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도덕과 자연법
1. 아퀴나스의 도덕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윤리를 행복의 추구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행복은 인간의 목적(telos)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데, 이런 목적이 충족될 때에 인간은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자연주의적’ 도덕이라고 부를 수 있고, 아퀴나스는 신과 관련한 ‘초자연적’인 목적을 여기에 추가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주의적’ 윤리학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아퀴나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신에게 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윤리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도덕은 이중적인 단계로 구성되어 인간의 자연적 목적, 초자연적 목적과 관련을 맺게 됩니다.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육체의) 감관을 통해서 감각 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감관을 통해 얻은 지식(e.g. 눈을 통해서 보게 된 것들, 코를 통해서 맡게 된 냄새 등)은 우리를 ‘쾌락적이고 좋은 것’에 이끌리게 하고, ‘해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배척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견인(牽引)과 배척의 기본원리에 의해 인간은 사랑과 쾌락, 증오와 공포를 수용합니다. 동물은 이런 욕구에 의해서만 행동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과 의지로서 행위가 조절됩니다. 의지는 인간에게 선을 이루게 하는 매개입니다.(의지는 선과 정의에 대한 욕구를 표출합니다.) 따라서 동물과 같이 단순히 감관을 통해 수용된 것을 따르지 않고, 의지에 의해서 ‘다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배가 고프지만 의지에 따라 밥을 먹지 않는 경우가 있죠) 인간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대상들 중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성(책에서는 지성이라고도 표현하던데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모호하군요.)의 지도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지성은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으로서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대상은 진리인데, 이러한 진리는 곧 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완전한 행복은 피조물들(자연)에서가 아니라 최고선인 신 안에서 발견됩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한 행위가 도덕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선행 조건은 자유입니다. 인간이 기계적이거나 정확히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되어있다면, 그러한 행동은 자유롭지 않고 따라서 도덕적 관점에서 취급될 수 없습니다. 형법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협박을 받거나 사기를 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습니다.(물론, 이 경우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딸을 인질로 잡고 그 아버지에게 절도를 요구하는 경우에 아버지는 형법 제12조(강요된 행위에는 벌하지 않는다는 취지)에 따라 처벌되지 않습니다. 또한 아퀴나스에 의하면 행위가 자유로워야만 ‘인간적’입니다. 선택 대상에 대한 지식과 선택할 의지가 있는 곳에만 자유가 가능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지식과 의지를 갖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적인 덕(탁월함)이 성취되려면 욕구가 의지와 이성에 의해 적절하게 조정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2. 자연법
아퀴나스는 도덕은 행위에 대한 규율을 임의적으로 모아놓은 집합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이 경우 왜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겠지요.) 아퀴나스가 생각한 도덕적 의무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본질 그 자체. 생명의 보존, 종의 번식 등의 성향은 인간의 본질 속에서 구축됩니다. 인간의 이성은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것으로서 역시 인간의 본질 속에 있습니다. 도덕의 기본진리는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됩니다. 2) 종을 번식시키려는 자연적 성향은 부부 결합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며 이 관계에 대한 다른 근거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점. 3)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은 평화로운 세계에서 그 진리를 더욱 잘 추구할 수 있다는 점. 이런 도덕적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도덕률은 이런 이성 즉,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lex naturalis)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의 자연법에 대한 논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대부분 언급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자연적 정의와 약정적 정의를 구별한 바 있습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7장) 자연적 정의는 그 원clr이 자연에서 도출되는 법입니다. 가령 살인은 이런 자연적 정의에 반하는 것이 되겠지요. 반면에 약정적 정의는 사람들의 약속으로 정해진 법입니다. 가령 ‘전쟁 포로의 몸값은 100달러로 한다’와 같은 합의가 약정적 정의에 해당할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법은 이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신은 모든 사물을 창조했기 때문에 신의 지혜와 이성이 인간의 본성과 자연법으로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영원법 : 교재참조
(2) 자연법
자연법은 영원법 중 인간에 해당하는 법을 가리킵니다. 영원법은 모든 사물에 각인되어 있어 각 사물들은 어느 정도 영원한 법을 공유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모든 사물들은 자신들의 적합한 행위와 목적을 향한 저마다의 성향을 보여줍니다. 아퀴나스는 인간과 같은 이성적인 피조물 내에 영원법이 관계하는 것을 자연법이라고 부릅니다.
