을 주장하시는 ‘주’(dominus)시요 ‘수여자’(largitor)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난 믿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 심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이다(롬 10:14-17). 기도를 통하여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없음’(nostra inopia)을 아들의 ‘충만’(plenitudo)으로 채우신다(3.20.1).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으로 제시한 보화들이 기도로 ‘채굴된다는 것을’(effodi) 우리는 믿음으로 직각(直覺)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서 자신의 앞에 놓인 보화를 향하여 손을 내뻗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않으니, 아들을 믿는 자마다 하늘의 성소에서 자신과 교통하는 길을 여셨다. 우리는 연약하며 무능하고 허물이 커 단지 죄에 눌려 쓰러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의 요새’(unicum salutis praesidium)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invocatio)이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그 분의 ‘섭리’(providentia), ‘능력’(virtus), ‘선하심’(bonitas)이 현재 작용하기를 바라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그 분 자신의 ‘전적인’(totum) ‘현존’(praesentia)을 간구한다(3.20.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시 121:4). 그 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신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간구를 듣고자 하시니, 이는 우리를 훈련시켜 더 큰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벧전 3:12). 기도는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믿음으로써 자라가는 도구이다. 기도를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는 법을 깨달아 날마다 그 분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훈련이 결여된 기도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은 없다(3.20.3).
2. 기도의 직분과 법
기도를 통하여서 성도는 자신의 믿음이 잠자거나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그것은 하나의 ‘직분’(officium)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예배하는 열망’(semper quaerendi, amandi, colendi desiderium)을 더욱 불타게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한 구원의 닻으로 믿고 그 분을 피난처로 여기는 습관을 갖게 된다. 둘째, 우리 양심이 수치스럽다고 가책하는 욕망이나 소원이 영혼 속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모든 소원과 모든 마음을 먼저 하나님의 면전에 토로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총을 영혼의 진정한 감사로 받기 위해서이다. 기도로써 우리는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5-16).
넷째,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신 소원을 이루심으로써 우리가 ‘감화되어’(persuasi) ‘더욱 뜨겁게 그 분의 선하심을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ad meditandam eius bonitatem ardentius)이다. 다섯째, 우리가 ‘더욱 큰 기쁨으로’(maiori cum voluptate) 기도를 통하여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서 ‘쓰이는 용도자체와 경험’(usus ipse et experimentum)이 확증하는 바에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길을 여시고, 우리를 단지 말씀으로만 달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도움으로’(praesenti ope) 도우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3.20.3).
이와 같이 기도는 성도의 성화를 위하여 필연적이다. 기도자는 다음과 같은 ‘기도의 법’(lex orationis)을 따름이 합당하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colloquium)이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이성의 맹목적인 추구를 그치고 그 분께 마땅한 마음과 정신을 가져야 한다. 허무한 인간 본성의 한계에 붙들려 드리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 안에서 제한할 뿐이다(3.20.4). 기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마음의 감동’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진정한 성전이 자기 자신이므로 기도는 ‘영과 진리로’(요 4:24) 드려야 한다(3.20.29-30).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서 듣게 되는 ‘친밀한 위로의 말씀’(familiare alloquium)을 세속적인 것으로써 불순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오직 우리의 담대함은 아버지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여 들음을 얻는데 있다(요일 5:14). 세상의 찌기 위에 앉아서 넋두리하듯 드리는 한탄이 기도가 아니다(렘 48:11; 습 1:12). 성경은 기도함으로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라고 한다(사 37:4; 시 62:8; 145:19).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기도의 ‘교사’(magister)요 ‘인도자’(dux)로 주셔서 친히 간구하게 하심으로써(롬 8:26) 우리가 그 영 가운데 깨어서(고전 14:15) 기도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여호와를 바라며(시 25:1) 연약함 가운데서도 성령의 감화를 좇아 구할 것이다(3.20.5).
