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양식 나누는 ‘영적 잔치’
그리스도의 몸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 얻는 약속을 확증하다
'제29강좌' 성찬: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로서 살아감의 표, 미사와 가톨릭 거짓 성례들:새로운 유대주의(기독교강요 4.17.1-50; 4.18.1-4.19.37) |
1.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영적 잔치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외면적, 형상적이지 않으며 내면적, 영적이다. 그것은 성례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깥에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사신다. 그 분께서는 각인에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하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놀라운 교통을 하신다. 그리하여서 그 분께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기 까지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서 한 몸이 되사 날마다 자라 가신다(3.2.24).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은혜로써 성도 안에 사시고, 성도가 그 분 안에 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을 통한 성도의 ‘교제’(communio)와 ‘교통’(communicatio), 성찬은 이 ‘신비한 복’(mystica benedictio)을 마치 인(印)과 같이 확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부어주신 영으로써(행 2:33; 롬 8:9), 우리 안에 사신다(갈 2:20). 그 분께서 ‘우리 밖에’(extra nos) 계시나, ‘우리 안에’(intra nobis) 사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고리’(vinculum)가 되어서 우리를 그 분과 연합시키고, ‘수로’(canalis)가 되어서 ‘그 분 자신과 그 분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찬의 ‘물질적인 표징들로써’(corporeis signis) 제시되는 ‘영적인 진리’(spiritualis veritas)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초월하시면서 내재하시는 임재의 비밀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세 가지 익숙한 말로 설명하기를 원한다:의미(significatio), 그 의미를 낳는 질료(materia), 이 두 가지로 말미암는 능력(virtus) 또는 효과(effectus). 의미는 표징이 지시하는 약속들에 담겨있다. 나는 그리스도를, 그 분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질료 혹은 실체(substantia)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속, 의, 거룩함, 영생, 그리고 다른 모든 은총들을 효과라고 이해한다(4.17.11-12).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아버지’(optimus pater)로서 자신의 자녀들을 일생 동안 쉼 없이 ‘기르신다’(alere).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능력에 맞추어서’(ad modulum) 성찬을 제정하셨다. 그리하여서 자신의 호의에 대한 ‘보증’(pignus)을 삼으셨다. 성찬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분께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증하는 ‘영적 잔치’(spirituale opulum)이다. 성찬의 ‘떡’(panis)과 ‘포도즙’(vinum)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얻게 되는 ‘보이지 않는 자양분’(invisibile alimentum)을 표상한다. 우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unicus animae nostrae cibus)이 되신다. 그 양식을 먹는 자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의 능력’(vivificae mortis virtus)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된다. 이러한 ‘은밀한 연합’(arcana unio)이 떡과 잔의 표상으로써 기념되었다(4.17.1).
성찬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까지 자라가며 그 분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으로 삼게 되는 은혜에 대한 증거를 얻게 된다. 떡과 잔이라는 성찬의 표징들을 통해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시되신다’(exhiberi).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큰 확신과 달콤함’(magnum fiduciae et suavitatis)을 얻게 된다. 주님께서 인자가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에 오를 길을 여셨다.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무력해지심으로 우리가 강해지고, 빈곤에 처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 죄의 짐을 지심으로 우리가 의를 덧입게 하셨다. 살과 피를 취하시고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부활의 육체 가운데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4.17.2, 11).
성찬의 주된 기능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양식’, ‘참된 음료’로서 그 분의 몸을(요 6:55)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요 6:54) ‘약속을 인치고 확증하는데’(promissionem obsignare et confirmare) 있다. 십자가에서 이 약속이 수행되었으며 다 이루어졌다. 주님께서 죽음을 삼키는 죽음을 당하셨다(벧전 3:22; 고전 15:54). 그리하여 그 분의 살과 피를 영생의 양식으로 제공하셨다(요 6:48, 50). 그 양식으로써 마지막 부활의 때에 우리의 육체는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된다(고전 15:53-54).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그리하여서 ‘그 분의 실체에 참여하는 자들’(participes substantiae eius)이 되게 한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accipite, edite, bibite; hoc est corpus meum, quod pro vobis traditur; hic est sanguis, qui in remissionem peccatorum effunditur)”(마 26:26-28; 고전 11:24; 막 14:22-24; 눅 22:19-20).
이러한 제정의 말씀을 통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이 ‘우리의 것’(nostrum)이며 ‘우리를 위한’(pro nobis) 것임을 선포하셨다(14.17.3-4, 11).