(3) 인간법(인정법)
인간법은 정부(국가)의 특정한 성문법을 가리킵니다. 인간법은 자연법의 일반적인 기초원리에서 나옵니다. 아퀴나스에 있어서 법은 자연법에 기초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모든 법은 자연법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법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또한 그는 어떤 면에서든 자연법을 벗어난 다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고 법의 왜곡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법은 이미 구속력을 갖지 못하지만 때로는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적용되기도 합니다.(극악무도한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군요.) 아퀴나스는 도덕법을 따르지 않는 정부의 제어력에 법의 성격을 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법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아퀴나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법들을 따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신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4) 신법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자연적인 목적만 고려하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에 이성에 알려진 자연법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 반면에 아퀴나스는 초자연적인 목적을 향하게 해줄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법(神法)입니다. 신법은 계시와 성서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적 목적과 특히 초자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닌 신의 신총에 의한 것입니다. 자연법은 선에 대한 이성적인 지식을 나타내며, 지성은 그 지식에 의해 의지에게 인간의 욕구와 정념을 조정하게 합니다.(욕구와 정념은 거의 같은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를 통해 인간은 정의, 절제, 용기, 분별이라는 기본적인 덕을 이룸으로 자신의 자연적인 덕을 이룹니다. 반면 신법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알려지며 이는 은총에 의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더욱 고귀하고 신학적인 덕을 이루게 됩니다.
VII. 국가
1.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국가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자연적인 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국가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견해를 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자연적인 요구만 염두에 두고 국가가 이런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가정했지만, 아퀴나스는 그런 자연적인 요구 이에도 인간은 초자연적 목적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국가가 이런 초자연적 목적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고, 교회가 그런 목적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아퀴나스는 국가를 인간 죄악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무런 죄악도 없는 상태에서도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사회적 본질 때문에 국가는 신에 의해 의지되고 신이 부여한 기능을 갖는다고 합니다. 국가는 평화를 유지하고 시민들의 활동이 서로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며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 주기도 하고 선한생활에 방해되는 요소를 가능한 방지해 줌으로써 공통선을 추구할 수 있게 합니다.
3.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국가는 교회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교회를 초국가(super-state)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국가는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자치적인 권한을 가지고 생활권 내에서 인간의 초자연적인 목적에 관련해서는 국가는 어떤 제재도 가할 수 없습니다. 즉, 국가는 절대적인 자치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목적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목적이 신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이런 정신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공동체의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4. 국가와 법(네 번째 단락은 앞서 이야기한 자연법과 내용이 같아 생략합니다.)
5. 주권과 법의 목적
군주는 신에게서 그의 권한을 부여받으며, 그 권한의 목적은 공통선을 위해 제공된 것입니다. 목적 그 자체로서 또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권한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통선은 개개인의 선이기 때문에 집단 전체 안에서 개인을 무시하는 공통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퀴나스는 법이 지닌 기능을 그 법의 지배를 가진 사람들을 선한 본성으로 이끄는 덕들을 갖추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입법자는 ‘신적인 정의에 따라 규정된 공통선’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데 유일한 ‘참된 근거’를 가집니다. 이런 근거에서 법은 언제나 사람을 선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겠지요. 아퀴나스는 개인은 국가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가 공통선과 조화되지 않으면 그 개인이 선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부분적인 선은 전체의 선에 비추어 고려되는 것입니다.(중세의 공동체적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VIII. 인간의 본성과 지식
1. 인간의 본성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육체적 실체입니다. 특이한 점은 아퀴나스는 인간의 본성을 통일체로서 보아,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본 것입니다. 즉, 영혼이 없다면 육체는 어떤 형상도 갖지 못하고,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을 정신적 실체로 보았고, 그 보다 앞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고도 보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영혼은 인간에게 육체적 형상을 부여해주기 때문에 인간은 생명과 오성, 특별한 육체적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영혼은 인간의 감각 능력과, 지력, 의지력의 요인입니다. 이성 또는 지성적인 능력은 대체로 영혼에 의지합니다.(인식 내지 감각의 소재와 관련해서는 육체도 어느 정도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성 때문이며, 지성은 인간에게 신을 관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2. 지식
인간의 인식에 대한 회의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 인간의 지식은 감각적 지각에 국한되어 있고 감각 대상들도 항상 변하기[流轉하기] 때문에 어떠한 확실성도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가시계(可視界)와 가지계(可知界)로 두 세계를 가정하여 가지계에 영원한 존재가 있고, 지식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이데아(idea, 形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러한 이데아론을 기독교 사상에 적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신은 자신의 정신 내에 이데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 빛을 통해 인간의 정신 위에 비추게 될 때 인간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앞에서 공부했던 조명설이죠?)
아퀴나스는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현실적인 개개의 대상들과 마주함으로 자신이 행하는 바를 인식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감각 가능한 사물 안에 내재하는 불변적이고 안정된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을 감각할 때 그것들이 비록 변화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의 본질, 즉 나무와 인간의 본질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지성은 개체적인 사물 안에서 보편자를 보게 됩니다. 그것을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추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정신 능력을 능동적 지성(active intellect)라고 합니다.
