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필립 얀시 지음/전의우 옮김
요단 출판사/2001년 1월/254쪽/8,000원
▣ 저자 필립 얀시
우리시대 최고의 기독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인간의 깊은 갈망과 난해한 의문점 혹은 내면의 두려움 등을 구체적인 구도의 소리로 탁월하게 육화시키는 그의 역량은 신앙의 확실성보다는 신비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불어넣고 새로운 차원의 확신을 부여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미국 ECPA 선정 “올해 최고의 책”을 수상했고, 이 책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와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등 모두 9권의 저서로 골드메달을 수상했다. 휘튼대학과 시카고 주립대학에서 수학했고, 「캠퍼스 라이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지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한 바 있다.
▣ 옮긴이 전의우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역서로는 멘토링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서인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를 비롯하여 『영혼을 깨우는 이야기모음 1, 2』 등이 있다.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으로 역자상을 수상하였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 나는 진정으로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구약을 중심으로 한 묵상이다. 애굽의 바로의 폭정 아래 고통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폭염과 목마름 속에 광야의 모래밭에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보다 선한 삶을 살았던 의인 욥은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해야 했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이 버림받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동족에게 하나님의 저주와 재앙을 선포하며 미움을 받아야 했던 예언자들의 아픔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이러한 의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면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고통받는 자가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실 때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가장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실 때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2000년 미국복음주의기독교출판협의회(ECPA) 선정 '골드메달' 수상작으로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지성인 필립 얀시의 역작이다. 필립 얀시는 이 책을 통해 현대의 분석적 철학과 과학적 인과율, 통계적 정보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정수가 담긴 구약성경을 오늘날 고난에 처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도 유려한 문체를 통해 제시해주고 있다. '성스러운 의문'의 소유자 필립 얀시와 함께 구약성경을 한장한장 짚어갈 때 구약의 신비가 풀리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 차례
1. 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
구약성경은 왜 따분한가?/어느 한쪽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서 말해 봐.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가?/ 하나님이 사귀시는 사람들/ 영혼의 일기
2.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 내기/ 욥의 친구들/ 욥/ 작은 승리/ 하나님의 등장/ 욥과 같은 시대/ 우주적인 문제/ 후기: 욥과 고난의 수수께끼들
3. 쓰고도 단 인생: 신명기
사막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늙은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저 말이라도 하고 나니/ 점점 약해지는 모세의 목소리
4.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 시편
어깨 너머로 보는 편지/ 인생처럼 뒤죽박죽인 시편/ 영혼을 치유하는 시편/ 찬양대/ 재조정/ 후기: 문제의 시편들
5. 지혜의 마지막: 전도서
최초의 실존주의자/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저주/ KGB의 이중스파이론/ 신들의 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두 나라의 이야기/ 일의 결국
6. 하나님께서 대꾸하신다: 예언서
철저히 현대적인 책들/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높이신다/ 문제의 책들/ 지금과 나중/ 하나님의 관점/ 우주적 전투/ 무엇이 다른가?
