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칼과 칼집/한 홍 지음

미션(cmc) 2010. 6. 19. 09:11

칼과 칼집/한 홍

 

 

칼과 칼집

한 홍 지음

두란노/2002년 6월/247쪽/8,500원

▣ 저 자 한 홍

UC 버클리에서 유럽과 미국 현대 외교사를 전공하고, 위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미국 교회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4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1.5세로서 진정한 글로벌 리더십의 길을 제시하려는 비전을 품고 있다. 현재 온누리교회 부목사이며 두란노 바이블칼리지 학장이다.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강의를 주최하고 있으며, 상당수 불신자들이 섞여 있는 교회 밖 사회 지도자 모임에서 리더십 특강을 계속하고 있다.

▣ Short Summary

한홍 목사가 쓴 전 방향 리더십론으로 『거인들의 발자국』에 이은 한 목사의 시대와 인물을 관통하는 리더십 이야기이다. 이 책을 통해 목회자 리더십을 말하고 있으며, 현대의 폭넓은 역사와 문화에서 길어낸 리더십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21세기 영적 리더십은 단편적인 지식이나 기술, 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영성이 통합된 전방향 리더십이다. 저자는 이것을 ‘칼’과 ‘칼집’이라는 은유적 장치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21세기 리더는 예리한 실력은 물론, 균형 잡힌 깊은 영성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리더십 파워에서 리더십 아킬레스건까지 리더가 알아야 할 영적 감식력과 묵상의 발자취. 제2의 거인(巨人)들의 발자국을 만날 것이다.

▣ 차 례

리더십 파워

리더십 센스

리더십 네트워크

리더십 업그레이드

리더십 아킬레스건

리더십 묵상

에필로그 리더십의 정점, 사랑

칼과 칼집

한 홍 지음

두란노/2002년 6월/247쪽/8,500원

리더십 파워

리더십은 힘(power)도 지위(status)도 아니다. 또한 리더십은 꼭 전문가(specialist)라고 할 수도 없다. 물론 한 우물을 파서 그 분야의 대가가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리더십은 오케스트라 전체의 하모니를 이끌어 내는 심포니의 지휘력을 요구한다. 또한 엘리트(elite)도 꼭 리더라고 볼 수는 없다. 엘리트는 자신이 성공하는 사람이지만 리더는 남을 성공시켜 주는 코치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리더십의 기준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 사람이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왔느냐로 판단하는 것이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로 썩음으로써 다음 세대가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 리더가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길이 아니라 끝없이 자기를 포기하는 형극의 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리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인스턴트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는 리더도 라면처럼 급조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의 생각으로 급조하면 사울 왕 같은 비참한 지도자가 나온다. 진 에드워드는 『세 왕 이야기』라는 책에서 사울과 다윗은 처음 시작할 때는 둘 다 능력도 비슷했고 겸손하게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둘의 차이는 오직 하나, 사울은 광야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급조된 리더였기 때문에 그의 지위가 그를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다윗은 태양 같이 젊은 20대를 광야에서 사울의 광기에 찬 추적을 피해 도망다니며 보냈다. 광야를 통해 하나님은 다윗 속에 자리하고 있던 제2의 사울을 죽여 버리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다윗을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영성과 인격을 깊게 하는 리더십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놓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Leadership Interview

목회와 신학 : 이번에 진행된 리더십 세미나 중에 ‘칼과 칼집’이라는 제목의 강의가 있었는데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재미있는 은유라고 생각되는데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 홍 :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아이작 스톤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겪었던 일화 한 가지를 기억합니다. 중국에는 전국에서 뽑아낸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만든 국립관현악단이 있어요. 10억 인구 중에서 뽑아냈으니 얼마나 잘하겠어요? 게다가 전체주의 특유의 스파르타 교육으로 훈련시킨 덕분에 10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이 차이코프스키의 어려운 곡들도 굉장히 잘 연주했어요. 연주가 끝난 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책임자가 아이작 스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작 스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기교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놀랐고, 그러면서도 이토록 영혼이 없는 음악은 처음입니다."

