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럼

신앙의 열매가 잘 맺기를 원한다면

미션(cmc) 2010. 2. 1. 18:08

신앙의 열매가 잘 맺기를 원한다면

다시 한번 인생으로 산다해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오해 가운데 가장 큰 문제 하나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란 우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열매’는 맨 처음에 뿌려진 ‘씨’를 말한다. 콩의 열매는 콩이고 팥의 열매는 팥으로 계속 ‘열매’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열매’ 자신은 스스로의 삶을 살았을 뿐인데 어느 날 보니 ‘열매’가 맺혀 있더라는 고백이 나와야 진짜 ‘열매’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콩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열릴 뿐이다. 더 이상 달라진 것이 없는데 더 이상 달라지기를 원하고 있는 신앙인들의 ‘열매’가 거창하기를 원하는가?

 

   ‘열매’가 종류가 달라졌거나 금을 입고 나오거나 보석으로 치장을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다만 한 ‘열매’가 열심히 자신의 사명을 다해 수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뿐이다.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데 달라진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한 것이나 애쓴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신앙의 ‘열매’는 달라지기를 원하며 변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마 3:8이나 눅 3:8에 나오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화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다보면 반드시 맺힐 수밖에 없는 ‘열매’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다. 회개가 무엇일까라는 의미를 몰라서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 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자신의 죄를 기억해서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것일까?

 

    회개가 그런 의미라면 아예 하지를 말라. 자신이 현실 속에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이다. 나의 장점이나 잘난 점, 좋은 점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단점이나 약점, 못난 점, 나쁜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의 위선과 왜곡의 가면을 벗어버리며 나의 교묘한 이중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나의 내면 속에 숨겨진 비밀을 들쳐 내어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여 원래의 나를 찾는 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가 지은 죄를 털어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교회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정도가 아니라 일어날 수 없을 정도 부끄러워 엎드려 있어야 한다.

 

    뭘 잘했다고 일어나 변명이나 핑계를 대려고 하는지 “처분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까지 할 수 없는 정도로 잘못했는데 어디다 고개를 들려고....... 괴상망측하게 변해버린 내 몰골을 쥐구멍에라도 쳐 박아 다시는 보여줄 수 없는 나의 형상을 그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야수처럼 변해버린 내 얼굴을 잘라버리고 다른 얼굴로 바꿔지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원래 나의 얼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본래의 얼굴을 찾지 않고 아직도 옛 사람의 가면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일 날 예배드릴 때만, 아니면 밥 먹을 때 기도할 때만 벗고 얼른 다시 뒤집어쓰는 원인이 무엇일까?

 

   나 자신이 성결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며 율법을 지켜보겠다고 애쓰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결코 아니다. 주일성수하는 것이나 헌금을 잘 내고 교회봉사 헌신 충성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매’가 맺어져 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아주 미미한 ‘열매’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열매’가 무엇인가? 거대하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것이 아니며 교인 수가 많아져 급성장한 것이 ‘열매’가 아님을 왜 모르는가? 사단 마귀의 전략 속에 넘어가는 속물이 되지 마라. 교인의 생활이나 사업이 잘 되는 것의 ‘열매’에도 속아 넘어 가지마라. 그것을 ‘열매’의 기준으로 잣대로 삼지마라.

 

    콩의 열매가 팥의 열매로 뒤바뀌는 것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육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바뀌는 개념으로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이다. 변형되었던 씨가 본래의 씨앗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면 신앙인의 ‘열매’는 본래 창세전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존재인 사람으로 가는 것이다.

 

    짐승의 속성인 야수에서 진정한 인간의 본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죄를 기억해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 본연의 존재로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나무에 올라가 나와 함께 죽어주신 것을 믿는 순간,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죽어주실 뿐만 아니라 삼일동안 무덤에서 함께 장사지내시며 함께 부활하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신 것, 즉 그 분과 함께 연합하여 한 몸으로 이루어진 것을 믿어지는 순간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복잡하며 어렵게 교회생활(신앙생활로 표현하면 안 됨)을 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을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교회에 출석하여 어느 소속 교단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교회의 일원으로 직분을 얻어 핵심멤버로 충성 봉사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니다. 교회의 기여도에 따라 ‘열매’의 측정의 대상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목사나 선교사로, 장로나 권사로, 집사나 교사로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이 전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의 ‘열매’를 잘 맺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육신을 좇아 사는 삶에서 성령을 좇아 사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3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사건이다. 계속 반복되어져야 하며 그렇게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주변의 모든 환경은 우리를 육신 세계에 가두어 놓고 육신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전부인양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다. 공허와 혼돈과 흑암의 세계에서 빛으로 존재해야 하고 소금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열매’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열매’를 추구하고 거기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자 노력하더라도 온전히 선할 수 없고 아무리 악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결국은 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 항복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그처럼 악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인 양 강조하고 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이처럼 악에 대항하는 자의 삶에서 오히려 악을 보고도 지나쳐버리는 자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39에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악한 자는 대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다. 뺏고자 하는 자에게는 줌으로서 이기고, 뺏길 것이 나에게 없음으로 이기는 승리의 본질을 찾아라.

 

    ‘열매’라는 그 자체가 좋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맺은 ‘열매’를 좋아하시기 보다는 그렇게 ‘열매’로 맺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우리를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이런 열매로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며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되게 함을 왜 모르는가?

 

    그런 ‘열매’는 교회생활에 의한 ‘열매’이지 신앙생활의 ‘열매’가 전혀 아니다. 종교로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한다면 그 ‘열매’는 병이 들어 변질이 되거나 변형이 되어 ‘열매’로서 가치가 없어 버려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매’에다 인간의 방법으로 농약을 치거나 인위적인 비료를 주지마라.

 

   하나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 성경에 없는 방법을 취하여 ‘열매’에다 이상한 것을 주입시키지 마라. 개념도 모르면서 성경을 암송하거나 의미도 모르면서 각종 종교 행위,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라는 생각마저도 쥐약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부화하는 과정에서 껍데기 깨고 나오는 데 도와주겠다며 껍데기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제거해 주는 행위가 바로 이와 같다.

 

   부활의 ‘열매’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으로 맺어야 할 ‘열매’인 것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는 ‘열매’는 커지는 것도 아니며 달라지는 것이다. 부활의 ‘열매’ 그대로를 다른 사람에게 전했는데 받아들일 때 그 ‘열매’가 탄생하는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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