둘째,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inopia)을 절감하고 ‘진지하나 강렬한’(serium, imo ardentem) 간구를 드려야 한다. 기도를 단지 부과된 일을 요식적으로 행하듯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갈망하며 얻기를 구하지 않는 기도는 허탄할 뿐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니(마 6:9; 눅 11:2), 그것이 곧 우리에게 가장 유익함이 된다(3.20.6). 우리는 항상 연약하여 넘어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더라도(약 5:13) 더욱 그때를 ‘주를 만날 기회’로 여겨야 한다(시 32:6).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끄시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tia)을 믿기에 우리는 ‘항상’(엡 6:18), ‘쉬지 말고’(살전 5:17)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주시고 가까이 하신다(렘 29:13-14; 시 145:18). 다만 진실함과 간절함이 없이 정욕으로, 시기로 구하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사 29:13; 약 4:3). 성령을 근심시키는 행실 가운데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즐거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자기의 악행을 버리고 진정 낮은 자리에서 ‘거지의 품성과 마음씨’(mendici personam et affectum)를 가져야 한다(3.20.7).
셋째,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고 자신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기신뢰를 전적으로 버려야 한다. 오직 구할 것은 주님의 긍휼이요, 주께서 주님 자신을 위하여 들으시길 바라야 한다(단 9:18-19). 주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진흙으로 여기고(사 64:5-9)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빚으시길(렘 14:7) 간구해야 한다(3.20.8). 기도의 문을 여는 ‘열쇠’(clavis)는 상한 심령이다.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함은 기도의 열매는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끄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태로부터 지은 모든 죄를 기억치 말라고 기도드려야 한다(시 25:7, 18; 51:5). 주님께서는 죄를 안고 살면서 병이 나음이 무익함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온전히 구원하셨다(마 9:2). 구약의 조상들도 ‘피의 속죄’(sanguinis expiatio)로 기도를 거룩하게 구별하였다(창 12:8; 26:25; 33:20; 삼상 7:9).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사하시고 정결케 하신다(요일 1:9). 기도는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한다(3.20.9). 그러므로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지 않고 날마다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경건한 삶에 힘쓰고 오직 그 분의 ‘관용’(clementia)을 붙드는 자가 구하는 바를 얻게 된다(3.20.10).
넷째, 기도하는 자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사랑에 소망을 갖고 그 분을 굳게 믿어야 한다. 기도는 회개와 믿음에 부착한다. 믿음이 기도에 선행(先行)한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막 11:24; 마 21:22; 약 1:5-6; 5:15)이 ‘기도의 본질’(precationis natura)에 가장 부합한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언사(言辭)가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응답하신다(마 8:13; 9:29; 11:24).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요일 5:14)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롬 10:14, 17). 기도는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토로함에 다르지 않다(3.20.11).
이러한 네 가지 법에 따라서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아우르는 묵상’(tam naturae Dei quam verbi meditatio)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음성을 들으시며(시 50:15; 65:1-2; 삼하 7:27) 그것을 가장 기뻐하신다(시 147:10-11).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에는 주시고, 찾게 되고, 열어주시는 약속이 함께 있다(마 7:7-8).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므로 기도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가르쳐지는 ‘경건의 직무’(officium pietatis)가 된다(3.20.13).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소망을 두고 담대히 보좌로 나아갈 것이다(히 4:16; 엡 3:12). 주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니 주야로 그 분의 자비를 구할 것이다(시 5:3; 33:22; 56: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기 전에 미리 들으시나 우리의 간구를 기다리시니, 이로써 우리를 자신의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기 위함이시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의 은총을 구할 뿐이다. 오직 주의 인자하심에 위로를 찾고(시 119:76) 하나님의 언약에 용기를 얻어서(창 32:11-12) 여호와의 이름 가운데서 전적인 구원을(욜 2:32; 롬 10:13) 구하는 것이다(3.20.12, 14).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향한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오직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familiare colloquium)로 나아가는 자가 복되도다(3.20.15-16)!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림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재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셨다. 성령의 임재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의 ‘대언자’(advocatus)시며(요일 2:1) ‘중보자’(mediator)로서(딤전 2:5; 히 8:5; 9:15) 우리를 위하여 친히 중보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의 이름으로 구하여 그 분을 통하여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는다(요 14:13-14; 16:26).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아들의 순종으로 성취되니 우리는 단지 아멘 하여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고후 1:20). 기도는 그리스도의 ‘예’에 ‘아멘’ 하여 그 분의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3.20.16).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흉패를 자신의 가슴에 달고(출 28:9-21) 친히 하늘 성소에서 간구하신다. 이제는 그 분의 육체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로(히 10:20) 우리가 나아간다(3.20.18). 예수께서 생명의 길이시요 생명의 문이시다(요 14:6; 10:7).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인치심으로(요 6:27) 그 분을 우리의 목자와(마 2:6) 머리로(고전 11:3; 엡 1:22; 4:15; 5:23; 골 1:18) 삼으셨으므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실 분은 주님 밖에 없으시다. 성도들 상호간은 서로 위하여 기도는 하되 서로가 서로에게 중보자가 되지는 못한다(3.20.19).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mediator redemptionis)요 성도들은 ‘중재의 중보자’(intercessionis)라고 하는 궤변은 도무지 가당치 않다. 우리의 유일하신 대언자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로서(롬 8:34)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요일 2:1; 딤전 2:5).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은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사(요일 2:2) 땅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올리우신(히 7:26) 한 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3.20.20). 천사들은 부리는 영에 다름 아니니(히 1:14)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중보할 수 없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성자들이 그들의 의로 중보할 여지는 전혀 없다. 노아, 다니엘, 욥도 자기의 생명만 건질 뿐이다(겔 14:14).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 가운데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받으신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도무지 아버지께 나아갈 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3.20.21-27).
