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부활 묵상하는 자가 복음 유익 얻어
성도가 부활하여 누릴 즐거움은 이성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
1. 부활의 소망
중세시대의 역사관은 정태적(靜態的)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구조를 신뢰했다. 교회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상 질서로 하나님의 섭리가 제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교회에 맡기고 쉬고 계신 분으로서, 성도들의 삶을 주장하시기 보다는 단지 그들의 공로를 저울에 다는 일 정도를 계속하신다고 믿었다. 종말의 소망이 가르쳐지지 않았으며, 연옥 교리를 조작하여 사후에도 공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후의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지금 처지가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얻을 면류관이 없다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현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향의 복이 없다면 이곳의 나그네 삶이 그저 고통스럽지 않은가? 지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금 일어나 머리를 드는 것은(눅 21:28) ‘그리스도의 학교에서’(in schola Christi)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열매가 되셔서 천국 백성들이 받을 영광을 미리 보여 주셨다. 언약 백성의 삶은 종말을 지향한다. 종말은 단지 현재의 끝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현재의 삶에 이미 역사한다. 종말의 미래를 묵상하는 자는 그 열매를 이미 맛보아, 즐거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삶을 살게 된다(3.9.1-6; 3.10.4, 6).
사랑과 믿음이 소망으로 말미암는다. 소망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에 터를 잡는다(골 1:4-5). 예수를 우리가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함은 복음의 약속인 영혼의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벧전 1:8-9). 우리의 보물이 천상에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곳을 향한다(마 6:21). 마지막 날에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복스러운 소망’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끌어올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날마다 소망하는 가운데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애쓴다(빌 3:14; 딛 2:12-13).
‘육신의 감옥에 갇힌’(carnis ergastulo inclusi) 우리가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오히려 담대한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활의 권능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키게 되리니, 오직 우리는 잠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고, 믿고 지금의 몸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후 4:18-5:10; 롬 8:25).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그것은 오직 소망과 함께 역사한다(히 11:1). ‘소망의 본성’(spei natura)이 여기에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복음은 종말적으로 열매를 맺지만 현재적으로도 이미 역사한다. ‘의의 태양’이신(말 4:2)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조명하셨다’(vitam nobis illuminavit)(딤후 1:10). 그리하여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이제는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그 분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엡 2:19).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부활의 소망은 이러한 현재적 복에 감사하는 자에게만 넘친다. ‘복된 부활을 계속적으로 묵상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어김없이 받게 된다’(3.25.1).
성도가 이 지상의 나그네의 삶 가운데 누리는 ‘유일하고 완전한 복’(unica et perfecta felicitas)은 ‘하나님과의 유대’(紐帶, coniunctio cum Deo)를 이루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최고의 선으로서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저 헛될 뿐이었다. 그들은 그 유대를 이루는 ‘거룩한 고리’(sacrum vinculum)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서 연합되었지만 그 연합을 계속 심화시켜 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지만 그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날마다 달려간다고 하였다(빌 3:12). 성도는 그 속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시지만 마지막에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기다리며 현재의 삶을 소망 가운데 산다(빌 3:20).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10:12). 그 분께서 ‘우리의 부활을 위한 모든 조목들’(omnes resurrectionis nostrae numeros)을 이미 다 완성하셨지만 ‘그것들 자체의 효과로’(ad suum effectum) ‘우리 몸의 속량’을(롬 8:23) 이루기 위해서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러므로 오직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미 지상의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3.25.2).
