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갓 캐처스 :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토미 테니 지음 / 배응준 옮김

미션(cmc) 2010. 6. 19. 09:37

갓 캐처스 :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

토미 테니 지음 / 배응준 옮김

규장 / 2002년 2월 / 301쪽 / 9,800원

▣ 저자 토미 테니 Tommy Tenney

토미 테니(Tommy Tenney)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God Chaser’ 시리즈의 저자이다. 해마다 백만 명 이상의 독자들이 저자의 신선한 통찰력과 열정이 담긴 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있다. 그는 식어진 크리스천의 가슴에 예배열정의 뜨거운 불을 지피는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20여 년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갈구하는 강력한 순회 말씀사역으로 전 세계 40여 개국 크리스천들을 섬기고 있다. 그는 3대에 걸친 목회자 집안의 유산을 이어받아 역동적인 말씀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GodChaser.network의 설립자이다. 이 단체는 전 세계 목회자들을 지원하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그의 비전을 알리기 위해 조직된 사역단체이다. 그는 지금까지 20여 권의 책을 집필했고 그의 책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어 계속해서 영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뜨겁게 열망하기를 촉구하는 예배자 가이드북인 『갓캐처스(The God Catchers)-현재는 절판, 개정판 준비 중』(규장 발행), 『다윗의 장막』(토기장이) 발행이 있다.

▣ 역자 배응준

총신대학교와 총신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더치 쉬츠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기도』(규장), 로버트 모건의 『홍해의 법칙』(규장),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버리라』(나침반)외에 10여권 번역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에 찾아야 한다.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한 열정으로 눈물을 흘리든지 아니면 완전한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우리의 전존재를 드려 주님의 품안으로 돌진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족하는 자의 냉담한 요청은 무시하신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상자에 담을 수 없다.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면 우리 또한 상자에 담을 수 없는 무한한 배고픔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인위적인 영성 프로그램들은 무용지물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갑작스레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을 배고파하고, 간절히 바라고, 예배하고, 찬양하라. 과연 당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진정으로 목이 마른지, 진정으로 배가 고픈지 돌아보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땔감이 되는 일이다. 땔감이 없는 불은 연기만 피우다가 꺼진다.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되, 스스로 불이 되어 타고자 하는 욕구를 가져라.

▣ 차례

1부 하나님 발견의 열정

1장 하나님은 숨바꼭질하시는가?

2장 불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

3장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2부 하나님 임재 체험의 깊이

4장 강가에 모일 것인가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5장 운명과 갈망의 조우

6장 종업원으로서 손님이신 하나님 섬기기

3부 하나님을 맞아들일 채비

7장 빈 그릇의 마음

8장 뜨거운 커피를 나르는 법

9장 낭떠러지 은밀한 곳의 비밀

4부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자

10장 나는 아빠를 원해요

11장 좌절의 주소지인 회개의 마을에 거주하라

12장 하나님을 쫓는 자만이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다

갓 캐처스 :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

토미 테니 지음 / 배응준 옮김

규장 / 2002년 2월 / 301쪽 / 9,800원

1부 하나님 발견의 열정

1장 하나님은 숨바꼭질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떠날 때, 예배 시작 무렵보다 더 갈급하고 목말라야만 기뻐하고 만족하신다. 하나님을 쫓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붙잡고 싶은 갈급함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 당신에게 하나님은 종종 숨으신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딸과의 술래잡기를 통해 그 비밀을 깨달았다. 벽장 속에 숨어 있는 나를 찾는 딸은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 일쑤다. 오랜 시간 딸이 나를 발견하기까지 웅크리고 기다리는 것은 좀이 쑤시는 일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 딸의 얼굴에 피어나는 함박웃음을 생각하며 참는다. 때로는 숨어있는 곳의 단서를 알려주려고 슬쩍 발끝을 보이거나, 소리로 유인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술래잡기의 목적은 ‘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찾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딸이 잘 찾을 수 있게 숨으려 노력한다.

