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성령의 은사들과 조화 이루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따라 진리 가운데 섬기고 실천해야
'제26강좌' 교회의 직분: 머리이신 주님께로 자라감(기독교강요 4.3.1-4.7.30) |
1. 사람들의 대리적 사역(ministerium vicarium hominum)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되, 자신의 ‘가시적 현존’(praesentia visibilis)은 숨기시고 사람들을 ‘도구’(instrumentum)로 사용하신다. 다만 사람들은 ‘대리적 사역’(vicaria opera)을 감당할 뿐, 그 고유한 ‘권리’(ius)와 ‘영예’(honor)는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이는 손으로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신’(使臣, legatio)으로 삼으심으로써(고후 5:20) 그들에 대한 ‘자신의 배려’(dignatio sua)를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입을 사용하셔서 성소에서 친히 말씀하시듯 하신다. 그리하여서 자신의 은밀한 뜻이 사람의 말로 해석되어 전해지게 하신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전 3:16-17; 6:19; 고후 6:16).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와 같은, 심지어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서 자신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겸손에 이르는 훈련’(ad humilitatem exercitium)을 가장 효과적으로 받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의 보화를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숨기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후 4:7).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진리와 영생에 관한 가르침이 자신의 일꾼들에 의해서 선포되게 하심으로써 그 ‘고리’(vinculum)로 교회의 지체들에게 ‘상호간에 사랑’(mutua sapientia)이 자라게 하신다. 한 믿음으로 한 주를 섬기는 성도들이(엡 4:4-7) 하나가 되는 최선의 길은 목회자로 선택된 사람의 입을 통하여서 동일한 가르침을 받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직무를 부여하심으로써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엡 4:12). 그리하여서 교회의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신다(엡 4:15). 이렇듯, ‘사람들의 사역’은 교회의 ‘힘줄’(nervus)과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가시적 교회의 ‘직제’(職制, ordo)와 ‘정치’(regimen)에 있어서 ‘사도적이며 목회적인 직분’(apostolicum ac pastorale munus)은 필수적이다(4.3.1-2).
교회의 직분은 최고의 영예를 받을만한 가장 훌륭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자들을 세우셔서 자신의 교리를 해석하고 선포하게 하신다. ‘복음의 사역’(ministerium evangelii)은 그것이 ‘성령과 의와 영생의 경륜’(administratio spiritus et iustitiae et vitae aeternae)을 이루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고후 3:9; 4:6).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준비시키셔서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게 하셨다(행 10:3-6). 사도 바울이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의한 성결의 도를 받게 된 것은 아나니아의 도움을 통해서였다(행 9:6). 그리고 사도 바울을 친히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셋째 하늘로 이끄셔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듣게 하셨다(고후 12:2-4).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므로 그 분의 일꾼들의 발이 아름다우며(사 52:7), 그들의 말을 들음이 곧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눅 10:16), 그들 자신이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마 5:13-14) 불리게 된다(4.3.3).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도들 각자를 온전하게 하셔서 직분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 분의 지체된 성도는 그 분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 분을 닮아감으로써 그 분의 몸을 이루는 고유한 기능을 감당한다(엡 4:10-16). 교회의 사역들이 그렇듯이 성령의 은사들(dona Spiritus)은 다양하다. 마치 다양한 성부(聲部)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한 음을 만들어 내듯이 성도들은 각자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과 조화롭게 사용하여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직분에 앞서며 성령의 은사로써 직분이 표현된다(롬 12:6-8, 주석). 성령의 은사들은 직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직분을 예비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마다 사역과 관련된 은사들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도들과 목사들을 세울 때 다만 그들에게 가면만을 씌운 것이 아니라 은사들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이 은사들이 없으면 그들은 그들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단지 허망하고 무익한 이름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더불어서 능력을 동시에 받는다(엡 4:11-14, 주석).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이 직분을 합당하게 감당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영은 하나인 것과 같이, 직분들은 다양하지만 몸은 하나이다.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unitas Christi), 이것이 교회 사역의 신비이다(4.3.2).