아퀴나스는 플라톤과 달리 보편자가 개별자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다시 말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데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성이 파악하는 추상화된 개념만이 있으며 이 개념이 지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원래 감관 안에 없던 것은 지성안에 없기 때문에” 감각 경험 없이는 지식이 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감관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영혼에 이데아가 각인 되어있어 인간은 그것을 상기할 수 있다고 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보편자 문제에 대해서 온건 실재론자였습니다. 아퀴나스는 보편자가 1) 사물 외부에(ante rem) 존재하지만 신의 정신 안에서 신성한 개념으로 존재하며, 2) 종의 모든 구성요소들 속에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본질로서 사물 내에(in re) 존재하고, 3) 개체로부터 보편 개념을 추상한 후에 정신 내에(post rem) 존재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 만약 어떤 종의 구성요소들이 존재하다가 모두 없어지게 된다면 그 보편 개념은 사물 내에 더 이상 존재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보편 개념을 추상하여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개념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VIII. 스코투스, 오컴, 에크하르트
1. 아퀴나스 이후의 인물들
아퀴나스가 신학과 철학을 종합하였다면 그 이후에는 이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한 인물들로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요하네스 에크하르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퀴나스의 사상 전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일정한 분야에서는 근본적인 비판을 하였고, 신앙과 이성 사이를 갈라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의 이성 우위에 반대하여 주의주의를 지지했고, 오컴은 아퀴나스의 실재론에 반대하여 유명론을 주장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아퀴나스의 이성적이고 정교한 이론 구성에 반대하여 신비주의적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2. 주의주의
아퀴나스는 신과 인간의 의지는 지성에 종속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했습니다. 만일 신의 의지가 그의 이성에 종속되거나 영원한 진리에 의해 제한받는다면 신 자신도 제한 받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이 어떤 의미있는 방식으로든 자유롭다면 그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그의 이성이 아닌 의지가 곧 그의 지배적인 능력이 된다는 것이 스코투스의 견해입니다.
신의 지성이 아닌 신의 의지가 원초적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곧 신의 행위와 도덕 명령은 의지적(意志的) 행위인 동시에 비이성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신의 도덕률은 이성의 기준들에 근거하기 보다는 자신의 자발성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 신이 그렇게 하기를 의지한다면 살인이나 불륜도 선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도덕이란 이성이 아닌 의지에 기초하며 도덕은 이성적인 탐구, 즉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없고 단지 신앙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주지주의에 따르면 신은 지성에 기초하지 않으므로 이성에 의해 원인과 결과가 정연한 이성적인 질서를 발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에 근거한 자연 신학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즉, 주지주의에서는 경험 세계와 신 사이에서 어떤 이성적 연관 관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 증명은 개연적 논증에 불과하며, 신의 존재는 신앙의 문제로 한정되게 됩니다.
주지주의에 대응되는 견해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입니다. 이 견해는 신의 이성이 그의 의지에 우선하며 신의 선택도 이성적 기준에 따른다. 아퀴나스는 우리가 ‘자연의 빛(natural light)'를 통해 도덕 원리들을 알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도덕은 선의 원리들을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한 지성적인 학문이 됩니다. 또한 신 또한 이성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3. 유명론
오컴 역시 주의주의자였지만 유명론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주의주의에 따르면 ‘인간성’과 같은 보편적 용어들은 특정한 사물을 볼 때 우리가 형성하는 정신적 개념들을 지시하는 기호거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편자 문제는 보편적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오컴은 오직 구체적인 개별자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오컴에 따르면 정신은 보편 개념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식하는 것은 개체나 개체의 성질뿐입니다. 그런 용어들은 개체의 집합을 나타내는 용어이거나 명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명론에 대한 오컴의 논증인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성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하나의 영역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경우 존재의 두 영역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재론자는 보편자에 대한 설명에 대해 1) 개별적 대상, 2) 그것이 지니고 있는 독립하여 현존하는 속성, 3) 이것들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개념들을 가정합니다. 반면에 오컴은 개별 대상과 그 대상들에 관한 언어화된 정신적 개념, 단 두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오컴의 견해는 앞서 보았던 아퀴나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러나 오컴은 보편자가 신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반대합니다. 보편자가 신의 정신 속에 있다면 인간이 그 보편자를 사유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신의 사유를 분유(分有)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컴은 스코투스처럼 신의 이데아론을 거부하고, 신에게 있어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신의 이성 속에 있는 보편자를 부정하고, 보편자는 인간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실재론자들은 보편 개념이 개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실제를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보편자를 사유함으로써 경험의 영역을 초월한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고 확신했습니다. 더불어 보편자가 신의 정신 내에 있는 보편자로 본다면 신학적 진리에도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자연 신학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보편자 문제에서 엄격한 태도를 취한 오컴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철학에서 분리되고 철학은 과학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신학과 종교적 진리는 철학 또는 과학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컴은 이중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아, 과학이나 철학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과 계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이성의 문제, 후자는 신앙의 문제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분리는 대단히 엄격해서 신학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는 서로 독립적이고 상호 추론이 불가능하여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4. 신비주의
아퀴나스의 이성 우위에 대해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로서 감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자로서 에크하르트는 신의 본질과 창조에 대한 설명은 감각 지식을 초월한 데서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과의 합일 상태를 설명하며 인간의 노력으로서 이를 이룰 수 없고 세계의 모든 대상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합일은 신의 은총과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영혼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심연 속에서 신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신의 합일은 신비적이며 이성을 초월한 경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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