하나님도 술래잡기하는 아빠와 마찬가지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쫓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지칠 때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내가 자포자기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며 오히려 나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을 쫓다가 가끔 잘못된 방향으로 치우칠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다윗은 시편에서 11번 이상 “하나님은 숨으신다.”는 표현을 썼다. 일반적으로 알기로, 하나님은 죄와 교만으로 가득한 인간에게서 숨으신다. 그 이유는 죄와 교만으로 꽉 찬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필시 죽을 수밖에 없고,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꼭 이런 이유 때문에 숨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심판보다 오히려 기쁨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쫓아가서 마침내 하나님을 잡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출장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아빠가 통학버스에서 내리는 딸을 보고는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켜 준다거나, 뽀뽀하기 위해 달려오는 딸을 피해 도망가다가 잡혀서 더 큰 기쁨 속에서 포옹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잠시 돌아서신다. 하나님은 주일 아침 잠깐의 뽀뽀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잡을 수 있을까?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너무도 다르다. 인간이 아무리 수련하고, 분발해도 하나님을 잡을 수는 없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매달릴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여 포기할 때, 숨바꼭질하던 딸이 “아빠 제발!”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잡혀주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던 하나님의 마음이 이 한마디에 녹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이 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당신이 쫓던 그분이 거꾸로 당신을 쫓으실 것이다.

이렇듯 ‘쫓기 과정’을 역전시키는 것이 바로 예배다. 당신이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추적하고 잡으실 것이다. 영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예배는 본질상 ‘사랑의 덫’에 하나님을 걸려들게 하며, 하나님은 이를 즐겨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할 때, 하나님은 즐거워하신다. 성경에선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때로 당신에게서 숨으신다. 당신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그리고 그때의 풍성한 기쁨을 맛보게 하기위해 숨으신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신앙적으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영적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열정을 버리고 만다. 하나님을 붙잡는 자로서 우리는 영적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2장 불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

당신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열에 들뜬 자인가? 그 증상은 뚜렷하다. 만일 당신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몰두한다면, 형식적인 교회 행사나 인간적인 방식을 혐오할 뿐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흥분을 겨냥한 감정의 과대포장, 마치 종교라는 무대 위에 올려진 공연 같은 뜨뜻미지근한 예배에 염증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거룩한 갈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럴 때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영역으로 이끌려 나오신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 이것이 가능하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성에의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기상조건과 알맞은 습도, 실내외의 적당한 기온차가 있으면 독특한 형태의 성에로 만들어져 우리 눈에 보이듯이, 영적 영역에 알맞은 영적 온도변화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결정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영적 온도변화가 없기에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던 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라는 영원한 형태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자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하려했고 그로 인해 문둥병에 걸려 죽었다. 교만한 웃시야가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과 접촉하려 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어졌다.

오늘날 교회 역시 우리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웃시야 신드롬을 겪고 있다. 바울이 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내치실 것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예배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웃시야 신드롬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이다. 평생을 의지하던 웃시야 왕 사후 의지할 곳이 없어 비통해하는 이사야에게 비로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이셨다. 우리의 육신의 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영의 왕과 영의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도 이사야는 유다민족을 향해 많은 예언을 해왔지만,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사고와 삶은 완전히 변했다. 이사야 1장에서 5장까지는 이사야 자신과 민족의 죄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내용으로 일관하다가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60장에 걸쳐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예언적 선포를 한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인간 중심의 설교와 찬양에 환멸을 느끼게 되며 이전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흥분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당신의 운명과 미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에게 관심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이상, 내 방법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자아를 버리고, 야망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3장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우리가 느끼는 포만감이 교회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에 초점을 두지 않고 어제의 경험을 추억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그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제한된 시야와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어 저 멀리 이동하실 것이다. 영적인 균형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이 잘 되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사탄의 계략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포만감은 하나님께 민감하게 감사하지 못하게 하며,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배고픔이야말로 창조주께 드려야 할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열정이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더 큰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배고픔에 대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움직여 우리의 찬양 한 가운데로 모셔오도록 하는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우리의 배고픔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배고픔이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완전한 성취감과 공허감은 서로 공존할 수 있을까? 그렇다. ‘만족과 배고픔’ 둘 중 하나만 결여되어도 진정한 부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란, 말 그대로 영의 사람들이 호흡해야 할 공기와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상태를 유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인간의 갈망, 배고픔, 열정에 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우리의 열정을 원하신다.