7. 마지막 답변의 전주곡
나는 소중한가?/ 하나님이 돌보시는가?/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끝나지 않은 일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필립 얀시 지음/전의우 옮김
요단 출판사/2001년 1월/254쪽/8,000원
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
이 책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약성경을 피하지 않고 읽기 시작하게-궁극적으로 사랑하게-되었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한 시, 역사, 설교, 짧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 성경의 놀라운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셨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놀랍게도 각 부분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서로 잘 맞아 들어간다. 더 인내하고 구약성경을 읽을수록 더 많은 구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많은 구절을 이해할수록 그 구절들 속에서 나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너무나 많은 개념들이-새로운 것, 개인, 사람, 역사, 자유, 영, 공의, 시간, 믿음, 순례, 혁신-구약성경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는 구약성경 속에 담긴 세계와 우리의 위치를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의 뿌리는 구약성경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면에서-인권, 정부, 이웃 대하기,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미 구약성경을 말하며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예수께서 읽으셨고 사용하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드리신 기도요, 그분이 암송하신 시편이며, 그분이 부르셨던 노래요, 그분이 어린 시절 잠자리에 들면서 들었던 이야기요, 그분이 상고하셨던 예언들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린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사자로 그리는가 하면 양으로도 그리며, 독수리로 그리는가 하면 어미 닭으로도 그리며, 왕으로 그리는가 하면 종으로도 그리며, 재판관으로 그리는가 하면 목자로도 그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규명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구약성경은 그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그림을 제시한다. 그분은 고발자, 이발사(털 깎는 자), 포도원지기로 묘사된다. 결코 멈추지 않는 북소리처럼,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 세상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속적인 메시지를 듣는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배우지만, 그분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천천히, 예측할 수 없게, 역설적으로 움직이신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크기나 힘이나 부에 감명을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이며, 그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영웅들은 힘이나 부의 영웅이 아니라 믿음의 영웅이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나는 일찍이 잡지의 저널리스트로, 20대 초반에는 고통의 문제에 끌리게 되었다. 고통의 문제는 깔끔하게 풀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온다. 우리는 고통의 눈물과 울음 속에서 핏덩이로 태어난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그러면서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왜?”라고 묻는다. 이런 이유에서 욥기를 보고 또 본다. 욥기는 고통의 문제를 가장 잘 다룬 성경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욥기의 대부분에서(3-37장)고난이라는 주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욥기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계약적 믿음”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민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난을 당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던진 질문이었으며, 한 사람의 고전적인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대부분의 구약성경처럼, 욥기도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해답을 거부함으로써 처음에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과 언뜻언뜻 보이는 소망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절묘하게 만족시킨다.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
존 칼빈의 설교 700개 중 159개는 욥기에 대한 것이다. 닐 사이먼은 욥의 상황을 빌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희곡을 썼다. 더 최근에는 소설가 뮤리엘 스파크가 욥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연극 <아마데우스>조차도 구성의 상당 부분은 욥기에서 빌어왔다. 그렇지만 이 희곡의 작가는 똑같은 문제를 정반대의 입장에서 다룬다.
고통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씨름하는 문제이며, 우리 시대의 신학적 크립톤(자연상태에서 미량으로 존재하는 가스로 텅스텐 전구와 같은 강한 빛을 내는 데 사용된다.)이며, 고대인 욥은 물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욥기가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서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욥기가 전혀 고통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은 이야기의 구성재료이지만 이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고통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욥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시험을 위해 큰 시련을 겪도록 선택된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반응은 고난받는 사람뿐 아니라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욥은 무슨 잘못을 했는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욥이 고난을 당하는가? 우리는 그가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욥의 고난은 하늘에서 벌어진 큰 내기에서 중요한 주제로 선택되었다. 욥기 저자는 1-2장에서 우리에게 무대 뒤를 잠깐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모든 긴장 요소들을 포기하지만 단 한 가지만 예외이다. 욥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욥의 믿음에 대한 질문에만 대답이 없었다. 욥은 욥기 내내 너무나 엄청난 고난과 싸우는 나머지 그의 물음이 곧 우리의 물음이 된다.
내기
사단과 하나님 사이의 내기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사단의 말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하시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거기에 따른 대가가 있거나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매수당했기 때문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욥기는 순전함이라는 문제를 축으로 돌아간다. 욥은 하나님의 순전함이 시험당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부당하게 다루실 수 있는가? 그러나 욥의 모든 법적인 소송(항변)은 1-2장에서 제시된 보다 큰 재판의 상황, 즉 욥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는 상황 속에서 제기된다.
욥의 이야기가 우리 현대인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도 고난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을 세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창하고도 힘있는 어조로 하나님에게 답변을 요구한다. 그리고 욥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에 고개를 내젓는다.