스파르타 식 훈련으로 기교는 익힐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교는 어느 정도 훈련하면 다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경험과 철학과 문학 등 인생에서 깊이 녹여낸 영혼의 힘을 통해서야 비로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깊이는 단시일 내에 급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칼’은 콘텐츠나 지식, 노하우에 비유한다면 ‘칼집’이란 그 칼을 제대로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좋은 칼일수록 칼집도 좋습니다. 칼집이 없는 칼은 아무 곳이나 찌르고 마구 베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좋은 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잘 작동되듯이 칼집이라는 것은 칼을 때맞게 휘두를 수 있는 ‘자기 절제’ 혹은 ‘제어장치’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좋은 리더로는 영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경우 공생애 이전의 30년을 칼이 칼집에 꽂혀 있는 기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모세도 이집트에서 40년 동안 왕자로서 수업을 받았지만 이후에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는데 세상적인 교육으로부터 단절된 이 광야 기간이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깨워 칼집을 만드신 그런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목회와 신학 : 경영 마인드를 도입한다든가 하는 식의 패러다임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적 시각을 갖는 목회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홍 : 상당히 편협한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경영이라는 말은 청지기 개념인데 성경에 나오는 단어거든요. 세계 최초로 국가가 관리하는 경제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 창세기의 요셉 아닙니까? 당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원시 경제체제에서 7년 동안이나 곡식 일부를 저장했다가 흉년에 국가가 방출하는 경영을 했지요. 요셉이 행했던 국민을 살리는 지혜, 이것이 바로 경영이거든요. 잠언에서도 보면 경영 마인드가 없으면 집안이 망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나는 이런 경영 마인드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교회가 망각하고 있었던 성경의 진리를 뜻밖에 비즈니스 기업들이 현실에서 발견한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인데요. 어떤 분들은 과학과 신앙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것도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16세기 부흥 운동의 아버지 조나단 에드워드는 거미에 대한 논문도 쓰고 탁월한 지질학 서적들을 읽으면서 과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케 된다고 그랬거든요. 나도 경영자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이들이 인간의 한계를 알고 성경의 법칙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가령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제임스 콜린스의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에 나오는 얘기를 하나 소개하죠. 머크(Merck)라는 제약회사가 전후 일본에 만연했던 결핵의 특효약으로 스트랩토마이신을 개발했는데 정작 소비자인 일본인들은 패전으로 빈털터리였거든요. 미국 국방성에서도, 적십자에서도 사 주지 않으니까 잔뜩 만들어 놓고 회사만 적자나게 생겼단 말이에요. 이때 머크 사는 커다란 결정을 내립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돈도 안 받고 일본에다가 그걸 다 공급해 준 것입니다. 지금 머크 사의 해외 지사 중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 일본이거든요.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어려웠을 때 머크 사가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거죠.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많아요. 몇십 년이 넘도록 세계적인 신뢰를 얻으며 성장한 세계 유명 기업들은 돈보다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추구했습니다.

성경의 레위기에 보면 추수할 때 이삭을 흘려서 가난한 사람들도 먹게 하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은 항상 건강하게 일해서 돈을 벌고, 또 돈을 잘 관리해서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경영을 말씀하십니다. 탁월한 경영 마인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로운 것이지요. 오히려 우리가 은혜라는 이름을 빌어서 무식한 경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성경에 있는 경영 개념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서 이들이 건강한 직업정신을 가지고 건강한 경제 협력을 이루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봅니다.

리더십 센스

영향력 있는 리더가 되려면 칼과 칼집의 두 축을 갖춰야 한다. 칼은 콘텐츠, 즉 내용이다. 그것은 내가 축적한 지식이며, 연마한 실력이며, 경험을 통해 쌓아올린 노하우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목표를 갖고 있어도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칼이다. 그러나 명검일수록 칼집이 좋다. 칼을 실력이라고 할 때 칼집은 겸손이며, 인내이며, 침묵이요, 자기 절제고, 부드러움이다. 대가일수록 움직임이 부드럽다. 프로 골퍼들의 스윙이나 일류 축구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라. 춤을 추듯 부드러운데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이 뿜어 나온다.

