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권세는 주님 말씀에 종속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종들은 가르쳐서는 안돼
'제27강좌' 교회의 권세: 교리권, 입법권, 사법권(권징)(기독교강요 4.8.1-4.13.21) |
1. 교리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교리권은 ‘교리들을 전하는 권한과 그것들에 대한 설명’(autoritas dogmatum tradendorum et eorum explicatio)으로 이루어진다(4.8.1).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이나 그 후예들이 권위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들로 말미암지 않고 그들의 ‘직분’(ministerum) 곧 그들이 위탁받은 ‘말씀’(verbum)으로 말미암는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것 외에는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선포하였다(출 3:14).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를 여호와의 종으로서 믿었다(출 14:31).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입으로 전해진 진리의 법대로 전하였다. 먼저 그들은 듣는 편에 속하였다(신 17:9-13; 말 2:4-7). 선지자들 역시 여호와의 말을 들은 후 성실하게 전하였다(겔 3:17; 렘 23:28).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알곡’이었으며 그 외에는 모두 ‘겨’와 같았다(렘 23:28).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인정하고(렘 1:6; 사 6:5) 오직 여호와께서 그들의 입에 두신 말씀만 대언하였다(렘 1:9). 사도들은 보내심을 받은 소명이 자신들을 보내신 분의 것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는데 있음을 깨달았다(요 7:16; 마 28:19-20). 제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칭해진 것은 세상이 그들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마 5:13-14; 눅 10:16). 그들이 가진 풀고 매는 권세는 그들이 맡은 말씀에 있었다(마 16:19; 18:18; 요 20:23).
“교회의 권세는 무한하지 않으며 주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지는 교리권에 대한 다음 제 일 원칙은 언제나 불변하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 분 자신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ne quid doceant servi Dei quod non ab ipso didicerint).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는 그 분의 영원하신 지혜이신 아들께 먼저 배워야 한다. 믿음의 일꾼들은 언제나 ‘주의 영’으로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알았다(고후 3:18). 구약 시대 족장들에게 작용한 ‘은밀한 계시’(arcana revelatio)도 아들로 말미암았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마 11:27)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mysteria Dei)을 영혼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4.8.2-5).
구약시대의 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그들이 받은 율법을 가감 없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지키라는 명령을 수행하였다(신 4:2; 5:32; 13: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두심으로써 그들이 율법의 표준을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셨다(말 2:7; 4:4).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나심으로써 의의 태양이 정오의 밝은 빛과 같이 빛나서 완전한 진리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조명되었다(히 1:1-2). 주님의 오심을 말세 혹은 마지막 때라고 부른 것은(행 2:17; 딤후 3:1; 벧전 1:20; 벧후 3:3; 요일 2:18) ‘그리스도의 교리의 완전성’(doctrinae Christi perfectio)을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그 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요 4:25). 그러므로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
오직 유일하신 선생은 그리스도시니(마 23:8, 10),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선행(先行)하셔서’(praeeunte Christi spiritu) 명령하신 것만 전하였다(마 28:19-20). 사도들은 ‘확실하고 진정한 성령의 필사자들’(certi et authentici spiritus sancti amanuenses)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대로(롬 10:17) 기록하였을 뿐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참되시다(롬 3:4). 그러므로 기록하는 자와 전하는 자가 여일(如一)하니,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벧전 4:11).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고후 10:4-5)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서야 한다(4.8.6-9).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함께 역사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교회는 말씀에 부속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치시는 곳을 그 한계로 여기고 머물러야 한다.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음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진리로부터 전혀 동떨어져 있다.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신다(요 16:7, 13, 26). 성령께서 내주하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의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셨고 아버지께서 그 분 안에 계셔서 주시는 것을 말씀하셨다(요 12:49-50; 14:10). 그러므로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신 4:2; 계 22:18-19) 금하여야 한다(4.8.13).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겸손을 버리고 교만해질 만큼 베푸시지는 않는다. 교회가 정결하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으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림은(엡 5:26-27; 딤전 3:15),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그치시고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결하게 하셨으나, ‘성화의 시초’(initium sanctificationis)가 보일 뿐 그 ‘끝’(finis)은 그 분께서 오셔서 교회를 지성소적인 임재로 충만하게 하실 때 이루어진다(히 9-10). 교회는 ‘거룩하고 정결하다’(sancta et immaculata). 그러나 지상의 성도와 같이 교회도 아직 완전하지 아니하다. 교회가 이러할진대, 교회의 ‘공회의’(universale concilium)가 ‘오류를 범할 수 없다’(errare non posse)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창출해 낼 수 없다. 교리로 완전하게 할 만큼 말씀은 불완전하지 아니하며, 교리로 채워야 할 만큼 말씀은 부족하지 않다. 교리는 말씀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고백하게 하는 가르침일 뿐이다.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요 16:12) ‘관습들로써’(moribus) 교회에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오직 보혜사 성령의 역사로만 말미암는다(요 16:13).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외의 어떤 것을 매개로도 계시되지 않는다(4.8.10-12, 14-16).
