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도/기 도

리차드 포스터의 기도(3)/ C.밖으로 향하는 기도

미션(cmc) 2010. 1. 25. 09:28

   C.밖으로 향하는 기도
                      (필요한 사역을 구하는 기도)
           
15.일상적인 기도
  (1)일상적 기도의 방법
     첫째,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들을 기도로 바꾸는 것, 둘째,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셋째,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을 하면서 내내 기도하는 것이다.

  (2)일상적인 것의 신성함

  (3)일상생활 속에 계시는 하나님

  (4)행동으로 하는 기도
     기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삶이 동반될 때뿐이다.

  (5)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
     일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생활 중에 겪는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기도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도 일상적인 시간에 속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이며, 그러할 때의 기도는 말로 할 수 있는 기도보다 훨씬 더 나은 기도이다.

  (6)거룩함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정에서 생겨나는 기도가 아마 ‘일상적인 기도’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일 것이다. 가정에 기도처를 만들 수 있다.


16.간구기도
  (1)간구 기도와 중보기도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간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중보라고 한다. 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경험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우리가 무엇인가 구하는 기도는 더 유치하고 미숙한 형태의 기도인 반면, 찬양과 묵상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고상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영성에서 나왔다.  간구는 낮은 수준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식이다.

  (2)간구 기도의 두 가지 문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행위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포어시드에 의하면 ‘사랑은 이미 알고 잇는 것이라도 들어 보기를 좋아한다. 또한 사랑은 주고자 하는 것도 요청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뒤로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겸손이다.

  (3)응답없는 기도의 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사를 보류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사실상 응답되는 때가 많이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더 깊은 의도를 이해하시고 우리의 보다 큰 필요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특정한 관심사를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간구 기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 집중되기 때문에 결코 제삼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죄가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그 본질상 하나님과의 우리를 분리시키며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까지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4)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진실로 포괄적인 기도이다.
    *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것은 우리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간구해야 함을 말한다.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주의 한복판에는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원과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망이 놓여있다. 우리가 용서 할 수 있는 것도 단지 골고다의 숭고한 용서가 있었기 때문임을 명심하자 왜냐면, 바로 그것이 보복의 악순환을 단번에, 완전히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이 나이다 오히려 기억하기는 하되 옹서한 후에 더 이상 그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기적으로써 용서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분열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용서는 실제적인 상대방의 큰 잘못이 우리를 분열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사랑의 힘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과실의 힘보다 큰 것을 의미한다. (마6:14)
   * 구원해 주옵소서
     이 뜻은 ‘주님, 제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드러내시고 주님께서 저를 시험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제 속에 없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뜻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권력과 영향력에 의해 유혹을 받고, 또 하나님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로 인해 시험을 받는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원문에 보면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총체적인 의미의 악이 아니라 악한 자, 곧 사탄에게서 구원받기를 기도하라고 강권하고 계신다.  허버트 파머(Herbert Farmer) 교수는 , 만일 기도가 신앙의 핵심이라면 간구는 기도의 핵심이다. 라고 한다.

17.중보기도
   중보기도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 자신을 내어 주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중보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중보기도는 제사장적인 사역인데 신약이 가장 도전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만인 제사장직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요, 귀중한 특권이다.
  (1)중보기도의 좋은 모범
     포어시드(P.T.Forsyth)는 “우리가 결단의 골짜기에 더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기도의 산으로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하며, 하나님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주 관심사인 사람들의 두 손을 떠 받쳐 주어야만 한다.

  (2)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미약한 중보 기도는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에 의해 뒷받침되고 힘을 공급받는다.

  (3)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유일하신 계시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서 끊임없이 통치하심으로써 성취하신 위대한 사역을 온전히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본성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내용과 성격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4)끈질긴 기도가 승리한다.

  (5)집단적인 중보기도

  (6)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중보 사역을 담당하는 방법은, 어떤 사람들을 규칙적으로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기 원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두므로 , 또한 원수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함으로 할 수 있다. 필자의 방법은 가족을 위해 기도한 후에 나의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나 개인이 저절로 머리에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중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치유의 기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은 전인격적인 것으로 인격의 모든 면, 즉 육신과 혼과 의지와 마음과 감정 및 영까지도 포함된다.
치유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의학적인 수단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믿음의 태도일 수도 있으나, 영적 교만의 모습이 되기가 더 쉽다.
일반적으로 기도의 도움과 의학의 도움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고, 우리는 거기에 똑같은 강도로 의지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1)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2)당혹스러운 질문
     기도를 받는 사람이 모두 다 치유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치유의 기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다 알지 못한다. 때로 우리는 문제를 잘못 진단하는 수도 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치유인데 신체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 예다. 치유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죄 때문이라든지, 믿음이 없어서라든지 라고 말하지는 말자. 오히려  기도하는 우리의 믿음의 결여나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역사가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안수는 믿음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근거가 확실한 사역이다. 안수 그 자체로는 병자들을 고치지 못한다. 병자들을 고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안수는 우리의 믿음을 촉진시키고 하나님께 치유의 기회를 드리는 순종의 행위일 뿐이다. 바울은 분별없이 안수하는 일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 (딤전5:22)
  (3)네 가지 단계
     치유의 기도에 대한 접근 방법
첫째, 들어야 한다. 이것은 분별의 단계이다.
둘째, 구해야 한다. 이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셋째, 믿어야 한다. 이것은 확신의 단계이다. 즉 전인격적으로 믿는다.
넷째,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감사의 단계이다.