사람에게는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 외에도 육감(Sixth Sense)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리더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리더십 센스가 있어서 탁월한 리더와 그렇지 못한 리더의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리더십 센스란 대체 무엇인가? 첫째, 리더십 센스는 자기 사람들에 대한 섬세한 배려이다. 원숙한 리더는 자기 사람들의 표현치 못하는 아픔까지도 감지하는 센스를 가지고 있다. 둘째, 리더십 센스는 판단력이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제때 제때 잘 판단한다. 셋째, 리더십 센스란 때에 맞는 은총을 베풀어 줄 수 있는 호쾌함이다.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아시시의 프랜시스는 제자들과 함께 몇 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배가 고팠던 제자가 길을 가다가 맛있어 보이는 죽을 파는 것을 보고 거의 발작적으로 달려들어 그 죽을 먹어 버렸다. 순간 다른 모든 제자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 이 제자에게 쏟아졌고, 가엾은 그는 이제 자신이 파문당할 것을 각오한듯 고개를 축 떨구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토록 존경하던 프랜시스가 주저없이 자기도 죽 한 그릇을 들어 맛있게 먹고 난 뒤 놀라 입을 못 다물고 있는 다른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아, 실은 나도 너무 배가 고팠다. 우리 금식기도는 오늘로 끝내자.” 감동적인 리더십 센스다.

넷째, 리더십 센스는 자신과 자신이 이끌고 있는 단체를 평가하는 능력이다. 스스로 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약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지속적으로 건강한 평가를 하지 않는 사회는 학연, 지연으로 사람을 배치하는 현상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 리더십 센스는 계절의 흐름을 아는 리듬 감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 춘하추동의 계절이 있듯 한 인간이나 단체의 삶에도 어쩔 수 없는 계절의 흐름이 있다. 불같은 웅변을 쏟아내야 할 때가 있지만 태산같이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허리가 휘도록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지만 곡식이 무르익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영성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리듬에 자신의 인생을 맞춰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리더십 센스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물론 체질 속에 타고난 리더십의 감각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완숙한 리더십 센스가 영글지는 않는다. 타고난 어느 정도의 자질 위에 리더십 센스를 만드는 요소가 몇 가지 더 있다. 그 첫 번째는 아마도 자신의 경험이요, 두 번째는 자신이 축적한 지식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리더십 역량을 오히려 제한하는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유념하자.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편협성이다. “한 권의 책밖에 읽지 않은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배운 것, 자기가 익숙한 것만을 절대화하는 사람이 단체의 장이 되면 그 단체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당신의 경험과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그것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만 상주하면 그것은 오히려 당신을 가둬 버리는 우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경 시편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한 자의 지혜는 경험 많은 노인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인생을 많이 산 경험보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늘로부터 온 깨달음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리듬에 활짝 열리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다른 지혜로운 리더들과 교제하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 누가 완제품 리더십 센스를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다 만들어져 가고 있는 미완성 교향곡일 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리더십 센스일 것이다.

리더십 네트워크

2000년 서울에서 열렸던 아셈(ASEM) 정상회의 프레스 포럼 기조 연설에서 태국의 언론인 카비 총키다보른이 아시아가 유럽에서 배워야 할 점을 주장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나라들은 각국 국민들로 하여금 “나는 유럽 시민이며 유럽인의 사고방식에 따른다”는 생각을 갖도록 엄청나게 많은 공을 들인 데 반해서 아시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지난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아시아 나라들은 나름껏 훌륭히 극복하긴 했으나 국가 간 협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서운 경제위기를 뚫고 나왔다. 이에 비해 지난 50여 년 간 유럽의 통합 작업을 진행해 온 유럽인들은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도 하나의 여권으로 통과가 가능하고 유럽인으로서 자부심도 대단하다. 또 유럽연합(EU)의 이익을 위해선 개별 국가의 주권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