우리가 부당한 고난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데 욥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욥기는 많은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며,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욥기 1-2장은, 욥이 무슨 생각을 하든 욥기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욥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욥이다. 욥기는 고통의 문제-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
욥의 세 친구들, 이들은 상식과 이성이 공의로운 하나님은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다음 논리단계로, 욥의 극단적인 고난은 그에게 상당히 심각하고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혹평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이들을 즉석에 내치셨으며 이것은 당연하다.
욥의 친구들은 독단적인 교리주의자로 나타나 하나님의 신비스런 방법들을 변호한다. 이들은 설득력 있게 논증하며, 이들의 추론은 욥의 무절제한 감정 폭발과 대조된다. 이들은 자신의 교리와 논증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욥을 판단한다. 이들에게 있어, 문제는 분명해 보인다.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인간과 그들이 의롭다고 알고 있는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조지 맥도널드는 이들의 태도를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보다 그분의 비위를 맞추고 규범을 지키는 것에 더 신경쓰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비유한다.
욥
욥은 풀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하나님을 거부하면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믿음, 곧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난이 마땅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자신의 순전함을 손상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이처럼 극단적인 형벌을 받을 만한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은 선과 악의 끔찍한 싸움을 묘사한다. 욥은 선과 악 사이에서 더욱 끔찍한 도덕적 싸움을 싸우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가 욥의 무죄(순전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작은 승리
욥은 몹시 화가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첫째,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는 아내의 충고를 결코 따르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공정함과 선하심과 사랑과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하나님께 등을 돌리길 거부한다. 욥은 모든 증거가 그 반대라고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고뇌에 찬 역설을 안고 사는 쪽을 택한다. 욥은 수많은 것이 자신의 신념을 반증함에도 불구하고 공의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념을 굳게 붙잡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다른 대안들은 더 나빠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욥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내용은 그의 인격을 많이 보여준다. 욥은 절망이 그를 엄습해오고 자신의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속히 죽기를 구한다. 왜?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욥 6:10) 그러나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자 욥은 자신의 기도가 소망 없는 공허한 외침이라고 느끼고 “양측 사이에 손을 얹을” 중재자 또는 판결자를 요구한다. 그의 간구는 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께 대한 예언으로서 멋지게 성취된다. 마침내 욥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요구를 한 가지로 줄이며 이 요구를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마지막 요구는 욥의 친구들을 격분시킨다. 마지막까지, 그는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설명을 요구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구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의 등장
엘리후는 지금 조그마한 욥에게 왜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지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다. 욥기 38-4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은 많은 주목을 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문제를 완전히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오직 한 가지만 비판하신다. 욥의 제한된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욥은 불완전한 증거에 입각해서 판단을 내린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욥의 시야를 그의 비참한 상황에서 전체 우주로 넓히신다. 욥의 의심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계시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린다. 이 회개와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의 화해와 더불어, 1장부터 계속되어 온 긴장이 마침내 해소된다.
욥과 같은 시대
근본적으로 욥은 고난의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위기를 맞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극적인 사고, 말기의 질병, 또는 실직 등에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하나님,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나요?”
이런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환경-질병, 우리의 외모, 가난, 불운-을 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버린다. 하지만 욥은 우리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바로 믿기가 불가능해 보일 때라고 가르쳐준다. 비극이 찾아올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제한된 시각에 갇히고 말 것이다. 욥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을 적으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의 반응에 자신의 평판이 좌우되도록 허락하셨다. 욥이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거의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그를 보고 계셨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때보다 더 가까이 계셨던 적은 없었다.
금처럼 정제된 가장 순수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태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보류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신 8:2) 시련의 시험을 치르셨다. 후에 훨씬 심한 시련인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시편22편을 인용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다.(마 27:46). 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계속 의뢰하셨다.