2. 성경적 직분: 경건과 사랑
교회의 ‘통상직’(ordinarium munus)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계속되는 ‘항존직’(perpetuum)이다. 반면에 초창기 교회의 필요에 응한 ‘비상직’(extraordinarium munus)으로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가 있다(엡 4:11). 이들은 조직된 교회가 생길 때까지 존재했기 때문에 ‘임시직’(temporarium)이라고 불린다. 먼저 임시직을 살펴본다.
사도(, apostolus)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죄 사함 받는 세례를 주고 성찬을 거행했다(막 16:15; 마 28:19; 눅 22:19). 사도라는 명칭은 주님의 일꾼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어의를 가지고 있다.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듣지도 못한 곳에서 교회를 최초로 설립한 사람들이었다(롬 15:19-20; 고전 3:10). 사도들의 직분은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으로 요약되는 바, 이 직분이 목사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사도들이 전 세계를 향하여 사역을 감당했다면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무리만을 담당했다. 엄격히 말해서 사도의 명칭은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되나(눅 6:13; 갈 1:1)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광의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선지자(, propheta)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singularis revelatio)를 뛰어나게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날 사라졌거나 아니면 흔치 않게 존재한다. 이 직분은 이후 교사의 직분으로 대체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evangelista)는 사도들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비록 사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주님에 의해서 세움 받은 사람을 칭한다(눅 10:1). 이러한 세 가지 직분들은 ‘정당하게 조직된 교회’(ecclesia rite constituta)에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4.3.4-5).
교회의 통상직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되는 바, 그 중에서 목사직 혹은 장로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성경은 목사(pastor), 장로(presbyterius, senior), 감독(episcopus), 사역자(minister)라는 호칭들로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장로와 집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스리는 은사와 구제하고 긍휼히 여기는 은사를 말함으로써 이 직분들이 초대교회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롬 12:8; 고전 12:28; 딤전 5:17).
목사(, pastor)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교리로 사람들을 가르쳐서 진정한 경건에 이르게 하고, 거룩한 성례들을(sacra mysteria) 거행하며, 올바른 권징을 보존하고 시행하는 것’이다. 즉, 말씀 전파와 성례 거행, 가르침, 그리고 도덕적인 지도와 권징 시행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는 자신의 음성을 인간의 입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설교에 있다(고전 9:16-17).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선포된 설교’(externa praedicatio)는 가시적 교회가 서 있는 유일한 기초이며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고리’(vinculum)가 된다(4.1.5). 목사의 설교가 이렇게 중요하니까 제네바 규칙에서는 하나님의 소명과 더불어서 말씀에 대한 선하고 거룩한 지식과 그 말씀을 잘 전하여서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말씀을 통한 목사의 가르침과 충고와 권고와 비난은 공적인 담화와 개인적인 훈계를 포함한다(딛 1:9; 행 20:31). 경계를 넘어서 교회를 창설했던 사도들과는 달리 목사들에게는 각각에게 맡겨진 ‘양떼’(grex)를 목양할 소명이 고유하게 부여된다. 사도 바울이 자신들과 사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을 때(고전 4:1), 이는 오늘날 목사직을 칭한다고 할 것이다(4.3.6-7).
교사(, didascalus)의 고유한 직분은 ‘성경 해석’(scripturae interpretatio)을 통하여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sincera sanaque doctrina)를 보존하는데 있다. 목사는 이러한 교사직을 겸한다(4.3.4).
장로(, presbyterus)는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다스리는 것’()과 로마서 12장 8절의 ‘다스리는 자’()의 사역과 관계된 직분이다. 문자적으로 연장자(senior)를 의미하는 장로의 직분이 이러하므로 감독(, episcopus)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장로는 ‘도덕적인 견책’(censura morum)과 ‘권징’(disciplina)을 시행하는 직분을 감당한다. 장로의 다스림은 기독교인 군주가 교회를 통치하는 것과는 다르다(4.3.8).