물론 유럽도 처음부터 이런 끈끈한 연합 체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의 열강들은 서로 물고 뜯는 무서운 전쟁을 거듭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서운 전화(戰火)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러다간 유럽 대륙이 망해 버리겠다는 절박감이 그들로 하여금 ‘유럽공동체’라는 비전을 붙잡게 했던 것이다. 서로가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강력한 네트워킹을 형성해야 다 함께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협력이 더 이상 옵션이 아님을 절감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리더십에게 이런 위기감이 필요하다. 리더에겐 진정한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하다.

2천년 전 초대 교회는 결코 작은 조직이 아니었다. 몇 달 만에 몇 만 명으로 불어나는 대형 교회였다. 그 성장이 그토록 빠르고 탄탄했던 이유는 작은 오이코스(oikos, 가정교회)들이 제각기 최대한 특성을 살리며 교류하는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공동체로 팀을 이뤄 살며 일하기를 원하셨다. 획일화하는 팀워크가 아닌 각 개인의 다양성을 장려하고 품으면서도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팀 말이다. 팀워크가 모든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 실리콘 밸리의 전설적인 투자가로 불리는 존 듀어(John Doerr : 로터스, 컴팩, 넷스케이프 같은 기업들이 그의 지원으로 태동했다)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 세상엔 기술이나 기업정신, 자본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훌륭한 팀은 정말 찾기 어렵다.” 듀어는 매년 제2의 빌 게이츠를 꿈꾸는 수많은 벤처 기업가들의 투자 지원 요청을 받는다. 보통 2,500개 회사들이 지원 요청을 하는데 그 중 실제 투자하게 되는 회사는 25개 미만이라고 하니 선택될 확률은 100분의 1인 셈이다. 그렇다면 듀어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투자 대상을 골라낼까? “내게 투자 요청을 해 오는 회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기술과 상품, 서비스를 선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보는 것은 그들 자신에 관한 것들입니다. 회사 핵심을 이루고 있는 팀 구성원들의 실력과 인격, 그리고 그들이 과연 함께 팀워크를 잘 맞출 수 있는가를 봅니다.”

리더십 토크(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와 특별 대담)

한 홍 : 목사님이 안식년이었을 때 다른 교회와는 달리 부목사들에게 강단을 주시고, 목회의 많은 부분을 부목사와 장로들에게 파격적으로 위임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위임형 스타일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지요?

하용조 : 나 혼자 하면 하나밖에 못하는데 일을 나누어 주니까 30배, 60배, 100배로 확산되더군요. 그래서 나는 성경에서 나오는 30배, 60배, 100배가 바로 이런 원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사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없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스태프들을 보니까 아주 좋은 은사들이, 아주 기막힌 달란트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못하는 것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남이 잘하는 것을 이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팀워크를 만들면서 ‘이처럼 좋은 게 어디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됐죠.

한 홍 : 팀워크가 원활하게 되기 위해서 어떤 요소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하용조 : 나는 기본적인 원칙이 몇 가지 있어요. 첫째는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단점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내가 일하는 것은 그의 장점을 사는 것이지 단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요. 일단은 내가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살리고 이용하는 거죠. 두 번째는 함께 일할 때 목표가 같아야 같이 일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비전을 제시하고 목표를 아주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 홍 : 요즘 대형 교회에 대한 비판론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온누리교회도 열두 가정으로 시작했지만 급성장해서 어쨌든 대형 교회가 되었거든요. 대형 교회가 된 온누리교회는 어떻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용조 : 처음부터 대형 교회를 해 본 사람이 없어요. 작은 교회 하고 싶다고 작은 교회 하고, 큰 교회 하고 싶다고 큰 교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조직이 크냐, 작으냐의 접근은 좀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 자꾸 외형적인 문제로, 형식 논리로 문제의 본질을 피해 가기 때문에 항상 문제는 그대로 있거든요. 싸우는 집안은 백 명도 만 명처럼 느끼고요, 안 싸우는 집안은 만 명이 모여도 백 명이 모인 것 같아요. 초대 교회도 대형 교회지만 부드럽게 움직였거든요. 그것이 성령의 리더십이에요. 사람이 많이 모일 형편이면 모이는 것이죠. 결국은 질의 문제예요. 양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내용의 목회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홍 : 국민일보와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온누리교회는 한국 신학생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교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요. 목사님은 사람을 뽑을 때 '이 사람은 이 정도면 됐다'하는 기준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하용조 :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역시 사람이 중요하죠. 내 경우에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순수한 영성과 감성입니다. 사람은 일단은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순수해야 합니다. 영혼이 맑아야 되죠. 무능한 것은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교활한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순수한 영성이고, 지성보다 중요한 것이 감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물론 능력만큼 충성도 중요할 수 있죠. 오래 일하는 것은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으로 일하는 것 같더라고요.