2. 몸의 부활(carnis ressurectio)
세상을 떠나는 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육신의 삶이 감옥의 수형(受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육신으로 태어남이 그저 헛되지 않음은 현세의 삶이 없이는 죽음을 통한 다시 삶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이 없다면 그 분에 관하여 전하는 것과 그 분을 믿는 것이 다 헛되다(고전 15:14). 그 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단지 이 세상의 삶에 제한된다면 우리가 더욱 불쌍한 사람이 된다(고전 15:19).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많으나 육신의 부활을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경은 부활을 믿는데 있어서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유사함’(similitudo)을 찾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tia)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취하시고 영광을 입으신 채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그 분께서는 부활의 몸을 입으신 참 사람이시자 참 하나님으로서 그곳에서 여전히 중보하신다. 그리하여서 ‘미래의 부활의 보증’(pignus futurae resurrectionis)이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오직 우리를 위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caput)로서 첫 열매가 되셔서 온 몸의 지체들에게 ‘부활의 본’(exemplum)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한 구원을 조성하신 분’(perfectae salutis autor)이 되셨다. 그 분의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양자됨’(adoptio)이 무익하고 ‘우리 구원의 효과’(salutis nostrae effectus)가 무용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썩지 아니하는 ‘순전한 몸’(integrum corpus)으로 계시다가(엡 1:20; 시 16:10; 행 2:27)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우리의 생명이 그 분과 함께 아버지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 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생명도 또한 우리에게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골 3:1-4).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10).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삶을 공유하는 자들’(socios futurae vitae)로 삼으셨다. 그 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그 분께서 친히 부어주신 그 분의 영을 받은 자마다 그 영의 ‘능력’(virtus)과 ‘작용’(efficacia)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 그 분께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죽어도 사는 은혜의 길을 여셨다(요 11:25).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3).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혼을 떠받치기 위한 확고한 실체’(ad fulciendos animos nostros firma hypostasis)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부활이 증언되었다. 그 분께서 다시 사셨음이 천사들에 의해서 선포되었다(마 28:6; 눅 24:6).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직접 그 분의 몸을 보고 만졌다(눅 24:40; 요 20:27).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주님께서는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 1:3).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이 ‘보는데’ 승천하셨다(행 1:9; 고전 15:6).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내려 받음이(행 2:33; 요 16:7) 그 분께서 인성에 따라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오르셨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certum documentum)가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에 따라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를 위한 신인양성의 중보를 지금도 계속하신다. 오직 이러한 중보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만이 부활을 미리 맛본다(3.25.3).
몸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권능이 역사함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한다. 씨가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연의 섭생도 부활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으나(고전 15:36), 진정한 부활의 유비는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 외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부활의 섭리는 신비에 속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찬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계의 거민이 사망 가운데 처하여 있을지라도 주의 백성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언하였다(사 26:19). 다윗은 임박한 사망 가운데서도 생명이 되시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의뢰함을 노래하였다(시 68:20). 욥은 육체의 장막을 벗고 난 후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구속자를 자신의 눈으로 보리라고 절규하였다(욥 19:25-27). 에스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른 뼈에 힘줄과 살과 가죽을 더하시고 생명을 주사 자신의 군대를 삼으시는 형상을 부활의 환상으로 보았다. 이로써 태초의 창조의 권능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들을 채우시고 각 마디를 상합하게 하신 후 ‘생기’를 넣으시고 ‘너희가 살아나리라’ 라고 선포하셨다(겔 37:1-10). 이러한 말씀들은 부활이 ‘소망의 질료’(materia sperandi)이며 ‘모든 해방(解放)의 주요한 본’(praecipuum exemplar liberationum omnium)이 됨을 우리가 깨닫게 한다.
아들을 죽기 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의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신다(빌 3:21). 오직 하나님께서만 항상 미쁘심으로(딤후 2:13)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지키신다(딤후 1:12). 그리하여 심판의 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게 하신다(딤후 4:8). 우리가 지금은 환난을 받으나 주 예수께서 마지막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안식으로’ 갚아 주신다(살후 1:6-8). 이렇듯 성도의 부활은 성부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성자께서 육신 가운데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첫 열매에 동참하는 성도의 소망이자 그 실상이다(3.25.4).
3. 부활의 영원한 복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부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의 죽음으로 인정하셨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5). 몸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는 영’이 되셨음이 무의미하다(고전 15:45).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로, 고대의 천년왕국론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말씀을 곡해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다. 그들은 영생과 영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마 25:41, 46), 그 전제가 되는 몸의 부활도 거부하였다. 영생으로 부활하는 성도의 복이 유한하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의 영광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3.26.5).