2부 하나님 임재 체험의 깊이

4장 강가에 모일 것인가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막연하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저 은혜의 강가에 모일 것만이 아니라 은혜의 강 속으로 뛰어들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교회의 음향시설, 아름다운 찬양, 목회자의 뛰어난 설교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에 임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런 것들로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교회시설이나 설교, 성가대 등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거룩한 허기를 느낄 때,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할 때 반응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임하시기 전에, 먼저 인간적인 프로그램을 파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모호한 상상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에 도전하는 인간적인 지식을 파하신다. 또 우리가 개발한 각종 영성 개발 프로그램이 보유한 인간적인 영성을 타파하신다. 하나님의 불길이 우리의 삶을 통과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적인 기반 위에 뿌리내렸던 모든 것이 소멸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남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에 있어 공식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가 공허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만날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맛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파도를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때, 어느 민족, 어느 교회에 몰아칠지 아무도 모른다. 부흥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법이다. 성도들에게 필요한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게 예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바울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부터 교회에 갈 때 사람들을 섬기러 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의 모든 예배와 찬양, 기도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만일 당신이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당신은 인간적인 만남에 회의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교만 듣고 끝나는 집회라면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임재나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나 성령의 불길은 기도모임에서 체험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기도의 우선성 확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그 힘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2천년전 예루살렘의 다락방 사건을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검증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실수를 한다.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신 휘장을 오늘날 우리가 오히려 다시 꿰매고 있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율법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면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과정을 훼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은 이미 예수께서 담당하고 계시다.

‘뉴에이지’를 비롯하여 세계는 영적인 배고픔을 호소하는 운동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영적인 움직임에 돌을 던지는 데만 급급해 있다. 물론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거짓 가르침을 따르게 될까봐 두려워서겠지만, 참된 교회라면 그들에게 돌 대신 ‘하나님의 임재’라는 떡을 주어야 한다. 그들의 영적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것으로 그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 상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행위에 의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하나님이 이 시대에 행하고자 하시는 역사를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으로 필사적으로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강으로 뛰어들자! 우리 앞에는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다.

5장 운명과 갈망의 조우

참된 배고픔은 배고픈 자를 정직하고 솔직하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배고픈 아기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배고픔에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하고, 그것을 해결할 방도를 찾는다. 본능적으로 필사적으로 울음으로써 원하는 젖을 먹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삶에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태연한 자세로 살아간다. 사실 문제도 모른다. 그러나 영적 배고픔이 솟구치면 하나님께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위선적인 태도를 벗어버리고 정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 “나는 문제가 많습니다. 형식적인 교회생활에 지쳤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만나길 갈망합니다.”라고... 우리 속의 처절한 배고픔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을 통해 치유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빠의 선물이 아니라 아빠 자신이다.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 역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갈망하는 것. 둘째, 우리가 배고픈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졸라대며 울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급히 찾아오신다. 부자였지만 사람들에게 배척받던 삭개오는 배고픈 마음으로 뽕나무에 매달려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흙먼지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바디매오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우리가 어디 출신이든, 어떤 학벌을 가졌든 누구나 간절히 울부짖으면 하나님은 발길을 멈추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 주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두 사람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는 만남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간의 갈급함이 서로 만났을 때, 즉 오랜 전부터 뽕나무를 키우며 준비해 오신 하나님의 섭리와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배고픔으로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의 갈급함이 만났을 때 죄인 삭개오는 영생을 얻었다. 눈먼 거지 바디매오 역시 예수님을 향해 간절히 울부짖음으로 그분의 주의를 끌었으며,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 삶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당신은 지금 얼마나 배고픈가?

6장 종업원으로서 손님이신 하나님 섬기기

훌륭한 외식은 좋은 음식과 좋은 서비스라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두 가지 중 하나만 빠져도 그날 외식은 망치는 것이다. 훌륭한 종업원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예측한다. 모든 관심과 주의가 고객에게 향해 있기 때문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고객의 필요를 채운다. 마치 오랫동안 가족이 재회의 기쁨을 누리듯, 한 가족처럼,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다. 종업원의 손님을 향한 축복이 다시 손님이 종업원을 축복하도록 만든다.