우주적인 문제들
욥기의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악과 의에 많은 것을 거셨음을 보여준다. 욥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작은 역사가- 그리고 사실 나 자신의 믿음의 작은 역사가- 우주 역사의 큰 드라마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욥기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운명 뿐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중요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제시한다.
욥은 믿음이라는 가장 가는 줄에 매달림으로써 이 땅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서 중요한 승리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선남선녀들에게 우주의 구속에 참여하는 영예를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욥이 그렇게도 자세히 묘사한 이 세상의 고통과 불공평을 뒤바꾸는 일을 돕도록 허락하고 계신다. 타락을 뒤바꾸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달려 있다.
욥과 고난의 수수께끼들
욥기는 정작 왜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에 대한 어떤 탄탄한 이론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많은 “간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욥의 문제를 허용하셨으나 실제로 고통을 일으킨 것은 사단이었다.
2. 욥기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능력이나 선하심이 부족하다는 암시는 없다.
3. 욥은 고난이 언제나 죄의 결과로 온다는 이론을 단호하게 논박한다.
4. 욥의 친구들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의 공정성-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인정과 비난-이 오로지 이생에서만 나타나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다.
5.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심과 절망을 꾸짖지 않으셨으며, 그의 무지함을 꾸짖었을 뿐이다.
6. 어느 누구도 고난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다.
7.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히 침묵하시지 않는다.
8. 좋은 의도의 충고도 때로는 유익보다 해를 끼칠 수 있다.
9. 하나님께서는 논의의 초점을 욥이 고난을 당한 원인에서 그의 반응으로 다시 맞추셨다.
10. 하나님의 계획에서 고난은 ‘구속’이나 더 고상한 유익에 사용될 수 있다.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시편
어깨 너머로 보는 편지
시편의 세세한 부분-범주, 해석적 의미, 논리적 일관성, 시적인 형태-에 집착함으로써, 시편의 요점을 놓칠 수가 있다. 그 요점이란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쓰는 개인적인 편지와 매우 유사한 영적 일기장이라는 것이다. 시편의 수신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시인의 ‘어깨 너머’로 볼 수밖에 없다.
시편은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관해 하늘에서 주어진 사도적 권위가 있는 선언이 아니다. 시편은 시의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분위기에서 기록한 개인적인 기도이다. 시편기자 중에는 농부가 있는가 하면 왕도 있고, 전문 음악가가 있는가 하면 순수 아마추어도 있다. 시편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믿는 것과 실제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을 연결시켜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인생처럼 뒤죽박죽인 시편
우리가 시편을 찾는 것은 시인의 언어나 이미지가 우리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지식보다 더 큰 것을 얻는다. 바로 변화된 시각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거는 마술이다. 시편은 나의 영적 시각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
기본적인 수준에서, 시편은 내가 인생에 대해 믿는 것과 인생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것을 조화시키도록 돕는다. 시편에는 세상은 자신들을 버릴지라도 자신들은 사랑이 많고 은혜로우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고뇌에 찬 일기가 담겨 있다. 시인들이 이러한 문제와 힘겹게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편이 많다. 때때로 시인들은 시편을 쓰는 바로 그 과정에서 믿음의 감정과 믿음의 교리를 조화시키는 법을 찾아낸다. 신명기에서 연설(설교)을 하는 모세처럼, 시편기자들은 좋았던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던 때를 되돌아본다.
영혼을 치유하는 시편
시편은 영적 치유의 모델을 제시한다. 나는 언젠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을 쓰는 동안, 성경에는 하나님께 몹시 실망한 사람들의 자세한 기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욥과 모세가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하박국, 예레미야, 그리고 이름 없는 많은 시편기자들이 그랬다. 몇몇 시편들은 “하나님께 화가 난,” “하나님께 배신당한,” “하나님께 버림당한,” “하나님께 실망한”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150편의 시편은 진행중인 영적치유의 모자이크화를 제시한다. 의심, 편집증(망상증), 경솔함, 비열함, 기쁨, 증오, 즐거움, 찬양, 복수, 배신 등, 이 모든 것을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 이러한 감정의 폭발이 무익한 혼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을 건강의 표시로 본다. 시편에서 배운 것은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내어놓아도 좋다는 것이다.