집사(, diakonus)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역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즉 ‘구제하는 자’(,procureur)와 ‘긍휼을 베푸는 자’(, hospitallier)를 포함한다(롬 12:8).
집사 직분은 ‘공적인 교회의 사역’이며, 단지 목사를 돕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사역을 감당하는 독립된 직분이다(4.3.9).
교회 직분론은 내적으로는 예배의 경건(pietas)을 외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caritas)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성도의 일상의 삶과 교회의 삶은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교회의 직분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거행에 제한되지 않고 권징과 구제에까지 미친다. 교회는 어머니요 학교로서 성도의 경건과 함께 도덕적 삶을 가르치고 훈육한다. 그러므로 성속(聖俗)의 극단적 이원론에 서서, 예배가 교회의 관할에만 속하듯이 성도의 일상적 삶은 오직 국가의 세속권세에만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성도의 모든 삶은 오직 교회에만 속하며 국가의 통치에는 무관하다고 보는 성속에 대한 극단적 일원론도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에 따라서 진리 가운데 서로 섬기고 순종하는 사랑을 교회 속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오직 경건과 사랑 가운데 우리는 다음 말씀을 교회 통치의 제 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일꾼들은 먼저 ‘소명’(vocatio)을 받아야 하며(히 5:4), 그 소명에 확고하게 응하여야 한다(롬 1:1; 고전 1:1). 소명의 증거는 ‘우리 마음의 증언’(cordis nostri testimonium)이다. 직분 주시는 분께서 은사를 먼저 부여하시기 때문에(고전 12:7-11), 소명은 받은 바 은혜로써 확증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는 ‘건전한 교리’(sana doctrina)를 믿고 ‘거룩한 삶’(sancta vita)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딤전 3:2-3, 8-13; 딛 1:7-8). 그러나 이러한 조건도 전적인 은혜로 부여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성령과 능력을 먼저 부여하셨다(눅 21:15; 24:49; 막 16:15-18; 행 1:8).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교회의 직분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은총과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4.3.10-14).
3. 교회의 열쇠(claves ecclesiae)
고대 교회는 성경적 직분론에 충실했다. 처음에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만이 있었다. 장로들 가운데서 일부가 가르치는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와 가르치는 교사로서 각각 섬겼다. 감독(episcopus)은 가르치는 장로들의 대표를 칭하는 이름이었다. 각 도시에는 목사들과 교사들로 구성된 ‘장로회’(presbyterorum collegium)가 있어서 견책과 치리의 일을 감당했다(딛 1:9). 장로회는 ‘가르치고, 권고하고, 교정하는 직무’(munus docendi, exhortandi, et corrigendi)를 감당했다. 각각의 지역을 주관한 장로회가 교회의 몸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지방감독’(chorepiscopus)이라고 불리는 대표를 두었다. 그리고 니케아 공회의 이후에는 규율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방감독들 중에서 일인을 ‘대감독’(archiepiscopus)으로, 그리고 대감독보다 지위와 위엄이 더 높은 ‘총대감독’(patriarcha)을 두었다. 이러한 구조는 교회정치의 효율성을 추구한 것이지 ‘교권제도’(hierarchia)를 지향하지는 않았다(4.4.1-4).