2. 영적 그러나 실재적인 현존(praesentia spiritualis sed realis)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믿음이 없이는 성찬의 복을 누릴 수 없다. 성찬은 대리적 속죄의 의가 성도의 구원에 역사함을 확증하되, 오직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그러하다. 믿음 가운데 성찬에 참여함에 있어서, 표징 자체를 업신여겨서도 과도하게 찬양해서도 안 된다. 주님께서는 표징의 의미를 단지 관념상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성찬에 있어서, ‘먹음’(manducatio)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을 마음에 모신 성도가(엡 3:17)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양분’(alimentum)으로 ‘능력’(virtus)과 ‘생기’(vigor)를 얻는다.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를 단지 성령의 내적 감화를 받는 정도로 여겨서도 안 된다(4.17.5, 7).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요 1:1, 4; 요일 1:1-2).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원천이며 기원’(vitae fons et origo)이셨다. 그 분의 살은 생명의 떡이요 그 분의 피는 생명의 음료였다(요 6:48, 51, 56).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삶을 소망하는 성도에게 ‘놀라운 위로’(eximia consolatio)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생명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그 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우리는 그 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다(엡 1:23; 고전 6:15). 우리는 그 몸의 뼈와 살을 이룬다(엡 5:30; 창 2:23). 이러한 한 몸 됨의 비밀이 크다(엡 5:32). ‘이 비밀을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찬미하는 것이 낫다’(eam admirari quam explicare malit)(4.17.7-9).
성육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성의 따라서는 특정한 곳에 계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살과 뼈를 가지셨다(눅 24:39; 요 20:27). 그 ‘유한한 몸’(corpus finitum)으로 마지막 날 까지 하늘에 머물러 계신다(행 3:21).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내려주심은 이제 그 분께서 육신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이 땅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신다(마 26:11; 요 12:8; 막 16:19).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엄위와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maiestas, providentia, ineffabili gratia)에 있어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28:20). 주님께서는 몸으로 하늘에 ‘올려져’ 가셨다’(행 1:9; 막 16:19; 눅 24:51). 그리고 ‘거기로부터’(빌 3:20)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의 ‘거주지’(domicilium)는 하늘이다(4.17.12, 26-27).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신성에 따라서는 그 분은 ‘어디에나’(ubique) 계신다. 그러나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계신다. 부활로써 육체에 불멸성이 부여되었으나, 그것의 고유한 속성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육체의 현존’(praesentia carnis)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 후에도 인성에 따라서는 ‘지역적으로’(localiter) 현존하신다. 성도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게 됨은 ‘성령의 은밀한 능력’(arcana virtus)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성례의 약속을 효과적으로 실현한다. 성령께서는 표상에 의해서 ‘의미되는 본체’(res signata)를 ‘드러내시고 제시하신다’(praestat et exhibet).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심령에 ‘증거하시고 인치신다’(testatur et obsignat). 성령의 ‘작용’(efficacia)은 객관적인 성례의 거행과 주관적인 성도의 감화에 동시에 미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으로 인성에 따라서 육체가 지상을 떠나셨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그 육체의 ‘영적인 현존’을 이루기 위해서였다(4.17.10, 28).
성찬에는 ‘말씀의 선포’(praedicatio verbi)가 필수적이다. 제정의 말씀에 따른 약속은 표징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을 향하여 주어진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그 약속을 ‘믿음의 분수대로’(analogia fidei)(롬 12:6) 받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만이 성령의 ‘은밀한 힘’(vis arcana)으로 그 분과 하나 된 가운데 ‘영적인 먹음’(spiritualis manducatio)을 통하여서 그 분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 이 먹음은 영적이나 ‘참되고 실재적이다’(vera et realis). 이러한 성찬의 신비는 이해되기보다 경험된다. 그 역사는 오직 성령의 ‘불가해한 능력’(incomprehensibilis virtus)으로 말미암는다(4.17.32-34, 39-40).
성찬은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대로 ‘마음을 들어 올려’(sursum corda) 하나님의 영원한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4.17.31, 35-36).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동시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화목과 평강을 고백하는 예식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의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자라가는 거룩한 잔치이다(4.17.38, 42).
3. 로마 가톨릭 화체설 비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사제의 ‘축성’(祝聖, consecratio)으로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substantiatio)을 주장한다. 그들은 떡의 육체로의 ‘변화’(conversio)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떡의 실체’(substantia panis)가 없어진다. 떡은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잃는다. 둘째, 떡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새롭게 존재하며, 지역적, 육체적으로 현존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은 ‘떡의 형상’(forma panis)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도 그리스도의 몸은 편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승천하신 그대로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지역적 현존’(praesentia localis)을 ‘육체적 현존’(praesentia carnalis)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궤변에 따르면 한 분 그리스도께서 다수의 몸을 갖게 된다. 이러한 난점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들은 떡의 실체와 형상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여, 성찬에 있어서 떡의 실체는 없어지고 떡의 형상은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새로운 실체로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하늘에 현존하는 몸이 떡에 현존하는 몸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하여서 그리스도의 육체는 인성의 제한을 받으나 무제한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육체적, 물질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성찬의 표징으로부터 그것에 의하여 의미되는 본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시킨다. 그리하여서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로써 드러내심으로써 성도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자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이렇듯 표징과 그 의미와의 관련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들은 ‘병재’(竝在)에 의해서(per concomitantiam) 살과 피가 동시에 한 표상으로 제시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적 진리에 따른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이 아니라, 사제의 기적적 능력을 가정한 ‘은밀한 현존’(praesentia arcana)을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떡의 외형 아래에’(sub specie panis)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전혀 비성경적인 ‘은밀한’ 궤변이 있을 뿐이다(4.17.13-15, 18).