성경은 교회의 인정에 따라서 비로소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은 교회의 해석에 따라서 비로소 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승인하는 권세’(potestas approbandae scripturae)나 ‘성경을 해석하는 권세’(potestas interpretandi scripturam)가 교회나 공회의에 있지 아니하다. 성경의 진리가 사람의 모임이나 의사결정에 따라서 결정되거나 해석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모든 ‘판단’(iudicium)이 성경으로부터 나온다(4.9.1-2, 8, 13-14).
2. 입법권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을 만드신 ‘유일한 입법자’(unicus legislator)이시다. 교회는 법을 만들어서 성도들의 양심을 억압할 권한이 없다. 우리가 가진 영적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자유를 ‘인간의 전통’(traditio humana)으로 맬 수 없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그 분의 말씀을 듣는데 있지, 교회가 제정한 법을 지키는데 있지 아니하다. 양심은 ‘유일한 자유의 법’(una libertatis lex)인 복음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아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사람이 만든 법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유익할 수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많은 법으로 남을 억압하듯이, 전통은 말씀의 은혜를 단지 해칠 뿐이다(4.10.1).
로마 가톨릭은 교회법을 ‘자유의 법, 달콤한 멍에, 가벼운 짐’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으로써 오히려 성도의 양심을 구속(拘束)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멍에만이 쉽고 그 짐만이 가볍다(마 11:30).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 속에 ‘양심의 법정’(conscientiae forum)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율법을 마음에 새긴다(롬 2:15-16). 진정한 분별력과 사랑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전 10:28-29; 딤전 1:5; 행 24:16).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추구하는데 있다. 양심은 사람들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만 상관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다. 그러므로 양심에 사람의 짐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4.10.2-5).
교회의 법을 제정하시는 고유한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교회의 주교들은 영적 입법자가 아니며 교회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재판장이시자 입법자시니, 능히 살릴 자를 구하시고 멸할 자를 벌하신다(약 4:11-12; 사 33:22). 그러므로 주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벧전 5:2-3). ‘모든 의와 거룩함의 완전한 규범’(perfecta omnis iustitiae et sanctitatis regula)이 하나님의 ‘뜻’(voluntas)에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그 분의 뜻을 순종하고 섬기는데 있다. 따라서 그 분의 뜻을 거스른 경건과 예배의 규범은 모두 거짓되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세우려 하심에 있다(골 1:28).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심에 있다(골 2:3, 8).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마다 여전히 ‘그림자’에 속하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매여 있으니(골 2:8, 17, 19), 말씀을 떠난 교회의 법은 죽을 것으로만 역사한다(4.10.6-8).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constitutio ecclesiastica)은 의식과 예배에 관한 규정과 권징에 관한 규정을 포함는데, 이는 유대 형식주의와 외식주의를 계승한 ‘유전’(遺傳, traditio)과 다를 바 없다(마 15:3).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는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고(갈 4:9) 그리스도의 교훈을 무시하고 세속적 금욕주의를 주창할 뿐이다(골 2:23).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체며 완성이시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숨기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분을 드러내어야 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므로 성도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 구원의 전체 과정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로마 가톨릭은 미사라는 의식을 교회법으로 조작하여 주님께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신 십자가의 제사를 무시하고 여전히 짐승을 잡아 드리듯 하고 있다. 그들의 법은 미사를 성도의 공로라고 규정한다. 성도의 행위는 그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평가하시기 때문에 공로가 있는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것으로 여기시는 자비가 공로의 기원이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에 의해서 의롭게 여겨질 뿐, 그 자체를 본다면 불완전하고 미약하다. 의식이나 도덕적 행위가 의롭다고 여겨짐은 단지 형식이나 외식이 아니라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는다. 법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법을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신 12:32; 렘 7:22-23). 인위적 의식이 아니라 심중에 드리는 순종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신다(삼상 15:22-23; 렘 11:7). 법을 만들어서 새로운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평화의 법을 순종하며 서로 사랑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신다(행 15:19-29).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로 사신 자유를 자의로 사용함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7:23; 8:1-13). 사제 독신제와 수도원 맹세의 예들에서 보듯이(4.12.23-28; 4.13.8-21), 교회법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섞인 누룩과 같이 사람의 교훈을 강요할 때(마 16:12),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뿐이다(4.10.9-26).