19.고난의 기도
    기도의 형태 중에 전적으로 다른 사람 중심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난의 기도이다.  눅 23:34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사죄의 말씀을 하셨을 때보다 구속을 위한 이 고난의 사랑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치료하는 고난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은혜와 고난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속적인 고난을 통해 다른  이들의 죄와 슬픔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함으로써 변화된다.

  (1)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의 기도의 가치는 무한하다. 우선 그것은 어떤 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피상적인 신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또 하나의 가치는 고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민감해진다는 것이다.

  (2)어떻게 해야 하나?
     이 세상에는  고난이 잇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의 문제, 즉 이 세상에 있는 고난을 어떻게 하면 구속과 치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모세의 본을 따라야 한다. 다니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다니엘은 그가 자기만 안전하고 의로운 위치에 따로 덜어져 서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백성들의 죄와자신을 밀접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셉과 스데반, 마리아, 등 성경은 히11:38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난은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하여 그들의 죄와 슬픔을 의식적으로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다.

소극적 측면에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많은 시련들이 포함된다. 이럴 때 우리는 끈기 있게 견뎌 내야만하며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한다.
고난의 기도야말로 능력을 배양시킨다.
고난의 적극적 측면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그들의 슬픔과 애통을 자발적으로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포함된다.

  (3)다른 사람을 대신해 드리는 회개
     고난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회개하는 은혜를 받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 특히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자유케 하며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할 때 더욱 그러하다.

  (4)하나님과의 씨름
     하나님도 자신의 거룩함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과 씨름하신다. 죄를 참으실 수 없으시며 다른 한편으로 죄악된 인류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가장 깊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 때문에 가장 열정적으로 논쟁한다. 투쟁은 사랑과 병행한다. 투쟁이야말로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금식은 바로 상처받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서 싸우는 우리의 투쟁을 그 어떠한 것도 멈출수 없다는 징표이다.
필자는 우리의 금식을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무게를 지니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5)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그의 교회 안에 거하신다.



20.권세 있는 기도
    권세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어떤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여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1)과감한 시도
     고통을 향해 과감하게 명하라.

  (2)권세와 동정심
     이 기도는 오늘날 너무나 남용되고 오용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는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동정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잘못 연결시킬 때에 종종 권세 있는 기도가 지나치게 도를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권세와동정심이 상호 배타적인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두 가지가 아름답게 조화되었다. 권세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동정심이 필요하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권세를 행하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3)분별력과 신중함의 보조 레일
     권세의 기도를 바르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의 은사와 신중함이라는 기본 덕목이 있어야 한다. 분별력은 성령의초자연적인 은사이며 신중함은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중심 덕목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분별력은 실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행하여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다.
루이스(C.S Lewis)는 ‘신중함이란 실제적인 상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그 일의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일부러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중함이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부족한 덕목이다. 어떤 이들은 일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권세를 깨닫게 되면 모든 좋은 지각과 좋은 예절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들을 그 모든 것이 가장 불친절하고 가장 파괴적인 방법으로 일어나도록 명령하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바르게 행동하셨다. 그의 가르침도 일상적이며 ‘평이하고 실제적인 상식’으로 가득차 있다.

  (4)바람아, 파도야, 잠잠하라.
     우리는 옳고 유익할 경우 권세 있는 말도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명령하는 기도이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 예수님은 명령의 기도를 직접 시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권세를 위임하셨다. 칠십인을 보내실 때에도 똑같은 사명을 부여하셨다.

  (5)우리의 인도자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도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6)상식적인 조언
     첫째, 모든 고통이 악마의 공격은 아니다.
둘째,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특별한 목소리를 흉내낸다든가 어떤 기괴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우리에겐 의지할 만한  특별한 자원이 있다. 특정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다.
넷째,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확고하게 다루되 그 개인에 대하여는 언제나 유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다섯째, 권세 있는 기도는 훈련된 생활 습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경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영적 생활의 정상적인 훈련이 포함된 전반적인 생활 방식 속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일이다.
여섯째, 이 일을 수행할 때 다른 사람들과 연합해서 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독한 엘리야나 세례요한을 원하실 수도 잇지만 더 흔한 방식은 책임과 지원이 뒤따르는 공동체 속에 우리를 연합시키시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영적인 겸손함 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7)하늘에서 땅으로
     일반적으로 기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권세 있는 기도는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권세 있는 기도는 특별한 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의 자원을 가져 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아래로 향하는 기도이다.
엡1:20-22에서 바울의 의도는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세 있는 자리에 앉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역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하는 영적 전쟁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자원에 대한 바울의 그 유명한 묘사에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즉 하늘에서의 권세 있는 지위(엡1장)가 우리에게 그와 똑같은 지위를 주며(엡2장),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주권과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어린양의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엡6장)우리가 권세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늘의 권세 있는 지위에서 비롯된다.