리더십 업그레이드

13세기만 해도 중국은 이슬람, 비잔틴, 인도 문명과 함께 유럽을 능가하는 제국이었다. 특히 13세기 말 중국 원나라를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당시 동양 문화의 탁월함에 혀를 내둘렀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은 14세기 유럽이 동양권을 비롯한 세계 문명과 맞서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음을 대견해 할 지경이었다. 이토록 대단했던 중국이 어떻게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전 세계를 무릎 꿇게 한 유럽에 뒤쳐지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그 중 지배적인 것이 바로 유럽의 혼란과 불안정한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처럼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황제가 없이 왕과 귀족과 도시들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싸우며 으르렁댔던 투쟁의 역사를 살았던 그들은 답답한 자신들의 세계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도 답답하고 힘든 현실이 한국인들의 탁월성을 오히려 더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도 눈을 들어 계속 세계를 보고 나가야 한다. 세계 곳곳에 분야별로 탁월한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어 공부하게 하여 마음껏 자신의 실력을 세계의 인재들과 겨루게 하고, 또 각국의 탁월한 인재들도 한국으로 불러들여서 우리의 실력을 더 한층 세계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기업도, 학교도, 정부도 이런 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큰 무대로 계속 뻗을 수 있는 호쾌한 도전정신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지탱해 주는 결정적인 힘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태계 이민자들임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우리 울타리 안에만 집착하는 것은 우리를 편협하게 하고 쇠퇴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건 지나치게 자기 분야에만 집착하면 그것이 오히려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약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뮤지션들은 자신의 악기 연습 외에도 각종 문학과 철학 서적을 읽어 자신의 정신세계를 깊고 넓게 해야 한다.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젊어서부터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나라와 외국의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독서를 하고, 땀 흘리며 일을 해 봄으로써 기본적인 경제 개념을 파악해 둬야 한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세상을 만든 중요한 철학들과 문학,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며, 예술과 체육 활동을 통해 감성과 육체의 건강을 도모해야 한다. 이러한 전 인격적인 리더십은 절대로 벼락치기식 스파르타 교육으로 급조할 수 없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독서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들과 관계 형성을 하면서 조금씩 영글어지는 것이다.

한편 사회나 기업,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창조적 파괴는 틀에 박힌 전통의 일류 엘리트 기관에서는 오히려 나오기가 어렵다. 자신의 전통성에 대한 지나친 자만 때문이다. 일류 엘리트 양성 기관들을 절대시하면 신선하고 탁월한 변방의 진주들을 간과하기 쉽다. 유럽이나 남미 축구의 골 결정력이 높은 이유도 어릴 때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조성과 돌연성을 쌓도록 축구를 장난처럼 즐기게 한 때문이라지 않는가? 리더들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 내에서 선입관을 깨고 바라보면 번뜩이는 변방의 인재들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의 작은 지방도시 베른의 시골 특허국에서 근무하던 직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원리를 제창함으로써 프레넬의 파동성을 비롯한 고전 물리학의 토대를 송두리째 붕괴시켰다. 당시 전통 과학 연구의 중심지에서 비켜 있었던 까닭에 일류 두뇌들이 당연시하던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전통적 명문의 인재들이 기존 패러다임의 틀에 갇혀 씨름하고 있을 때 이 무명의 인재는 문제의 근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직시, 이를 바탕으로 획기적인 논리를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은 건전한 노동으로 땀 흘려서 돈을 벌어 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유태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종교인보다 위대하다.”고 배운다. 그래서 바울도 천막을 깁는 일을 했고, 유태인 철학자 스피노자도 렌즈를 만들어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깨끗한 리더십의 기반은 건강한 직업 정신이다.

