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기독교 강요

지상강좌 (25) 하나님과 하나될 때 교회는 참되다

미션(cmc) 2009. 11. 6. 06:54

하나님과 하나될 때 교회는 참되다

그리스도 말씀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리스도 나라 돼야


'제25강좌' 참 교회: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기독교강요 4.1.1-4.2.12)


1.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Christus caput ecclesiae)

   
칼빈의 교회관의 기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 1536년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의 ‘credo sanctam ecclesiam catholicam’(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을 해석하면서 칼빈은 교회의 유일성, 보편성, 거룩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선택된 자들 전체의 수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교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가…한(unam) 교회이며 연합체(societas)이고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들의 그리스도이신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들의 지도자며 통치자, 이른바 몸의 머리가 되신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 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 선택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으로 모이게 되었다(엡 1:4). 그런데 교회가 둘 혹은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연합체는 보편적(catholica), 즉 우주적(universalis)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 일치되어서(엡 1:22-23) 한 머리에 의지함으로써 한 몸으로 자라가고 그 몸의 지체로서 서로 결합되고 함께 지어져 간다(엡 4:16). 그들은 진실로 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하나가 되며 같은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영생의 유업을 위해서 부름을 받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또한 이 연합체는 거룩하다(sancta).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의 수만큼 교회의 지체들로 받아들여지며, 그들은 모두 주님에 의해서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요 17:17-19; 엡 5:25-32)”

1559년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이러한 신경의 조목으로 성도는 ‘가시적 교회’(ecclesia visibilis)뿐만 아니라 고금(古今)과 미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수(總數)로 구성된 ‘비가시적 교회’(ecclesia invisibilis)를 고백한다고 천명한다. 성령의 ‘인침’(signaculum)을 받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분변된다(딤후 2:19; 엡 1:13). 하나님 홀로 자신의 교회에 대한 지식을 가지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arcana electio)에 기초하며, 그로 말미암아 ‘내적 소명’(interior vocatio)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러한 선택과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작정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머리’(caput)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지 아니하면 한 몸의 ‘지체들’(membra)이 될 수 없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그 분의 의를 전가 받는 성도만이 ‘미래의 기업’(haereditas futura)을 분깃으로 받는다. 교회가 ‘보편적’, ‘우주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한 성령을 받아서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 된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함께 자라가기 때문이다(엡 4:16).

그리스도와 연합한 지체들은 ‘형제적 일치’(fraternus consensus)를 이루며 ‘형제적 사랑’(fraternus amor)을 나눈다. ‘성도의 교통’(sanctorum communicatio)은 하나님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저 주신 은혜와 은사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과 교통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다음과 같은 ‘열매’(fructus)를 맺는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존속된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견고한 터’(firmitudo)에 주추를 놓고 서 있으므로 그 분 자신으로부터 떨어지는 일이 없다. 셋째로, 교회의 품 안에 있는 이상 우리는 항상 진리와 함께 있다. 넷째로, 교회의 지체로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연합체 안에 머물게 된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성도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다(4.1.3).

비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에는 비록 신앙을 고백하고 성례에 참석하며 직분을 수행하는 자라도 ‘위선자’(hypocrita)가 많이 섞여 있다. 가시적 교회의 지체로서 비가시적 교회에 속하지 않는 자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오직 주님만이 끝까지 구원으로 견인하실 자를 아신다(마 24:13; 딤후 2:19). ‘주님의 은밀한 판단’(arcana iudicia)은 우리의 인식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비가시적 교회의 ‘표’(signum)는 무조건적 선택 외에는 없다(4.1.8-9).

한편 가시적 교회의 ‘표지’(nota)는 ‘말씀의 순수한 선포’(pura verbi Dei praedicatio)와 ‘성례의 합당한 거행’(legitima sacramentarum administratio)으로 제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 분의 충만이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게 존재한다(엡 1:23; 5:23-32).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리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딤전 3:15). 말씀의 양식이 먹여지고 성례적인 연합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 오직 교회만이 ‘건전하고 온전한 교리’(salva et illibata doctrina)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이러한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배교(背敎)에 다름없다. 다음 교리는 ‘주요하며’(praecipua) ‘절대적이다’(necessaria). 그러므로 이를 버린 교회는 죽게 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교리들(unum esse Deum; Christum deum esse, ac Dei filium; in Dei misericordia salutem nobis consistere, et similia.”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곧 그들의 교훈 위에 세워졌을진대, 그 모퉁잇돌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교회는 머리이신 그 분에 부착하는 한 진리의 연합체로서 존재하게 된다(4.1.9-12; 4.2.1).