예배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바람과 취향을 아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한 순서가 계획대로 진행되든 그렇지 않든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실 것이다. 형편없는 종업원이 유능한 종업원 행세를 하며 고객의 필요를 돌보지 않고, ‘무엇이 필요한가요?’라고 질문을 던지듯이 우리도 유능한 종업원 행세를 하는 형편없는 종업원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을 찾기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헛된 신화에서 깨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참된 목적을 잃고 만다. 즉,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영의 세계에 눈을 뜨면 전혀 새로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처음 비행기를 탄 아이는 이륙하면서 하늘 위에서 땅을 바라보며 장난감 집과 자동차를 보게 된다. 실제로는 집과 자동차이지만 관점이 높아지자 장난감처럼 보이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흠뻑 젖는다. 그러면 우리의 관점은 변하여, 문제와 고통과 두려움이 ‘장난감 문제와 장난감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식되어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그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마비시키던 모든 것들이 힘을 잃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효과이며 능력이다. 우리가 영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발견되는 독특한 과정이다. 우리가 목마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만나와 같아서 그날 먹을 것을 그날 구해야만 한다. 어제의 부스러기에 집착하지 않고 오늘 신선한 것을 구해야 한다. 오순절 다락방의 120문도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일정표에 맞추어 준비하고 있었다. 승천 직전 예수께서 기다리라고 부탁한 500명 가운데 380명은 기다리지 못하여 하나님과 운명적 만남을 가질 수 없었지만 120문도는 열흘간 철야하며 기도함으로 기다림의 과정을 이루었다. 우리의 문제는 조급하게 서두르는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불과 인간이 인위적으로 붙이는 불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임재의 불이 임하면 불이 붙되 아무것도 태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선으로 인간적인 해결방법을 찾아 성냥불을 붙이면 이내 화상을 입게 된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임재에만 맞춰져야 한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은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은사는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선한 일에 유익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은사를 우상화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바라는 자리를 떠나, 자신의 필요와 축복을 바라는 자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우리는 아빠의 선물보따리가 아닌 아빠의 얼굴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이실 뿐 아니라 풍성한 은사도 내려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기다리는 것이다. 텅 빈 마음으로 가득 찬 거룩한 땅으로 나오라.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휴식처이다.

3부 하나님을 맞아들일 채비

7장 빈 그릇의 마음

진정한 부흥을 태동시키는 선구자는 바로 우리의 ‘배고픔’이다.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은 충만하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 오시게 한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34:17-1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6)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다. 배가 잔뜩 부른 채 하나님께 나아가 채워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불평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풍족할 때는 만나주지 않으신다.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곤고하고 겸손해졌을 때 만나주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텅 빈 마음에 충만함을 듬뿍 쏟아 붓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힘과 지식, 아이디어, 계획, 아집과 허세를 기꺼이 버릴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텅 빈 그릇을 내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그들의 그릇도 빌려와야 한다. 이런 일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신실한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중보할 때, 그 기도는 우리를 죄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비상구를 알려주는 표시 역할을 할 것이다.

지독한 배고픔은 정직한 사람을 정직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온순한 사람을 난폭하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배고픔이다. 굶주림 앞에서는 지식도, 도덕도, 교양도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외치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정신을 따라 주께 울부짖어야 한다. 주께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하라. 단 잊지 말아야할 것은 당신이 예수님의 주의를 끌려 노력할 때, 분명 누군가가 끼어들어 당신을 방해하고 비난할 것이라는 점이다. 미리 각오하라.

또한 ‘씨뿌리기와 추수의 법칙’처럼 믿음의 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 씨앗창고의 씨앗을 모두 밭에 뿌려 창고를 비우듯이 우리도 우리의 창고를 비울 때, 당장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이내 밭에서 자라나는 무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빈 그릇을 준비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당신이 가진 것을 밭에 뿌리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약속된 것’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의 중간 지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믿고 투자하라.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들이 합심하여 울부짖을 때 더욱 풍성히 채워주신다. ‘집단적 배고픔’은 범국가적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홍해를 가른 모세나, 천체의 운행을 중단시킨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배고픈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꺼이 우주의 법칙마저 바꾸신다.

사탄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도시와 삶이 망가지기를 바라며, 우리가 문제에 사로잡혀 허덕이기를 바라며, 그 문제로 인해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당신이 배고픔을 솔직히 표현하고, 빈그릇을 모아 작은 계곡을 만든다면. 성령의 홍수가 밀어닥칠 때 작은 계곡은 거대한 바다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너무 다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원천은 말씀 그 자체이며, 말씀은 정확 무오하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말씀에 대한 지식만 쌓으면 결코 진리의 지식인 하나님을 아는 삶에 이를 수 없다. 설교와 찬양만으로는 안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초자연적 만남을 통해 참된 부흥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며 교회에 나갈 때 그 나라의 영적인 공기는 급속히 변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고파할 때, 그 배고픔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내려오신다. 우리가 가진 경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취한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아봐야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얼마나 잘났느냐, 지금까지 얼마나 잘 해 왔느냐와 무관하다. 우리의 배고픔과 관계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거나 길을 안내해 줄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교회, 술집, 나이트클럽 어디에나 계시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앞에 뚜렷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합심하여 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로 오실 것이다.