둘째로, 몸의 부활과 함께 영혼의 부활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좌소(座所)’로서(1.5.5; 1.15.2) 그 분의 신성을 최대한 반영하며 불멸성의 표지들이 그 가운데 새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dos)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몸이 영혼보다 ‘조건’(conditio)에 있어서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영혼은 이 세상의 삶 동안에만 몸을 살려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하며, 그것의 장막인 몸도 ‘성령의 전’(templum)으로 불릴 수 없다. 지상의 몸은 쇠하는 집과 같으나(벧후 1:14) 그것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있으니(고후 5:1) 지금은 주님과 떠나 사나(고후 5:6) 몸을 떠나게 되면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리라는(고후 5:8) 소망은 오직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만 배태될 수 있다. 영혼의 ‘본질’(essentia)이 죽음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강도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눅 23:43),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다는 말씀(눅 23:46), 주님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벧전 2:25) 여기고 자신의 영혼을 그 분께 드리고자 하는 스데반의 기도가(행 7:59) 헛될 것이다.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하여’(de intermedio statu)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후 우리의 영혼은 땅에서 들리신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요 12:32)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린 곳에서(눅 16:22)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omnia)은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까지 ‘유예되니’(suspensa), 이는 성도를 위한 ‘영광의 면류관’이 그 때 수여되기 때문이다(3.25.6).
셋째로,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부활시 이전의 몸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현재 입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동일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몸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며(고후 7:1), 몸으로 행한 것으로 판단을 받으며(고후 5:10), 예수의 생명이 죽을 몸에 나타난다고(고후 4:11) 하였다. 또한 성도들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며(고전 6:15), 몸으로 찬양하기를 원하고(딤전 2:8), 몸으로 제물을 드리고(롬 12:1), 몸으로 주님을 섬기라고 한다(고전 6:20).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시면서 부활을 말씀하신 것은 몸의 부활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요 2:19). 무덤에 있는 자들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아온다는 말씀도 몸의 부활을 명백하게 제시한다(요 5:28-29). 죽음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적극적 작정 없이 들어온 ‘우연한’(accidentalis) 것이라면 그것으로부터의 ‘회복’(instauratio)은 그 죽음의 육체에 속한다(3.25.7).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미래 부활의 표’(sigillum)가 된다. 우리의 몸은 의의 병기이다(롬 6:13, 19).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갈 6:17).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처소이다(고전 6:19-20). 이 몸은 죽을 것이로되, 그것이 다시 살리심을 받는다(롬 8:11; 고전 6:13-14).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된다(빌 3:20-21). 부활의 ‘비밀’(mysterium)이 여기에 있으니, ‘본체’(substantia)는 현재의 몸을 그대로 가지나 ‘자질’(qualitas)에 있어서는 영광스러운 변화가 있다. 즉 ‘썩음을 버린 채 썩지 않음을 입는다’(induet, deposita corruptione, incorruptionem)(고전 15:51-52).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신비를 믿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서 ‘너무 자유롭고 공교한 철학적 사색을 하는 방자함’(liberius argutiusque philosophandi licentiam)을 버려야 한다(3.25.7-8).
이러한 세 가지 사설(邪說)들은 성경이 약속한 부활한 성도들의 ‘영원한 복’(aeterna felicitas)을 앗아 간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자신의 몸의 영광을 다양한 은사들로써 드러내시기 시작하셨고, 부활 후 높아지심으로 그 영광을 날로 더하시다가 재림의 때에 완성하신다. 그 때에 ‘심판의 부활’로 나온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되고 ‘생명의 부활’로 나온 자들은 그 영광의 광채와 위엄에 휩싸이며 하나님을 ‘참모습 그대로’, ‘대하여’ 보게 된다(요일 3:2; 고전 13:12). 하나님을 마주봄은 그 분 자신의 영광과 능력과 의를 나누어 받음과 그 분 자신과 하나가 되는 은혜를 누림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 자신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부요함이 담긴 마르지 않는 샘이시다. 그러므로 ‘최고선’(summum bonum)과 ‘모든 복의 조목들’(omnes felicitatis numeros)을 그 분께 찾아야 한다. 영벌은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며(살후 1:9), 영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 분과 ‘연합체’(societas)가 되어서 그 분의 자녀로서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비의 숭고함’(sublimitas)을 ‘우리 마음의 관념으로’(mentis nostrae conceptio) 다 품을 수는 없다. 성도가 부활하여 누릴 ‘즐거움’(amoenitas)과 ‘달콤함’(suavitas)을 아무도 이성의 그릇에 다 담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이 자리에 이르고자 하지만, 어떻게 그곳에 이를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활의 복이 귀한 만큼 지금 부활의 삶이 복된 것이다(3.25.9-12). 그러므로 부활의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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