감독은 집사들에게 재정과 구제에 관한 일을 맡기고 관리하였지만 전횡을 일삼지는 못했다. 교회의 재산은 사분(四分)해서 성직록, 빈민구호, 교회건물 수리, 이웃들을 섬기고 그들의 긴급한 일들에 대처하기 위한 비용으로 각각 사용되었다. 성찬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주의 일을 섬기는 사람이 정해진 공적인 경비 외의(고전 9:14; 갈 6:6) 교회의 비용을 사용(私用)하거나 갈취할 때에는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여겼다(고전 11:29). 아직 교회가 건전했을 때, 직분자들의 삶을 지배한 것은 법이 아니라 ‘양심의 순수성’(conscientiae integritas)과 ‘삶의 순결성’(vitae innocentia)이었다(4.4.5-8). 교회의 감독은 평신도들이 선거로 뽑았으며 나머지 직분자들은 대체로 감독이 임명하였다. 감독을 포함한 장로들과 집사들이 직분에 나아가는 예식은 오직 ‘안수’(manuum impositio) 밖에 없었다(4.4.10-15).
이와 같이 성경적 직분론에 충실했던 초대교회와는 달리 ‘로마 교황청’(romana sedes)의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세속적, 권위적이었으며 교황을 최상위로 한 계급구조를 근간으로 전제적(專制的)이었다. 교회 지체들의 고유한 권한이었던 선거권은 전권이 ‘참사회원들’(canonici)에게 넘어갔다. 직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분이 무분별하게 주어졌다. 사제는 말씀과 성례의 직임을 감당하였던 장로가 아니라 ‘제사장’(sacerdos)으로 여겨졌다(4.5.1-4). 로마 교황이 ‘수위권’(primatus)을 주장하여 그리스도 대신에 교회의 머리임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목 잘린 지체가 된다고 호도(糊塗)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지금은 하늘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부인하고, 로마 교황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열쇠의 권한에 따라서 자신에게 사죄권과 중보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히 7:12), 십자가에서 구약의 제사법이 성취되었지만 교황은 여전히 그 이전에 머물며 은혜의 성도들을 예속시키고 있다(4.6.1-2).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Petrus)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은(마 16:18) 그에게 양을 먹이라는 이후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요 21:15; 벧전 5:2).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고전 3:11).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분께서 제정하신 ‘질서’(ordo)와 ‘정치 형태’(politiae forma)에 따라서 우리 지체들은 함께 한 몸이 된다(엡 4:4-5, 16; 골 2:19). 주님께서 ‘보배로운 산 돌’로서 ‘모퉁이 돌’이 되시고 우리가 그 위에서 하나로 지어져간다(엡 2:20-21; 벧전 2:5-6).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신 ‘매고 푸는 권세’(potestas ligandi et solvendi)는 그들이 전한 복음의 역사가 어떠함을 제시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사죄권을 부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마 16:19; 18:18; 요 20:23). 이는 사도들이 화목하게 하거나 벌을 주는 직분을 가졌다고 말할 때에 갖는 의미와 같다(고후 5:18; 10:6). 로마 가톨릭은 은밀하게 뽑은 자신들의 대표에게 온갖 영예를 부여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앉히고(살후 2:4)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단 7:25; 계 3:10; 13:5). 이미 불법의 은밀한 활동은 시작되었다(살후 2:7). 결국 교황청의 ‘은밀한 신학’(arcana theologia)은 제1조가 하나님을 부인함이요, 제2조가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말씀과 가르침을 허위라고 조장함이요, 제3조는 미래의 삶과 최후의 부활을 한낱 우화로 여김이다. 교황주의자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기도로 인하여 이 지상에서 이미 천상에서와 같이 과오를 범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4.6.3-10; 4.7.25-27).
보편적 교회는 있으나 ‘보편적 감독’(episcopus universalis)은 있을 수 없다. 특정한 사람을 교회의 머리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이 넘어지면 전체 교회가 넘어지게 될 것이다(4.7.4, 21-2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공히 주신 것이다(4.6.3). 지상의 성도가 그러하듯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 위에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사도들은 교회가 조직적으로 형성되기 전에 선도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으며 교회를 세계적으로 창설하였다. 그들의 직분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자신에게 교회의 머리가 되는 권능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지상의 성도가 그러하듯이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여전히 거룩해져야 한다. 즉,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 가고 있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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