찬양대
찬양에서, 피조물은 우주에서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창조자로부터 나온다고 즐겁게 인정한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적절한 위치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시편기자들, 특히 다윗은 자연세계와 보다 긴밀한 유대가 있었기 때문에 찬양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 시편기자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시편은 하나의 전체로서 잘 맞아들어가는 세상,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을 제시한다.
시편은 꼭 필요한 말씀들을 줌으로써 찬양이 부족한 문화의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러한 말씀들 속에 들어가 시편의 내용이 우리의 내적인 태도를 재조정하게 하는 것뿐이다. 본회퍼는 시편은 하나님의 언어훈련과정이라고 말한다. 유아들이 부모로부터 모국어를 배우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에서 기도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재조정
최근에 시편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은 소수의 시편만이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편의 70퍼센트가 애가의 형태를 띤다. 시편의 애가는 푸념하는 것이나 불평하는 것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욥처럼, 시편기자들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보이든 간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을 굳게 믿었고 공의를 부르짖어 구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슬퍼했다. 그 결과로 나온 시편들은 이들의 영원한 믿음과 일상적인 경험을 재결합하도록 도와주었다.
다윗은 자신의 업적-맨손으로 들짐승을 죽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으며, 사울의 맹공에도 살아남았으며, 블레셋을 패주시켰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들을 회상하고 거기에 관한 시편들을 쓰면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대 중앙에 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든지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고상한 찬양 시편으로 표현했건 거친 열변으로 표현했건 간에,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연관시켰다. 다윗에게는 자신이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의 시편들
1. 저주시편은 악에 대한 적절하고 “의로운 분노”를 표현한다.
2. 저주시편은 영적 미성숙을 표현하며, 신약성경이 이것을 바로 잡았다.
3. 저주시편은 기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하나님께서 대꾸하신다: 예언서
철저히 현대적인 책들
전에는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고루한 늙은이로 보이던 예언자들이 오히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인” 작가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언자들은 한 장 한 장마다 하나님의 침묵, 경제적 불균형, 불의, 전쟁, 악이 지배하는 것 같은 세상, 세상이 당하는 고통 등 마치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똑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예언자들은 욥기, 시편, 전도서, 심지어 신명기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러한 똑같은 주제들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거기에 또렷이 초점을 맞춘다. 구약 현실주의의 전형적인 책인 예언서는 우리가 느끼는-내가 느끼는-회의(의심), 고통, 그리고 혼란을 또렷하게 표현한다. 이제 예언서를 인간이라는 사실의 딜레마에 대한 예리한 증언으로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높이신다
예언서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의 애절한 물음에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을 변호하시면서 폭풍우처럼 호통을 치시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로 예언자들을, 다시 말해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내세우신다.
예언자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대답은 거의 알 수 없다. 그분은 제멋대로인 가지(또는 나라)를 잘라주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남은 자들을 자랑스럽게 지적하시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역사적 증거들을 열거하시고, 메시야 구원자를 약속하시며, 항상 이 땅의 그릇된 모든 것이 바로 잡혀질 미래에 대한 예고로 결론을 맺으신다. 이처럼 합리적인 설명 너머에는 강렬한 빛줄기처럼 쏟아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구약성경의 후렴을 반복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의 책들
예언자들은 실제로 매우 멋진 그림들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볼수록 내 마음에 든다. 도시 출신의 이사야는(유대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왕족이다.) 정치적인 발언(예표)을 위해 3년간을 벗은 몸에 맨발로 다녔다. 예레미야는 멸망(심판)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에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목에 멍에를 메었다. 에스겔은 흙으로 예루살렘의 모형을 만들어놓고 노끈으로 묶인 채 한 번에 몇 달씩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예언자들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전했다.