2.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ecclesia mater)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섭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능력에 맞추셔서’(ad captum nostram accommodnas) 교회를 주시고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복음 전파의 보물을 맡기시고 말씀에 따른 삶으로 성도들이 참 경건에 이르는 외적인 도움을 주도록 하셨다. 그들은 유아기와 아동기를 지나는 동안 교회의 도움과 섬김, 보호와 지도를 받아서 성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믿음의 목표’(ad metam fidei)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막 10:9). 사도 바울이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전한 바와 같이(갈 4:26), 교회의 성도는 율법 하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모성적 돌봄’(materna cura)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어떤 사람에게든, 진실로 교회는 어머니가 될지니라”(quibus ipse est pater, ecclesia etiam mater)(4.1.1.)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가시적 교회는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교회가 성도를 잉태하여 낳고 젖을 먹여 기른 후 마지막 때까지 보호하고 양육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도는 교회라는 ‘학교’(schola)를 떠나서는 구원의 진리를 배울 수 없다(사 37:32; 욜 2:32).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교육’(educatio ecclesiae)을 통하여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있어서 장성하길 바라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하신다(엡 4:10-13). 교회는 ‘영혼의 영적 양식’으로서 교리를 먹인다. 그리하여서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자라며(롬 10:17), 궁극적으로 ‘신앙의 일치’에 이르도록 이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는 사람의 혀와 입을 사용하셔서 그 지체들이 ‘자신의 음성’(sua vox)을 듣게 하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불렀다(출 20:24; 시 42:2).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속에 비춰 주시기를 간구했을 때(고후 4:6), 이는 하나님의 ‘천상의 교리’(coelestis doctrina)를 듣고자 함이었다. 진정 어머니의 품에서 생명의 도리를 배운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순복하게 된다(엡 4:12). 가르치는 직분이 사도와 교사에게 부여되지만 오직 성령의 감화로 듣게 하시고 듣는 자로 하여금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2:4; 3:7; 15:10; 갈 3:2). 그러므로 교회의 어머니 됨을 인정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망각하지 말 것이다(4.1.4-6).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무오(無誤)하지 않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도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그 가운데 있었다. 은사가 무분별하게 남용되었으며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곳을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성도들의 연합체’(ecclesia Christi sanctorumque societas)라고 불렀다(고전 1:2). 주님께서는 교회의 주름 잡힌 것을 펴시고 티를 씻어내심으로써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엡 5:26-27).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 않다.

“교회는 날마다 나아가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개교회에서 ‘성화의 증거’(indicia sanctificationis)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존재는 인정하신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다른 복음을 좇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온전한 순결함’(solida puritas)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곳에 여러 교회들이 존재함을 인정하였다(갈 1:2, 6). 교회는,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요 쉴 곳이 될 것이다(시 132:13-14). 낮과 밤의 운행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영영 쇠하지 아니 할 것이다(렘 31:35-36).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신앙을 살필지언정(고전 11:28), 자의로 판단하여 어머니의 품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4.1.13-15, 17). 성도들은 교회의 품 안에서 ‘서로 간에 고통을 감내하며’(sufferendo invicem)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야 한다(엡 4:3). 교회의 됨됨이를 자의로 판단하여 그 존재를 부인하거나 다른 지체들의 연약함과 허물 때문에 걸려 넘어져서 ‘연합체의 패찰’(牌札, tessera societatis)을 떼어내 버리고 성도의 교통으로부터 이탈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4.1.16). 세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이 되었다는 표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자녀들을 특별히 보호하신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중보하시는 성자의 공로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매일 사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길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른 지체의 허물과 불법을 이유로 삼아서 교회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무모함을 보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부른 자를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타나서 성도가 그 분과 화목하게 되었으니(딛 1:9; 3:4; 딤후 1:9; 고후 5:18), 누가 스스로 헤아려 그 사랑으로부터 혹은 자신을, 혹은 남을 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죄행에 대한 항속적인 은혜가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설립됨에 따라서 죄사함이 더불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perpetuam residere in ecclesia Christi delictorum gratiam: qoud, ecclesia velut constituta, remissio peccatorum adhuc subiungitur).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로서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속에 즐거이 머물자(4.1.17-21, 23-29)!