리더십 아킬레스건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를 파괴시킬 수 있는 일곱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노동 없는 부(富), 둘째 양심 없는 쾌락, 셋째 인격 없는 지식, 넷째 윤리 없는 비즈니스, 다섯째 인성 없는 과학, 여섯째 희생 없는 종교, 일곱째 신념 없는 정치.” 나의 은사이신 짐 브래들리 교수는 “학자는 자기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늘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알찬 내용이 없이 포장만 그럴 듯하게 과시하지 말라는 따끔한 일침이었다. 사랑하는 이 땅의 리더들이여! 진정 대권(大權)을 추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할 일이다.

교만이라는 동전을 뒤집으면 다른 면은 열등감이다. 내가 남보다 잘 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남보다 못하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자 앞에 고개 숙이기 싫어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길 꺼려하는지도 모른다. C. S. 루이스는 “교만한 자는 자기 밑을 보기에만 급급해서 자기 위에 계신 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쩌면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가 두려워 피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이 될 수 있음을 왜 모르는 것일까? 아테네는 무적이라고 자부했던 해전에서 졌고,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믿다가 무너져 버렸으며, 자동차 왕 헨리 포드도 모델 T만을 고집하다가 GM에게 자동차 업계의 패권을 뺏겨 버렸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오늘의 위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리더는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거기에 대해 솔직해야 한다.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냉철한 전략을 세운 뒤 인기가 없더라도 사람들에게 고통 분담을 끈질기게 요구해야 한다. 목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다. 아론은 모세가 시내산으로 십계를 받으러 올라간 사이 대중의 선동에 밀려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제대로 된 리더라면 대중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배고픈 오천 명의 군중들에게 빵을 주셨지만 자신을 왕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는 단호히 거부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져야 하는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졌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셨다. 진정한 리더십은 쇼맨십이 아니라 서번트십(servantship)이다.

“우리는 실패할 리 없다.”는 오만함 또한 리더십의 아킬레스건이다. 작은 구멍을 소홀히 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밀어 붙이기식으로 생각하는 집단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참사를 유발하는가는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가 직경 1.28인치밖에 안 되는 ‘오링(O-ring)’의 부품 결함으로 폭발한 사건 외에도 수많은 경우에서 보아왔다. 아가서에 보면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피땀 흘려 가꾼 포도원을 허무는 것은 작은 여우같은 실수요, 허점들이다.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신은 “3살짜리 어린아이와 마주 설 때도 몸조심을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반드시 그것이 가지는 어두운 면이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스스로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들이 바로 당신의 발목을 잡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다. 당신이 새로 시도하는 프로젝트가 많은 사람들을 살린다면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너무 뛰어난 사람은 본의 아니게 많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당신이 시도하는 모든 일이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당신의 아이디어가 모든 사람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은 아예 시작부터 접어 두라.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분명히 있는 이 리더십의 그림자를 부인하지 않고 솔직히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 묵상 속에 이 그림자가 누수 현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성령의 통제를 간구하는 것이다. 잠언의 명쾌한 충고처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아무 문제 없다.”는 가당찮은 객기보다 훨씬 더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리더십 묵상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일이다. 패자(覇者)로 대성한 제나라의 환공이 수훈 공신들인 관중, 포숙아, 영척을 불러 크게 잔치를 열었을 때 포숙아가 일어나 말했다. “아무쪼록 공께서는 내란이 일어났을 때 국외로 망명하시어 고생하던 때의 일을 잊지 마시고, 관중은 싸움에 져 노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기다리던 때를 잊지 말고, 영척은 가난할 때 수레 밑에서 여물을 먹이던 때를 잊지 마소서.”