실제로, 예언자들은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각자 독특한 스타일을 사용했다. 오바댜는 자신의 예언을 한 장으로 압축하는 반면,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그 길이가 7미터나 된다. 아모스는 농부였고, 이사야는 왕을 위해 일했으며, 다른 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전설에 의하면 므낫세가 톱으로 두 토막 내어 죽였다고 한다.) 다니엘은 두 이교도 제국 아래서 성공을 누렸다. 요나는 예언하기보다는 물에 빠져 죽으려 했다. 스가랴의 환상을 보면 에스겔의 환상은 시시해 보일 정도다.
지금과 나중
예언서를 읽다 보면 예언자들에게는 지금(now)이 나중(later)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견자로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전망(시각)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의 속박을 받지 않는 분이시기에 그분에게 있어 예언의 성취 순서는 사소한 문제이다. 거의 모든 예언은 수천 년 후의 우리들뿐만 아니라 처음 그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었다. 예언자들은 역사가 현재의 고난과 무질서와 정치적 혼란의 현실이 아니라 미래-하나님의 미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재창조를 말했다. 그러나 청중들이 이처럼 고상한 시각을 믿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증거, 다시 말해 스케줄대로, 예언에 따라, 자신들의 시대에, 곧 지금(Now)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필요했다. 예언자들의 예언들이 그들의 생애 중에 성취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나중(Later)에서 지금(Now)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을 강조한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동경을 규정한다. 그런 후에 이들은 지금(Now)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영광된 미래를 그려낸다. 이들은 사람들이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비전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관점
혼합적인 시간 추이-지금/나중/훨씬 나중-는 내가 예언서의 중요한 기여라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것은 예언서가 하나님의 관점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 큰 권세들과 실제보다 큰 폭군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상을 다른 수준의 시각에서 돌아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주셨다. 예언서에는 적어도 세 가지 수준의 의미, 그러니까 일종의 삼중적 초점의 시각이 있다.
또한 예언자들은 세상에 대한 신문의 시각을 도덕적인 전망에서 해석했다. 예언자들의 도덕적 역사관은 그들이 비난한 지혜와 부와 힘의 상징인 명성과 권력에 초점을 맞추는 신문의 관점과는 확연히 다르다.
우주적 전투
욥은 구약성경에서 우주적 관점에 대한 가장 깔끔한 스케치를 보여주며,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각을 가진 “선견자들”로서 좀더 자세히 보여준다. 신약성경에서 예언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책인 요한계시록은 우주적 관점에 대한 가장 생생한 예들을 제시한다. 우주적 관점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보시는 방법과 가장 닮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예언자들은 보다 깊고 근본적인 것을 보는 시각, “세상의 벽 너머에 있는 기쁨, 슬픔보다 더 쓰라린 기쁨”을 보는 시각을 요구한다. 미래와 우주적 현재를 흘끗 보여줌으로써, 예언자들은 우리가 어쨌든 공의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준다. 공의는 예언자들에게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판은 그분이 궁극적으로 공의를 베푸실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답변의 전주곡
내가 살펴본 모든 구약성경은 이 질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애굽에서 노역을 하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는 모세의 확언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욥의 친구들은 미약한 욥이 우주의 여호와께 중요하다는 불합리한 생각을 조롱했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이 질문을 보다 냉소적으로 던졌을 것이다. 해 아래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모든 인생이 헛되지 않은가?
나의 의심은 병이라기보다는 무능력에 가깝다. 나의 의심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내가 자기 연민 가운데 뒹굴며, 욥기와 전도서에 너무나 잘 묘사되어 있는 우주적 고독의 쓰라림을 겪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와 그분이 행하신 일에 눈을 돌린다. “해아래” 있는 내 실존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와 모순된다. 나는 소중한가?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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