3. 참 교회(ecclesia vera)

‘교회의 교제’(communio ecclesiae)는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consensio sanae doctrinae et fraterna caratias)이라는 두 고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in Christo vel secundum Christum) 하나로 연결될 때 온전해진다(빌 2:1, 5; 롬 15:5).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진리가 함께 역사하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한 믿음 가운데서 그 분을 한 주로 섬기고(엡 4:5) 그 분을 머리로 한 몸 된 지체들로서 서로간의 연합을 이룬다(4.2.5).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홀이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가 그 나라의 통치방식이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듯이(요 10:14, 27), 진리에 속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는다(요 18:37). 참 교회의 지표는 ‘건전하고 타락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진리’(veritas Christi salva et incorrupta)에 있다. 교회의 사도성은 정치적 사도권의 계승이 아니라 사도 시대 때부터 변함없이 ‘만장일치’(unanimi consensu)로 보존되어 오던 교리의 계승으로부터 비롯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일하게 참됨은 ‘하나님의 교리에 대한 한 진리’(una divinae doctrinae veritas)를 동일하게 믿고 고백하기 때문이다(4.1.10; 4.2.2-4).

교회의 머리가 한 분 그리스도이시므로 그 분만이 교회의 ‘유일한 감독’(unicus episcopatus)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임 당하신 양으로서 목자가 되셨다. 우리를 위하여 종으로 오셔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이제 주인이 되셨다. 오직 우리에게 한 제사장이 계시니 그 분께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께만 우리를 위한 사죄권이 있으시다(4.2.6).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열쇠의 권한’(clavium potestas)은 복음을 전도하고 그 약속으로 성도들을 권면하라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대신하라는 뜻은 아니다(4.1.22).

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이다. 참 교회가 빛으로서 비추고, 시내로서 적시고, 가지로서 열매를 맺게 됨은 빛의 근원이시며, 생수의 샘이시며, 나무되시는 그리스도께 붙들려 있음으로 말미암는다. ‘하늘 교사의 교리’(coelestis magistri doctrina)를 미리 듣지 아니하였다면 ‘언약의 율법’(lex foederis)이 구약 백성들에게 단지 헛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다면 ‘교회의 주요한 신경이자 영혼’(principuus nervus atque anima ecclesiae)이 되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이 단지 의문을 좇는 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4.2.6-7).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에 의해서 제정되지 않은 성례들을 거행하고 미사를 드림으로써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모든 대속 사역을 다 이루신 그 분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마치 벧엘에 제단을 쌓는 것 같아서(왕상 12:31) 하나님께서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워하신바 된 것이다. 교회의 지체로서 성도의 교통에 참여해야 함의 당위성은 그 교통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연합인가에 달려있다. 미혹의 터에 자리 잡고 우상의 가증스러운 것을 버팀목으로 서 있는 거짓 교회의 표는 단지 멸망 밖에 없다.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속히 떠나 적그리스도를 그 중앙에 앉히고 섬기고 의지하는 사교(邪敎)에서 ‘합법적인 교회 형태’(legitima ecclesiae forma)를 찾을 수는 없다(4.2.8-12).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과 같이 성도들도 다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거할 때에만 교회는 진정 참되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그 분의 중보자 인격을 박탈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오히려 그 분을 교회의 머리로 여기고 그 분의 지체들로서 그 분과 하나가 되도록 하자. 우리는 이 연합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한 분 되심이 무익하거나 무용하지 않듯이, 그 연합의 능력이 성도들의 몸 전체로 퍼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주입해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자신의 생명과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복으로 우리와 교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요 17:2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