성경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 부르짖을 때면 하나님이 꼭 그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기억하라."이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오는 것은,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첫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그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연인들은 처음 만나 서로 눈과 눈이 마주치며 가슴 두근거리던 때를 잊지 못한다. 하나님도 우리를 처음 만나 주셨을 때의 그 감동, 그 첫사랑의 자리를 잊지 않으시고, 세상 사는 데 시달려서 지치고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첫사랑의 자리로 초대해 주시는 것 같다. 아니, 우리가 너무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가니 인생의 폭풍을 허락하셔서 처음 사랑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2천년 전 베데스다 못 가. 38년 동안 하반신이 마비되어 누워 있던 남자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다.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묻고 계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축복의 전조와도 같은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명의(名醫)가 수술하면 뒤탈이 없듯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은 이 7천만 겨레를 철석같이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많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양보하고, 땀 흘리고, 용서해야 한다. 그럴지언정 하반신이 마비된 채로, 형제끼리 총을 겨눈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 않은가! 이제 어줍지 않은 정세 판단과 이해 타산 따지기는 접어두고, 이 답답한 역사의 봇물을 터뜨리려 하시는 전능자의 축복을 받아들이자. 지난 반 세기 동안 상처 입은 난쟁이처럼 움츠리고 살았던 이 나라는 그때야 비로소 오랜 잠에서 깨어난 거인(巨人)이 되어 기지개를 켤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국의 교회는 그 거인의 심장으로 박동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이 만든 ‘순수 민주주의’의 이상이 얼마나 많은 비극을 초래했는지를 보여 준다. 원래 민주주의 철학의 발상지는 인간을 신격화했던 헬라 문명의 중심지 아테네다. 이 어렵고 힘든 우리의 현실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하자. 다수의 민중은 사랑의 대상이고 섬김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은 대중을 사랑하고 분명히 이끌어 갈 사람이지 대중의 눈치를 살피며 순간의 인기에 연연하여 거룩한 신념을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편 우리의 리더십들은 너무나 쉽게 절대 언어를 써서 지킬 수 없는 맹세나 호언장담을 한다. “죽어도 그것만은 안 할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약속대로 죽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약속을 깨고 나서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늘로도 땅으로도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는 초인적이고 무적인 척하는 리더보다는 이제 신실하고 겸손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그런 리더를 선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기적이고 약한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담는 그릇이 된다. 한 마디 말에 천근의 무게를 담도록 하자.

그리고 진정 세계화된 나라의 국민이라면 그에 걸맞는 인격의 깊이와 생활의 품위를 갖춰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 11대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우리가 세계의 리더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린 아직 부끄럽게도 입양아 수출로 세계에서 톱 랭킹에 들어 있고,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이나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직 말이 아니며, 우리나라에 와서 막일을 하는 제3세계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학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성공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 성공을 잘 관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했던 카네기처럼 자신이 이룬 성공을 다시 지혜롭게 재투자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끝으로 진정한 리더십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결정한다. 나의 이익이, 나의 생명이 다른 이들의 것과 바꾸어져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 자신부터 챙긴다. 그러나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다 자기 목숨 챙기기에 급급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대책 없이 버려진 고아들을 살려 낸 브레이즈델 중령 같은 사람도 있어 세상을 살맛나게 한다. 이런 사람을 보면 2천년 전, 하늘 보좌를 박차고 내려와 전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시금 강렬하게 다가온다. 파격의 살신성인 리더십이 이 꽉 막힌 역사의 물고를 틀 게다.

에필로그 리더십의 정점, 사랑

리더십의 정점은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가장 좋은 면을 믿어 준다. 사랑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최선의 가능성을 믿어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당신의 칼이 남을 살리는 데 쓰이도록 해 줄 가장 확실한 칼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