8장 뜨거운 커피를 나르는 법

뜨거운 커피가 들어있는 잔을 나르기 위해서는 갑자기 출발하거나 들썩거리면 이내 액체가 넘쳐 손 위로 흐르기 때문에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것처럼 당신의 마음의 잔에 채워진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나르기 위해서는 당신 마음 속에 느껴지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평범한 일상을 지속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심어놓으신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받은 것을 쏟지 않고 예배모임이나 묵상의 시간까지 갈 수 있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빛을 어두운 세상으로 운반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도록 허락하신다. 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변혁시키는 동력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올 때, 우리는 우리 주변의 버림받은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게 된다. 버림받은 자들을 구원할 방도를 모색한다.

하나님의 방문 이후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지 못하시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발생한 ‘좋은 느낌’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부수적인 것에 눈을 돌리면 안된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풀며 당신을 방문하실 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셔서 진정한 부흥이 시작되었을 때, 원수 사탄은 하나님의 약속을 강탈하고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심어주신 은혜를 송두리째 파괴하려 한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한 방을 만들어야 한다. 엘리사가 머무를 방을 만들었던 지혜로운 수넴여인처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쉴 수 있는 하나님을 위한 방을 만들어야 한다. 수넴여인이 아들의 주검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되뇌었듯이 당신의 삶에서 깨어지고 상하여 죽어가는 것들을 하나님의 방 한가운데 있는 예배의 침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방문을 갈구하라.

모든 성경적인 예배는 ‘희생’을 기초로 한다. 예수님의 보혈의 희생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나. 우리도 예배할 때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운반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내게로 돌리게 만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9장 낭떠러지 은밀한 곳의 비밀

나의 고향에서는 누군가에게 집 열쇠를 숨겨둔 곳을 알려줄 정도면 언제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마음대로 커피를 마셔도 좋다고 허락해준 거나 마찬가지다. 열쇠 숨겨둔 곳을 아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가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 숨겨둔 곳을 알려주셨다. 솔로몬은 이것을 ‘낭떠러지 은밀한 곳’이라고 표현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피조물인 인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온전히 받아들일 것과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은혜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 앞에서 ‘값싼 은혜’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을 쫓으면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축복을 갈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갈망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가득해서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라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가서 2장 14절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이 상대에게 다가서는 특별한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낭떠러지 은밀한 곳의 비밀’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 출입 허가증인 셈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노아, 다니엘, 욥, 모세, 사무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들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환경적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꾸시도록 한다면, 그 효력과 파장은 무한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친구가 되길 원하신다. 열정적인 예배는 실패와 좌절과 역경의 골짜기를 뚫고 뻗어나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지대로 당신을 안내한다. 비록 어떤 일은 이미 손을 쓸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열정 하나로 하나님님께 불가능한 것을 구할 때가 올 것이다.

4부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자

10장 나는 아빠를 원해요

술래잡기를 하던 딸아이가 양탄자에 걸려 넘어져서 울음을 터뜨릴 경우 아빠는 지체하지 않고 울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딸아이에게로 달려간다. 이렇게 술래잡기는 끝나는 것이다. 이렇듯 ‘울음’에는 굉장한 진리가 숨어있다. 아브라함의 조급함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이 광야로 쫓겨났을 때 그의 울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어린아이의 단순한 울음이, 상처받고 좌절한 심령의 탄원이 웅변가의 언변을 무색하게 만든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열정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구도를 재편성하여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 바꾸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비논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논리를 뛰어넘는다.

당신과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 국가의 역사를 바꾸는 데는 단 30초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30초의 임재체험으로 충분하다. 지금 전 세계에는 회개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당신의 갈급한 울음소리는 당신이 뛰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울려 퍼진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 마음속에 가득한 것을 열정적으로 토해내라 이것이 바로 찬양과 감사의 희생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30초간 임재체험으로 과거 30년간의 신학체계를 포기했다. 또한 그 체험에 익숙해지기까지 3년간 아라비아 광야에서 세월을 보냈다. 우리는 아직도 그 30초간의 임재체험을 통해 받은 계시의 지식을 즐겨 먹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임신한 임산부와 같아서 더 이상 이전의 옷을 입을 수 없고, 입맛도 변한다. 오랜 세월 해산의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교회가 곳곳에 있다. 해산의 순간이 임박했다. 기다림에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불을 지피고 기다려라.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때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안일한 현재의 삶에 만족할 때 하나님은 숨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 할 때 우리가 만나는 위기의 순간은 오히려 아빠를 원한다고 외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면 게임은 끝난다. 왜냐하면 술래잡기의 묘미는 숨은 사람과 찾는 사람이 서로 만나는데 있기 때문이다.