4. 루터란 공재설 비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는 달리, 루터란들은 떡의 실체가 변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들도 떡과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체적 관련성’(habitudo substantialis)은 부인한다. 그들은 성례에 있어서 떡이 그리스도를 ‘제시함’(exhibitio)을 떡이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한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현존한다는 사실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떡이 몸이다’(panem esse corpus) 라는 말과 ‘몸이 떡과 함께 있다’(corpus esse cum pane) 라는 말은 천양지차이다.
로마 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떡에 ‘내포시키려고’(includat) 하는 반면에 루터란들은 그것을 떡에 ‘부착시키려고’(affigat)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썩을 요소들에 가두거나 고착시키는 것은 그 분의 영광에 합당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속성을 그 분의 몸에 돌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지금도 양성 가운데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4.17.16-17, 19-20).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은밀한 현존’이라는 모호한 말로써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떡 가운데도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주장을 한 반면에, 루터란들은 승귀한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현존한다는 ‘편재성’(ubiquitas)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o)을 전개하였다.
루터란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영광의 몸’을(빌 3:21) 인성의 제한을 받지 않는 ‘보이지 않고 무한한 몸’(invisibile ac immensum corpus)이라고 곡해한다. 그들에 의하면, 그 몸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나 어떤 공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multis in locis simul esse, nulloque spatio contineri). 이러한 궤변은 ‘속성 교통’(communicatio idiomatum)에 대한 그들의 오해로부터 기인한다.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말씀은 모두 위격적 연합 가운데 읽어야 한다. 어느 특정한 성에 속하는 사실은 전체 위격에 돌려진다. 양성은 위격 안에만 있으며, 위격을 통하여서만 교통한다. 위격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전체로 계신다. 그러나 위격에 속한 양성에 관한 한 각각의 성이 항상 전체로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 이시다. 그러나 전체로서 그러하신 것은 아니다’(totus, sed non totum ). 승천 후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에 따라서는(ad humanitatem) 하늘에 계시고 신성에 따라서는(ad divinitatem) 어디에나 계신다. 신성에 따라서는 장소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인성에 따라서는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실 수 없다. 한 성에 따른 것은 다른 성에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성에 따르던 그 주체는 양성의 위격이다. 즉 인성에 따라 특정한 곳에 계신 분도, 신성에 따라 어디에나 계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 전체시다. 루터란들은 이러한 양성의 위격적 교통을 곡해하여 양성이 위격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교통하여 서로 혼합되거나 변화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에 혼합되어서 육체인 채로 어디에든지 현존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마찬가지로 루터란의 공재설도 성찬을 받는 성도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4.17.29-31).
5. 로마 가톨릭 미사와 거짓 성례들 비판
로마 가톨릭은 미사를 죄를 보속하기 위한 공로를 쌓는 희생 제사로 여긴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세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5:6, 10; 7:17, 21; 9:11, 26; 10:10, 14, 21; 시 110:4; 창 14:18).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요 19:30; 히 10:18, 26), 죽을 인간이 제사장이 될 필요도 없다(히 7:17-19). 미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의를 곡해하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성찬를 제거하고 폐지한다. 그러므로 전적 은혜를 감사하는 성찬과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는 미사는 양립할 수 없다(4.18. 1-3, 7).
로마 가톨릭은 세례와 성찬 외에 비성경적인 다섯 가지 성례를 거행한다. 견진례(confirmatio)는 세례 받은 성도들이 거룩한 영적 싸움을 싸울 능력을 주는 성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이미 세례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롬 6:4)이기 때문이다(4.19.5, 8). 고해(poenitentia)에는 가시적인 표징이 없다. 내면적인 통회가 회개의 표징이자 본체이기 때문이다. 고해 역시 견진례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세례에 포함되어 있다(4.19.15, 17). 종부성사(ultima unctio)는 임종을 맞이한 성도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병 낫기와 영혼 구원을 구하는 예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를 제정한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4.19.18-20). 신품성사(ordes ecclesiastices)는 일곱 가지 직분에 나아가는 서품의 예식이다. 그러나 이는 직분의 임명과 다르지 않은 의식으로서 성례의 표나 말씀이 없다(4.19.22). 혼인성사(matrimonium)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연합의 신비를 기념하는 예식으로 여겨진다(엡 5:28-32). 그러나 진정한 성례적 연합은 세례와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교통으로 족하다(4.19.34-36).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거짓 성례들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무화(無化)시키고 단지 인간의 공로만을 부각시킬 뿐이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이므로, 은혜의 약속이 말씀으로 제정되지 않는 어떤 예식도 단지 헛되고 참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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