  (8)어린양의 전쟁을 수행하라
     권세 있는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수단으로서 주로 지금 현존하는 어두움의주관자들과 권세들에 대항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권세 있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어둠의 나라와 싸우는 성령의 전쟁에 참여한다. 은밀한 기도의방은 피흘리는 전쟁터이다. 바로 여기서 격렬하고 결정적인 전투가 수행된다.
그러나 음부의 문이 교회의 맹공격을 견뎌 낼수 없다. 우리가 완전 무장을 갖출 때 어둠의나라가 완전히 물러가게 된다. (엡6:13-18)

  (9)우리의 권세를 사용하라
     영적 전쟁은 이야기의대상이 아니라 실제 행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까?
먼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파괴적인 맹세를 깨뜨림으로써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질병과 실패와 죽음을 자청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죄한다.  우리는 그 저주를 깨뜨리는 권세 있는 말을 해야 한다. 그 일은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질병을 다스림으로써 가능하다. 질병은 하나의 적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즉 권능의 사역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삶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그것을 다스릴 권세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적 전쟁은 모든 사회악과 제도적인 불의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빈곤을 보장하는 제도적인 구조에 대해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도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부당한 법에 대해서 항거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값없이 하는 것들이다.



21.철저한 기도
  (1)말씀 선지자
     신학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선지자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을 알려주는 풍부한 전례가 있다.
이 선지자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들은 모든 계층, 모든 범주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육을 받은 자 그렇지 못한 자, 교단출신일 수도 교단 밖의 사람일수도‘ 여자일수도, 남지일 수도 , 심지어 어린아이일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종교계에서조차중요하지도 않고 관련성도 없다 그들에게 영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향력 있는 자리가 중요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도력 밑에,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한번 모이고 있다. 조직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또 그 지도자들은 손으로 깨뜨리지 아니한 돌이 이 세상 나라를 부숴 뜨리고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많나 큰 산이 되는 것을 본 사람들이다. (단2장)
그들은 또한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들이다. 그 미래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미래를 말한다.
선지자적 메신저도 중요하지만 선지자적 메시지가 더욱 중요하다. 선지자적 메시지는 철저한 생활 방식과 철저한 기도 방법을 마음속에 그려준다.

  (2)영적 저항
     참된 선지자적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를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한 영적 저항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영적 지하 저항 운동이다. 불의와 압제와 폭력의 세계에서 볼때 우리는 위험 분자들이다.  우리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언제나 그들의 입장을 하늘 보좌에 탄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요구해야 하며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장해야 한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 “성경적인 기도는 뻔뻔스럽고, 굽힐 줄 모르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정중한 독백이라기보다는 야외에서 열리는 바자회에서 끈질기게 값을 깎는 흥정과 더 흡사하다.” 우리의 영적 저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시는 것도 포함된다. 영적 저항은 필연적으로 모든 불의와 압력에 대한 단호하고도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게 한다. 우리의 저항의 무기를 보면, 우리가 권력과 효율과 통제에 기초한 세상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며,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불의와 협력하기를 거부한다. 놀라운 것은, 이 무기들은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리며 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만큼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3)사회적 성결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단지 질병만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방치하곤 했던 사회 속의 질병까지 고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삶을 통해 우리는 모든 장벽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4)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진정한 선지자적 메시지는 늘 우리에게 두 팔을 넓게 벌려 전 세계를 가슴에 품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가지고 온 세상을 뒤덮어야 한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며 숭고한 사명이다. 우리는 개개인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열방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교회의 갱신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힘써 일해야 한다. 세상의 죄악들에 대해기도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케 하는 생명의 메시지를 가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나가라고 요청하시는 참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한편으로 담대한 믿음과, 다른 한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5)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적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초청한다. 그리스도인의 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흩어진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제도적인 공동체, 공동생활 공동체, 개인적 영적 후원공동체, 소그룹 영적 성장 공동체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중의 하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여러 면에서 상호보완적인 것이될 것이다.
공동생활이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요한 문제들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차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 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다른 모델은 소그룹 영적 성장 공동체이다. 이것은 양육과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접근 방법이다.

  (6)최고의 법
     아가페만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를 지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지적 메시지는 늘 우리를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초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두 계명은 이음매가 없는 한 벌의 옷이다. 진정한 영적 사랑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사랑이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 준다.

  (7)참되고 온전한 기도는 ‘사랑’그것뿐
     성 어거스틴은‘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