11장 좌절의 주소지인 회개의 마을에 거주하라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단축시킨다. 참된 회개는 슬픔을 만들어내고, 그 슬픔은 죄로 인해 분리된 우리와 하나님의 틈을 메우는 다리 역할을 한다. 또 회개는 절망하는 마음과 상한 마음을 낳는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를 간청하는 것이라면,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를 촉구하는 것이다. 주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아니하신다고 말씀으로 보증하셨다. 우리가 가진 진정한 문제는 인간중심의 신앙생활에 환멸을 느끼며 소위 형식적인 교회생활에 지쳤다는 점이다. 교회나 그 언저리, 주변 사람들 말고는 더 좋은 곳에 가본 적이 없지 않는가? 이제 좌절의 주소지, 회개의 마을로 이사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예배 후 우리의 심령 속에 말할 수 없는 배고픔과 하나님에 대한 불만족함을 느낀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우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원해요.’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하나님이 초대하신 이 불만족의 긴장상태는 ‘절망의 도시, 배고픔의 거리, 좌절의 주소지’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그 과정 속에 대부분 좌절한다. 바울과 실라가 전도 여행 중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은 분명 좌절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때 그들이 선택한 행동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굴복시켰다. 한밤중에 드려진 예배는 마치 육과 영의 어두움이 짙게 깔린 고통의 상황 속에서 미래에 대한 어떠한 희망조차 없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마련이다. 상심했을 때, 더욱 상심이 될 때 하나님께 달려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에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상한 심령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애쓴다. 피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불가능한 것을 구할 때 상한 마음을 갖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는 삶 자체를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끊임없는 역경과 헤쳐 나가기 어려운 장애로 점철된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배고픔을 표현했지만 수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예배하였다. 그의 삶은 어두움의 세력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많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처절하게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쫓는 자’였다.

하나님은 왜 좌절의 주소지에 살게 하실까? 어쩌면 상한심령을 보살피는 선교사로 쓰시기 전 준비기간을 거치게 하시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의 훈련에는 지름길이 없다. 당신이 직면한 동일한 문제를 어떻게 이겨나가는지 우리의 이웃과 동료들은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좌절의 주소지에서 우리의 처지와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바울과 실라에게 너무 급히 나타난 나머지 땅이 진동하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를 이루신 그 하나님을 당신도 만나게 될 것이다.

배우자에게 만족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혼생활을 파멸로 이끈다. 만족은 열정을 시들게 한다. 열정이 시들면 배우자의 존재도 사라진다. 진정한 배우자는 ‘나는 당신에 대해 너무 잘 알아.’가 아닌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

12장 하나님을 쫓는 자만이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다

하나님을 쫓는 자들의 시간계산법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에게 엄마와 떨어져 있는 30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듯이 누군가를 의지하고 보고 싶어 할 때, 시간은 더디 흐른다. 왜냐하면 상대방과 떨어져있는 시간을 측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하나님이 오시는 순간, 우리는 일상에 작별을 고하는 것도 잊고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갈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갑작스런 출현을 예측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이 가는 길에 문제와 고통이 찾아오거든 그 문제와 고통을 기도와 예배의 제단으로 바꾸라. 상한 마음을 찬양으로 승화시켜서 하나님의 마음을 쫓는 과정에 박차를 가하라.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되, 자신을 땔감으로 삼아 스스로 불사를 준비를 해야 한다. 교회는 온도계가 아니라 자동온도 조절장치가 되어서 주변의 문화와 사람들의 온도를 최고치로 올려놓을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던져야 한다. 도시 전체가 불붙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해야 한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마음이 상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이것을 기회삼아 1분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가장 배고픈 사람이다.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향기를 느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향기가 사라졌다면 임재를 발산하게 했던 진원지가 당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배고픔으로 임재를 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임재의 향기를 집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만이 예수님과 동일한 향기를 풍길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상한마음으로 희생을 감수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처럼 배고픔과 절망에 빠진 연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 자존심과 위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삭개오처럼 운명의 뽕나무에 오르라. 땅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하늘문을 여신다. 이제 우리가 합심하여 하나님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는 울음을 울 때가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을 원합니다!”