교회법의 목적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고전 14:40) 영원하신 말씀에 따라서 교회가 사랑과 진리의 연합체를 이루는데 있다. 교회법이 없다면 교회는 마치 ‘근육’(nervus)이 없는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교회의 모든 규율은 의식에 관한 것이든, 도덕적 행위에 관한 것이든 자유로운 양심을 억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데 있다. 즉 ‘교회의 건덕’(ecclesiae aedificatio)이 교회법의 제일 가치이다. 교회법은 지체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게 할 때에만 올바르다(4.10.27-32).
3. 사법권(권징)
교회의 재판권은 세속적 사법이 아니라 ‘영적인 제도’(spiritualis politia)로서 ‘도덕적 권징’(morum disciplina)을 그 요체로 한다. 교회의 권징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열쇠의 권한’(potestas clavium)에 부합한다. 복음의 교리는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제자들이 부여 받은 권한은 ‘교리의 저자’(doctrinae autor)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구원을 선포하는데 있다(마 16:19; 요 20:23). 이러한 열쇠의 권한은 선포된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권징을 포함한다(마 18:15-18). 로마 교황청은 이러한 열쇠를 스스로 제조(製造)한다(4.11.1-2).
교회의 사법권은 세상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검을 사용하여(고후 10:4-6) 성도를 돌이키는데 있다. 그것은 합당한 절차에 따르되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고전 5:4-5). 초대 교회에서는 성경 말씀에 충실하여 ‘장로들의 회’(senatus presbyterorum)가 이 일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사제들이 교회의 재판권을 독점하고 ‘칼의 권세’(ius gladii)를 휘둘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의 습속으로 성도들을 판단하는 것을 금하셨다(마 20:25-26; 막 10:42-44; 눅 22:25-26). 우리의 싸움의 병기는 육체에 있지 아니하다(고후 10:4). 교회가 가할 수 있는 마지막 벌은 ‘출교’(excommunicatio) 밖에 없다(4.11.3-10).
교회의 권징(disciplina ecclesiae)은 ‘견책’(censura)과 ‘출교’(excommunicatio)로 주로 시행된다. 권징은 교회가 가진 영적인 재판권으로서 열쇠의 권한에 의존하여 논의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교회의 생명이라면 권징은 교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힘줄’(nervus)이라고 할 것이다.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반대하며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는 ‘굴레’(fraenum), 게으른 사람에게 약동시키는 ‘박차’(stimulus), 타락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 징계하는 ‘아버지의 매’(paterna ferula)와 같다(4.12.1).
권징은 ‘사적인 충고’(privata monitio)로부터 시작된다. 성도들은 한 몸의 지체들로서 가족과 같이 서로 충고할 수 있다. 특히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과 경건을 보살펴야 할 직분을 맡은 목사와 장로들이 이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처음 단계의 경계(警戒)를 받고도 계속 죄와 악행을 범하는 사람에게는 재차 충고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면 장로회에서 공적 권위로 치리하여야 한다(마 18:15-17). 은밀한 사적인 죄는 이와 같은 절차를 지킬 것이나, 공공연히 드러난 공적인 죄는 즉시 그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엄숙히 꾸짖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딤전 5:20). 그리하여서 적은 누룩이 온 회중에 퍼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전 5:1-7). 교회의 권징은 개인 구원과 더불어서 교회의 연합을 고려하여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2.2-4, 6).
권징을 시행하는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더럽고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금함으로써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치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건강을 위하여 종기가 제거되어야 하듯이, 거룩함을 위하여 부패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골 1:24; 엡 5:25-26). 둘째로,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함으로써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게 되므로, 성경은 행악하는 자들과 사귀는 것과 함께 먹는 것을 금하였다(고전 5:6, 9). 셋째로, 행악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갖도록 징계를 가함으로써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살후 3:14).
권징의 방식으로 시행되는 ‘교정’(correctio)과 ‘출교’(excommunicatio)는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우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판단하되, 온유한 심령으로 행함으로써 권징을 받는 사람이 형제적 사랑을 느끼며 너무 많은 근심에 빠져 절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갈 6:1; 고후 2:7-8; 살후 3:15). 교정은 고치어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며, 출교는 연합체로부터 떠나게 하되 다시 돌아올 길을 여는 것이다. 이렇듯 권징이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의가 있지만 그것은 항상 교회의 전체 지체들의 유익을 고려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가라지를 뽑으려다 곡식을 다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마 13:29). 키프리아누스의 다음 말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깊이 새길 귀한 교훈이 된다.
“가능하거든, 긍휼히 여기며 한 사람을 교정하라. 그러나 불가능하거든, 끝까지 참고 사랑으로 슬퍼하며 신음하라”(4.12.5,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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