4.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주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방법’(ratio)과 ‘양식’(forma)을 가르쳐 주셨다(마 6:9-13; 눅 11:2-4).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를 아들을 통하여 ‘판에’(in tabula) 새기듯 가르쳐 주셨다(3.20.34-36).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고자 하심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자만이(요 1:2; 요일 3:1) 아버지의 부성적인 사랑을 의지하여(시 27:10; 마 7:11; 사 49:15)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은 우리가 모두 한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셔서 편재(遍在)하시므로 ‘하늘에 계신’ 이라고 호칭한다(3.20.36-40).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기도로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한다. 여호와의 이름은 ‘영광의 표지들’(notae gloriae)로서 그 분의 능력, 선하심, 지혜, 공의, 자비, 진리를 함유한다. ‘나라에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gubernatio)가 편만하기를 구함이다. 성령의 임재가 다스림이다. 성령으로 만물이 창조되고 운행되며, 그 은밀한 역사로 감화된 성도가 마땅한 주의 자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우주가 운행되며 우리의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3.20.41-43).
이어지는 간구로서 우리의 유익을 위한 첫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다. 먹고 마시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 10:31). 이를 위해서 우리는 떡을 구해야 한다. ‘오늘날’ 이라고 함은 주님의 섭리가 시시각각 끊이지 않음을 믿고 구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것으로 구하라고 했으니, 이기적인 물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신 8: 3; 마 4:4).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다음 기도가 가르쳐진다. 죄사함에는 의의 전가가 함께 있다. 죄를 안고는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조건적이므로 우리도 남의 허물을 헤아리지 않겠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이는 십자가의 그늘에 거하는 백성으로서 사망의 권세에 놓이게 하지 말라는 간구이다. 시험이 없지는 않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시험을 이겨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자리에 서게 해 달라는 애통함이다(3.20.46).
우리의 최고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공식’(formula)을 가르쳐 주셨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어야 한다(마 17:5). 완전한 기도, 기도의 ‘완전함’(perfectio)이 아들의 음성으로 제시되었다. 모든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간구로 귀결된다. 그리고 오직 양자의 영을 받은 자만이 외치는 다음 음성으로 마치는 것이다. ‘아멘’(Amen)(3.20.47-49).
기도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성도가 헷셀링크(I. John Hesselink) 박사는 칼빈의 기도론의 신학적 특징을 ‘하나님의 부드러운 초대’, ‘중보자 그리고 중재자로서 그리스도’, ‘말씀의 불가결함’, ‘성령의 역할’, ‘믿음의 중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특히 주목할 것은 칼빈은 에라스무스와 루터와는 달리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를 단지 영적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특히 칼빈의 선지서 강의 후에 드린 기도문들은 그의 기도신학에 대한 입장을 잘 대변한다. 본서의 편집인 McKim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자비의 하나님으로서 부름, 죄의 고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함, 하나님의 인도하심-특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함, 전체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권고함. 이와 더불어서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에 있어서 특징적인 ‘미래에의 묵상’과 상응하는 기도의 종말론적 동기가 논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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